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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y Lounge

5.18 광주항쟁사 - 광주일보

제 1회 1979년 12월 M16소총과 탱크 몇대 /집권전야의 야비한 축배



  1979년 12월, 그들은 그들이 저지르는 일이 역사를 이토록 뒤헝클어 놓는 일인지 깨달았을리 없었을 게다. M16소총과 탱크 몇대만 있으면 손에 쥘 이른바 통치권을 놓고 그 무뢰한들에게 역사나 정의는 한낱 따분한 구호일 뿐이었음이 분명하다.

쿠데타로 18년의 세월을 절대권력과 함께한 朴正熙소장을 선배로 모신 그들에게 79년 겨울의 한국은 그들식의 우국충정을 자극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허수아비 대통령뒤에서 집권전야의 야비한 축배를 들던 그들도 광주라는 도시가 그들 손에 이토록 많은 피를 묻게 할 줄은 몰랐으리라.

80년 광주에서의 시민학살. 그것은 한국민주주의의 원죄였다. 그리고 그 원죄는 어처구니없게도 코흘리개가 성인이 되는 동안의 세월동안 속죄되지 않았다.

수백명의 양심가가 악랄한 박해를 받고, 수천명의 지식인이 위선을 강요당하고, 수만명의 대학생이 투옥되었으며, 수십만명의 광주시민들이 한을 품고 사는 동안 한국사회는 이 죄악을 망각하는 노력을 해왔다. 그리하여 광주학살의 최고책임자 전두환前대통령이 명산고찰에 현대판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그것이 마치 光州학살에 빚갚음하는 셈이 되는 양 떠들었고, 엄동에 산사에서 지내는 그를 동정하는 자도 있었다. 80 光州를 풀지않고선 한국의 민주주의는 있을수 없다.

光州를 원칙대로 처리하고 나야 비로소 이땅에 민주주의가 실천될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光州의 해법엔 고통이 따를수 밖에 없다. 그 고통을 두려워해 光州를 망각하려 애썼던 지난 16년은 그래서 본말이 맞지 않고, 오류가 모범을 얕보며, 스승이 제자에 답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명령하지 못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잘못을 캐따지는 이는 평화의 파괴자로 손가락질 당했고 누이좋고 매부좋은 식의 부조리를 고발하려는 자는 조화를 모르는 이단아로 낙인 찍혔다. 비열한 웃음속의 크고 작은 범죄가 저자거리로부터 국가수뇌부에까지 창궐하는 동안 좋은게 좋은 것이란 금언이 젊은이의 처세훈으로 권장되었다.

그러던 우리가 光州로부터 15년이 지난 지난해 겨울, 全·盧 두전직대통령을 투옥했다. 그리고 5.18특별법을 제정했고 검찰은 그들을 기소했다. 이것이 문민정부의 계획된 개혁작업이건 집권후반부의 정국주도용 정략이건 간에 우리 모두는 바야흐로 역사청산이란 것을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역사청산에 관한한 완전 초보임을 자인해야 한다.

우리는 현대사에서 적지않은 역사청산을 보아왔다. 2차대전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은 종전직후 뉘른베르그 재판과 동경재판을 통해 생존전범들을 과감히 투옥·처형했으며 1940년 독일에 국가의 3분의 2를 내준 프랑스 비시 정권의 페당대통령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금융인·노동자 심지어 창녀들 까지도 나치에 협력한 3만여명이 삭발당하고 공민권을 제한당했다.

우리의 사정은 어떤가. 해방후 제헌의회가 제정한 대한민국법률 제3호 반 민족행위처벌법은 갖은 방해끝에 1년도 못가 폐기되고 말았다. 반민법에 의해 설치된 반민특위는 거물 친일파 몇을 소환조사하는 것으로 끝났고 李承晩정권의 비협조와 일제 경찰 전력을 가진 당시 경찰들의 반발로 특위사무실이 습격당하는 수난끝에 문을 닫고 말았다. 이때 지식인들은 통탄했으나 속수무책이었고 다수국민은 국부 이승만의 정책에 맹종했다.

4.19끝에 얻어낸 청산장치-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도 그렇다. 3.15부 정선거범들에 대한 장면정권의 관대한 처분에 항의, 4.19부상학생들이 국회에 난입 항의하면서 얻어낸 이 법은 소급입법시비에 입방아만 찧다가 5.16 쿠데타를 맞고 만다.

보통·비밀선거의 헌법원칙을 헌신짝 취급한 그들을 처벌하면서 이른바 선량들은 소급입법 불가의 헌법원칙을 내세워 시간을 탕진한 것이다. 30년전의 이 잘못은 5.18특별법에 의한 피고인들로부터 또 위헌심판청구를 받게 되면 일어날수 있는 촌극이기도 하다. 헌법을 파괴한 쿠데타범을 처벌하면서 헌법준수의 원칙때문에 고민하는 꼴인 것이다.

근대시민사회 성립과정에서 별다른 고통없이 2차대전 종전과 함께 하루 아침에 민주공화국으로 탈바꿈한 우리 사회는 과거청산에 미숙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그 앞 수세기를 사대문화의 전통에서 살아왔고 농본사회의 가부장적 질서속에 사회를 지탱해 왔기 때문에 역사청산을 갈등투성이의 보복극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같은 예를 아르헨티나에서 본다. 스페인의 오랜 식민지 아르헨티나가 독립을 얻은건 아메리카 혁명식의 무장독립투쟁도, 간디식의 국민저항 운동도 아니었다. 그들은 1810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점령하자 식민종주 국의 소멸로 느닷없이 독립을 맞았다. 결국 근대시민사회 성립과정에서 잘못된 과거에 대한 정리작업없이 독립을 맞은 아르헨티나에 찾아온건 장장 2세기에 걸친 군부 쿠데타와 민선정부의 교대였다. 헝클어질대로 헝클어진 현대사 속에 그들은 그 시원을 찾기도 어려운 독재치하 범죄들에 대한 더디고 더딘 청산작업을 지금에야 벌이고 있다.

이제 光州日報는 한국 현대사의 원죄- 80년 光州의 현장에 있던 신문으로서 시대의 전환점에서 그 비극의 역사를 다시 쓰고자 한다. 지난 89년 5.18항쟁사를 맨처음 연재, 5.18재조명의 바탕을 마련한데 이어 그 이후 밝혀진 새로운 사실등을 보완해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연재물은 79년 朴正熙대통령의 피살직후부터 신군부의 내란, 그리고 혼돈의 80년 봄, 비극의 5.18과 함께 특히 全·盧씨의 기소를 통해 새로 드러난 가해자측의 진실을 정리해 나갈 계획이다.

이 연재에 동참하는 기자일동은 80년 光州시민학살 직후 재갈물린 언론으로 침묵했던 과거에 대한 죄의식을 먼저 고백하며 객관성과 정확성있는 기술로 우리들의 역사를 바로세워 후세에 남기고자 한다. 죽음으로 역사를 지킨 5월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삼가 역사 앞에 옷깃을 여민다.

제2회 10.26운명의 밤
 궁정동거사 新軍部등장 빌미/ 판결문 공개않은채 김재규 전격처형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5.18 광주항쟁 발 발로 남한 전체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있던 나날들, 그 와중에 5월 24일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구치소 내 교수형장에는 내란목적살인 등의 죄명으로 5월 20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金載圭 前 중앙정보부장(54)과 朴 善浩중정의전과장(46)·朴基柱중정경비원(32)·柳成玉중정 운전원(37)·金泰元중정 경비원(33)등 5명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됐다.

오전 7시 두명의 교도관에 의해 팔을 낀채 포승을 앞으로 묶은 손에 염주를 든 金載圭는 교수대 앞에 앉아 집행관으로부터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나라에 이제부터 민주화가 올것이다.

나는 내 생명과 유신체제를 바꾸었다.
훗날 사가들은 나를 다시 재판할 것이다.
부모님을 뵙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어 자루로 얼굴이 덮이는 순간 金은 염주를 쥔 손을 꽉 움켜쥐었다.
발판이 내려진 후 金은 이내 절명했고 교도의는 사망이 확인된 金을 검은색 목조관에 입관시켰다.
흰색저고리에 적힌 수번은 101번. 이어 30분 간격으로 나머지 4명의 형이 집행됐다.
金등의 처형은 계엄하의 언론에 일절 보도되지 않았다.
구치소측은 사형을 집행하면서 수인들의 가족에조차 알리지 않았으며 집행 후 시신을 가져가라고 연락했다.

당시 보안사는 金의 가족들에게 조용한 장례식을 치르라고 압력을 가했으며 이에 따라 金의 장례는 수도통합병원 영안실에서 훈련중 사망한 일반 사병들처럼 조용히 3일장으로 끝났다.

경기도 수원시 판교인터체인지 부근 남한산성 공원묘지에 金의 시신이 운구 될때는 헌병 1개소대가 따라 붙었다.
보안사의 요구로 가족들은 무덤에 묘 비를 세우지 못했다.보안사가 대법원의 형확정 4일후에 전격 金에 대한 사형을 집행한 것은 당 시 서서히 일기 시작한 金에 대한 구명운동을 의식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80년 4월 LA 교민회등 해외단체들은 金載圭구명운동을 시작했으며 일부 대학대자보는 金을 '의사'로 표현하고 있었다.역사는 구조적 필연과 돌발적 우연의 복합체다.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50.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발생한 김재규의 박정희대 통령 총격살해 사건은 5.16이후 20년 독재가 빚은 국가모순·권력내부갈등 의 필연이자 金載圭라는 역사 실행자의 행위가 빚은 우연의 결과였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朴正熙는 揷橋호 준공식 행사를 마치고 오후에 宮井동 중정식당에 도착했다.

十長生 8폭 병풍이 둘러쳐진 요정식 식당에 는 중정부장 金載圭·비서실장 金桂元·경호실장 車智澈·여가수 沈守峰 ·한양대생 申才順등 6명이 참석했다.朴正熙대통령은 오후 7시 TV뉴스 를 시청하다 金泳三당시 新民黨총재 관련 보도가 나오자 기분 나쁜 듯 TV를 끄고 이내 沈씨가 노래를 시작하는 주흥이 벌어졌다.도중 金부장이 자리를 뜨고 약 20분후 돌아와 갑자기 車실장에게 짜식 너는 너무 건방져 하는 말과 함께 독일제 32구경 7연발 권총을 1발 발사했 다.

총알은 車의 손바닥을 관통했고 놀란 車는 방에 딸린 화장실로 도피 했다.

(이상 沈守峯회고록 '사랑밖에 난 몰라'문예당刊. 당시 金載圭가 金桂 元에게 형님, 나는 한다면 합니다라고 한 발언, 車에게 이 버러지 같은 놈 이라고 한 발언등은 사실과 다르다고 봄이 옳음) 이어 金은 朴대통령의 흉부를 향해 권총을 1발 발사했고 또 재사격을 시도 했으나 권총의 격발이 되지 않아 방 밖으로 나갔다.

金은 수분후 38구경 5 연발 리벌버 권총을 구해 돌아왔고 화장실에서 나온 車실장이 탁자를 밀어 붙이며 저항했다.그러나 金은 탁자를 관통해 車에게 재차 사격, 車는 흉부에 총탄을 맞고 뒤로 쓰러졌다.이어 金은 沈양의 팔에 안긴 朴正熙대통령의 머리를 겨냥, 제 2탄을 발사했다.

金載圭가 朴대통령에게 확인사살을 하고 방을 뛰쳐나간 시각은 10월 26일 오후 7시 43분이었다.

이때 방밖에서는 金의 발사음을 신호로 朴善浩가 응접실 대기중이었던 경호처장 鄭仁炯·부처장 安載松을 사살했고 朴興柱(중정부장 수행비서관·육군대령)·李基柱·柳成玉등은 주 방에서 대기중이던 경호실 특수차량계장 金容太·경호관 金鏞燮을 사살한 후 경호관 朴相範(93년 金泳三대통령 경호실장을 맡게 됨)에게 중상을 입혔다.

金泰元은 직후 M16소총으로 安載松·鄭仁炯·車智澈·金鏞燮에게 각각 확인사살을 했다.

