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urrent Issue

위안부들은 결국 속아서 온 거야

[단독인터뷰] 구 일본군 군속이 말하는 종군위안소 충격적 실태


"위안부들은 결국 속아서 온 거야" (1부) [단독인터뷰] 구 일본군 군속이 말하는 종군위안소 충격적 실태

박철현 기자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들이 얼마나 두려웠을지..."

마쓰바라 마사루(85) 씨는 인터뷰 도중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담담하게 풀어나갔지만 역시 감정의 동요는 감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지바 현 아비코 시의 시민단체 '아비코 평화네트' 회원인 그는 65년전 제국해군 군속(군무원)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마쓰바라 씨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들고있던 손가방에서 당시 자료들을 꺼낸다. 그리고 그는 다시 겉옷 속주머니에서 샛노랗게 물든 명함크기 증명서를 탁자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이게 그 때 사용한 군 위안소 출입증입니다."

▲ 마쓰바라 씨가 발급받았던 위안소 출입증. 1943년 11월에 발급받았다고 한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가로 5.8센티, 세로 10.8센티의 그 증명서에는 '남국료출입증(南国寮出入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위안소를 이용할 때엔 이 출입증을 가져가야 해요. 우리 부대 근처에는 두 군데가 있었죠. 하나가 여기 적혀져 있는 '남국료위안소'였고 또 하나는 '남성료(南星寮)위안소' 였습니다."

마쓰바라 씨는 "남국료와 남성료는 일본군 위안부들이 모여있는 시설로 군인, 군속들의 성적욕구 해결을 위한 시설로 사용됐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도 물론 남태평양 트럭(truck) 제도 일대로 배속된 1943년부터 '남국료'를 몇 번 이용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18~25세 정도되는 종군위안부들이 각 위안소에 5, 60명 정도씩 있었습니다. 44년부터는 더 늘어났어요. 마지막에는 아마 각각 70명 정도씩 되지 않았나 하네요. 일본인 위안부가 그중 10% 정도였고 나머지는 전부 조선에서 온 위안부들이었습니다."

1942년 제국해군 제4함대 시설대대에 배속된 마쓰바라 씨는, 43년 남태평양 마리아나 제도의 트럭제도에 둥지를 틀었다.

하루시마, 나쓰시마, 아키시마, 후유시마, 그리고 게쓰요시마, 가요시마, 수이요시마, 모쿠요시마, 긴요시마, 도요시마, 니치요시마 등 총 11개의 큰 섬과 100여개의 무인도로 구성된 트럭제도는 산호초로 둘러싸인 바다의 요새였다.

▲ 위안소 실태를 최초로 육성증언한 마쓰바라 마사루 씨. 그는 1998년 나카가와 농수산대신의 일본군 위안부 발언으로 인해 이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그는 나쓰시마(夏島)에 주둔했고 이 안에 있는 두 위안소를 관리하는 시설대대 군속으로 일했다. 나쓰시마는 후방보급기지로 그 주변에는 각종 유곽, 술집, 식당, 옷가게 등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나쓰시마를 기준으로 각각 위 아래에 위치한 하루시마(春島), 아키시마(秋島)는 전투부대가 주둔했다. 양 섬은 물론 나쓰시마에 주둔하는 일본군 및 군속들은 일과가 끝나거나 휴일이 찾아오면 나쓰시마의 두 위안소를 이용했다.

"위안소 접수대엔 위안소를 이용하려는 군인들로 바글바글했습니다. 한산한 경우를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전투태세에 들어가거나 중요한 훈련이 있는 날엔 한산했을 수도 있지만 저도 그 땐 작전에 참가해야 하니까 실제로는 어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평균잡아서 종군위안부 한 명당 하루에 14, 15명 정도는 받아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1시간 10분간에 걸쳐 자신이 경험한 위안소의 모든 것을 담담하게 털어 놓았다. 하지만 그 역시 "조선에서 속아서 끌려 온 그녀들"을 추억하는 장면에서는 목소리가 떨린다.

"본명은 모르지만 '미도리'라는 이름을 가진 위안부가 나에게 울먹거리면서 '고향에 꼭 부쳐달라'며 소포를 건네 줬지요. 그 땐 그 정도 였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게 그녀 고향으로 잘 갔는지 지금도 마음에 걸립니다."

마쓰바라 씨는 언론에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말한다. 평화운동을 계속 해 왔기에 언젠간 말할 날이 오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다 보니 미뤄졌다.

하지만 지난 1998년 당시 농수산성 나카가와 쇼이치 장관의 "종군위안부는 없었다"는 발언에 양심고백을 결심했다.

구 일본군 군속으로 위안소의 이용자이면서, 또 그 위안소를 관리하는 일을 맡아본 마쓰바라 마사루 씨. 그가 회고하는, 참혹하고 소름돋는 일본군 위안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인터뷰는 2010년 4월 21일 지바 현 아비코 시 모처에서 1시간 10분에 걸쳐 진행됐다.)

