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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그는 누구인가

오바마,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바마 스토리 <상> 몸으로 역사를 가르쳐준 그들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급격한 상승세가 미니 슈퍼화요일을 기점으로 주춤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8일 실시된 와이오밍 코커스에서 다시 승리함으로써 연승 행진을 재가동했다.
 
  득표율에 따라 대의원을 확보하는 민주당 경선의 특성상 힐러리 클린턴이 남은 경선에서 모두 60% 이상 득표하지 못한다면 오바마와의 차이를 좁힐 수 없다는 미국 주요 언론들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선출직 대의원 확보로 드러난 민심을 8월 전당대회에서 당연직 대의원이 뒤집기도 어렵다. 따라서 미니 슈퍼화요일은 오바마에게 '숨고르기'의 시간이었을 뿐 승산은 여전히 오바마가 높다는 평가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견해를 달리 한다 하더라도 세계의 지도자들과 개인적 유대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짐작컨대 한미동맹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과 인간적인 유대감을 만드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애석한' 사실은 그런 밀월의 시간이 매우 짧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지금으로부터 1년 후부터 임기가 끝날 때까지 부시가 아닌 다른 미국 대통령을 상대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당선 가능권에 들어온 세 명의 후보는 부시와 사뭇 다른 사람들이다.
 
  그중에서 이 대통령과 가장 다른 가치체계를 가진 후보는 아마도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일 것이다. 자서전과 평론집, 연설문,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만난 오바마는 열거하기조차 힘든 많은 면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달랐다.
 
  오바마는 과연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오바마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프레시안>은 오바마의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과 평론집 <희망의 담대함>, 그리고 각종 언론보도를 통해 드러난 오바마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순서를 마련했다.

 
  아버지, 흑인, 아내라는 3대 키워드를 통해 오바마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그가 무엇을 위해 미국 대통령에 나왔고 어떤 가치지향을 가졌는지 살펴본다. <편집자>
 
  오바마에게는 세 명의 '아버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외할아버지 스탠리 던햄이다. 유년기와 청년기의 오바마를 키운 외할아버지는 실제 아버지에 버금가는 존재였다. 두 번째는 인도네시아인 계부 롤로 소에토로. 오바마는 그를 따라 6살 때부터 10살까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살았다. 아들에게 이름을 물려줬지만 그 아들의 머릿속에는 단 한번의 만남으로만 남아 있는 케냐인 생부는 세 번째 아버지다.
 
  그 아버지들은 각자 자신이 처했던 역사의 한 복판에서 성공하고 또 좌절하며 어린 오바마를 키워냈다. 그 속에서 자란 오바마는 자연스럽게 역사와 정치를 몸으로 배웠고 다민족적 정체성을 갖게 됐다. 그들은 오늘의 오바마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영원한 '수호천사' 외할아버지
  
▲ 어린 시절 하와이 해변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로이터=뉴시스

  파란 많은 인생역정이 될 뻔 했던 오바마의 유소년기를 잡아줬던 것은 외조부였다. 오바마가 태어나던 1961년부터 하와이의 명문 푸나우 아카데미를 졸업하던 1979년까지, 외할아버지는 그가 인도네시아에 살았던 4년을 제외하고 14년 동안 오바마를 지켜줬다.
 
  오바마가 10살이 된 이후부터 어머니가 인류학 연구를 위해 전세계를 떠돌아도, 생부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져도, 계부 역시 10살 이후 없어졌어도 외할아버지는 언제나 그의 옆자리에 있었다.
 
  외조부는 오바마에게 미국의 백인 중산층 가정의 언어와 문화, 세계관을 터득케 했다. 케냐인과 미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흑백혼혈이자 자카르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오바마였지만 정체성의 혼란을 딛고 다문화적 장점만을 받아들인 인물로 성장하게 한 것은 외조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외할아버지가 겪고 오바마에게 전해준 역사는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었다. 캔자스 남부 위치타에서 태어난 그는 대공황을 겪은 후 1941년 진주만 공격 이후 입대, 유럽에서 군복무를 했다.
 
  1959년 사업을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에 정착한 그가 미국 50개 주(州) 중 절반이 흑백 결혼을 중죄로 여기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딸과 케냐인의 결혼을 승낙한 것은 언제나 자유를 갈망했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오바마는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서 "늘 새로운 출발을 찾고 눈에 익은 것들로부터 도망쳤다"라고 외할아버지를 묘사했다.
 