총격이 끝난 후 김재규는 이미 약속을 해 현장의 다른 방에 기다리고 있던 鄭昇和육참총장을 승용차에 태워 육본 벙커로 갔다.이때 시각이 밤 10시 25분. 金으로부터 朴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사실만을 전달받은 鄭총장은 1군과 3군 에 비상태세를 발령하고 수도권 지휘부대장을 불러 들였다.이후 金載圭는 군지휘관과 국방장관·金奎元비서실장등이 모인 밤 11시 20분께 참석자 전 원에게 '대통령유고'를 알리고 보안유지를 당부했다.

金은 이어 金桂元비서 실장에게 우선 계엄을 선포하고 혁명위원회로 간판을 바꾸어 군사혁명으로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 보안사 합수부 발표) 그러나 金桂元은 鄭총장에게 金이 대통령 살해범이라는 사실을 귀띔했고 鄭 총장은 밤 11시30분 金에 대한 체포계획을 수립했다.

헌병감과 보안사 수 사관이 金을 무장해제했고 곧 보안사로 압송했다.金載圭에 대한 처형으로 10.26사건의 완전한 진상은 현대사의 미결로 남게 됐다.다만 여기서 한가닥 의혹을 벗기는 일은 당시 5월 20일 작성되었던 대법원 전원합의체 재판부의 판결문을 공개하는 일이다.

이 판결문은 관례 대로라면 법원공보와 대법원 판례집에 수록되어 하급법원의 지침으로 활 용된다.

그러나 80년 5월 이후 어디에도 金載圭등 사건에 대한 판결문은 없다.더욱이 전원합의체 재판부에서 金의 사형에 반대의견을 냈던 5명의 대법관 들은 동년 8월 8일 일괄사표를 내고 법복을 벗었으며 상당기간 변호사 개 업도 못했다. 밝혀야 할 진실은 이렇게 쌓여있는 것이다.

제 3회 쿠데타는 필연이었나
 金載圭체포직후 하나회 음모 꿈틀/ 박정희 독재 '軍우월주의' 배태
 
  현역육군대령이던 朴興柱피고인을 제외한 金載圭내란목적살인사건 피고인들은 계엄 보통군법회의·고등군법회의·대법원의 3 심절차를 거쳐 처형되었다.金載圭는 이 일련의 공판과정에서 계 엄사합수부가 주장한 박대통령의 총애를 잃고 지위가 불안해진 나머지 대통령을 시해하고 권력을 찬탈하려 했다는 범행동기를 일관되게 부정했다.

金은 부마사태등을 보고 유신체제의 한계를 느꼈으며 박대통령을 제거하 면 모든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을줄 알았다고 진술했다.범행동기에 대한 그의 `소신'은 1979년 12월8일 오전 서울 삼각지 육군본부 군사법원 대법 정에서 열린 이사건 보통군법회의 2회공판때부터 일관되게 계속된다.그러나 사건직후 육본 벙커에서 무장해제되고 너무나 간단하게 `대통령 시해범'으로 구금되어 버린 그의 행적을 놓고 과연, 10.26이 김이 주장하는 민주회복 거사였는지 아니면 엉성한 집권 쿠데타였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12월8일의 제2회 공판에서 金載圭가 피고인 신분으로 처음 내뱉은 진술 은 모조리 `혁명'타령이었다.

검찰관이 鄭昇和 육참총장을 궁정동에 대기시 킨 이유를 묻자 그는 그날은 제가 혁명하기로 결심했기때문에...라고 답했고 참모총장과 혁명 초부터 접촉하기 위해서... 그날오후 준정식당에 도착 해서 혁명준비에 들어갔습니다.

.. 라는 식이었다.

이에 군재 법무사는 피고인은 자주 혁명 혁명하는데 사실만을 진술하라 고 제지했다.김은 또 12월15일 7회 공판에서는 이렇게 진술했다.

...저는 10.26혁명이 없었다면 이나라에는 현재까지도 자유민주주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대통령께서 권한대행때 국민앞에 공약했습니다.국회에서는 이미 긴급조치 9호를 해제되었고요. 이런 일련의 행위가 10.26혁명없이 이루어 질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할때 혁명의 목적은 완전히 달성되었고 그렇기때 문에 저는 죽어도 아무여한이 없습니다.저는 죽어서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한 투사로서 영웅으로서 평가받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 앞으로 해야할 혁명과업이 많습니다....

제 지금 기분이 전쟁에서는 승리를 한 장군이 우연한 기회에 적의 포로가 된 기분 입니다.저는 혁명을 완성시 켜놓고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金의 朴대통령살해를 민주회복을 위한 거사로 보려는 시각은 1심 선고 직후 제출된 김제형.이돈명.강신옥등 변호인단의 항소이유서에도 강조되고 있다.

항소이유서는 3선개헌과 부마사태등을 접한 金載圭가 박의 제거를 결심하는 과정을 상술하고 범행직후의 엉성한 태도가 집권쿠데타와는 너무 거리가 먼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더욱이 이 항소이유서에는 1심재 판 과정중 재판진행절차를 놓고 변호인단과 검찰과의 사이에 격론이 벌 어질때 재판장 뒤쪽 문으로 수많은 쪽지가 전해진 사실, 그리고 김의 악 화된 건강에도 불구 1심재판이 무리하게 강행된 사실등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 이미 12.12를 통해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가 김의 처형을 위해 군법회 의에 실권을 행사한 흔적이다.

10.26에 대한 金載圭의 의견은 80년 1월24일 고등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마지막으로 피력된다.

金은 여기서 유신체제의 모순과 억압.부마항쟁의 전투확산가능성을 짧게 적은뒤 민주화의 과정에서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고 많은 사람의 희생보다는 한사람을 희생시킬수 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다.또 군사법정에 대해서는 피고인 신분답지 않게 군인여러분의 보는 눈은 지극히 국한되어 있다. ...

재판이 잘못되고 민주주의를 천연하면 혼란이 온다.혼란이 와서 나라가 위태하면 金載圭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것인가?... 나는 10.26사태에 처음이며 끝이다.오직 나의 책임인 것이다. 법리의 차원을 떠나서 역사적 관점에서 심판하라 역사에 있어서 가정법은 무의미하다.그러나 朴대통령과 車지철을 살해 한 金이 이후 냉정을 되찾고 김계원 비서실장과 정승화 육참총장에게 상황을 설명한후 일정기간 그가 주장하는 혁명의 중심에 있었다면

*계엄 선포 *긴급조치해제 *비상내각구성 *대미연락유지(대북경계관련) *계엄해 제 *개헌 *총선 *대선등의 역사전개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서울의봄은 화 창하고 80년 5월 광주는 구악청산과 민주주의 개막으로 환희에 차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金載圭는 10월26일 밤11시30분 육본 벙커2에 도착해있던 김계 원이 노재현 국방장관 정승화 총장에게 대통령 살해범은 金載圭 라고 밀고한후 27일 새벽 0시40분 체포되고 만다.

체포를 명령한 자는 정승화, 체포작전을 수립한 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 행동대장은 헌병감, 행동대원 은 보안사 요원2명이었다.박대통령에 2발의 권총을 발사한 시각이 26일 밤7시40분, 이른바 거사는 6시간만에헝클어진채 끝나버리고 만다.金載圭의 거사 성공에 가정법을 적용해보는 일은 그러나 서울의 봄쪽으로만 답이 나오는 건 아니다.10.26직후 수일간의 혼돈이 어떻게 전개되었 건 간에 20년 박정희 군사독재가 진행되는 동안 남한의 군대, 특히 육군에 뿌리깊게 심어진 군 우월주의적 문화는 `서울의 봄'을 살육의 봄으로 뒤 바꾸어 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즉 70년대 제3세계권에 만연한 군사쿠데 타가 박이후의 남한이라고 발생하지 않았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그리고 그 주역들은 5.16이후 독버섯처럼 세력을 키워오던 육사출신 하나회 멤버들이었을 가능성이 절대적이다. 과연 그들은 그해 12월에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른다

제 4회 새정권 [합수부]
 하나회·보완사 인맥 집권선봉대/ 全斗煥정권찬탈 발판
 
  10.26은 독재자 박정희의 최후이면서도 암울한 유신치하에서 민주인사들이 목숨을 걸고 갈망했던 민주화의 시작은 결코 아니었다.거인 박정희의 죽음말고는 5.16이후 국가통치의 골격을 이루던 군부 중심의 권력체제는 그대로 이어졌다.다만 힘의 중심이 박정희대통령 살해사건을 수사하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옮겨 간 것 말고는 달라진게 없었다.서울의 봄은 사실 봄이 아니었고, 광주학살이라는 비극의 싹은 이미 이때부터 잉태하기 시작했다.

10.26 그날 밤,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소장은 김재규가 대통령을 살해한지 3시간여만인 밤 11시께 한남동 육군본부의 지하지휘소에 있었다.사건현장 에 있던 사람들을 제외하곤 현역 장성으로선 대통령 유고라는 긴박한 상황을 가장 먼저 인지한 인물이었다.친동생인 전경환당시 청와대 경호계장이 권력핵심부의 이상 기미를 급전 해 왔던 덕분이었다.

전두환을 17년간 수행했던 손삼수전비서관(44)의 증언 (월간조선 96년 1 월). 그날은 연희동에서 서빙고분실로 가던중이었습니다.전사령관 내외분께서 사과 몇 짝을 싣고 서빙고 분실에서 수고하는 직원들을 격려하러 갔어 요... 크라운 호텔을 지날 즈음 무전기에서 연락이 왔어요. 보안사령부로 전화 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차를 세우고 전화를 해보니 `전경환청와대경호계장으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국방장관과 육참총장이 육본벙커로 들어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전두환은 서빙고 분실에 도착하자 마자 보안사 상황실로 연락해 전방상황 을 체크하라고 지시, 전혀 이상이 없다는 보고를 받자 다시 청와대 경호실 로 전화를 건다.그러나 기다리라고 한 뒤 5분이 지나도 연락이 없고 전경 환과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이 순간 `청와대에 무슨일이 생겼다'고 중얼거리시더군요 손비서관의 증언은 계속된다.

이후 전두환은 육본 지하벙커로 곧바로 가서 군수뇌부와 앉 아있는 김재규를 본 뒤 슬쩍 빠져 나온다.박대통령과 관계되는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뒤따라 나온 변규수 육본보안 부대장에게 경호병력을 붙여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으나 지금 당장은 어렵다고 하자 `내가 이곳을 빠져 나간 사실을 비 밀로 해주시오'라고 당부하고 전속력으로 보안사령부로 돌아갔습니다" 그 시점에서 박대통령의 살해 사실은 보안사령부에 체크된다.

`김계원비서실장 이 누군가를 업고 와 국군서울지방병원의 대통령 전용병실에 눕혔다'는 위 병의 보고가 보안사 당직사령이던 리상연 감찰실장(후일 안기부장 역임)을 통해"궁정동 안가에서 박대통령이 피격됐다"는 사실이 확인 된 것이다.

이에 김재규를 의심한 전두환은 곧바로 대공수사관 7~8명을 무장시켜 김 재규와 국무위원들이 모여있는 국방부 장관실로 직행했다.

김계원으로부터 김재규가 살해범이라는 사실을 전해들은 정승화육참총장은 국방장관 옆방으 로 전두환을 불러 사실을 알린 뒤 체포를 명령했고, 김재규는 79년 10월27 일 새벽 0시 20분께 국방부에서 김진기헌병감, 보안사 오일낭중령(대통령경 호처장 역임)에게 붙잡혀 무장해제됐다.

체포된 김재규는 보안사 요원들에 의해 곧바로 세종로 분실을 거쳐 서빙고 분실로 압송된다.

정치군인 전두환이 운명의 밤 10.26에 이처럼 기민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또 어떤 알지 못할 궤적을 그렸을까. 그러나 10.26이후 대통령시해사건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을 권력의 핵심 부에 등장시킨 단초는 이미 박정희 유고전에 마련돼 있었다.김이 체포.압송되는 순간, 국방부의 심야 비상국무회의에선 최규하국무총 리를 대통령권한대행으로 인준하고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계엄사령관에 정승화육군참모총장,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에 전두환보안사령관이 임명됐다.