- 오늘 이렇게 시간 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먼저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립니다.
"저는 마쓰바라 마사루라고 합니다. 지금은 노랫말을 만들고, 또 시민단체 활동도 하고 있지만 1942년부터 44년까지 남태평양 북 마리아나 제도의 트럭제도에서 군속으로 복무했지요. 도쿄에서 따진다면 3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입니다. 트럭제도는 크게 11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 4개 섬을 하루, 나쓰, 아키, 후유시마라고 불렀지요. 왼쪽은 게쓰요시마를 중심으로 7개 섬이 있었지요.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외곽길이는 약 240킬로미터에 달했습니다."

- 위안소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병참기지, 그러니까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나쓰시마에 위안소가 두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남국료(南国寮), 또 하나는 남성료(南星寮)였습니다."

- 그 위안소는 누가 관리했습니까?
"나쓰시마 일대가 제4해군함대의 기지였는데 이곳(나쓰시마)는 병참보급기지였어요. 제가 배속된 곳은 제4함대 시설부대였습니다. 부대장은 하기와라 간이치 대좌였지요. 제4함대 시설부대라는 건 제4함대에 소속된 부대입니다. 제4함대 사령장관은 고바야시 마사시 해군중장이었습니다. 제가 배속받은 이 시설부대가 위안소를 관리했습니다."

- 시설부대는 위안소 관리만 했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위안소도 관리했지만 본국(일본)에서 넘어 온 죄수들도 관리했습니다. 한 700명 정도? 그들은 주로 잡역을 했습니다. 그 외에 한국에서 그러니까 당시엔 조선인데요. 조선에서도 많은 수의 장정들이 왔었습니다. 그들은 일을 시켜준다는 말에, 그러니까 결국 속아서 온 셈인데 아무튼 다들 같이 사역을 했습니다. 유사시 인적지원이라는 명목으로 평소에 일을 시킨 것이지요. 아무튼 위안소, 위안부, 죄수 등은 전부 제가 소속돼 있던 시설부대가 관리했습니다."

- 보통 시설부대라면 공병을 쉽게 떠올리기 마련인데 마쓰바라 씨가 있었던 곳은 사람도 관리했다, 그런 의미네요.
"그렇죠. 우린 시설부대니까 막사나 도로, 항만, 비행장 같은, 그러니까 토목건축도 다 했습니다. 그것도 하고 아까 말한 그런 것도 하고... 사실 뭘 짓고 그러는게 결국 노동력이 필요하니까요. 일본인 사역자들도 꽤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인들이 더 많았습니다만..."

- 시설부대가 위안소도 관리했다는 것인데 당시 위안소는 어떤 사람들이 드나들었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이 일본군 위안부를 하고 있었나요?
"(겉옷 안쪽 속주머니에서 증명서를 꺼내며) 이게 남국료 출입증입니다."

- 남국료라면 아까 위안소라고 말씀하신...
"네. 그렇습니다. 저는 남국료를 담당했고 또 남국료를 사용했습니다. 이 출입증은 당시 실제로 사용했던 원본입니다. 계속 가지고 있었지요."

- 출입증 겉면에 적혀있는 내용은 어떤 의미입니까?
"여기 적혀있는 건, 먼저 가장 왼쪽이 남국료출입증,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있으면 남국료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하기와라 부대라고 씌여져 있습니다. 부대장 이름이 하기와라 간이치여서 하기와라 부대입니다. 인감이 그 밑에 찍혀 있지요. 원본인데 원래는 반납하지 않으면 안되는 건데 몰래 가지고 귀국했지요."

- 위에 이 번호는?
"그건 발급번호입니다. 갑제511호. 모두 이런 번호가 찍혀져 있습니다. 관리번호지요."

- 쇼와 18년에 발급받았네요.
"네. 서기로 따지면 1943년이고, 11월에 발급받았습니다. 발급날짜가 출입증 옆에 씌여져 있는 것이죠."

- 1943년이면 태평양전쟁이 한참 일어나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렇죠. 전시상태였죠.(사이) 이듬해, 그러니까 1944년 2월 17일과 18일 양일간에 걸쳐 미군 폭격기의 대공습을 받았어요. 여기, 나쓰시마가 거의 궤멸됐습니다. 위안소도 물론 공습피해를 받았습니다."

- 대공습으로 사라질 때까지 위안소는 계속 있었나요? 그러니까 마쓰바라 씨가 처음 여기로 갔던 1942년에도 위안소는 있었던 겁니까?
"계속 있었습니다. 남국료와 남성료 둘 다 있었어요. 각각 5, 60명 정도 위안부 여성이 있었습니다. 남성료는 육군이 이용했고 남국료는 해군이 이용했습니다. 저는 제4함대 소속이었기 때문에 남국료를 이용한 것입니다. 여기(나쓰시마)는 또 함대기지였기 때문에 해군장병들이 특히 많았습니다. 언제 출격할지 모르니까 그 전까지는 마음껏 즐겨라 그런 분위기가 있었지요. 육군은 주로 하루시마(나쓰시마의 북쪽에 위치한 섬)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하루시마에는 죄수들도 같이 있었습니다."