  던햄의 역마살을 다스린 것은 오바마의 탄생이었다. 오바마가 태어난 후 그는 하와이에 완전히 정착해 손자를 뒷바라지하며 자신이 겪은 경험이며 역사를 대물림했다.
  
▲ 콜롬비아 대학 교정을 찾은 조부모와 함께 ⓒ로이터=뉴시스

  특히 외할아버지는 소년 오바마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흑인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오바마의 피부색에 얼굴을 찌푸리거나 혀를 차는 관광객들을 향해 경멸을 태도를 보이며 그의 상처를 달래줬다.
 
  "너희들만 잘 되면 그게 다야. 내가 바라는 건."
 
  외할아버지는 평생 오바마에게 이 말을 되풀이하며 부모의 사랑에 목마른 손자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한 뒤 1992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여전히 생존해 있는데, 'CNN 중독자'가 되어 외손자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벅찬 가슴으로 지켜보고 있다. 가끔은 유세장에도 나간다.
 
  계부, 타협한 엘리트주의
 
  계부 롤로는 생부와 마찬가지로 하와이대 동서센터 유학생이었다. 오바마가 그를 따라 자카르타로 건너간 것은 1967년이었다. 수하르토가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를 무력으로 진압한 뒤 수카르노로부터 권력을 찬탈한,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 최고의 격변기로 기록되던 바로 그 해였다.
  
▲ 자카르타 시절. 왼쪽이 계부 롤로 가운데가 어머니와 이복동생 오른쪽이 오바마다. ⓒ로이터=뉴시스

  롤로는 당시 가장 급진적인 제3세계 지도자로 꼽혔던 수카르노 대통령에 의해 장학생으로 뽑혀 유학을 갔었다. 그러나 수하르토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후 여권이 취소되어 귀국했고, 1년간 강제 징집됐다.
 
  그런 롤로는 오바마를 친아들처럼 아꼈다. 그러나 오바마가 본 것은 절망 끝에 세상과 타협해 버리는 전형적인 엘리트의 모습이었다.
 
  군에서 나온 롤로는 오바마의 표현대로 "아무런 위장도 하지 않은 채 벌거벗은 몸뚱어리 그대로 늘 생경하게 존재"하고 있는 권력에 의해 길들여졌고, "권력과 손을 잡고 망각의 지혜를 배웠다." 석유회사에 취직해 돈과 권력을 맛봤지만 탈세 혐의로 몰락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롤로는 자신의 행태에 대해 '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몰아붙이는 오바마의 어머니에게 "죄의식은 외국인이나 가질 수 있는 사치"라고 쏘아붙였고, 둘은 불화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공작으로 집권한 수하르토 치하에서 과거를 버리고 타협해 버린 롤로. 그런 그에게 '양심'을 이야기 하는 미국인 어머니의 다툼 속에서 어린 오바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바마는 롤로가 "가난과 부패와 자기 안전을 위한 끊임없는 쟁탈에 대해 설명했다"면서 "그의 설명은 내게 늘 가까이 남아 있었고 내 안의 몰인정한 회의주의에 자양분이 됐다"고 고백했다.
  
▲ 인도네시아 학교에 다니던 시절 ⓒ로이터=뉴시스

  이런 혼란에서 빛을 발했던 것은 어머니 앤의 존재였다. 앤은 롤로의 체념이 아들 오바마에게 전도되지 않도록 엄격하게 교육했고, 아들을 자부심 강하고 예의 바른 인물로 만들었다. 형편이 허락지 않아 오바마를 국제학교가 아닌 인도네시아 학교에 보내는 대신 매일 새벽 4시 아들을 깨워 미국식 교육을 시켰다.
 
  그리고 앤은 아들에게 언제나 생부 얘기를 들려줬다. 아버지가 얼마나 가난하게 자랐는지, 그렇지만 얼마나 부지런하고 정직했는지를 되풀이 해 들려줬다. 오바마는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의 유일한 동맹군"이라고 말했다.
 
  아버지, 몰락한 우상
 
  계부가 투항으로 몰락한 엘리트였다면 친아버지 오바마 시니어는 저항으로 몰락한 엘리트였다.
 
