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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in the Box

황후화가 추악한 블록버스터라고....


[펌] '황후화' 中서 '추악한' 블록버스터, 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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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공리 주윤발 주연의 중국의 대표적인 블록버스터 '황후화'가 최근 중국에서는 썩 좋지 않은 평가를 받으며 장이머우 감독을 긴장시키고 있다.

3억위안(360억원)의 흥행을 기록하며 중국 유사이래 가장 많은 수입을 낸 영화로 중국에서 그간 문화산업적 공헌도에서 칭찬을 받아왔으나, 최근들어 영화의 메시지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광범하게 받고 있다.

꼭 한번 봐야하는 영화라는 기대감에 영화관을 찾았던 중국 관객들 뿐 아니라 이제는 중국 정부와 당에서도 불만을 제기하고 있어 관심 모아지며, 급기야 지난 7일에는 공산당 간부양성학교인 중앙당교서 발행하는 '학습시보(學習時報,스터디타임스)'란 신문에 공개비판 평론이 오르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제기돼왔던 '황후화' 비판의 핵심은 상업영화주의와 그속에 들어찬 불건전한 내용들에 대한 가혹한 비난이었다.

신문에 실린 '황후화-추악한 블록버스터'란 제목의 화제의 평론도 마찬가지의 시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흥행의 성공(아주 많은 중국인들이 보았다는 것)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심각성(영화의 메시지가 바람직하지 않다)을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베이징의 수도사범대학 중문과에서 문화를 전공하는 도동풍(陶東風) 교수로, 문화연구 분야의 권위자인 도 교수는 중국 문화계에 만연한 배금주의의 산물로 '황후화'를 판단하고 있다.

영화자본 제일주의의 허상을 폭로하고 있으며 훌륭한 영화는 관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도 교수는, 중국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폭력을 통한 현실대응의 해법을 찾아나설 가능성도 경고하고 있다.

장이머우 감독과 그의 영화 '황후화' 평가에 국내 관객들의 많은 관심이 모아지는 상황이라 중국관영언론의 보도로 중국의 소후닷컴(sohu.com) 포털사이트에 지난 9일 소개됐던 평론을 소개하기로 한다.

포털에 올라온 80여개의 댓글중 대부분의 중국네티즌은 무척 공감한다는 의견을 표시했으며 "영화, 그저 오락일뿐"(IP숨김) "애써 설교하시느라 고생하세요. 노교수님"(IP:60.215.229.* ) 등 두 부류의 이견만이 있었다.


"예전에 중국의 영화감독들이 자금문제로 고뇌에 휩싸이곤 할 때 중국영화계에선 이런 말이 유행한 적 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거액의 투자만 있다면 중국영화는 아카데미상 수상이 시간문제일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 장이머우, 천카이거(무극), 펑샤오강(야연) 등 이른바 중국의 거물급 감독들은 일찌감치 초대형자본의 특권을 누린지 오래이고 그들이 만들어낸 블록버스터는 수백억원도 아낌없이 쏟아부었으며 '황후화'의 투자는 450억원에 달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카데미로 향하는 먼길에서 깡통만 차고 돌아왔다.

몇년 전에 중국의 학계에서 유행했던 말이 있다. "월급을 3배만 올려주면 중국의 교수들은 노벨상 문제없다"는 것. 이와 같은 황당하고 기만적인 헛소리가 생각나 탄식을 금할 수가 없다. '배금주의'는 중국 문화계의 골수까지 깊이 파고들어와 있다.

훌륭한 예술은 호화로운 장면과 비주얼한 성찬과는 동의어가 아니며 폭력과 성적인 것들의 대강대강의 결합물은 더더욱 아니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그들 감독들은 단순한 이치까지 망각하고 있다.

인간을 진정으로 감동시키는 것은 늘 매우 소박한 것들이며, 겉보기에 호화무쌍하지만 내용은 죽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블록버스터는 훌륭한 영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관객과 평론가를 감동시키는 것은 공교롭게도 단순하지만 항구적인 인생의 철리(哲理)들이며 인간의 영혼을 깨우쳐 일으키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중국의 문화예술은 사회주의혁명기에 도덕적 계발을 이데올로기적 교화작용으로 단순 이해함으로써 도덕이라하면 웬지 수구적이고 위선적인 것을 연상시키게 만들었고, 기본적인 공중도덕의 최저한도도 없는 세상은 인간이 사는 세상이 아니란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었다. 이러한 도덕의 최저한도를 지켜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예술이란 것의 기본적인 사명이다.