이어 발표된 계엄포고령 제5호는 검찰.군검찰.중앙정보부.경찰.헌병.보안사 등 국내 모든 정보수사기 관의 업무를 조정.감독하기 위해 계엄사 내에 합동수사본부를 설치.운용한다 "고 명시했다.

김재규사건 수사만을 위한 합수부라기보단 무소불위의 거대권력이 탄생한 것이다.정규육사 출신 장교단의 리더로서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앉은 전두환이 수사권과 함께 보안사.정보부.경찰.헌병의 정보채널을 장악함으로써 대통령유 고상황에서 아주 중요한 카드를 한손에 쥐게 된 순간이었다.이처럼 보안사가 비상계엄하에서 모든 권한을 쥘 수 있게 한 것은 박정희 생전 국가 비상사태 발생시 보안사가 자동적으로 국내의 모든 수사.정보기 관을 흡수하는 합동수사본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 대통령령을 근거로 한 것이다.

육군본부의 비상사태 조치계획인 충무계획의 합수본부를 둘 수 있다는 단 한 줄의 근거에 기초한 것이었다.

79년 여름 합수부의 조직을 기안토록 법무참모(소령)에게 지시했던 전두환은 이미 10.26이전 부마항쟁이 터지자 부산에 내려가 합동수사단(단장.권정달부산보안부대장)을 설치해 실험을 해 본 터였다.10월27일새벽 전두환은 보안사로 오석근 검찰총장, 윤익균 정보1부장, 전 재덕 2차장, 손달용 치안본부장 등 수사기관장들을 불러 합동수사본부 첫회 의를 열었다.전두환은 이 자리에서 대통령의 서거를 설명하고 살해범은 김재규라고 말한 뒤 일사천리로 후속조치를 밟아 나간다(김충식 저 `남산 의 부장들II'). 힘이 쏠린 합수부에 권력지향형 군인 전두환이 본부장을 맡으면서 80년 광주의 비극은 싹트기 시작한다.

감독관실.본부분실.기획조정실등 3실, 안전 처.정보처.총무처 등 3처, 1수사단으로 중앙조직이 구성돼 있던 합수부의 곳 곳에는 하나회와 보안사 인맥이 여기저기에 박혀 권력찬탈의 선봉에 서게 된다.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대령, 인사처장 허삼수대령, 수사과장 리학봉 중령등이 포진해 있었다.여기에 비호세력으로 김진영수경사 33경비단장, 장 세동30단장 등이 합세해 10.26부터 12.12까지 권력공백기간동안 전두환의 집 권을 준비한다.이들 친위 5인방에 힘입어 12.12로 사실상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은 광주 학살로 쿠데타를 완성하게 된다.

제 5회 鄭昇和총장 강제연행 / 군주도권 장악 전씨 일당 하극상
 
 1979년 12월12일 오후7시 20분 서울 용산구 한남동 鄭昇和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부관실에서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탕! 첫 총성이 울리고 난 수초후, 잇따라 콩 볶는듯한 총격음이 칠흑같이 어두운 서울의 겨울밤 하늘을 찢었다.

그 시간, 盧載鉉국방부장관은 퇴근해 공관에서 식사중이었다.
갑작스런 총성에 그는 베란다로 나가 총장공관 쪽을 내려다 보았다.총알이 핑핑 날 아가는 소리에 놀란 그는 영문도 모른채 사복차림으로 가족들과 함께 무 작정 단국대 철조망을 넘어 피신했다.한국 현대사를 음모와 반역, 하극상과 학살의 질곡으로 몰아 넣은 12.12 는 이렇게 시작됐다.이날 오후 7시가 채 되기전, 일제 도요타 수퍼 살롱, 지프, 마이크로 버스 등 몇대의 차량들이 서빙고 분실의 정문을 미끄러지듯 빠져 나갔다.

합수부 수사1국 수사관 申東基준위가 모은 슈퍼살롱에는 보안사 인사처장 許三守 대령, 육본범죄수사단장 禹慶允대령, 韓吉成소령(서빙고 분실장), 합수부 수 사3계장 金大均소령, 수사관 朴元澈 준위가 타고 있었다.육본 헌병감실 기 획과장 成煥玉 대령, 육본 헌병대 李鍾敏중령, 합수부 수사관 李章錫. 梁一 根. 金德秀 준위는 지프에 타고 있었다.7시 5분께, 합수부 요원들이 총장공관 앞 해병대 초소를 지날 즈음, 鄭 총장은 처가에 가기 위해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2층 거실에서 텔레비젼 뉴 스를 보고 있었다.

총장부관 李在千 소령, 경호대장 金仁善 대위는 현관에 나와 許三守 대령과 禹慶允 대령을 마중했다.

중요한 보고를 하겠다던 權正 達정보처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許. 禹 두사람을 접견실로 들여보낸 李소령과 金대위는 뭔가 심상치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접견실쪽으로 가려했지만 합수부 요 원 3명이 앞을 막아 어깨를 밀며 몸싸움을 벌였다.그 순간 1층 접견실에선 許대령이 鄭총장에게 연행하겠다는 무례한 말을 막 내뱉은 참이었다.총장님께서 金載圭로부터 많은 돈을 받았으니 진술을 녹음해야겠습니다 녹음준비가 된 곳까지 동행하자는 요구였다.이놈들, 누가 그 따위 지시를 하던가. 내가 계엄사령관인데 대통령 이외에 그런 지시를 할 사람이 없는데 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해? 그렇습니다 禹. 許대령이 대답했다.

만약 그렇다면 대통령이 직접 전화라도 있을텐데 내가 직접 확인하기전 에는 이런 조사에 응할 수 없어. 부관! 총리공관이나 장관에게 전화를 대 호출소리에 부관 李소령이 접견실로 뛰어 들었다.

鄭총장의 양쪽 겨드 랑이를 許와 禹가 끼고 있었다.李소령은 다시 부관실로 뛰어 들어 전화기 쪽으로 갔다.수화기를 들자 수사관중 한명이 호주머니 속 권총을 내 李소 령의 등을 쐈다.李소령은 훗일 12.12사건 수사를 맡은 서울지검에서 당시 피격상황을 이 렇게 진술했다.최초 저를 쏘는 총성이 먼저 들렸고, 이어 계속 땅땅땅 하며 연속 총성이 들렸는데 처음 총성이 난후 복부에 통증과 중압감이 와서 제가 맨 처음 총격을 당한 것으로 확신합니다 혹자는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할 이같은 한남동의 총성 없이 합수부 별동대가 鄭총장을 연행하고 崔대통령의 결재가 있었다면, 5.18학살 과 全斗煥의 집권도 없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軍내 全斗煥그룹의 움직임은 이미 鄭총장 연행 며칠전부터 돌아 오지 않을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1995년 12월 21일, 12.12 군사반란 사건의 재수사를 맡은 이종찬 특별수 사본부장(서울지검 3차장)은 全斗煥. 盧泰愚 두 전직대통령을 군사반란 혐 의로 기소하면서 12.12의 핵심행위인 鄭총장 연행은 사건 발생 5일 전인 79년 12월 7일 全.盧씨가 함께 결정했음이 드러났다고 밝혔다.검찰에 따르면 이날 정기외박을 나온 盧9사단장은 보안사령관실로 全斗 煥을 방문, 朴正熙대통령 시해사건수사팀으로부터 수사보고를 받은 뒤 대 책을 논의한 끝에 鄭총장 연행를 전격 결정하고 12월12일로 날짜까지 잡았 다는 것이다.

全.盧는 아울러 여러 장성들을 이 계획에 끌어들인다는 방침에 따라 황영시 1군단장, 유학성 국방부 군사차관보등 10여명에 대한 포섭 에 들어갔다.全씨는 또 사건 당일 오전 許三守보안사 인사처장등 체포조에게 대통령의 재가가 없더라도 정총장을 데려오라고 직접지시 했다.이에따라 체포 조는 이날 오후 7시10분쯤 총장공관에 도착, 연행에 들어갔고 全斗煥은 불과 30분전인 오후 6시43분께야 崔대통령의 재가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검찰수사 결과대로라면, 朴正熙 유고이후 형식상 유지돼온 崔대통령-盧 국방장관-鄭총장-全斗煥합수본부장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명령체계가 12.12 로 인해 일순간에 全斗煥 1인 권력형태로 집중화 됐다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이 부분에 대한 검찰의 전두환 노태우씨에 대한 공소장을 들춰보자. ...피고인 全斗煥이 계엄업무 수행과정에서 10.26사건과 관련하여 직무유 기혐으리로 구속된 이재전 대통령경호실 차장의 석방, 청와대에서 발견된 금원의 처리... 등을 둘러싸고 鄭昇和총장과 작은 의견대립으로 마찰을 빚어 오던중, 11월 중순경 단행된 군인사에서 비정규 육사출신들이 군요직에 배 치되고 정규육사 출신의 피고인 등이 중심이 된 소위 하나회소속 장교들 이 배제되자 자신들의 자신들의 군내 입지에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고 12.

초순경 군 일각에 피고인 全斗煥이 잦은 월권 행위와 군지휘체계 문란행위 등으로 곧 실권이 없는 한직으로 인사조치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

鄭昇和총장이 국방부 장관 盧載鉉에게 피고인 全斗煥의 인사조치를 건의한 것으로 알려지자...鄭昇和총장이 10.26사건 당시 朴대통령 시해 현장 부근인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의 본관식당에 있다가 金載圭와 육군본부로 동행한 사실로 인한 일부 군인들 사이에

鄭昇和 총장이 위 사건에 연루되 어 있을 지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음을 기화로 鄭昇和총장을 金載圭 와 관련 혐의에 대해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강제연행하여 그 지휘권을 박탈 하는 한편, 군의 정식지휘계통이 이를 저지할 경우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제 암함으로써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로 결정하고 12.7. 경 국군보안사령부에 서 서로 만나 鄭昇和총장의 연행.조사 문제를 논의한 끝에 그 연행일을 12.12로 결정하고...

제 6회 張泰玩. 鄭炳宙. 金晋基를 격리하라
張世東 수경사30경비단장, 金振永 수경사33경비단장의 안내로
 
   12월 12일 오후6시30분. 합수본부장이 계엄업무로 수고가 많은 수도권지휘관을 초청, 저녁을 대접키로 했다는 연락을 받고 鄭炳宙특전사령관, 張泰玩 수경사령관, 金晋基육본헌병감이 차례로 연희동의 한 요정에 도착했다.

같은 시간 兪學聖 국방부 군수차관보, 黃永時 1군 단장, 車圭憲 수도군 단장, 盧泰愚 9사단장, 朴俊炳 20사단장, 白雲澤71방위사단장, 朴熙道 1공수여단장, 崔世昌 3공수여단장 등 신군부 핵심들은 계획대로 許 和平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張世東 수경사30경비단장, 金振永 수경사33경비단장의 안내로 경복궁 내 수경사 30경비단장실에 집결했다.

全斗煥은 이미 趙洪 수경사 헌병단장에게 밀명을 하달했었다.

H아워까지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를 붙잡아둬라 거사를 앞두고 자신들의 편이 아닌 육본 직할부대의 핵심지휘관들을 미 리 격리할 계획이었던 것이다.崔圭夏대통령으로부터 鄭총장 연행 재가를 받는데 실패한 全斗煥은 鄭東 鎬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와 高明昇경호실작전담당관에게 삼청동 총리공 관의 출입통제를 지시하고는 밤 9시쯤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연희동 요정에서 全斗煥을 기다리며 마신 술이 2-3순배 정도 돌 무렵인 오후 7시35분쯤 閔마담이 金晋基준장에게 육본헌병감실로부터 전화가 왔 다고 전했다. 전화를 받고난 金 헌병감이 황급히 방으로 들어왔다.

총장공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는데... 張사령관은 즉각 총장공관에 전화를 걸었다. 나, 수경사령관이다. 부관 바꿔라 그러나 수화기에서는 응답대신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앰블런스 앰블런스... 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千鍊宇대위(육사 28기)가 헐레 벌떡 뛰어왔다. 사령관님, 부대상황실에서 무전이 왔는데 총장님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답니다.

총장님의 생사와 누구 소행인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럴때가 아니야. 빨리 부대로 돌아가자구 張사령관이 소리치고 뛰쳐나오자 鄭炳宙 특전사령관이 뒤쫓아 나왔다.