▲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당시 트럭제도 일대. 그의 증언에 따르면 지도 오른편에 보이는 나쓰시마(夏島)라는 곳에 두 곳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jpnews


- 아까 나쓰시마에 남성료, 남국료 둘 다 있다고 했는데요. 그럼 육군은 배를 타고 와서 위안소를 이용했다는 건가요?
"그렇죠. 거리상으로 그리 멀지 않으니까 조그만 배도 자주 왔다갔다 했습니다. 트럭제도 동쪽 4개 섬만 놓고 보면 위안소는 나쓰시마에만 있었으니까. 꼭 위안소가 아니더라도 하루시마, 후유시마(나쓰시마의 남쪽에 위치한 섬)에 주둔중이던 군인들은 자주 나쓰시마로 놀러 왔습니다."

- 놀러?
"아, 네. 여긴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요코스카 미군기지 같은 그런 개념인데요. 환락가가 있어요. 보통 상점들도 줄 지어 있고, 학교는 물론 신사까지 있었습니다. 일용품이나 그런 건 다 살 수 있어요. 술집이나 요정도 물론 있었지요."

- 그 군인들이 나쓰시마에 와서 놀았다는 것은 결국 다른 섬에는 그런 시설이 없었다는 거네요.
"네. 하루시마, 후유시마는 그냥 기지만 있었죠. 그러니까 다들 놀고 싶을 땐 나쓰시마로 건너 왔습니다."

- 위안소는 그런 군인, 군속들이 주로 이용했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 마쓰바라 씨도...
"네. 저도 물론 이용했습니다."

- 위안소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이용할 수 있었나요?
"영업시간은 기본적으로 12시부터 22시까지 였습니다. 22시에 일단 영업은 끝납니다. 단, 일반사병들은 18시까지만 이용하도록 돼 있습니다. 귀대해서 이것저것 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외 하사관이나 장교, 저희같은 군무원들은 22시까지 이용할 수 있었고 또 자고 가는 것도 허용됐습니다."

- 위안소는 매일 운영됐나요?
"네. 매일 열었어요."

- 공휴일은 없었습니까?
"네. 그런 건 없었고, 다만 한 달에 한 번씩 성병검진이 있었어요. 위안부 여성들은 이 때만 영외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해군병원에서 검사를 받았으니까요. 해군병원은 위안소에서 한 2킬로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트럭으로 가면 금방 가지만 걸어서 갔어요. 어차피 도망가지 못하니까 천천히 걸어가면서 시원한 공기도 좀 쐬고 그래라 그런 것이었지요."

- 도망가지 못한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섬이니까요. 사방이 바다니까..."

- 하루 10시간씩 매일 그런 일을 강요해 놓고 한 달에 한 번 시원한 공기 쐬라고 인정 베풀 듯이 그랬다는 건 좀 그렇네요.
"해군은 위안부에 대해서 그나마 그런 감정같은 게 있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쯤은 그런 해방감을 맛봐라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30일간 줄곧 한 군데서만 지내야 하니까. 그렇게 병원을 가는 위안부 여성들도 그 때만큼은 파라솔도 펴고 오랜만에 바깥구경한다고 즐거워했었습니다. 하지만 금방 또 같은 짓을 반복해야 하니까. 위안소로 돌아가는 그녀들을 보면서 저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무엇보다 다들 20살 안팎인 게 참 그 뭐랄까..."

- 하지만 마쓰바라 씨는 그녀들을 관리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저에게 마음을 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또 눈물도 보였습니다.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 너무 슬프다,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간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간다는 무슨 말입니까?
"그건 그녀들이 위안소에 어떻게 왔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실 위안부들은 모두 속아서 왔어요. 모집공고가 붙는데 위안부 모집한다는 문구는 그 안에 없습니다."

- 그럼 어떤 문구를 넣죠? 그 모집공고라는 것에.
"보통은 고급장교의 메이드(하녀)를 모집한다던가, 병원에서 사무 볼 사람을 찾는다는 그런 내용들입니다. 그러니까 위안부들은 결국 속아서 온 겁니다. 게다가 월급이 30엔, 숙박료도 식대도 필요없다고 하니까 다들 응모하는 겁니다."

- 월 30엔이면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됩니까?
"지금 얼마나 할 지는 모르겠는데, 그 당시 초임, 그러니까 중학교 졸업하고 취직했을 경우 초임이 45엔이었으니까..."

- 30엔이면 꽤 높은 급료네요.
"그렇습니다. 30엔이면 상당히 좋은 수준입니다. 그러니까 다들 거기에 속아서 오는 겁니다. 30엔이나 받는데 숙박료, 식대 다 무료니까 아, 이 돈 모아서 고향에 부쳐주면 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응모하는 겁니다."

- 연령대가 어떻게 되던가요?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18세정도부터 많게는 25, 6살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아주 어려 보였습니다."

- 아까 한 위안소에 60명정도 있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약 120명이라는 말이 되는데, 국적은 어떻게 됩니까?
"일본인도 있었습니다. 그 외엔 전부 한국이었지요. 일본인 비율은 약 10% 정도였습니다."

- 90%가 한국인, 그럼 적게 잡아도 조선에서 속아서 온 여성들만 100명 이상이 있었다는 거네요.
"네. 그렇습니다."