  케냐 정부 장학금으로 하와이에 유학을 와 오바마를 낳은 그는 아들이 2살 되던 해 부인과 이혼하고 하버드 대학으로 떠났다. 거기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다른 미국인과 결혼해 케냐로 돌아간 그는 대통령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고위직에 올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새 조국 케냐의 건설을 주도했고 부와 명예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케냐는 최대 부족인 키쿠유족과 제2의 부족인 루오족의 갈등으로 심각한 위기 국면에 휩싸였다. 작년 12월 대통령 선거 후 소요사태로 16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케냐의 부족갈등은 40년의 뿌리를 가진 것이었다.
 
  루오족 출신인 아버지 오바마는 같은 루오족 출신인 부통령 라일라 오딩가와 함께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현재 케냐 야당 오렌지민주운동의 지도자 오딩가가 미국의 유력 대선후보인 오바마를 두고 자신의 조카라고 주장하는 건 아버지 오바마와의 직접적인 인연 때문이다.
 
  아버지 오바마는 오딩가와 함께 케냐의 정치가들이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고 제국주의자들이 두고 간 재산을 차지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고 비난했다. 최대 부족이 만들어 가는 기득권에 타협하는 이들이 속출하는 가운데서도 오바마는 대통령의 만류까지 뿌리치며 강력히 저항했다.
 
  정부는 그런 오바마를 거세게 탄압했다. 공직에서 해임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갑자기 닥친 불행을 술로 달래던 오바마는 권토중래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982년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하는 비운을 맞았다.
  
▲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생부를 만났던 당시의 모습 ⓒ로이터=뉴시스

  아버지 오바마가 꿈에 그리던 아들을 데려갈 요량으로 하와이를 찾았던 것은 어쩌면 마지막 희망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외조부 밑에서 반듯하게 잘 자라고 있는 아들을 데려가겠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오바마는 그런 아버지의 시련을 뒤늦게 듣게 됐다. 그것은 우상의 몰락이었다. "명석한 학자, 관대한 남자, 탁월한 지도자라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부서져 연기처럼 사라졌다." 소수파로서의 제약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아버지를 통해 미국 사회의 마이너리티로 살아가야 할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다.
 
  화해, 그리고 자유
  
▲ 연설하는 오바마 ⓒ로이터=뉴시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오바마가 아버지에게 절망할 이유는 없었다. 명예와 원칙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아버지. 부끄러운 생을 살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는 오히려 오바마가 좇아야 할 그 무엇이었다.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잘 나가는 변호사의 길을 마다하고 시카고 빈민가의 공동체조직가로 뛰어든 것은 아버지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다.
 
  '나는 누구인가'에 답하기 위해 찾은 아버지의 땅 케냐에서 오바마는 결국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고 그래서 아버지와 화해했다. "공포 그 자체는 부끄러움이 아니다. 공포가 만들어 낸 침묵이 부끄러운 것이다." 케냐에서 만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오바마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려 했던 게 무엇이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됐다.
 
  오바마는 흑인으로서의 삶, 소년 시절의 절망, 시카고에서 목격한 분노와 희망이 대서양 건너 케냐의 작은 마을과 이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침묵하지 않는 삶을 살겠노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우상은 무너졌지만 그 잔해 속에 그 무엇보다 값진 게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왕의 동상은 무너졌고 우상은 사라졌다. 진실을 가렸던 에메랄드 빛 커튼이 걷혔다. 그래 좋다, 내가 할 일은 얼마든지 잘할 수 있다. 어떻게 해도 아버지보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아버지의 음성은 여전히 내 등을 떠밀며 격려했다. 배리, 넌 마땅히 해야 할 만큼 열심히 하지 않는구나. 더 힘을 내. 네 민족의 투쟁을 도와야지. 일어나라, 흑인의 아들아."
 

오바마 스토리 <중> 흑인으로 산다는 것


오바마가 자신은 흑인이고, 흑인은 미국 사회에서 차별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각성하게 된 계기는 기습적으로 찾아왔다.
 
  새아버지 롤로와 함께 인도네시아에서 살던 9살 무렵 주 자카르타 미국대사관에 들렀을 때였다. 오바마는 대사관 도서실에서 미국 잡지 <라이프>를 뒤적이다가 충격적인 사진을 보게 된다. 피부색을 하얗게 만들려고 화학수술을 받은 한 흑인 노인의 사진. 수술을 위해 전 재산을 쏟아 부었으나 실패하고 결국에는 후회 속에 생을 보내는 이의 모습이었다.
 