여보, 장장군 어떻게 된거야? 정선배, 오늘밤 무슨일이 있어도 나를 배신하지 않을 테지요? 무슨 소리야. 생명을 같이 합시다 필동부대를 향해 질주하는 차속에서 張사령관은 동승한 趙洪헌병대장에게 물었다.

자네는 무슨 일이라고 생각하나? 趙대령은 한참 머뭇거렸다.

글쎄요. 아무래도 북괴간첩 소행이 아니겠습니까 張사령관은 귀대하는 차 속에서 무전으로 긴급작전지시를 내렸다.

전예하부대에 비상을 발령하고 모든 지휘관과 참모들은 상황실에 집결하라 이어 밤 10시께, 경복궁에서 부대로 복귀한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朴淙圭 중령에게 정병주특전사령관을 체포토록 지시한다. 朴은 이날 자정 특공중 대 병력 10명과 외곽 지원대 병력 38명을 동원, 특전사령부를 공격했다. 이 들은 수십발의 위협사격과 함께 건물 2층 사령관 부속실로 진입하려했다.

이때 사령관 집무실 안쪽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박중령은 M16을 난사했다. 사령관 비서실장 金五郞소령이 배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숨졌다. 鄭사령관 은 집무실 옆 거실의 문을 잠그고 권총을 쏘며 저항했다.

박중령의 부하들 이 M16으로 문고리를 쏴 부수었다. 정사령관은 왼쪽 팔에 총을 맞았다. 그 는 부상을 입은 채 질질 끌려 나가 지프에 실렸다.지프는 보안사 서빙고 분 실로 달려갔다. 새벽 3시쯤이었다.

또 조홍 헌병단장의 명령을 받은 申允熙 부단장은 헌병단 병력을 동원해 13일 새벽 3시40분쯤 수경사령관실을 공격했다.

그는 헌병 10여명과 함께 복도에 서성거리고 있던 육본 수뇌부 장성 부 관들을 무장해제 시킨 뒤 권총을 뽑아들고 사령관실로 뛰어들었다.河小坤소장(육본작전참모부장)이 얼결에 허리께에 손을 가져가자 헌병의 M16이 발사됐다.야, 이놈들이 나를 쏜다 하소장은 옆구리를 움켜쥐고 사령관실 옆 접결실로 쓰러질 듯 들어갔다.

張泰玩사령관이 접견실 밖으로 나왔다.신중령과 헌병들이 장군들에게 M16 을 겨누고 있었다.야, 이놈들아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 신중령이 머리를 숙였다.사령관님 죄송합니다 누구 명령인가. 부단장은 누구 명령을 받게 되어있나? 보안사령관님의 명령입니다.이제부터 제가 사령관님을 모시겠습니다 이놈아, 전두환이한테나 가 그곳에서 대책을 논의하던 尹誠敏육군참모차장, 文洪求 합참본부장, 張泰 玩 수경사령관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실려갔다.

새벽 4시30분께. 이와함께 全斗煥은 12일 밤 11시 박희도 공수1여단장에게 국방부와 육본 을 점령하고 盧載鉉 국방장관을 연행해 오라고 지시한다.13일 0시5분 1천5 백명의 공수1여단 병력은 개화초소-행주대교-능곡 왕거미초소-수색검문소 등에서 경계근무중이던 30사단, 수경사 헌병병력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오전 1시35분쯤 삼각지 국방부 및 육본청사 앞에 도착했다.

국방부와 육본을 점 령한 박희도는 오전 2시40분 국방부장관실에 난입해 김종환합창의장 등 장 성 8명의 무장해제를 시킨 다음 국방부 청사를 수색한 끝에 오전3시50분께 지하1층 상황실 입구에서 盧載鉉장관을 발견, 보안사로 끌고 갔다.이에 앞서, 이미 새벽 2시가 지나면서 서울 일원은 쿠데타군 병력이 완전 장악했다.20사단과 30사단 90연대가 태릉과 고려대에 비치됐다. 9사단 29연 대와 제2기갑여단은 중앙청 일대에, 수경사 30.33경비단 헌병단은 경복궁에 배치됐다. 1공수여단은 국방부와 육본을 점령했고 3공수여단과 5공수여단은 장충단과 동국대에 출동했다.

張泰玩수경사령관이 전화기를 붙들고 국방장관, 3군사령관 등과 통화를 하며 진압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 봤으나, 요령부득이었다. 張泰玩자신의 휘하에서도 {하나회} 회원들은 그의 명령권밖에 있었고 철저한 사전준비와 월등한 병력을 동원한 합수부측은 이미 출동 순간 패권 을 잡은 것과 다름없이 사기 충천해 있었다.

육본과 합수부측의 군사력은 2대 8정도 됐을 겁니다... 육본측이 병력을 동원했더라도 요소 요소에 배치된 합수부측 병력이 막 으면 힘도 못썼을 것이라는 얘기

제 7회 패장들의 육성녹음 / 최규하대통령 정승화총장연행 사후재자
 
   부대원에게 끌려갔던 盧載鉉국방장관은 신현확총리와 함께 총리공관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13일 새벽 4시30분께. 崔圭夏대통령은 鄭昇和참모총장에 대한 연행을 사후재가 했다. 그리고 12.12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12.12 당시 쿠데타군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던 張泰玩수경사령관의 분전은 세월이 흐르면서 국민들에게 알려져 역사속에 뚜렷히 각인돼 있다. 12. 12 때 보안사가 육본수뇌부의 전화를 감청한 육성녹음이 후일 언론 (월간 朝鮮 95년 9월호)을 통해 전해져 당시 張장군의 고군분투. 나약한 육 본지휘부. 하극상과 허위보고등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시간대별로 감청내용을 요약해 본다.

12.12 밤 8시 50분 尹誠敏 참모차장과 이건영 3군사령관의 첫통화

尹: [총장님이 납치됐갔다 이렇게 됐는데... 이제 약간 확인해보니까 {安 家사건 때문에 한 번 조사할려고 한 것이 이렇게 됐다} 그런 얘깁 니다]
李: [그렇더라도 총장님이 어떻게...]
尹: [총장님이 어디가 있느냐 그러니까 보안사령관이 안전하게 보호하 고 있다...]
李: [보안사령관이 그래요?]
尹: [예]
李: [그럼 그렇게 뭐할 필요는 없나요?]

12.13 오전2시 이건영 3군사령관과 尹誠敏 참모차장

尹: [...지금 모르죠, 우리들이야. 지금 하나의 쿠데타지요. 사령관님 의견 은 어떻습니까?]
李: [글세, 지금이야 뭐라고 판단을 못하겠는데.... 그런데 병력을 전방에 서 빼오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尹: [여기서도 찬반양론이 있습니다]
李: [그러니까 지금 1공수에서 와가지고 육군본부, 국방부에 갔단 말이지 요]
尹: [예. 지금 점령된 것 같습니다]
李: [그럼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尹: [글세 말입니다]
李: [아! 이걸 어떻게 하지. 어떻게 되는 건가...]

이렇듯, 尹참모차장의 얘기는 합수부측의 병력동원이 명백히 쿠데타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쿠데타 반군을 진압해야할 육본지휘부의 나약함은 [이걸, 이떻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듯하다.

12.12 밤 9시 40분

(이건영 3군사령관이 예하 수도군단참모장 김성환 준장에게 수경사 30경 비단에 가 있던 차규헌 군단장의 행적을 묻는 상황)

李: [그런데 군단장이 왜 거기 가 있는가. 30단에...]
金: [....]
李: [지금 군단장이 30단에 가 있다며?]
金: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李: (車圭憲군단장의) 부관은 지금 어디어서 전화를 받나?]
金: [....]
李: [부관이 지금 참모장하고 전화를 통하는게 어디서 통하지?]
金: [확인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李: [직접 전화통화하지 않았나?]
金: [예]
李: [그러면 지금 참모장이 그 상태를 잘 모르는가, 나한테 뭘 숨기고 있 는가?]

12.12 오전1시 50분

(이건영 사령관이 김봉규 9사단 30연대장으로부터 부대출동 지시를 받았 다는 보고를 받은 직후 구창회 참모장과의 통화내용)

李: [9사단 30연대가 어디 출동하는 모양인데 어디 출동시키는가?]
具: [연대 출동 안합니다]
李: [그런데 어디 출동한다고 그러는데 무슨 소리야?]
具: [연대가 말입니까]
李: [응]
具: [연대출동 안합니다]
李: [지금 9사단 30연대장이 삼송리까지 출동한다고 전화가 왔는데...]
具: [연대 출동 안합니다]

직속상관인 사단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데도 이미 全斗煥측에 선 부하들은 하나같이 허위보고로 일관하고 있다. 후일 張泰玩장군은 12.12의 원인과 당시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했던 이유 를 우선 여기서부터 찾고 있다( 월간 新東亞 93년 7월호)

[무엇보다도 군에 있어서는 안될 사조직 문제를 들어야 합니다....특히 당 시 수경사 특전사 3군사령부 및 그 예하 부대의 지휘계통은 하나회원과 보 안사요원들이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명령계통을 완전마비시켰습니다. 따라서 진압기능은 마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2.12 밤 10시 16분 張泰玩수경사령관과 이건영 3군사령관 통화

(張泰玩수경사령관이 30사다에 모여있던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중장 등 합수부측의 회유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무력 진압 의사를 강력하게 밝히고 있다)

張:[{兪장군님 남의 부대에 와서 왜 이럽니까} 제가 이상해서 물으니까 {에이 張장군 거 알면서 왜 그래 이리와} {이리 오기는 어딜와. 당신 왜 그래요? 왜 남의 부대에 한밤중에 와서 무슨 지랄하고 있어. 쏴 죽 인다} 이렇게 했더니 황영시 장군한테 전화를 바꿔요. 황영시 장군이 있다가 {장태완이 너 왜 그래, 알만한 사람이... 나하고 다 통할수 있는 처지인데 왜 그래? 너 이리와} {아니 왜 이라십니까, 왜 그 우리 좋은 총장님을 어쩌자고 납치해가고 왜 이라요. 정말 그러면 내 죽여} 했 더니 {차규헌이도 와 있고 다 와있는데 마 이리와} 해놓고 바로 출 동준비를 갖추고 있는데 말입니다]

12.13 오전2시 張泰玩수경사령관과 이건영 3군 사령관

張: [...그러면 전쟁을 하기 위해서도 한 2개 사단정도를 여기 갖다 놓는게 어떻습니까?]
李: [사단을 가져오는 것은 안돼. 전방이 더 문제가 있고 그렇게 됐을 때 뭐예요, 쌍방이 굉장히 문제가 생겨. 그러니까 그쪽하고 아무 연락도 안되나. 전해 무슨 얘기도 안되나?]
張: [(풀 죽은 목소리로) 안돼지요. 예. 그저...군사령관님께서 잘 한 번 판 단해 주십시오. 참모차장 바꿔드리겠습니다]

그러나 李사령관은 盧국방장관의 직접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끝까지 병력 출동을 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같은날 오전 盧장관이 부른다는 金容烋국 방차관의 전화를 받고 장관실로 갔다가 쿠데타군에 연행된다.

제 8회 노재현과 장태완
노재현- 사태수습 팽개진채 도피, 장태완- 쿠데타저지 고군분투
 
   보안사의 감청테이프 기록에서 드러나듯 12.12 당일밤 남한의 군수뇌부는 일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치밀한 집권계획에 따라 최소의 병력으로 최 대의 성과를 거둬가는 신군부 쿠데타세력과, 보안사령관이 직속상관인 육군참모총장을 무력으로 강제 연행하는 하극상을 빤히 보고도 신속한 대응을 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육본측은 서로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삼군의 지휘권을 손에 쥔채 진압군 출동명령 한번 내려 보지 못하고 운명의 12일 밤을 겁에 질린채 보내버린 盧載鉉국방장관과, 소수 정치 군인들의 쿠데타를 몸으로 막으며 필사의 노력을 벌인 張泰玩수 경사령관 두사람을 보게 된다.