- 아까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게 가장 슬프다 그런 말씀을 들었다고 하셨는데, 그 외엔 어떤 말들을 들었는지 혹시 기억나는게 있습니까?
"보통은 그런 말들인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일단 여기 와 버리면 끝이라는 겁니다. 인생이 끝나는 거예요. 속아서 남태평양 섬까지 왔는데 돌아갈 가능성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사방은 바다고... 결국 그녀들은 희망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저는 군무원으로 왔지만 저조차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을 못했어요. 저만 해도 그런데 하물며 위안부들이 어떻게 자력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절망적이지요. 또 군에서 그녀들을 돌려보내지 않아요. 절대로."

- 그건 왜 그런 거죠?

"돌아가면 거짓말이 탄로나니까요. 고향에 가서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모집공고 거짓말이다, 속으면 안된다고. 그러니까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 그러면 평생 여기 있다가 죽어라, 뭐 그런 겁니까?
"그렇습니다. 평생 여기서 그렇게 강요당하다가 죽어가는 겁니다. 육군의 경우를 보면 작전지역에 위안소를 만듭니다. 작전기간 중에 짬을 내서 위안소를 이용하는 거지요. 그런데 작전이 끝났습니다. 후퇴를 해야 한다고 칩시다. 그럼 데려갈까요? 아니예요. 위안소도 위안부도 버리고 갑니다. 군대만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없는 폐허가 된 땅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이지요."

- 섬은 더 고통스러울 것 같습니다.
"네. 실제 44년에 대공습이 있었습니다. 다 날아 갔어요. 위안소는 그나마 피해를 덜 받았지만 대부분의 청사, 창고 등이 폭격을 받았어요. 2000기가 떴으니까 엄청난 공습이었죠. 문제는 식료품이 사라졌다는 것. 물탱크도 박살났고... 하지만 섬이니까 도망칠 데가 없어요. 공습이 또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속에서 죽어가는 겁니다."

▲ 마쓰바라 씨가 활동하는 '아비코 평화네트'의 회원들도 인터뷰에 동석했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마쓰바라 씨는 위안소 관련해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직접 이야기도 하고 그랬다니까 위안소 관련 업무를 전문적으로 했을 것 같은데요.
"네. 저는 제4해군함대 시설부대 경리과에 있었지만 위안소 관련해서는 직접 필요한 물건을 나르기도 했지요. 다른 일도 다 했습니다. 위안소를 위해서 특별히 뭘 했다 그런 건 없습니다."

- 아까 위안소 출입증을 보여주셨는데 그건 보급품이나 그런...

"아닙니다. 그건 위안소를 이용할 때 제시하는 증명서 같은 겁니다."

- 출입증은 일본군이라면 누구나 지급받았습니까?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출입증은 저같은 군무원만 받습니다. 군인은 이걸 보여주지 않아도 군복을 입고 있으니까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지요. 출입증이 필요없는 겁니다. 저희는 사복도 입기 때문에 이런 출입증을 발급받는 겁니다. 일반인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죠."

- 요금은 지불하나요?
"네."

- 얼마 정도인가요?
"잘 기억나지 않는데... 1, 2엔 정도였던 것 같네요. 아니, 아마 1엔이었던 것 같습니다."

- 일본 우익들 논리중에 하나가 위안부들이 성매매를 통해 상당한 돈을 벌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손을 내 저으며) 그건 말도 안되지요. 군인이 무슨 돈이 있다고."

- 요금은 위안부에게 직접 건넵니까?
"아뇨. 요금소가 있어요. 나쓰시마에 있었던 위안소, 그러니까 남국료, 남성료는 둘 다 길다란 단층짜리 막사 대여섯동이 죽 나열된 형태입니다. 1개 막사에는 보통 10개에서 12개 정도 방이 있는데 위안소 주위에는 울타리같은 게 쳐져 있어요. 정문에 가서 출입증을 보여주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방 번호표를 받아야 하는데요. 그 번호표를 주는 곳이 요금소라는 곳입니다."

- 방 번호는 뭡니까?
"위안부 여성들이 거주하는 방입니다. 막사 1개 동 내부구조를 보면, 길다란 복도가 하나 있고 그 복도를 따라 조그만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각 방마다 몇 호인지 적혀져 있어요. 복도 끝은 세면장과 화장실입니다. 방 크기는 하나당 4조(약2평) 정도? 왼쪽 구석에 매트리스 침대가 하나 있고 조그만 탁자가 하나 있습니다."

- 그럼 그녀들에게 직접 주는 건 아무 것도 없나요?
"네. 방 번호를 건넬 뿐이지요."

- 돈을 직접 건네지 않았다는 말이네요.
"돈은 요금소에 냅니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남국료는 그랬어요. 아무튼 그런 시스템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그 돈이 실제로 위안부들에게 건네졌는지 아닌지 아무도 모르지요."
▲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위안소 평면도. 왼쪽에 요금이라고 적혀진 곳이 요금접수대이다. 군인, 군속들은 요금소 앞에서 길게 줄 섰다. 요금을 내면 방 번호표를 받고 오른쪽 복도를 지나 지정된 방으로 들어간다. 방은 다다미 4장 정도의 크기로 가재도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복도 끝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군 부대가 위안소를 직접 관리했다" (2부) [단독인터뷰] 구 일본군 군속이 밝히는 일본군 위안소 충격실태

박철현 기자
("위안부들은 결국 속아서 온 거야" (1부) 에서 이어짐)

- 그러니까 요금소라는 곳에 돈을 지불했을 뿐이니까 실제로 위안부들한테 돈이 건네졌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런 말씀이네요.
"그렇죠. 다른 곳 이야기를 들어보면 육군위안소 중에는 위안부에게 직접 군표로 지불했다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지만 여기 위안소는 돈으로 냈습니다. 그리고 군표는 말이 군표지 일반사회에서 통용되는 화폐가 아니니까 사실 의미가 없다고 봐야지요."