  오바마는 피부색이 희면 행복이 보장된다는 광고를 믿고 그런 수술을 받은 사람이 미국에 수천명이나 된다는 기사를 읽으며 백인인 어머니에게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어머니가 백인이어서가 아니었다. 왜 미국이 이런 곳이라고 설명해주지 않았는지, 그런 사실을 알고도 어떻게 태연했는지를 따지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오바마는 "새로 발견한 이 무서움을 도무지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한 때 ⓒ로이터=뉴시스

  어머니에게 들은 흑인들의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 흑인 남자는 모두 최초의 흑인 판사였던 서굿 마샬이었고, 흑인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시드니 포이티어였다. 흑인 여자는 모두 민권운동 지도자 패니 루 해머나 흑인 여배우 레나 혼이었다. 흑인이라는 사실은 위대한 유산과 특별한 운명의 혜택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얼마든지 강인해서 충분히 짊어질 수 있는 영광스러운 짐을 진 것이라고 어머니는 가르쳤다.
 
  그러나 <라이프>의 그 놀라운 사진을 보고 돌아온 그날 밤 오바마는 발가벗은 채 거울 앞에서 읊조렸다. "내 주변에 있는 어른들은 다 미쳤다."
 
  돌아온 고향 하와이, 우울한 세월
 
  오바마에게 이제 세상은 전과 같지 않았다. 아마도 콜롬비아대학을 졸업한 뒤 1985년 시카고로 가 공동체조직가로 투신할 때까지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을 보면 청소년기 오바마의 머릿속을 맴도는 말은 오직 흑인, 흑인, 흑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술과 담배, 마리화나에 손을 댄 것도 흑인으로서의 열등감,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 때문이었다.
 
  10살이 되어 자카르타에서 하와이로 돌아와 명문 푸나호우 아카데미 5학년에 전학한 오바마에게 인종주의는 구체적인 현실이 되어 버렸다. 오바마가 오기 전까지 흑인이 단 한명밖에 없었던 푸나호우에서 그는 친구들의 놀림과 따돌림을 받았고, 스스로 쌓은 벽 안에 갇혀 허우적댔다.
 
  그나마 위안이 됐던 것은 농구였다. 푸나호우 농구부 선수가 된 오바마는 대학 코트에서 만난 흑인 선수들을 보며 열등감을 털어버릴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 농구장에서 그는 "존경심은 자기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받을 수 있는 것이지 아버지가 누구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했다.
  
▲ 푸나호우 농구부 시절(16세) ⓒ로이터=뉴시스

  흑인에서 소수자로…넓어지는 시야
 
  흑인 문제를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로, 그리고 이민자, 여성, 피정복민 등 소수자 전체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LA에 있는 대학에 입학한 뒤부터였다. 오바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에 항의해 미국 기업들이 남아공에서 철수하도록 압력을 가했던 '투자 철회 운동'에 가담하면서 흑인의 문제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분노와 절망과 동정을 넘어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된 오바마는 인종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에서 출발한 정체성에 관한 고민의 끝에 하나의 개념을 발견했다. 공동체다. 그는 "나와 흑인 친구들이 범죄와 관련된 통계를 접할 때 함께 느끼던 절망, 농구 코트에서 친구들과 나누던 하이파이브보다 더 깊은 어떤 것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 정착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을 검증할 만한 그런 공간", 즉 어떤 공동체를 염원하게 됐다.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한 뒤 24살이 되던 해에 시카고라는 낯선 땅으로 건너간 것은 공동체에 대한 동경과 갈망 때문이었다. 욕망의 도시 뉴욕에서 할렘과 부유층 거주 구역을 보며 목도한 문제, 즉 인종과 계급이 얽혀서 만들어낸 차별과 억압을 공동체를 통해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공동체조직가가 되기로 결심한 오마바의 혼잣말을 보면 지금 오바마가 내걸고 있는 '변화'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게 이 무렵이 아닌가 싶다. 그의 독백은 매우 급진적이다.
 
  "레이건과 그의 앞잡이들이 더러운 짓을 벌이는 백악관에 변화가 필요하고, 양처럼 고분고분하고 부패한 의회에 변화가 필요하며, 미친 듯이 한쪽으로만 치우친 나라 안의 분위기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조직된 풀뿌리에서만 나온다."
 