역사가 사회경제적 구조와 시대사상의 운행에 따라 전개되는 것이긴 하 지만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다. 그래서 역사에는 특히 시대를 가르고 국운이 좌우되는 사건의 현장에는 그곳에 서있는 인간의 행동양식이 역사를 결정하 게 된다. 국방장관 盧載鉉의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대처에 다만 12.12진압실태의 책 임을 물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사태발생직후 정위치에서 정상적인 사태수 습에 나섰던들 全斗煥등의 국가 집어삼키기는 이처럼 쉽게 성공하지 않았 을 가능성이 크다.

먼저 12월12일 오후 한남동 국방부장관공관에서 인근 육군참모총장공관 의 요란한 총성을 들으면서 취한 盧장관의 행동부터가 사태를 꼬이게 한 다.(이하 94년 3월 11일 盧씨 검찰 진술기록 참조)

盧장관은 12일 밤 9시 공관에서 쉬고있다가 인근 육군참모총장공관쪽에 서 나는 총소리를 듣고 베란다에 나가 정황을 살핀다. 이어 그는 당직부 관이 몸을 피하시는게 좋겠다고 하자 처와 아들 그리고 가정부를 데리고 장관공관을 나와 단국대 철조망을 헤치고 단국대 체육관에 피신한다. 그는 그때의 판단을 이렇게 전한다.

(검찰조서)
<문> 그당시 총장공관에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였 나요
<답> 金載圭지지세력이나 북한등의 보수세력이 총장공관을 습격한 것 으로 생각하였으며 그렇다면 장관인 나도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우선 피했던 것입니다.

盧장관은 이후 국방부 합참상황실에서 사태를 묻는 전화를 했으나 당시 까지 아무런 사태파악이 안돼 있는걸 알고 합참 작전국장 李炅律소장(당시 당직)에게 차를 가지고 나를 데리러 오라고 지시했다. 국방부장관으로서 국방부에 나가봐야겠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는 약 1시간후 호위헌병과 함께 도착한 李소장의 차에 가족과 함께 탄후 국방부로 가려다가 우선 가족들을 안전한 곳에 대피시켜야겠다고 생 각하고 여의도 李소장의 집으로 가 가족을 맡긴다. 30여분을 또 소모한다. 盧장관은 차안에서 金容烋국방차관과 통화를 해 지금 곧 국방부로 가겠 다고 한뒤 생각을 바꿔 육본 B2벙커로 향한다.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엔 육본이 더 좋다는 판단에서다. 육본에 도착한 盧장관은 金鍾煥합참의장. 柳 炳賢연합사부사령관.文洪球합참본부장등이 대기중이었다. 여기서 그는 비로 소 全장군등이 鄭총장을 서빙고분실로 강제 연행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밤 10시에 가까운 시각이다.

제대로라면 이단계에서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고 한미연합사 와 공조, 全장군측의 불법연행을 원상복귀할 [진압작전]에 착수해야 한다.

그러나 盧장군은 겁을 집어먹은듯한 행동을 보인다. 즉 그때 1공수여단 이 육본을 점령하가위해 출동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盧장관은 육본에 실병 력이 없다는데 불안을 느낀 나머지 수경사로 옮겨가자는 건의를 수용하 고 육본을 빠져 나간다. 盧장관은 육본을 나와 정상보고체계를 밟는걸 빠뜨린채 다시 용산 美8군 사령부로 간다. 전방상황을 묻기위해서였다. 사령관 위컴과 대사 글라이스 틴은 그때 이미 8군사령관실에 대기중이며 사태를 예의 관찰하고 있었다.

북한의 동향에는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듣자 盧장관은 비로소 대통령에게 전화를 한다. 밤 10시 전후다. 대통령은 빨리 총리 공관으로 와서 사태를 보고하라 (당시 崔대통령은 총리공관에 있었음)고 했으나 盧장관은 곧 가겠다고 답하고 또 엉뚱한 행동을 한다. 즉 1군사령관과 3군사령관에게 전화를 해 나의 육성 명령없이는 병력을 움직이지 말라고 지시, 진압군의 발을 묶어 버린 것이다.군의 동요나 혼란을 막자고 한 행동이었으나 결국 이 전화는 신군부만이 탱크를 몰고 질주하는 무법천지의 밤을 보장하는 셈이 되고 만다.

盧장관은 이어 全斗煥과 통화하는데 빨리 이곳(美8군)으로 와서 사태를 보고하라고 지시했으나 全이 들을리 없다. 全은 그곳은 미군부대인데 어떻 게 가겠는냐며 억지를 부리다가 그렇다면 국방부로 오라는 盧장관의 지시를 받는다.

밤 11시의 일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全斗煥등은 이미 鄭昇和총장 연행 재가를 받기위한 서 류를 들고 밤 10시30분께 총리공관으로 가 崔圭夏대통령에게 결재를 강요 하고 있었다. 美8군에서 盧장관과 통화하던 崔대통령은 全斗煥 兪學聖 車 圭憲 黃永時 白雲澤 朴熙道등 6명의 장성들에 둘러싸인채 전화를 받고있는 터였다.

盧장관은 국방부에 도착해 총리공관에 있던 全斗煥과 전화연결이 되자 너 빨리 오라고 했는데 왜 오지 않는거야라고 꾸짖었으나 全은 수화기 를 兪學聖에게 건넸고 兪는 장관님, 저희들한테 좀 오십시오라며 되레 장 관을 불러 들이려했다. 다시 盧장관의 검찰진술. 이후 시간이 계속 흘러 장관의 도리로서 대통 령께 보고를 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에 부관에게 차를 준비시키고 총리공관 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막 장관실을 나서는데 현관에서 총소리가 들렸습니 다

盧장관은 장관의 신병을 수중에 넣은 신군부측 병력이 국방부를 덮치자 지하 상황실로 몸을 숨겼다가 새벽 3시께 신군부측에 발각돼 보안사로 [모셔]진다. 盧장관은 여기서 거수경례를 붙이는 全斗煥에게 왜 오라는데 오지 않았 느냐고 묻자 全옆에 있는 黃永時는 모두 국가를 위한 일입니다라고 일축 한다. 盧장관은 여기서 全이 내미는 서류에 결재를 하고 이어 全과 함께 총리공관으로 가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내는데 들러리를 선다.

盧장관은 全의 서류에 결재를 한데 대해 검찰진술에서 지금 결재를 하더라도 그 동안 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결재를 했다고 진술하고있다. 이것이 79년 남한의 국방부장관이 취한 행동과 판단이다.12일 밤 또 한사람의 인물은 신군부 쿠데타의 사면초가 속에서 울먹이 는 목소리로 국가의 안녕을 위해 몸부림친다. 바로 張泰玩수경사령관이다. 육봅해김지휘관을 따로 따돌리기 위한 신군부의 각본(연재6회)에 속아 12일 오후 연희동의 한 요정에 나와있던 장은 술이 2-3순배 돌 무렵 좌석에 있 던 金晋基헌병감이 부관으로부터 鄭총장의 연행사실을 보고받자 이를 전해 듣고 혹시 쿠데타라도?라는 혼잣말과 함께 즉시 귀대한다.

차안에서 수경사 전병력에 비상을 발령한 그는 부대도착 즉시 이건영 3군 사령관과 연락 을 하며 사태를 파악한다. 이내용은 보안사의 감청기록에 생생히 나타나 그 의 고군분투를 입증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도 13일 새벽 3시40분 헌병 병력을 동원한 신군부측의 수경사 기습에서 체포되고 만다.
 

제 9회 쿠데타저지 필사의 몸부림 / 야산서 숨진채 발견 타살의혹
 
   역사는 악인에 대한 단죄와 함께 의인에 대한 평가를 제공한다.

긴박했던 79년 12월12일 밤 또 한사람의 의인이 신군부의 쿠테타를 저지하려다 실패하고 체포된다. 바로 공수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이다.

더욱이 정사령관은 12.12이후 강제예편당하고 10년의 세월을 회한속에 보내다가 지난 89년 3월4일 목맨시체로 발견돼 아직껏 타살여부가 의 문에 쌓여있다. 정사령관도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마찬가지로 10일 오후 전두환의 초청을 받고 연희동 요정에 불려나와 술을 마시고 있다가 급거 귀대한 다. 그는 육본핵심세력 빼돌리기를 위해 사전에 마련되었던 연희동 그 술자리를 뒤숭숭한 세상, 정보를 많이 갖고 있는 전두환 보안사령 관을 만나 세상이야기 좀 듣자고 참석했었다고 후일 술회했다. 그러나 정승화 참모총장의 연행소식에 후다닥 귀대한 그는 예하 전 여단에 여단장 정위치 및 부대 출동대기 지시를 내린다. 이 때가 오후 8시쯤 정사령관은 이어 전화로 사태파악에 나선 결과, 수경사 30경비 단에 거사주모세력들이 모여 있는걸 확인했고 그들로부터 이쪽으로 오라는 회유를 받기도 했다.

정사령관은 또 예하 3공수 여단의 최세창 여단장으로 부터 직접 설 득을 당하기도 한다. 최는 정사령관이 요정에서 돌아온 시각 자신도 30경비단에서 돌아와 정승화 총장의 연행사실과 그 불가피성을 보고하 면서 정사령관에게 신군부 쿠데타 세력에 가담한 자신의 결정을 정당 화했다. 최는 특히 정사령관의 여단장 시절 작전과장으로 재직, 직속 사령관으로 모셔온 사이인 만큼 두사람의 이날밤 대화는 군인으로서의 사명과 소신이 엊갈리는 비장한 것이었다. 정사령관은 이때 이미 예하병력중 박희도의 1여단, 최세창의 3여단, 장기오의 5여단이 신군부와 손잡은 것을 알고 윤흥기 준장의 9여단을 출동시킨다.

정승화 총장이 연행되고 없는 상황에서 선임 지휘관인 윤 성민 참모차장으로 부터 1개여단을 착출해 수경사에 배속하라는 지 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가 13일 새벽 1시30분. 쿠테타를 저지해보 려는 마지막 몸부림인 셈이다. 그러나 9공수 출동명령을 내린 30분후의 정사령관은 몇시간 전 헤어 진 최세창 3공수여단장이 보낸 특공대에 의해 체포되고 만다. 최준장 이 보낸 38명의 특공대는 박종규라는 대령이 지휘했는데 특전사 2층의 정사령관 집무실을 포위하고 M16을 난사했다. 특공대는 잠긴 문을 부수고 쇄도하면서 정사령관의 부관 김오랑소령 을 향해 M16을 난사해 사살했다. 정사령관도 권총을 쏘며 저항했으나 왼팔에 총을 맞고 체포되고 만 것이다.

이때 정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서울로 출동중이던 9공수는 3-4차례 대기명령을 받고 이후 회군명령을 받고 만다.

막강 전투력을 자랑하는 수도경비사령부와 최정예 병력을 지휘하는 공수특전사령부등 육본의 양대세력이 신군부의 치밀한 각본에 의해 모 두 무력화되고 만다. 피를 흘린채 지프에 실려 보안사 서울분실로 끌려갔던 정사령관은 과다출혈로 이내 병원에 옮겨져 2차례 수술을 받고 겨우 목숨을 건져 80년 3월 퇴원한다. 이미 80년 1월 20일자로 예편된 신분이었다. 그랬던 그가 89년 3월 4일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울대리 송추유원지 부근 야산 참나무가지에 주황색 나일론 끈으로 목맨채 시체로 발견됐 다.

이동네 장마루상회 주인 최현구씨(당시 33세)가 발견해 신고된 정 씨의 사체는 높이 2m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고 얼굴만 새까맣게 부패되어 있었으며 주변엔 소주병 3개와 1회용 컵등이 있었다. 정씨의 손목에 있던 반자동 세이코시계는 19일.수요일.11시45분으 로 멈춰있어 이대로라면 정씨 사망시각은 4개월 보름전인 88년 10월 19일로 추정되었다. 유류품은 현금 4만원등 특별한 것은 없고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사체발견 즉시 정씨의 사인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어 부검이 실시됐 다. 3월6일 서울지검 의정부지청 윤형모검사의 지휘로 국과수 법의학 과장 서재관박사가 집도한 부검에서는 목 오른쪽에 색흔(졸린 자국) 이 있고 사반이 하지와 하부장기에 몰려있는데다 외상이나 외부충격흔 적이 없어 일단 의사에 의한 자살로 추정된다고 결론지었다.