- 마쓰바라 씨가 이용했다는 그 '남국료 위안소'에는아까 60명 정도 위안부가 있었다고 했는데 전체 군인들 수에 비해서 어떤 정도였나요. 위안소는 항상 붐볐습니까?
"네. 붐볐습니다. 항상 군인들로 바글바글거렸어요. 매번 줄을 서야 했으니까. (사이) 평면도로 그리면 이렇게 되는데..."

- 일반인은 사용하지 못하는 거죠?
"(평면도를 그리면서) 그렇죠. 일반인들은 바깥사회에 유곽 같은 곳을 이용하거나 공창이 있었으니까... (사이) 여기가 이렇게 울타리가 쳐져 있고, 입구가 이렇게 있으면 왼쪽에 요금소가 있고. 요금소 앞에 사람들이 줄을 길다랗게 늘어섰죠. 요금소 오른편에 길다란 동(棟)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1층짜리 길다란 막사인데 들어가면 길다란 복도가 나오고 끝에 세면장, 화장실이 보입니다. 물론 공용입니다. 복도를 쳐다보고 오른쪽에 방이 죽 나열돼 있습니다. 번호표를 든 사람들은 자기 방 번호표를 찾아가는 그런 방식이었죠."

▲ 마쓰바라 씨는 직접 위안소 평면도를 그렸다. 오른쪽이 마쓰바라 씨의 손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이런 막사가 위안소 내에 몇 개나 있었습니까?
"대 여섯개 정도? 보통 한 막사에 방이 10개 정도였으니까요. 정문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한 동이 서 있고 뒷편으로 죽 나열돼 있었죠."

- 실제 방 구조는 어떻던가요?
"방 크기는 4조(다다미 4장 크기, 약 2평) 정도였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 구석에얇은 판이 놓여져 있고 그 위에 매트리스가 깔려져 있었어요. 오른쪽 구석에는 위안부들이 자기 물건을 놔 둘 수 있는 조그만 탁자가 있었고 문 바로 옆에 경대가 있었나... 아무튼 그랬어요. 그 외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 아까 위안소 주변에 울타리가 쳐져 있다고 하셨는데, 그건 어떤 종류의 울타리인가요? 철조망같은 겁니까?
"아뇨. 그냥 외부와 구분하기 위해서 친 건데,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대충 만든 그런 형태였습니다."

- 바깥에서 들어올 수 있다면 안쪽에서 나가는 것도 가능했겠네요. 마음만 먹으면.
"하지만 남국료는 섬이니까 나가봤자 별 의미가 없지요. 그리고 경비원이 그 주변을 계속 돌았습니다. 위안부가 나가는 걸 막는다기 보다는 혹시라도 들어오는 사람을 제어하기 위한 건데... 그렇지만 아까 말씀드렸듯이 들어온다고 해서 무작정 하는게 아니라 요금소에 돈을 내고 방 번호표를 받아야 위안부들이 있는 방에 들어갈 수가 있으니까요. (들어와도)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 정리하자면 위안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요금소에 돈을 내고 방 번호표를 받아 위안소를 이용한다는 거니까, 위안부들이 돈을 직접 받았는지 아닌지는 모른다는 것이죠?
"네. 어떻게 배분했는지 그런 건 저희들은 모릅니다."

- 그런데 아까 마쓰바라 씨는 위안소를 시설부대가 관리했다고 했는데요.
"위안소 자체는 군부대가, 그러니까 나쓰시마 위안소는 우리 부대가 관리한 게 맞지만 시설운영 자체는 민간업체위탁해서 했으니까 요금이 어떻게 분배되고 그런 구체적인 부분까지는 모릅니다."

- 그 민간업체 이름이나 그런 건 기억나십니까?
"음, 그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 시설부대에서 그 쪽 관련 계약이나 그런 건 어디가 담당했습니까?
"위안소에 관련된 사항은 시설부대 서무과가 담당했습니다."

- 이 남국료출입증도 그럼 서무과가 발급했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출입증 나이란을 가리키며) 사실 이 나이도 거짓말인데요. 여긴 22살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 때 제 나이는 19살이었어요. 왜 그랬냐면 20살이상이 아니면 위안소 이용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제가 서무과로 찾아가서, 선물 같은 걸 가지고 간 것 같은데... 아무튼 좀 잘 봐달라 그런 식으로 얘기해서 이걸(출입증) 발급받았지요."

- 나이가 차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하면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런 건가요?
"모두가 그런 건 아닙니다. 저같은 경우는 부서는 달라도 같은 부대에서 비슷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니까 얼굴을 다 알고 있지요. 그러니까 발급해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통 20살 이전 어린 병사들이 위안소를 이용하고 그러면 안된다 그런 분위기도 있었으니까... 거짓말로 발급받은 건 제가 알고 있는 범위내에선 저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 마쓰바라 마사루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어떻게 보면 규칙을 어긴 셈인데, 왜 그러신 건가요?