▲ 학창 시절 ⓒ로이터=뉴시스

  공동체조직가(community organizer)는 원래 있던 말이 아니었다. 오바마도 그걸 하겠다고는 했지만 정확히 무슨 일을 해야 할지는 막연했다. 그러나 도심의 흑인과 외곽의 백인을 묶어 제조업 일자리를 마련하는 일, 시청의 지원을 받아 직업 창출 및 훈련 센터를 만드는 일, 저임금 노동자들을 위한 공공임대주택을 개발하는 일, 공공아파트에 노출된 석면 문제를 해결하는 일, 대선 유권자 등록 운동 등을 닥치는 대로 해 나가면서 그는 공동체조직가의 개념을 스스로 만들어 나갔다.
 
  물론 그것은 그저 헌신성과 착한 마음만 있으면 되는 봉사활동 같은 게 결코 아니었다. 소수자 집단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분열과 반목을 치유하기 위해 남다른 수완이 필요했고, 차별받는 이들의 삶 하나하나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활동이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대단히 정치적인 행위들이었다. 시카고 사우스사이드 로즈랜드 커뮤니티와 앨트겔드 가든이라는 넓지 않은 지역에서 벌이는 일이었지만 미국 사회의 근본 모순과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과격한' 투쟁이었다. 권력자들, 권력 브로커들, 투자은행가들이 오바마의 싸움 상대였다.
 
  번뇌 그리고 행운
 
  시야가 확장되면서 흑인으로서의 열등감은 어느 정도 해소됐다. 그러나 개인적인 차원의 열등감이 없어졌다고 해서 모든 모순에서 초탈해 자유를 얻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푸른 눈을 가지고 싶어 미용 렌즈를 낀 흑인 여성, 흑인을 '깜둥이'라고 비하하는 흑인 지도자를 일상적으로 접하면서 오바마는 끝없이 번뇌했다.
 
  오바마의 내면은 흑인으로서의 자존심과 백인에 대한 증오, 그리고 흑인 민족주의 사이를 부유했다. 그러나 자존심을 갖는 것만으로는 마약 복용, 10대 미혼모, 흑인이 흑인들 대상으로 저지르는 범죄-이걸 '질병'이라고 표현했다-를 고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아니었다. 백인에 대한 증오는 어머니의 가르침과 맞지 않았다. 흑인 민족주의 역시 오바마를 온전히 설득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오바마가 공동체의 꿈을 잃지 않게 해 준 '행운'은 여기저기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그는 특유의 담담한 인내심와 노력으로 그 행운을 놓치지 않았다.
 
  우선 공동체조직가로서의 활동 자체가 그에게 행운이었는데, 석면 노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국과 싸우면서 오바마는 승리의 기쁨을 맛봤다.
 
  뒤늦게 얻게 된 종교(UCC; United Church of Christ)는 결정적인 축복이었다. 오바마는 '희망의 담대함'이란 설교를 듣고 흑인들의 시련은 보편적인 인간의 것이라는 위안과 희망을 얻게 됐다. '희망'의 담대함은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의 기조연설, 그리고 미국의 미래 비전을 담은 그의 평론집 제목이 됐다. 아버지의 땅 케냐에 다녀와 정체성의 뿌리를 확인하는 동시에 한때 우상이었다가 부서져 버린 아버지와 마음으로 화해한 일도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 케냐에서 만난 할머니 ⓒ로이터=뉴시스

  흑인에서 소수자로, 소수자에서 미국 사회로
 
  희망을 품은 오바마에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1988년 하버드 로스쿨에 들어간 뒤 흑인 최초로 <하버드 로 리뷰>의 편집장이 됐다. 91년 졸업한 오바마는 다시 시카고로 돌아와 민권변호사로 활동했고, 결혼과 동시에 시카고대학에서 헌법학 강의를 맡기도 했다.
 
  시카고로 다시 돌아왔을 때 오바마는 사우스사이드 전역에 만연한 부패의 흔적, 더욱 남루해진 사람들의 삶, 벼랑 끝에 몰려 통제할 수 없게 되어버린 아이들을 다시 만났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사회 구조의 모순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더없이 성숙해져 있었고, 흑인으로서의 자폐적 자의식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이란 흑인이든 백인이든 미국이라는 공동체에서 모든 이들의 권리와 주장을 실현하는 데 매진하는 것이었다. 8년에 걸친 주 상원의원 활동, 그리고 2004년 일리노이주 역사상 최대 표차로 당선되며 입성한 연방 상원에서의 활동은 마틴 루터 킹 목사, 말콤 엑스, 2차 대전 당시 억류된 일본인들, 착취당하던 러시아 유대인 아이들, 멕시코 국경 지대의 그란데 강을 건너 미국으로 넘어오는 허기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것이었다.
 