또 얼굴 부패상태와 하체수포상태, 겨울철 날씨등을 고려할때 3-4개월전 사 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정씨는 이미 88년 10월 16일께 명 동성당을 다녀온뒤 집에서 쉬다가 밤 8시께 집을 나간 상태였다.

남겨진 정황대로라면 12.12이후 계속 우울한 생활을 해오던 정씨가 당뇨등 신병의 악화. 빚보증을 잘못해 녹번동 자택이 근저당(6억10만 원)된데 대한 고민등을 이유로 가출해 경기도 야산에서 소주를 마시고 자살을 한 것이 된다. 그러나 유족들은 몇가지 의문을 제시하며 검은 세력에 의해 타살된후 자살로 위장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첫째, 그는 83년 영세를 받은 후(세례명 요아킴) 독실한 천주교 신자생활을 해 온 만큼 자살을 죄악시하는 천주교의 교리를 어길리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당뇨로 고생하고 있긴 했으나 산책을 하고 대중탕을 애용하는등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써온 만큼 삶에 대한 애착이 컸다는 점이다.

셋째, 평소 사소한 일도 기록을 남기는 성품으로 보아 유서 한 장 없이 살할 사 람이 아니란 점이다. 또 빚보증문제도 집이 근저당만 설정되었을뿐 직접 생활에 변화가 온 건 아니란 점도 들고 있다.

이같은 의문은 특히 95년 개혁조치와 함께 세인들의 재평가를 받은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 이 TV에 출연, 정씨의 사인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같은 군인으로서 정씨는 결코 자살할 인간이 아니다고 주장하면서 또다시 관심을 불러 모았다. 쿠데타의 와중에서 육본수뇌부 전체가 그러했듯 정사령관도 효과적 진압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러나 신군부의 회유에 굴하지 않고 진압군 출동명령을 내린 행동은 아수라장이던 12.12의 와중에서 그나마 군의 사명을 다한 충성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정씨는 강제예편후 특히 부관 김오랑소령의 죽음과 그 충격으로 시 력까지 잃은 미망인에 대해 가슴 아파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는 쿠데타 세력들이 과거 군선배에게 던져주는 관직이나 공사사장직 따 위를 일절 거절하고 쪼들리는 생활을 하면서도 장성은 군복을 벗은 후에도 명예를 중시해야 하는데 취직을 하면 그 순간 명예를 더럽히게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씨는 특히 12.12에 대한 단죄를 상상하기 어렵던 87년 11월 기자 회견에서 12.12는 하극상이라고 단정하고 지휘책임을 다 못한 책임 에 대해 뼈를 깎는 반성을 해왔다고 말했다.

제 10회 보안사 합동수사본부의 수사결과 / 12월26일 오후 7시40분 궁정동
 
   1979년 12월 24일 국방부는 보안사 합동수사본부의 수사결과에 따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내란방조혐의로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총장공관에서 정총장을 강제연행한지 12일만의 일이다.

합수부가 작성한 정총장에 대한 혐의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먼저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당일인 12월26일 오후 7시40분 궁정동에서 자신을 영접하던 김정섭 중앙정보부 2차장보와 식사를 하다가 총소리가 나자 의아해 하던중 김재규가 와이셔츠차림에 당황한 표정으로 나타나 {총장, 큰일 났다} 고 말한 것을 듣고 대통령관련 위급사태가 발생한 것을 감 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어 오후 7시50분께 김재규와 함께 차를 타고 육본으로 가던중 김으로 부터 대통령 서거사실을 밝히면서 김이 무사히 탈출한 것, 김이 범인을 밝 히지 않은 점, 계엄선포를 주장하면서 국가의 장래가 육참총장에게 달려 있다고 격려하는 점으로 미뤄 김이 대통령 시해범인일 것을 의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육본 벙커에 도착, 대통령경호실장 휘하에 있는 수경사에 연락을 취 해본 결과 이상이 없어 차지철이 범인인 가능성이 배제돼 김이 범인이란 심증이 더욱 굳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총장은 이후 긴박한 상황속에서도 수시간 김을 방치해 두었다 가 밤 11시50분 김계원으로부터 김이 범인이란 사실을 통보받고야 보안사 령관과 헌병감에게 김 체포지시를 내렸고 지시하면서도 {정중히 모시라}고 해 기회주의적 행동으로 김의 범행을 방조했다는 것이다.

합수부는 여기에 덧붙여 정승화와 김재규는 62년이래 가깝게 지냈고 재 경 경북출신 장성모임과 3군단장 인수인계를 하는등의 인연으로 교분이 더 욱 두터웠고 79년 1월에는 김이 적극적인 천거로 육참총장에 보직되자 취 임후 맨 처음 김을 방문, 감사인사를 한 사실이 있으며 그후 부부동반 초 청 회식등에서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지냈다고 밝혔다. 합수부는 또 김이 중 정부장으로 막강한 조직과 전력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10.26직후 시해의 배 후에는 방대한 배후조직이 있을 것으로 판단, 기회주의적 처신만이 자신의 공리를 위해 현명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종합하건대 합수부는 정총장이 10.26사건 발생직후 군 최고통수권자를 살 해한 범인을 알았으면서도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내란을 방조했다는 것이다.

이미 계급장 없는 군복차림으로 조사받고 있던 정총장은 이후 12월30일 구속됐다가 80년 1월18일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되고 80년 3월5 일 수번 105번을 달고 국방부 군법회의에서 첫공판을 받았다. 적용법규 는 형법 제87조 (내란)관련 종범으로 징역 15년이 구형됐으며 3월13일 징역 10년이 선고됐다.

정총장은 닷새후인 3월18일 계엄 관할관인 국방부장관에 의해 7년으로 감형되었고 항소를 포기했고 옥살이 6개월만인 80년 6월10일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군 교도소에서 석방됐으며 이듬해인 81년 3월2일 전두환 대통 령 취임기념 특사로 사면 복권됐다.

그랬던 정씨가 긴 침묵을 깨고 87년 11월 당시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12.12는 권력을 노린 일부 군인들의 반란}이라고 규정하면서 {그반란을 막 지못해 국민들이 지금까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때 유구무언} 이라고 말해 일대 파문이 일었다.

당시는 아직 전두환씨가 대통령에 재임중이었고 노태우씨는 민정당총재 로 차기대권을 인수받으려던 참이었으며 유학성.장세동씨등 12.12주역들이 권력을 손에 쥐고 호령하던 때였던 만큼 정씨의 이 발언은 정치권에 일대 회오리를 몰고왔다.

정씨는 이어 각 언론과의 회견을 통해 12.12당시의 상황을 상술했다. 그 의 회고에 따르면 12월12일 그는 오후 7시 국방부 조사대장과 보안사 처장 이라고 소개한 2명의 사복남자에 의해 강제 연행됐으며 연행과정에서 대통 령 재가 여부를 묻자 그들이 총기를 사용해 불가항력이었다고 밝히고 있 다.

이들중 보안사 처장이라고 밝힌 자는 곧 인사처장 허삼수대령이었는데 그는 {총장님, 김재규한테 돈을 많이 받으셨더군요}라며 정총장의 동행진술 을 요구했다.

후일 문제의 이 [돈]은 김재규가 79년 10월에 추석떡값으로 보낸 것으로 밝혀졌는데 정씨는 이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79년 추석 무렵 [중추가 절]이라고 적힌 봉투를 김재규중정부장이 사람을 시켜 놓고간 적이 있는데 안에는 10만원권 수표 30장이 있었다. 의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받았다}

후일 보안사 수사기록에는 김재규가 준돈은 7백만원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액수의 문제라기 보다는 합수부측이 정총장연행을 위한 구실 로 삼았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정씨가 87년 11월에 12.12에 대해 [입]을 열자 집권당인 민정당측은 그 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 악역을 전담한 사람은 유학성의원이 었다.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정씨는 김재규 범행과정에서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고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내란을 방조한 자}라고 혹평했다. 게다가 그는 무인다운 표현법으로 {10.26당시 군최고통수권자가 살해당한걸 알면 육군참모총장인 그는 할복 자살했어야 옳다}고 까지 몰아붙였다.

그러면서 신군부측 정치권이 물고늘어진 또 하나의 구실은 바로 정총장 이 12일 밤 11시 김계원으로부터 김재규가 범인이란 사실을 듣고 김 체포 지시를 내리면서 {정중히 모시라}고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씨는 {김을 안가로 정중히 모시라고 말한 것은 김 이 외부에 노출돼서는 안된다는 점과 대통령 시해범이라고해서 너무 거칠 게 다루면 사고가 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려해서 했던 말}이라고 해명했 다.

어쨌건 정승화 육참총장의 강제연행과 그로 인해 성공한 12.12내란은 이 제 그 실체적 진실이 밝혀졌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계엄사령관이 라는 막중한 책임을 진 그가 10.26이후 한달이상 신군부의 음모와 동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속수무책으로 강제연행한 사실은 그에게 단순한 [쿠데타 피해자]란 분류외에 별도의 애국적 희생자란 칭호를 허용하지 않 는다. 아무리 서슬 퍼렇던 때라지만 항소마저 포기하고 감형.형집행정지처분 을 받은 그에 비하면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이름없는 영웅들이 우리의 현대사에는 숱하기 때문이다.

제 11회 신군부의 12.12거사가 혼미의 79년 겨울 崔圭夏 대통령
권한 대행이 혼란한 정국을 수습해 주길 바랄 뿐
 
   신군부의 12.12거사가 혼미의 79년 겨울에 일부 핵심 군 지휘관들의 전쟁으로 치러진 동안 계엄하의 언론은 입도 뻥긋못하고 있었고 대다수 서울시민과 남한 주민들은 아직 쿠테타 발생사실조차도 모르고있었다.
국민들은 20년 독재를 비극적으로 마친 朴正熙대통령의 죽음을 막연히 민주화의 신호탄으로 여긴채 인자한 모습의 崔圭夏 대통령 권한대행이 혼 란한 정국을 수습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崔대행은 예상대로 11월9일 오후 [시국담화]를 발표,
▲유가헌법을 대통령 발의나 국화발의를 통해 개정하고
▲잔여임기에 국한받지않고 개헌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조속 실시해 [평화적 정권교체]의 토대를 쌓으며
▲빠른시일 내에 계엄을 해제하겠다는 것이었다.

崔대행은 이어 11월14일 시정연살을 통해
▲헌정중단은 없으며 합헌절차에 따라 대통령선거를 실시하고
▲韓美공동방위체제를 공고히해 한반도 전쟁억지를 견지하며
▲경제분야의 안정기조를 유지한다는 등 사회 각 분야의 시책을 발표했다. 국민을 안심시키는 조치였다.

게다가 崔대행은 각계인사들과 대화를 실시, 11월27일에는 서울 15개대학 총장들과 면담을 갖고 제적학생 복적.복교 등을 추진하고있다고 밝혀 바야흐로 유신암흑의 희생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조치를 예고했다.

崔대행은 12월6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실시된 통일주체국민회의 제3차 회의에서 대통령단독후보로 출마한 제10대 대통령 보궐선거 결과 2천5백49명의 대의원 중 2천4백65표를 얻어 당선됐다.

崔대통령이 된 그는 12월8일을 새벽 0시를 기해 긴급조치9호를 해제하고 2백14명의 시국사범을 면소 또는 불기소처분하고 복역중인 93명에 대해서 는 잔형을 면제했다.

그는 [새 국가건설에 동참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80년 3월초까지 개헌안을 마련한다는 정치 스케줄을 발표했다.

崔대통령은 12월14일 국무총리에 申鉉碻,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李漢彬, 내무 金鐘煥, 법무 白翔起, 국방 周永福, 문교 金玉吉 등 18개 부처 새내각을 발표했으며 12월31일 대통령 취임에 맞춰 1천6백41명에 대해 특 사.가석방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申총리는 12.12 이틀후인 14일 조각발표에 덧붙여 {12.12 사태이후 에도 정치스케줄엔 변동이 없다}고 밝혔다. 언론들은 새 대통령 취임뉴스와 잇단 사면.복권조치를 보도하기에 바빴으며 그 사이에 金載圭 등 내란살인 사건의 계엄 보통군법회의 수사발표를 통해 가끔식 계엄사 합수부장이라는 머리 벗겨진 사람이 흑백TV에 비쳤다.