"그 땐 위안소 실태를 알고 싶다 그런 생각이 있었던 건 전혀 아니고, 그냥 그걸 해결하고 싶었지요."

- 요금 문제를 제외한 위안부들의 처우는 어땠습니까? 보통 직장이나 군대도 평시훈련중에는 1시간에 10분 휴식하고 그러는데요.

"그런 건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영업이 시작되면 무조건 군인들을 받아야 했고 군인들이 없더라도 언제 올 지 모르니까 계속 대기해야 했으니까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휴식시간은 없다고 봐야 겠지요."

- 군인들은 어땠나요? 시간제약 그런 건 있었습니까?
"네. 그런데 시간이 길고 그러지 않아요. 10분에서 20분 정도? 욕구만 해결하고 바로 나오는 그런 겁니다. 여운에 빠져 있거나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뒷 사람이 기다리는 것도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군인들은 외출할 때 반드시 콘돔 2개를 지급받았습니다. 혹시라도 임신하거나 성병에 걸리면 큰일나니까 그걸 예방하기 위해서 받는 것입니다."

- 콘돔은 외출할 때 무조건 지급받는 겁니까?
"네. 무슨 신청서를 쓰거나 그러는게 아니라 무조건 다 주는 겁니다. 외출 나가면 위안소에 가라는 말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전부 가는 것도 아닙니다. 위안소에 안 가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런 이들은 콘돔을 버리거나 그냥 놔두거나 그랬지요."

- 합해서 120명의 위안부가 있었습니다. 군인들 수는 몇 명 이었습니까?
"그건 유동적이었습니다. 나쓰시마는 함대기지니까 바다에서 죽지 않는 이상 이쪽에 모이게 됩니다. 함대가 집결할 때는 군인 수가 늘어나고 다시 바다에 나가면 줄어들고 그랬으니까... 평균 잡아서 3, 4만명 정도였다고 봅니다."

- 3, 4만명을 위안부 120명이 상대했다는 거네요.
"그런 셈입니다. 제가 생각해 보면 위안부 여성 한 명당 하루 평균 14, 5명을 받았을 거라고 봅니다. 훈련이 없을 땐 위안소가 붐비지만 훈련시에는 또 비게 되니까. 그걸 다 평균내면 14, 5명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 마쓰바라 씨는 1942년에 시설부대로 배치받았다고 했습니다만 이 때 이미 이런 위안소가 있었습니까? 왜 이런 걸 물어보냐면 보통 우익들 하는 말이 위안소가 있었다 하더라도 전쟁말기에 조금 있었거나 다들 공창이었다, 그러니까 자기네들이 원해서 돈 벌러 온거다 라면서 일본군 위안부가 성적학대를 받는 성노예라는 사실을 부정하거든요.
"그건 말이 안되는 것이지요. 공창은 환락가에 따로 있었으니까요. 나쓰시마만 하더라도 그런 공창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위안소는 막사가 설치되고 무엇보다 시설부대 관리하에 있었습니다. 또 제가 배치받았던 42년에 이미 이런 위안소가 존재하고 있었어요. 이 출입증은 43년으로 돼 있습니다만, 42년에 있었던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42년에도 있었지만 종군위안소 자체는 중일전쟁 때부터 있었지요. 이건 제가 경험해 보지 않아서 확실하게 말씀드리지 못합니다만 태평양전쟁 전부터 있었던 건 사실인 듯 합니다.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중일전쟁 당시 강간사건 같은게 많이 발생했지요. 그게 이제 문제가 되니까 그럼 아예 이런 시설을 만들자, 그런 발상에서 출발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 아까 44년에 대공습을 받았다고 하셨는데요. 그 이후에 위안소는 어떻게 됐습니까?
"위안소는 다행히도 공습을 피해 갔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들이 전부 폐허가 돼 버려서 위안부들은 전부 스스로 먹거리를 조달해야 했습니다. 고구마감자 같은 걸 재배하거나 근처 해안가에서 생선을 잡았죠. 위안부들의 자급자족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됐습니다. 이 때 저는 공습직후인 4월에 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중에 그렇게 들었습니다. 위안부 여성들은 그게... 그러니까 44년 7월 사이판이 완전히 함락된 이후에 돌려보냈다고 그러더군요."

- 돌려보냈다는 건 어디로 돌려보냈다는 겁니까?
"본국이지요."

- 본국이라면 한국을 말하는 겁니까?
"아뇨. 일본입니다."

- 어떤 루트를 통해 일본으로 돌아왔을까요?
"그게 상당히 불분명한데 제 예상으로는 아마 병원선(病院船)을 탄 게 아닐까 합니다. 저도 병원선을 타고 귀국했으니까요. 나쓰시마는 비록 공습은 받았지만 전부가 몰살한 건 아니니까요. 병원선도 간혹 왔다갔다 하고 했습니다. 여성군속, 거류민들도 있었으니까요. 그들과 함께 귀국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 위안소에 대해서 좀 더 듣고 싶습니다. 특별히 생각나는 위안부 여성이 혹시 있습니까?
"음... 네. 자주 만났던 위안부는 22살이었는데 이름이 '미도리'였습니다."

