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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역사적 419 혁명 50주년


이승만 정권은 종신집권을 위하여 언론과 사회 전반에 억압적인 조치들을 취하였다.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보장하라",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 구호를 앞세우고 대구 도심으로 시위를 벌였다. 이를 2·28 대구 학생의거라고 부르고 있는데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3·15 마산시위)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무자비하게 강경진압함으로써, 마산 시민들의 분노감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결국 3월 18일, 내무부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 이가학이 마산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고 내무부장관 홍진기로 교체·임명하는 등 정국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4월 11일, 마산시위 때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되어 검시가 이루어졌는데, 검시 결과가 발표되지 않자 시민들이 병원으로 들어가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김주열 시체 인양사건이 알려지면서 당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어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15 마산시위(이후 3.15의거)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이 항거한 사건으로, 이후 전 국민적 분노와 함께 4.19혁명의 도화선이 돼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3.15의거는 지난 2001년 제정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을 통해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됐으나, 4.19혁명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모진 평가를 받으면서 독자적인 위상을 갖지 못했다. 때문에 국회의원 전원인 293명의 동의서명을 받은 '3.15의거 국가기념일 제정촉구 결의안'이 지난해 12월말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는데도 국가보훈처가 '국가기념일' 제정 불가 입장을 밝히면서 폐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후 부정적 입장을 밝혀온 국가보훈처가 3.15의거 '국가기념일' 제정에 최종 동의를 하면서 행정안전부는 2010년 2월 23일부터 2010년 3월 2일까지 입법예고했으며, 2010년 3월 9일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사실상 '국가기념일'로 확정됐다.



4월 18일 서울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오에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후, 세종로-태평로 일대로 진출해 시위를 벌였다. 여기 까지는 문제가 없었으나, 귀교하는 도중 유지광이 이끄는 정치폭력깡패들로부터 기습,폭행을 받아 수십 명의 사상자 및 부상자가 속출했는데 당시 깡패들의 난무를 경관들이 보고만 있었던 이유는 대통령수행책 곽영주의 지시로 임화수의 부하 깡패가 동원됐기 때문이었음이 1960년 4월 26일 판명 되었다.

또한 1960년 4월 18일, 시위를 하고 돌아가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집단으로 구타, 많은 대학생들을 살상하게 하는 이른바 '고대생습격사건'은 곽영주와 임화수의 지시였음을 훗날 5.16 군사정변 후 재판과정에서 밝혀졌다. 이 때문에 곽영주와 임화수가 사형을 당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한편 2008년 4월 17일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은 4·19 혁명 48주년을 맞아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3·15 부정선거 사건기록’을 일반에 공개했는데 기록에서 4·18 고대생 습격사건은 대한반공청년단과 화랑동지회 등의 주도로 계획적으로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고대생 습격 사건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던 유지광의 수하 김태련은 2003년 고희연에서 “고려대생 습격사건은 조직적·계획적 사건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발생한 폭력사건을 보복하려다가 일어난 우연한 일”이라고 회고하였다.

이처럼 엇갈린 견해에서 고대생의 시위가 원래부터 조직적·계획적이 아니고 상황적이었듯이 습격사건 역시 우발적으로 발생한 폭력사건일 수 있다는 생각에 좀 더 면밀히 살펴볼 사건으로 보인다.


"4월 11일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 시신이 발견된 게 도화선이 됐죠. 서울 지역 총학생회 간에 물밑 논의를 통해 19일 오전 9시 일제히 경무대와 중앙청 앞에 집결하는 것으로 행동 지침을 정했습니다. 경무대 앞엔 대학생만 2만여명을 헤아릴 만큼 엄청난 군중이 몰렸습니다. 여기에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많은 희생자가 났습니다(사망 21명, 부상 172명). 살인 진압은 국민을 격노시켰고, 결국 엿새 후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과 대통령 하야로 이어졌습니다."