  오바마의 희망은 소수자로서 미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참의미를 되새기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그것은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의 기조연설 전반부에 압축됐다. 그 연설로 오바마는 일약 전국적인 스타가 되었다.
  
▲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은 연방 상원의원 후보였던 그를 일약 전국적인 정치 스타로 만들었다. ⓒ로이터=뉴시스

  "이 나라의 가능성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졌던 내 부모님은 나에게 '신의 은총'이란 뜻의 버락이라는 아프리카식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것은 관대한 나라 미국에서 이름은 성공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부모님들은 부유하지 않았지만 내가 좋은 학교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관대한 나라 미국에서는 꼭 부유하지 않아도 잠재력을 꽃피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부모님들은 모두 돌아가셨지만 오늘 밤 하늘나라에서 나를 자랑스럽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오늘 내가 물려받은 다양성에 대해 감사하고, 내 부모님들의 꿈이 내 귀여운 두 딸에게도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여기 서 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품고 있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이고, 내가 먼저 살았던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으며, 내 이야기는 미국이 아니고서는 지구상 어디에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 밤 우리는 우리나라의 위대함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 모였다. 미국은 마천루의 웅장함이나 군사력, 경제 규모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다. 200년 전 독립선언문에 나온 대단히 간단한 말은 우리가 가진 자긍심의 기초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것은 진정한 미국의 정신이다. (…) 흑인의 미국도 백인의 미국도, 라틴계의 미국도 아시아계의 미국도 없다. 미국은 오직 미국일 뿐이다."

 
  오바마 스토리 <하> '바위' 같은 아내 미셸

"부부가 같은 걸 좋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부부는 증오하는 대상이 같아야 한다. 오바마 부부에게 공통의 증오 대상은 미국이다."
 
  최근 "어른이 된 뒤 처음 진정으로 이 조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됐다"라는 미셸 오바마의 발언이 도마에 올랐다. 악의에 찬 한 논객은 오바마 부부가 미국을 사랑하기는커녕 극단적인 반미주의자들이라고 낙인찍어 버렸다.
 
  이 말이 논란이 되자 미셸은 "조국이 아니라 정치과정을 잘못 말한 것"이라며 즉각 해명했다. 그러나 오바마가 현재의 기세를 몰아 민주당의 대선후보가 된다면 이 발언은 두고두고 입방아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설화(舌禍)다.
  
▲ 오바마 부부 ⓒ로이터=뉴시스

  미셸의 연설을 보았는가
 
  미셸의 말이 문제가 됐던 경우는 그 전에도 몇 번 있었다.
 
  "오바마는 잘 때 코를 골고 발 냄새를 풍겨 우리 딸들이 아빠 침대에 들어가기 싫어한다. 양말을 아무데나 벗어놓기도 한다. 빵에 버터를 제대로 바를 줄도 모르고, 냉장고 안에 넣지 않아 녹아버릴 때도 있다."
 
  너무나 소탈하고 솔직한 말이었으나, 일부 언론들은 미셸이 남편을 조롱하고 무시한다고 치고 들어왔다. 오바마 부부는 그냥 웃어 넘겼지만 그 후부터 선거 참모들은 미셸의 단어 선택에 신경을 곤두 세웠다.
 
  힐러리가 오바마를 누르고 민주당 대선후보가 된다면 그를 지지하겠냐는 질문에 "생각해볼 문제"라고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도 실수였다. "민주당원으로서 힐러리를 지지해야 한다"라고 말한 부분이 편집되어 버려 졸지에 '경쟁 후보의 속 좁은 아내'가 돼버렸지만, 그 후 오바마 캠프는 미셸과 관련된 언론 대응에도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 미셸 오바마의 연설 장면 ⓒ로이터=뉴시스

  원고 한 장 없이 하는 미셸의 연설을 보면 눈이 번쩍 뜨인다. (그 말 잘한다는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도 오바마 지지연설을 할 때면 원고를 본다) 한 편의 잘 짜인 연극과도 같은 장면을 연출하며 수많은 청중들을 쥐락펴락 한다. 대학 강단에 선 적은 있지만 정치라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흑인 여성이 어떻게 저런 연설을 할 수 있을까.
 