바햐흐로 朴대통령 사망사건은 다가올 민주화 시대를 열었으며 국민들은 이듬해 80년 봄이 여느해와는 다른 봄이 될것으로 믿기를 주저하디 않았다. 이미 시극의 두꺼운 얼음장은 녹기 시작했다. 총선과 개헌에 이어 민선방식에 의한 대통령선거가 이제 남한에서도 이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정계와 대학가에 넘실거렸다. 崔대통령은 이어 80년 연두기자회견에서 총리급 남북대화를 제의하는 한편 3월에 개헌심의회를 설치해 1년내에 개헌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당초의 스케줄을 지연시킨셈이었지만 崔대통령은 {정치바람에 휘말려 서둘러 헌법을 개정한 결과 1년도 못가 헌정이 중단되고만 경험을 되살려 이제는 후회없는 헌법개정을 해야한다}고 전제하고 {이를위해 전직 3부요인 등 각계원로가 참여하는 [국정 자문위]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말했다.

아직 그가 입을 열지않아 개헌연기에 신군부의 압력이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당시엔 혼란한 정국의 정치스케줄에서 개헌에 신중하겠다는데 반대하는 여론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서울의 봄]은 대학가에서부터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엄동인 80년1월, 개학도 하기전에 [복적생]신분으로 학교에 돌어온 긴급조치위반 제적생들은 각 대학에 잔존한 시국서클을 규합, 나름의 시극 집회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주된 구호는 [학원자율화]였으며 이를 위해 당시의 학도호국단제를 폐지하고 학생회를 부활해야한다는 주장이 가장 먼저 제기됐다.

신임 金玉吉 문교부장관은 이를 긍정수용했다. 학생들은 비상계엄해제와 시국 사범 추가해금, 정치일정 단축 등을 오구하는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개학과 동시에 이 봇물은 터질 것이었다.

崔대통령은 2월8일 문교부 순시에서 {학생들이 본연의 자세를 잃고 정치 현실에 참여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므로 면학지도를 철저히 해줄것} 을 당부했으나 이는 당랑거철에 불과했다.

3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움직인건 金泳三 新民黨 총재였다. 그는 2월 18일 崔대통령 초청으로 삼청동 총리공관에서(그때까지 崔대통령은 청와대에 입주하지 않았다) 오후 6시부터 밤11시까지 5시간동안 독대하며 민주화일정을 논의했다.

金鐘泌 共和黨 총재도 2월22일 기자회견을 갖고 시국사범에 대한 복권을 촉구했다.

金大中씨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76년 3.1 明洞사건으로 복역중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가택연금상태에 있던 그는 崔대통령 취임특사로 2월29일 시 국사범 복권조치로 정치에 복귀한다.

그러나 그는 2金과는 달리 군부를 경계하는 성격이 다분히 조심스런 태도를 견지했다.

5년동안 투옥.연금을 당했던 사람답지않게 그는 복권 다음날 가진 기자회견에서 {현정부가 국민이 원치않는 일을 성습하게 추진하려하거나 국민전체가 원하는 바를 짐짓 늦추려한다면 이것 자체가 정국을 불안하게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될 것}이라고 전제한 뒤 {이 순간에 있어 나의 1차적인 관심은 민주제도의 차질없는 재확인이지 대통령후보가 되는 것이 아니다}며 {대통령 후보 경쟁에 열중한 나머지 민주주의의 소생을 송으로 원하지않는 자들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줄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또 그는 {민주주의 파수병의 한사람으로 국민들과 더불어 이러한 불행한 사태가 오지않도록 감시하고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긍의 이같은 목소리는 일간지마다 대문짝만하게 실린 대규모 사면복권기사와 3金 대권경쟁체제를 예고하는 남한의 3월 기류속에 [기우]로만 여겨질 뿐이었다.

제 12회 {K공작계획} / 민간정보수집을 위해 보안사내에 정보처를 부활
 
   12.12로 군권을 장악한직후 全斗煥보안사령관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측은 육본측 장성들을 대거 숙청하고 80년 2월 민간정보수집을 위해 보안사내에 정보처를 부활시키는등 정권찬탈을 향한 내부 정지작업에 착수했다.
全斗煥은 유신시절 직제가 폐지돼었던 보안사내 정보처를 이때부터 부활시켜 민간정보 수집분석 활동에 착수했고 정보처를 중심으로 언론통제계획인 소위 {K공작계획}을 수립, 계엄사의 보도 검열업무를 강화해 나갔다.

全斗煥은 또 관련 법규를 무시한채 申鉉碻국무총리 등 각료들 대부분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현역 장성으로서 같은해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함으로써 신군부의 영향력을 정계 등에까지 대폭 확대했다. 全斗煥은 정권찬탈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마무리한 뒤인 5월 4일게 權 正達보안사 정보처장 등 핵심 참모들과 수시로 만나 정권장악 방안을 논의 하는등 내란모의가 본격화 됐다는 게 검찰의 발표 내용이다.

검찰은 특히 全斗煥은 權正達 등과의 논의를 통해 비상계엄확대 조치를 수단으로 초헌법적 비상기구인 국보위의 설치 민주화 일정등이 논의도 리 임시국회의 조기해산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시국수습 방안}을 확정 한 시점을 내란의 시작으로 결론을 내렸다. 아무튼 全斗煥은 80년 3월 중순 보안사에서 {K공작계획}을 수립해 언론 계 중진들과 개별접촉을 시도하는 한편, 5.17비상계엄전국확대 조치직후에 는 보안사에 언론통폐합계획을 입안하도록 지시했다. 全斗煥은 또 같은해 6월 許文道 당시 국보위 문공분과위원등이 작성. 보 고한 {언론계의 정화. 정비 계획}중 언론인에 대한 숙정을 단행, 언론사 자 율정화 형식으로 언론인 9백33명을 같은해 10월까지 해직시켰다. 全斗煥은 이후 같은해 11월12일 이상재 당시 보안사 언론대책반장이 작 성한 {언론건전육성 종합방안보고서}를 토대로 허문도 당시 정무제1비서관 이 작성한 언론통폐합계획서인 {언론창달계획}을 승인하고 45개 언론사 대 표들을 보안사로 불러 강제로 언론사 포기각서를 작성토록 해 64개 매체를 18개 매체로 통폐합했다.

검찰이 全斗煥.盧泰愚 등에 대해 내란수괴 등 혐의로 기소하면서 밝힌 {K공작}의 확인된 내용들이다.

검찰은 그러나 K공작을 80년 5월 {시국수습방안}과 함께, 단순한 언론통 폐합 차원이 아닌 全斗煥일당의 집권시나리오로 파악했다.

12.12와 5.18이 치밀하게 짜여진 연속된 쿠데타라면, 보안사가 마련한 {시국수습방안}과 {K공작}은 이 집권시나리오의 일환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신군부측이 12.12를 일으키고 집권시나리오에 따라 光州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한 뒤 崔 圭夏대통령을 하야시켜 집권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全斗煥의 중앙정보부장 겸직. 5. 17 비상계엄확대조치 경위 등도 {연속된 쿠데타}임을 증명하는 일 련의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검찰이 {K공작 계획}에 관해 가장 중시하는 부분은 그 목적.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신장을 위한 안정세력을 구축함에 있다]는 데 검찰은 주목하고 있다. 단결된 군부란 바로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며 안정세력 구축은 곧 정권장악을 달히 표현한 것이란 해석이 가능한 탓이다.

검찰은 또 이 계획이 80년 3월 중순이전에 작성돼 全斗煥의 결재를 받았 고 시행기간을 1단계 3월24-5월 31일, 2단계 6월1일-6월30일, 3단계 7월1일 -공작 종료시까지로 {특정일정}에 맞춰져 있음을 주목하고 있다.

이와함께 7대 중앙일간지와 5대 방송사, 2대 통신사의 사장, 주필, 논설위 원, 편집-보도국장 등 총 94명을 회유공작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점도 검찰의 판단을 뒷받침하고 있다. 즉 이들에 대한 접촉을 통해 협조가능성 여부를 따진 뒤 구체적으로 체제 홍보에 이용하려 했다는 풀이다.

실제로 신군부측 은 1차 접촉대상 18명의 3김씨에 대한 지지성향을 분석했던 것으로 드러났 다.따라서 검찰은 {K공작계획}이야말로 12.12를 통해 군 최고실력자로 떠오 른 全斗煥이 신군부 핵심과 함께 정권을 탈취하기위해 만든 밑그림일 가능 성이 높은 것으로 봤다.

5.18관련 사건 고소-고발인들은 신군부가 치밀한 사전 집권계획을 갖고 이를 행동에 옮겼다고 주장해왔다.그리고 그 핵심 시나리오로 {K공작}을 지목했다. 대언론 공작을 통한 민간정보 장악,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점거 및 봉쇄, 정치인-재야인사의 체포 등 정치활동 금지, 광주유혈사태 유발, 崔 圭夏대통령 강제하야 등 향후 수순이 사전에 구체적으로 준비됐다는 것이 다.

대통령의 사전 지시나 허락없이 이미 80년 5월초 全斗煥보안사령관이 權 正達 정보처장에게 비상계엄확대, 정치활동 규제,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 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만들도록 했으며 李鶴捧 보안사 대공처장에게는 정치인. 재야인사. 학생대표 들에 대한 검거를 준비하도록 한 사실을 근거 로 제시하고 있다.

이에따라 李처장은 대통령이 계엄을 재가하기도 전인 5월 16일 전국보안 부대 대공과장 회의를 열어 [5월 17일 자정부터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되니 일제검거에 나서라]는 지시를 하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군 병력 역시 5월 14일부터 확대 배치돼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全斗煥등 피고소.고발인들은 사전음모를 전면부인하고 있다. 이들은 [80년 일련의 조치들은 사회혼란을 수습하고 국정안정을 도모하 기위해 계엄업무 또는 대통령의 재가, 지시에 의해 이뤄졌다]며 [이 과정에 서 주도적 인물로 부상한 全보안사령관이 자연스럽게 대통령으로 뽑혔을 뿐 정권장악 계획은 없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신군부측은 또 [K공작계획은 담당자가 역할과시를 위해 존재를 부풀렸을 지 모르나 집권시나리오는 결코 아니다]고 주장했다. K공작계획이란 보안사 정보처 언론반이 언론계 지도급 인사들에게 군의 역할을 이해시키고 국가 안보와 사회안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입안한 언론 반의 운영계획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제 13회 崔圭夏정부는 과도정부
군부내에 全斗煥을 정점으로 한 새로운 힘의 중심이 형성
 
   79년 10월 26일 朴正熙정권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가 곧바로 막 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군부내에 全斗煥을 정점으로 한 새로운 힘 의 중심이 형성되면서 崔圭夏정부는 과도정부로서의 역할 조차 수행할 수 없을 만큼 유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해 11월 13일 해직교수협의회, 동아.조선투위, 민주청년협의회, 자유 실천문인협회, 민주청년협의회등 5개단체는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란 성 명을 통해 유신체제의 조속한 청산과 민주회복, 새로운 민주헌법의 3개월내 제정 등을 주장하며 국민저항의 깃발을 올렸다.

15일 기독청년협의회(EYC)는 기독청년민주화선언을 발표, 유신잔재의 일소와 거국내각 구성,종교.언론.학원 자유의 보장 등을 요구했고 , 같은날 민주주의와 학원자유화를 위한 국전 대학행협의회 학생회 부활준비위원회 도 새 헌법제정과 해직교수 복직, 학원 자율활동 보장 등을 요구하는 성명 을 냈다. 22일과 23일에는 같은 주장으로 서울대 관악캠퍼스와 서울농대에 서 시위를 벌여 4명이 구속되고 6명이 수배됐다.

그리고 24일 오후. 재야 민주화세력들은 명동 YWCA 강당에서 결혼식을 위장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선출저지 국민대회를 개 최했다.