하지만 불행한 것은 중국인들이 중국의 블록버스터 속에서 찾아내는 폭력미학과 폭력숭배가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예술 속에서 도덕의 최저한도가 무너졌다는 얘기는 이미 괜한 소리가 아닌 소름끼치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블록버스터란 것은 보통 폭력과 살상을 피해갈 수 없기도 하며 미국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나라의 어떤 블록버스터도 중국의 블록버스터처럼 그렇게 폭력의 전시가 그야말로 도덕적 제약과 가치적 함의를 완전히 벗어나 철두철미한 폭력숭배와 폭력미학이 돼버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장이머우는 바로 핏빛 페인트를 스크린 위로 쏟아붓는 페인트공에 불과한 것이다.

중국의 블록버스터는 대부분 복수하는 주제를 다루길 좋아하고 '야연' '황후화' 등등이 모두 그랬다. 하지만 복수하는 자와 복수의 대상, 통치자와 반란자, 권위와 질서의 대표자와 반역자, 도전자는 어떠한 한쪽도 정의와 양심을 대표하지 않으며, 그들이 폭력으로 원한을 갚으려하려는 바에야 자신의 권력과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외에 다른 정당한 이유란 없다. 이러한 복수와 그것이 초래한 살상은 폭력의 남용에 불과한 것이다.

'황후화'를 그것의 원작소설인 '뇌우'와 간단히 비교해보면 각색한 뒤로 근본적인 변화가 바로 원래는 명확했던 가치판단과 도덕판단 기준이 흐리멍텅해졌다는 것이다. '뇌우'에서 그려냈던 명확한 인문적 가치는 없어졌고 바른 이와 그릇된 이의 구분선도 없어져버렸다.

'뇌우'는 황실 속만의 암투극이 아니고 그것의 핵심은 깨우침과 반항을 강조하는 데 있었으며 '뇌우' 속에서도 좌절감을 안기기는 하였지만, 그 좌절감은 부권전제질서 반대편의 부상을 의미했고 이 편은 설득력있는 올바른 도덕과 가치적 내함을 부여받았었다(물론 역사의 합리성까지도).

하지만, 각색 후의 '황후화'는 황실 속만의 암투극이 돼버렸고 이야기속 인물은 폭력으로 국왕의 권위와 국왕이 상징하는 질서를 뒤엎어버리려하든 아니면 아니면 마찬가지로 이러한 폭력으로 권위와 질서를 지켜내려하든 모두들 정당한 이유를 찾아볼 수 없다.

도덕적 제약을 벗어난 폭력적 서사는 엄중한 사회문화적 대가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폭력이란 것의 본질은 인간삶에 대한 위협과 부정을 뜻하며, 모든 폭력행위는 인류의 도덕질서에 악영향을 가져오게 된다.

정당방위 혹은 악의 제거에 한할 때라야 폭력은 비로소 도덕적 정당성을 지닐 수 있으며 게다가 비록 이럴지라도 그것의 정당성은 제한적인 것이다. 폭력은 도구적 가치이며 부득이한 악의 제거의 수단일 뿐이다.

폭력의 합리성은 수단의 합리성이지 목적의 합리성은 아니고, 바로 이런 이유로 문명사회는 문화예술의 폭력적인 서사에 대해 엄격한 제한을 가하며 특히 감성적인 예술(영화, TV, 연극 등)에 대한 통제는 엄격하다.

이러한 통제는 폭력서사의 시간과 정도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반드시 폭력서사를 도덕의 궤도로 끌여들여 인류의 기본적인 가치의 제약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도덕의 제약을 벗어난 폭력서사는 인류의 기본적인 문명준칙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서사를 중국의 블록버스터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장이머우 한사람 뿐이 아니고, '황후화' 한편 뿐도 아니며, 사실상 많은 중국의 감독, 중국영화 특히 블록버스터가 모두 폭력을 정당화하고 폭력을 미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중국의 블록버스터 감독들이 폭력적인 서사 면에서 왜 그렇게 그누구보다도 상상력이 풍부하고 싸움장면과 살인기술을 설정해내는 데 탁월한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촬영감독 정소동이 말한 바로는 '황후화'에서는 무참한 살상장면을 집어넣음으로써 비주얼한 클라이막스를 추구했다고 한다. 그의 소개에 따르면 이러한 장면은 촬영에 위험부담이 매우 컸고 30명의 닌자가 4백미터나 되는 거리를 밧줄타고 낙하하는 장면은 홍콩같은 곳의 어떤 영화도 감히 손댈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면이 5분이나 되고 5억원이나 투자됐다.