여중생의 편지

"어머님께"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십시오.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읍니까.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합니다.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어머님,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기뻐해주세요.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ㅡ 4.19혁명에 참여,희생된 당시 한성여중생,진영숙(16세)의 마지막 편지임

4.19 혁명 이후의 변화

계엄령에 주춤했던 시위는 시간이 감에 따라 더 번져갔다.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하고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하였다. 4월 25일에 묵묵히 지켜보던 대학 교수들까지 시위를 함으로써, 이승만의 제1공화국 정부는 무너질 위기를 맞고 있었다. 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 전 계층으로 확산되어 시위가 확산되자, 주한 미국대사였던 W. P. 매카나기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서 하야할 것을 권유,설득하였다. 이에 장시간동안 설득끝에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할 것을 결정을 하게 되고, 4월 23일 시위진압경찰의 발포로 시민들의 사망이 전달되자, 애도의 뜻을 공식적으로 발표한다. 4월 24일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을 사임선언을 한다. 4월 26일 오후 1시에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연설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의 대국민 담화문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 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 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바 그대로 할 것이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3·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1960년 4월 26일.대통령 이승만


4.19 혁명의 의의

1,민주주의는 가열찬 투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이것만이 가치있다는 것을 경험한 점.
2,혁명의 성공으로 외국으로 하여금 우리민족을 높이 평가하게 하였다는 점.
3,혁명은 부정선거가 원인이나 근본정신은 20년간 누적된 부패정치와 사회악에 대한 항거였다는 점.
4,혁명으로 구체제가 무너지고 새 민주체제가 성립했다는 점.
5,혁명으로 반공이데올로기가 크게 약화되었다는 점.
6,혁명으로 세계 민주운동사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점.
7,혁명으로 시민의 전체적인 개혁이 시작되는 동시에 한국 학생들의 정치,도덕적 갱신과 성숙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전 청와대수석,김정남은 4월혁명의 정신은 "반독재민주, 반외세자주,반분열통일,반기득권민중주의"라고 단언하고 이는 이승만정권에 대한 부정을 넘어서는 것으로 정권타도뿐만 아니라 향후 미래의 공동체적 이상을 제시했다면서,4월혁명은 "우리 사회가 반드시 시작해야할 시원,고향이요 반드시 이루어야할 이상,목표로써 계속 진행되고 있다"했다.419혁명은 민족정기이자 혼이요 생명이고 영원히 타오르는 민족의 숨결이고 정신인 것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4월혁명을〈낡은 것,썩은 것을 퇴치하고 4월의 봄같이 새생명이 돋아나는 세세상을 만들자는 운동이었다〉했다.이승만과 자유당 간부의 대다수를 차지한 친일파가 썩은 것으로 이를 몰아내고,관존민비,남존여비,등 온갖 인간차별적 낡은 봉건인습을 타파하는 것이었다.4월혁명은 모든 퇴영적인 것,침울하고 억압된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혁명으로 한국인은 일종의 '사회적 민주주의'라는 '정신혁명'을 경험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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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5월->6월의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하는 오늘이 되길...


이승만 독재정권 시절  

마산상고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419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의  70년대 대학생들은

오로지 419 정신 하나로 학생운동을 해나갔습니다  박정희도 419만 다가오면 노심초사할만큼...


전두환 노태우 군사 쿠데타 독재 정권의 80년대에는

5월의 정신이 있었죠..  518광주민중항쟁...     그래서  4월과 5월에는 항상 뽀얀 최루가스가 캠퍼스안에 가득했죠
5월  그날이 다시오면..


4월과 5월의 정신은  그대로 6월 항쟁으로 계승됩니다.

87년 1월 서울대 박종철군이 고문으로 사망하고
동년 6월 고문치사사건의 은폐를 규탄하던  시위중에 연대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한달만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촉발된 6월항쟁은  결국 629선언을 이끌어냅니다.


지난 독재정권시절  캠퍼스의 선배들의 4-5-6월은 그렇게 처절하고 뜨거웠습니다.

이 모든 힘은 419에서 나온것이고  

그래서 419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