  청중과 지지자들은 신랄하고, 거침없고, 풍자적이고, 유쾌한 말의 향연에 환호하고, 낄낄대고 때론 눈물을 흘린다. 대부분 남편과 따로 움직이지만, 같이 있을 때는 오바마의 연설에 앞서 '바람잡이' 역할을 해도 손색이 없다. (☞미셸 연설 장면 동영상 보기)
 
  그러나 한 번 제대로 연설을 하기 시작하면 무려 40분간 교육 문제에서부터 이라크 전쟁까지 수많은 이슈를 얘기하다 보니 언론들이 제목으로 뽑기에 좋은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다. 미셸의 '말실수'가 잦은 것은 그처럼 자유롭고 솔직한 스타일 탓도 크다.
 
  미셸의 지인들은 "공석에서나 사석에서나 똑 같은 모습이다"라거나 "가식이 전혀 없다"라고 입을 모은다. 하버드 로스쿨 지도교수였던 데이비드 윌킨스는 "일반적으로 학생들은 어떤 결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거나 논리적 기교를 부리지만, 미셸은 언제나 입장을 뚜렷하게 표명했다"라고 회고한다.
 
  미국에서 흑인 여자로 산다는 것
 
  이렇게 자신만만한 미셸의 태도는 그냥 생긴 게 물론 아니다. <뉴스위크>는 자신의 능력과 인종, 계급, 그리고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을 극복하며 얻어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에서 태어난 미셸은 '침대가 하나밖에 없을 정도로' 가난하지만 화목한 집안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전업주부로 자식들에게 헌신했다. 시청 수도국 직원이자 민주당 지역구 위원장이었던 아버지는 과묵하고 엄격했다.
  
▲ 한때 유명한 농구 스타였던 미셸의 오빠 크레이그 로빈슨 ⓒ로이터=뉴시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미셸은 모든 면에서 뛰어났던 오빠의 후광에 가려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현재 브라운대학 농구부 감독인 오빠 크레이그는 훗날 농구 스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지만 공부 또한 잘 해 명문 프린스턴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그에 비해 미셸은 공부를 잘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뛰어나진 못했다. 오빠를 따라 프린스턴에 입학 원서를 낼 때도 지도교사의 만류를 뿌리쳐야 했다.
 
  백인과 특권층 자녀들이 많은 프린스턴은 어린 흑인 여학생에게는 녹록치 않은 곳이었다. 어떤 공식적인 인종차별적 제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백인 학생들은 흑인 친구들은 그저 소수자우대제도(affirmative action) 덕택에 입학한 아이들이라고 여겼고 따라서 곧잘 무시했다.
 
  미셸이 프린스턴을 나오며 쓴 사회학 졸업논문은 <프린스턴 대학 흑인 졸업생들과 흑인 공동체>였다. 눈에 보이지 않은 차별이 얼마나 공고히 버티고 있었고, 그에 대한 미셸의 인식이 어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미셸은 그 논문에서 "프린스턴은 과거 어느 곳에서보다 내가 흑인임을 인식하게 했다"라면서, 개방적이라고 알려진 캠퍼스에서 자신은 학생이 아니라 한 사람의 방문객에 불과했다고 썼다. 졸업 후 들어간 하버드 로스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프린스턴에서의 경험에 익숙해진 그는 그런 현실을 무디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흑인과 여성이라는, 미국에서 살기에 불리한 조건 두 가지를 딛고 미셸은 마침내 성공했다. 고향 시카고로 돌아와 유명한 로펌 '시들리 앤 오스틴'에 취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프린스턴이나 하버드에서와는 달리 오바마 선거 운동에는 여성이자 흑인이라는 조건이 오히려 플러스 요인이다. 그렇다고 미셸이 흑인과 여성들의 마음을 직접 자극하는 전략을 택하진 않는다. 오바마에 비해 그런 얘기를 좀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입장이긴 하지만, 미셸도 가급적이면 '통합'을 말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속을 후련하게 해줄 말을 잔뜩 기대했던 흑인 여성 유권자들로부터 야속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래도 미셸은 흑인들이 대부분인 유세장에 나서더라도 "피부색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우리는 미국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식이다.
  