이러한 살인작전 수행장면은 눈번뜩게 하는 기술 외에는 어쩌면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못했고, 소름끼치는 그것들은 관객들에게 기본적인 도덕과 가치의 설득성을 전혀 가져다주지 못했다.

우리는 늘 미국의 블록버스터가 폭력이 과다하다고 지적하지만 실상 미국의 블록버스터는 살상의 추악한 정도에서 보면 중국의 그것보다는 훨씬 덜하면 덜하지 더하지 않다. 적어도 미국의 블록버스터는 도덕감이 선명하고 시비관념은 뚜렷하며 가치판단은 명확하고 정의와 악의는 식별이 가능하다.

어쩌면 중국의 블록버스터 감독 혹은 중국의 블록버스터를 좋아하는 이들은 이렇게 말할는지 모른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죄다 이른바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승리한다는 것 아니냐고. 그렇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주제는 대부분 그들의 선을 바로세우고 악을 징벌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류의 기본적인 도덕은 원래 단순한 이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류는 이러한 기본적인 도덕의 최저한도를 견뎌냄으로써 비로소 기본적인 윤리적 질서를 지켜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도덕의 최저한도를 지키라는 것으로 위대한 예술이 만들어지진 않지만 이러한 것이 없다면 그 블록버스터는 단지 추악하거나 추잡한 것이라는 것도 잊어선 안된다"

[사진 = 중국공산당의 강한 비판에 직면한 폭력선동 영화 '황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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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최대관객수입을 끌어올리면서
폭력, 근친상간등 내용면에서 추악한 블록버스터라고 네티즌,중국정부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고한다.

조금 웃음이 나오기도하고...
이름하여 블록버스터 중에 폭력이 없고 내용면에서 배울만하다던가 감동이 넘치는 영화는 별로 기억에 없는것 같은데 유독 황후화에게 그런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는건지..

특히 중국영화는 홍콩영화에서부터 시작해서 소위 무협내지는 액션영화들은 하나같이 폭력미의 추구가 아니었던가.

근친상간이 나오는 영화는 여럿있었지만 난 폭력이나 근친상간 모두 영화 황후화에서는 그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는것으로 그 교훈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폭력으로 일어서서 근친상간으로 잘먹고 잘살았다면 몰라도...

007은 시도 때도 없이 쉽게 사람을 죽이고
홍콩영화는 사람을 장난삼아 패고
블록버스터란 수백억의 돈을 들여서 비쥬얼에 치장할 뿐이지
무슨 문화영화를 바라는건지..

7~8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꼭 영화가 선과악이 분명하고 선이 이겨야하는건가.
오히려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는 애매모호함이
더 현실에 가깝지 않은가.
그럼에도 인문적가치 내지는 도덕적가치, 역사적 합리성 운운하는
조선일보기사는 세상의 영화는 모두 월트디즈니영화 같아야 한다고 말하는것  같다.

개인적으로 황후화는 그만큼의 비쥬얼을 제공했고
스토리라인도 그리 허무맹랑하지도 않고
소재나 주제도 여타 블록버스터들에 비해 많이 빗나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개봉된 묵공은 황후화만큼의 시선을 받지못했다.
묵공도 나름대로 돈이 들어간 영화이고 교훈적인 내용도 많이 내포하고 있지만
그들 스스로 황후화를 선택했으면서 왜 영화에 대고 욕을 하는건지.

영화자본제일주의 운운하기 이전에
사회주의교화로서 문화예술의 다양성을 침해하려고하는
중국공산당정부의 경직성이 더 우려되는듯하다.

세상에는 좋은 이야기와 나쁜 이야기가 있다.
좋은 이야기와 나쁜 이야기 모두 교훈이 된다고 생각한다.
받아들이기 나름 아닐까.
엔터테인먼트는 엔터테인먼트 만으로도 순기능이 있다.
모험, 스릴, 파괴본능의 대리만족. 영화만큼 승화시킬것이 있을까.


황후화에서 지적하고 싶은 옥의 티라면
황후까지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유치한 복식과
언제까지 중국은 인해전술로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건지
그런게 좀 아쉬울뿐이다.

어느 중국네티즌의 글처럼

영화는 영화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