- 일본인 위안부인가요?
"아뇨. 한국에서 온 위안부인데 본명은 모르고 위안소에서는 미도리로 불렸던 여성입니다. 솔직한 성격이었습니다. 그녀를 기억하는 이유는 저같은 경우엔 잡무가 많아서 보통 밤늦게 위안소를 갔습니다. 군무원은 숙박이 가능했기 때문에 위안소에서 자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때 그 여성과 함께 있었지요. 꽤 여러 번 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같이 밤을 지새고 또 그게 여러 번이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할 것 같습니다만.
"그렇죠.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가족 이야기, 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또 그렇게 제가 숙박을 하게 되면 다른 방에서, 그러니까 영업시간은 끝났고 숙박 군인이 없는 위안부 여성들이 미도리 방으로 건너 왔어요. 꽤 여러 명이 와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 마쓰바라 씨가 직접 사용했던 위안소 출입증 사본. 오른쪽이 앞면, 왼쪽이 뒷면이다. 원본은 이쪽 링크(http://jpnews.kr/sub_read.html?uid=4576)에서 확인할 수 있다. ©jpnews/박철현

-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던가요?
"기본적으론 아까 말했던 그런 것들입니다. 다들 울면서 가족들과 헤어진 아픔, 슬픔을 이야기하는 건데 한국인들은 가족을 생각하는 그런 것이 상당히 있으니까요. 이제 못 간다, 영원히 못 만난다 그런 말들을 하면서 우는 겁니다. 아까 그 미도리라는 이름의 여성은 저에게 소포를 부쳐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는데 그 때 그 여성의 주소와 본명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다른 종이에 그것들을 옮겨 적어 놓고 부쳤어야 했는데 그냥 우체통에 넣어버린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쉽고 그러네요. 만일을 생각해서 적어 놨어야 하는 건데 말이죠."

- 그 소포는 어떤 소포입니까?
"안은 확인해보지 못해서 모릅니다. 두꺼운 봉투였습니다. 아마도 고향집에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도리는 자기는 못 돌아가니까 저한테 일본으로 돌아가면 꼭 부쳐달라고 하더군요."

- 미도리라는 분의 본명이나 주소 같은 건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까?
"사실은 저도 군무원이니까. 원래 그런 부탁을 받으면 안됩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쉽고 미안하지만 그 때는 그런 것을 적어두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금방 머릿속에서 지웠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도 주소도 들었습니다만, 전혀 기억이 안 나네요."

- 공습후 위안부 여성들은 자급자족을 했다고 하셨는데, 공습전에는 어떻게 식사같은 걸 해결했나요?
"식사는 시설부대에서 했고, 잠은 그 위안소에서 자고 그랬습니다."

- 위안소나 시설부대에서 잡역을 하던 장정들 말고 다른 한국인들도 있었습니까?
"거류민으로 와 있는 한국, 조선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위안부 여성들을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은 어땠나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마 접점 자체가 없으니까 위안부라는 존재자체를 몰랐었을 가능성도 있지요. 군인과 군속들만 (위안부와) 접촉했으니까요. 또 일반인들은 위안소를 사용할 수 없었고 성욕을 해결하려면 환락가에서 따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 아까 말씀하신 공창 같은 곳을 의미하는 건가요?
"그렇죠. 거기가 사실 중요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위안소는 공창하고 전혀 다릅니다. 위안소는 완전히 따로 격리된 곳입니다. 매일 일해야 하고 한 달에 한 번만 외출이 가능합니다. 외출도 성병검진을 위한 거니까 그냥 병원과 위안소를 왕복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위안소로 다시 돌아오면 바로 일을 해야 하니까 쉰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고 봐야지요."

- 위안부가 120명 정도 된다고 했는데 그 숫자는 변함없었나요? 새로 사람이 오면 그만큼 준다거나 그런 건 있었나요?
"제가 나쓰시마에 주둔하기 시작한 때가 정확하게 43년 11월인데 이 때는 60명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목표기준이란 것이 있었는데 그 목표기준이 5, 60명 이었으니까요. 그 전에는 남국료 위안소가 어땠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점점 더 늘어나 70명 이상 됐던 것 같습니다."

- 늘어났다는 건 원래 있던 분들은 그대로 있고 더 추가됐다는 겁니까?
"그렇지요. 기존 멤버는 계속 있는 겁니다. 괌 자료를 보면 나중엔 300명까지 늘었다 그러는데 그건 좀 아닌 것 같고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서 더 늘어난 것은 확실합니다."