▲ 오바마의 지지자인 오프라 윈프리가 진행하는 토크쇼에 나간 오바마 부부 ⓒ로이터=뉴시스

  그러나 일종의 성공신화를 가진 미셸의 자신만만함이 약점이 될 때가 있다. 설교를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지난 1월 애틀랜타에서 열린 흑인들의 모임에서가 그랬다. 미셸은 늘 그렇듯 자신의 성공담을 얘기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이미 성공한 흑인들이 모였던 그 자리에서 굳이 그런 얘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미셸이 너무 젠 체하는 게 아니냐고 뒷말을 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삶을 돌아보게 한 오바마
 
  지금은 미셸이 오바마의 지주지만 원래는 오바마가 미셸의 지주였다. 미셸은 오바마보다 두 살 어리지만 대학 졸업 후 바로 로스쿨에 갔기 때문에 직장생활은 선배였다. 시들리 앤 오스틴에 인턴사원으로 들어온 오바마를 달리 보게 된 것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이어가던 공동체조직가 활동 현장에 따라간 뒤부터였다. 오바마가 지역 주민들을 모아두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만들어져야 할 세상"의 차이를 좁혀야 한다고 연설하는 모습을 보고 미셸은 그만 반해버렸다.
 
  그 와중에 미셸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생겼다. 아버지, 그리고 '자유 영혼'을 가졌던 한 친구의 죽음이었다. 슬픔에 빠져 있던 미셸은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을 돌아보며 이제는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 결혼식 날 버락의 어머니와 ⓒ로이터=뉴시스

  미셸은 로펌을 그만두고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선택 뒤에 올 '배고픔'을 생각하니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둘이 결혼해서 아끼고 산다면 수입이 적어도 살 수 있지 않겠냐는 오바마의 설득이 없었다면 감행할 수 없었을 꿈이었다.
 
  둘은 마침내 결혼과 동시에 퇴직을 하고 사회사업의 길로 뛰어 들었다. 미셀은 시카고 시청에서 2년을 근무한 뒤, '공공동맹'이라는 비영리단체에서 청년지도자 양성 과정을 담당했다. 그 후 시카고대 의대 의사들을 빈민지역에 파견하는 프로그램을 추진했고, 작년 가을까지 시카고대 의대에서 지역사업 담당 부총장을 지냈다.
 
  밸런타인데이 유세 일정을 모두 취소한 까닭
 
  경선 초반 미셸은 오바마에게 마음을 쉽게 주지 못하는 흑인들의 표심을 돌려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는 그런 미셸이 '끝장을 보는 사람'(the closer)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소개했다.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기 전 자금 모금과 힐러리 격퇴 전략의 청사진을 캠프에 요구한 미셸은 만족스런 답변을 듣자 직장까지 집어치우고 선거 운동에 뛰어들었다. 남편의 안전은 그가 무엇보다 중시하는 문제다.
 
  하지만 그런 미셸이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은 따로 있다. 오바마가 현실감각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오바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현실적인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틈만 나면 일깨워준다.
 
  오바마가 선거전에서 졌을 경우, 혹은 정계를 은퇴했을 경우, 보다 빨리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계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셸은 오바마로 하여금 보통 사람임을 깨닫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인 이상은 보통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져야 하며, 그들이 원하는 변화를 잊지 않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 오바마의 가족 ⓒ로이터=뉴시스

  그를 위한 미셸의 전략은 두 딸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는 유세장에 가급적 딸들을 데려간다. 아버지와 딸들의 물리적 거리를 가깝게 해 주기 위해서다. 그것도 안 되면 노트북으로 화상전화를 하도록 해 오바마가 두 딸의 아버지임을 늘 알게 한다. 밸런타인데이에는 유세 일정을 모두 취소시키고 시카고로 데려와 딸들과 시간을 보내게도 했다.
 
  오바마는 그런 미셸을 "나의 바위"라고 말한다. 자신을 든든히 지탱시켜 주고, 현실이라는 땅에 뿌리박게 해주는 바위. 무엇 때문에 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바위다. 남편의 뒤편에 서서 억지 미소나 보내며 액세서리 역할이나 하는 정치인 아내의 모습을 거부한 미셸. 미국 정가에 느닷없이 등장한 이 흑진주의 미래는 그의 남편 오바마만큼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