- 솔직한 마음을 듣고 싶습니다. 당시 군인이나 군무원들, 그러니까 위안소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위안소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나요. 위안부들이 불쌍하다는 인식같은 건 있었나요?
"전혀 없었습니다. 저만 해도 그랬던 것이 당시 일본에는 공창제도가 있었거든요. 때문에 군 위안소도 공창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아무런 저항감이 없었어요. 그 땐 지금과 달라서 보통 직장에서도 회식하고 단체로 공창에 가고 그랬거든요. 그런 문화사회적으로 인정됐던 것이죠. 쇼와 31년(1956년)에 공창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다들 그런 감각이었어요. 지방에 출장갔다 돌아오는 길에 역 주변에 있는 공창촌에 들러 여행의 때를 벗긴다는 게 당연한 시대였으니까요. 저는 위안소를 이용하면 숙박을 자주했기 때문에 아침에 귀대를 했습니다. 그러면 '야노'라는 해군 중좌(중령)가 저를 불러서 '너 말이지, 너무 그런 곳 가는 게 아니다'라고 꾸중하기도 했어요. 사고방식 자체가 그랬으니까 그 때는 위안소에 간다는 것이 부끄럽거나 그랬던 건 없었습니다."

- 그 상사는 어떤 의미에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아, 그건 단순히 제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런 곳에 자주 가기 보다 군무에 힘을 써라, 그런 의미에서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 위안부 여성들과 연애감정을 느끼거나 그런 건 있었습니까?
"그런 사례도 있었습니다. 제가 그랬다는 건 아니고 한국출신 죄수와 위안부 여성이 같은 고향 출신이라서 같이 도망갔다는 사례보고가 올라온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 마쓰바라 씨가 도망가게 해 줬다거나...
"그건 없습니다. 그랬다간 큰일나지요. 또 섬이라는 것도 있었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우편물을 우체통에 넣어주거나 그녀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 정도 밖에 없었습니다.

- 죽은 사람은 있습니까?
"폭격을 받아 몇몇 위안부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제가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위안부들의 귀환 역시 제가 본 것이 아니니까 무사히 돌아갔는지 아닌지 확실치 않습니다."

- 임신한 사례는 있습니까?

"제가 들은 바로는 없습니다."

- 만약 임신하면 어떻게 처리하도록 돼 있습니까?
"중절시키는 게 일반적입니다. 위안부가 임신한 케이스는 버마(현 미얀마)에서 있었는데 결국 사산했다고 하더군요."

- 마쓰바라 씨는 구 일본군 군속 출신으로 실제 위안소를 이용하기도 했고 또 그 위안소를 관리하는 부대에서 근무하셨는데요. 지금은 '아비코 평화네트' 등 시민단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계시고 오늘은 귀중한 증언까지 해 주셨습니다. 무엇이 계기로 작용했나요?
"위안소 문제는, 오늘 제가 경험한 것을 공식적으로 말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그간 노랫말을 짓거나 해서 위안부들의 심정을 노래로 표현해 왔습니다.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며) 이게 제가 지은 노랫말인데 제목이 '종군위안부'입니다."

▲ 마쓰바라 씨가 직접 지은 노랫말. 제목은 '종군위안부' 노랫말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속았다고 눈물 흘리는 위안부를 때리는 저 차가운 바람은 오늘도 멈추지 않아 / 탄식하는 모습 또렷히 남아있는 위안부는 어느새 백발이 되어 오늘도 괴로워한다 / 다테야마(館山)의 종군위안부 비석이 부르는, 적도에서 원한속에 죽어간 여성 / 보소(房總) 바다 저편 먼 언덕에서 들려오는 통곡의 비석 '의 종군위안부'" ©jpnews/박철현

- 이건 언제 지으셨나요?
"그 옆에 날짜가 나오는데, 2005년 1월에 만들었네요. 그때 nhk가 종군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적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뭐랄까, 위안부의 비참한 삶을 제대로 보도하기는커녕 방송내내 역사를 왜곡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화가 많이 났습니다. 보도기관이 역사를 왜곡한다면 그걸 까발리는 것을 제 나름대로 해야 겠다고 생각해서 이 노랫말을 지은 겁니다."

- 어떤 내용입니까?
"제가 직접 경험했던 위안부들의 삶을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 '속았다고 눈물 흘리는 위안부들을 때리는 저 차가운 바람은 오늘도 멈추지 않아...'라는 식으로 나갑니다."

-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러니까 nhk의 방송을 보며 화가 났다고 하셨는데 그 화가 왜 났을까라는 부분입니다. 언제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됐는지가 궁금합니다.
"아, 그건 예전부터 반전운동도 줄곧 해 온 것도 있고 또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듣고 참 죄송스럽다는 마음이 들었지요.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1998년 당시 농수산 대신이 종군위안부는 없었다라고 발언한 것이 컸습니다. 제가 위안소를 이용했고 관리하는 입장이었는데 종군위안부가 없다니 그게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런 거짓말을 태연하게 하는데 그냥 있어선 안되겠습디다."

- 용기를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중요한 증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증언이라기 보다 그냥 당사자로서 이런 부분이 감추어져선 안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제 지인들에게는 조금씩 말했습니다만... 사실 그거 여성에게 있어 가장 억울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성을 무참하게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의 물리적 힘에 의해 빼앗겨버렸다는 것이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부모는 물론이거니와 남편, 아이들이 있는 위안부도 있었으니까 언젠가는 말해야 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게 마침 오늘이었을 뿐입니다."

- 긴 시간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이 인터뷰는 2010년 4월 21일 지바 현 아비코 시내 모처에서 이루어졌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끝)



http://jpnews.kr/sub_read.html?uid=4591%A1%D7ion=sc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