홍성엽군과 윤정민양이 여러 어른들과 친지를 모시고 혼례를 올리게 됨 을 알려 드립니다. 즐거운 자리에 함께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79년 11월24일(토) 오후 5시30분 YWCA1층 강당(명동성당 앞)

5백여명의 하객들은 축의금을 전달하고 신랑은 인사하기에 바빴으나, 잠 시후 나타난 前국회의원 박종태씨는 주례사 대신 대회 인사말을 하기 시작 했다. 물론 신부는 나타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잔악한 자들이 유신체제를 고수하기 위해 마련한 비상계엄하에서 부득 이 결혼식이라는 상황을 이용,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잠시후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대회장으로 난입했고 난투극 끝에 96명이 연행됐고, 가까스로 빠져 나간 참석자들은 유신철폐를 외치며 코스 모스백화점에서 무교동쪽으로 시위를 벌여 44명이 경찰에 잡혀갔다.

YWCA위장결혼식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 았지만 재야 민주세력. 학생권에 끼친 여파는 컸다.

같은 달 26일 고려대 15개 서클의 학원민주화 선언발표, 28일 광주 신. 구교 및 재야 민주화운동 6개 단체의 민주화를 향하여 함께 나가자는 성 명발표 및 계엄군과의 충돌, 30일 전남대생 2천여명 군의 중립 요구하며 시 위, 12월 5일 전북대생 1천5백여명 유신잔당 퇴진요구 시위 등 학원가는 朴正熙 사망이후 관망태세에서 벗어나 민주화 투쟁의 불을 지피기 시작 했다.

드디어 80년 3월이 오자 대학가는 급속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79년 11 월부터 학생회 부활을 논의해오던 전국의 대학생들은 방학기간을 이용 학 생조직을 재건한다. 3월 28일 서울대가 총학생회를 출범시키고 4월초까지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학생회 구성을 완료했다.

대학가는 4월 들어 병영집체훈련 거부를 주요이슈로 유신잔재 철폐투쟁 에 나섰다.문무대 입영교육을 받게 된 성균관대생들이 맨먼저 병영집체 훈 련을 거부했고 뒤이어 서강대와 서울대가 이제도의 폐지를 결의했다.

군부정치의 연장선상에 서 있던 崔圭夏정부로선 학생들의 이같은 투쟁을 정부에 대한 정면도전으로밖에 여길수 없었고, 학생운동도 당연히 대정부 정치투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학생운동권과 군부의 정면대 결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4월 14일 신군부의 핵심 全斗煥은 중정부장 서리 자리까지 차지해 군부와 행정부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권부의 핵심을 움켜잡았고 , 5월들어 학생운동권은 야권의 분열을 보면서 자제해왔던 가두진출로 방향을 선회한다.

2일 서울대생 1만여명은 민주화 촉진대토론회를 갖고 격렬한 논쟁 끝에 병영집체훈련에 일단 응소하는 대신, 계엄해제 요구등 정치투쟁에 돌입했 다.3일에도 서울대생은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6일 하루동안 충남대. 전북대. 연세대 등이 시위를 하거나 성명서을 발표하는등 계엄해제 를 요구하는 대정부 정치투쟁이 전국의 대학가로 들불처럼 확산됐다.

결국 13일 연대생을 주축으로 한 서울시 6개대 2천5백여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14일에는 이젠 둑이 터진듯이 서울시내 대학 생 7만여명이 교문을 박차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다음날인 15일 오후. 서울역엔 무려 35개대 10만여명의 대학생이 집결 했다. 지방에서도 24개 대학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날 오 후 3시가 넘으면서 군이 투입되고 있다는 제보가 학생 지도부에 전달되면 서 상황은 돌변한다. 효창운동장과 잠실운동장 부근에 군인들을 실은 트럭 과 장갑차가 집결해 있다는 제보였다. 불안에 휩싸인 가운데 서울역 사수 를 외친 학생들이 다수였으나, 학생지도부는 심야에 군부대와 충돌은 바람 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시위중단을 결정하고 말았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 이었다.

그리고 16일과 17일. 光州에서 전남대생이 주축이 돼 도청앞에서 평화적 인 횃불시위가 있었을 뿐 전국의 대학가는 다시 잠잠해졌다.

그러나 서울역회군이후 채 3일도 넘지 않은 운명의 5월 17일. 全斗煥을 주축으로 하는 신군부는 대반격을 시작했다.

제 14회 1980년 5월15일 서울역앞 집회 / 金大中, 金鍾泌, 李厚洛씨 등을 체포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는 1980년 5월15일 서울역앞 집회 를 끝으로 수그러들었다. 군부집권음모를 감지한 전국47개대학 총학생회장 들이 이날밤 고려대에 모여 가두시위 중단과 정상수업결의를 했기 때문이 다.
그러나 17일 전군지휘관회의는 거꾸로 학생소요 격화를 이유로 비상계엄 확대를 결의, 중무장한 병력이 국무회의장을 둘러싼 공포분위기 속에서 전 격 통과시키도록 했다. 이날 합수부는 계엄사령관에게 金大中, 金鍾泌, 李厚洛씨 등을 체포, 조사계획을 알리고 밤10시를 기해 일제검거에 들어갔다. 이에따라 2천6백여명이 체포됐고 金大中씨등 24명은 소위 金大中내란음모 사건 관련자로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金泳三씨도 수경사헌병단에 의해 가택 연금됐다.

서울의 봄날을 누비며 민주회복의 부르짖던 학생.민주인사측의 반대편 에선 이미 신군부측이 79년 12월12일 鄭昇和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면서 부터 집권 시나리오를 차근 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일지형식을 빌어 요약하자면, 80년 2월 全斗煥보안사령관은 보안사내에 정보처를 복원해 對民정보 수집활동을 본격화했고, 3월 중순에는 보안서 정 보처가 언론통제를 위한 K-공작계획을 수립했다.

4월14일 마침내 全斗煥은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해 보안사와 함께 양 대정보기구를 장악하는 권부의 막강 실세로 자리 잡았다.그리고 全斗煥은 5 월초 權正達보안서 정보처장에게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하고 李鶴捧보안사 대공처장에게 정치인. 재야인사.부정축재자 등에 대한 조치방 안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5월 4일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 소재 보안사 안가에서 權正達.盧泰愚.兪學聖. 黃永時. 李鶴捧. 車奎憲. 許和平. 許三守. 鄭鎬溶 등 8명은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비상기구 설치(국보위), 국회봉쇄 등을 뼈대로 하는 시국수습방안 을 통해 군이 전면에 나서 정국을 장악한다는 집권시나리오를 확정하고 실 행을 결정했다.

全斗煥은 이어 5월12일 이같은 내용의 시국수습방안을 보고 받고 14일에 육본에 소요진압본부를 설치하고 전국에 소요사태 진압부태 투입준비를 지시했다. 16일 李鶴捧은 전국 보안부대 대공과장 회의를 소집 해 5월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에 확대되니 학생시위 주동자와 배후조정자를 일제 검거하라고 지시했다.

철저히 권력장악을 위한 준비를 마친 全斗煥은 16일 밤 申鉉碻총리와 李熺性계엄사령관, 周永福국방장관, 김종환내무장관등과 함께 청와대에 들 어가 심야대책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申鉉碻총리는 崔圭夏대통령에게 국내상황을 보고했고, 全斗煥. 李熺性. 周永福 등은 비상계엄확대의 필요성 을 주장하는 한편, 다음날 오전에 전군지휘관회의가 열릴 것이라고 보고했다.

17일 全斗煥은 보안사 집권시나리오팀인 權正達정보처장, 李鶴捧 대공처 장, 許和平비서실장,許三守 인사처장 등을 모아 전군지휘관회의의 결의사항 를 숙지시키고 시국수습방안 추진을 위한 구체적 계획을 수립했다.

비상계엄확대 조치에 따른 집단적인 저항을 봉쇄하기 위해 전문대학 이 상의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회 간부들을 예비검속한다정치권 3金씨 를 각각 상이한 명분으로 제거할 수 있도록 그들의 과거행적에 대한 자료 를 준비하고 연행병력을 대기시킨다국회가 열려 계엄해제 결의를 하지 못 하도록 군병력으로 국회의사당을 봉쇄한다혁명위원회 역할을 수행할 국가 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준비하고 알맞은 인물을 선정해 둔다.검열 거부를 한 언론인들을 모두 제거하고 계엄 확대조치를 옹호할 수 있도록 중진 언 론인들을 포섭한다.

말이 시국수습방안이지 사실상 쿠데타 음모였다. 마침내 17일 오전 11시 국방부에서 전군주요지휘관회의가 열렸다. 이에앞 서 오전10시 李熺性계엄사령관이 군 수뇌부들을 만나 시국수습방안이 안건 임을 알리고 통과. 결의시키자고 제안했다. 유병현대장이 정치적으로 민감 한 문제는 군회의에 다루기 어렵다고 반대의견을 냈으나 묵살됐다.

43명의 지휘관들이 참석, 약 4시간 동안 계속된 회의에서 안종훈 육군군 수사령관이 비상계엄전국확대에 대한 반대의견을 냈으나 대세는 신군부쪽 으로 이미 결론이 나 있는상태였다.

周永福국방장관이 비상계엄 전국확대 의견을 묻자 鄭鎬溶특전사령관은 사회안정을 위하여 군이 적극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력 주장했고 盧泰愚. 黃永時 등이 이에 적극 동조했다.

이에 周永福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전군 지휘관들의 의견으로 대통령에게 건의키로 결론을 내리고 참석자들로 부터 백지에 연서명을 받아 周永福. 李熺性 등은 오후5시10분쯤 崔대통령을 찾아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건의하면서 일부에서는 비상기구 설치와 국회 해산문제도 거론됐다고 보고 하자 崔대통령은 오후7시께 계엄 확대방안에 대해서만 국무회의에어 논의해볼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밤 8시 41분. 중앙청에서 개최된 제42회 임시국무회의 周永福은 비상계엄 전국확대 선포안의 제안설명을 하고 반대토론없이 8분만에 의결 했다.盧泰愚의 수경사 30단 소속 무장병력 3백여명과 장갑차 4대가 중앙청 외곽에 비치돼 있었고, 현관과 국무회의장에 이르는 계단과 복도 등 중앙청 내부는 수경사 헌병단 무장병력 2백50여명이 약 1-2미터 간격으로 배치되 고개하나 까딱 할 수 없는 삼엄한 분위기에서 였다.

또 참석국무위원들이 외부와 연락할 수 없도록 중앙청내 전화인입 2천4백40회선과 구내배송선 일체를 절단하고 중앙청내 근무 공무원 들을 5층에 있는 방으로 모두 몰아 넣은 후 18일 오전 7시까지 외부에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치밀한 작전을 전개, 정보의 유출을 막았다.

결국 周永福은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24:00를 기해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전국 일원으로 변경했다. 집권시나리오 작성(시국수습방안)-전군지휘관회의-비상국무회의-대통령 재가 등 일련의 권력찬탈 시나리오는 이렇듯 요식행위를 모두 갖추면서 예 정한 대로 짜 맞춘 듯 진행됐다.

그러나 신군부가 대통령의 재가를 마냥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국무회의가 계엄확대안을 의결하기 수시간전인 오후6시께 이미 합수부요원 들은 경찰병력을 이끌고 전국 대학생 대표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있던 이화여대를 급습, 다수의 학생대표들을 체포했고 충정부대역시 초저녁부터 작전을 개시, 전국 주요대학으로의 진입을 시작했다.

전두환의 쿠데타군은 벌써 충정이라는 철모를 쓰고 光州를 향한 트럭 에 올라타 있었다.

제 16회 한국 현대사의 원죄 /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이후 전국 1 백36개 대학 및
주요시설에 진주한 계엄군에 대해 유독 광주의 전남대생들이 시위로 항거
 
   한국 현대사의 원죄 5.18 이 왜 광주에서 발생했는가에 대하여는 사태발 생후 지금껏 부단한 논쟁이 계속돼왔다.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이후 전국 1 백36개 대학 및 주요시설에 진주한 계엄군에 대해 유독 광주의 전남대생들 이 시위로 항거, 이에따라 발생한 유혈과잉 진압이 5.18의 원인이었다는 우연설이 있는가하면, 金大中검거후 악화될 지역여론을 빌미삼아 광주를 희생양으로 하는 신군부측의 다단계 쿠데타의 한 단계였다는 계획설 이 있어왔다.

1980년 5월 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 결과 내려진 전국의 계엄령은 사실 상 같은해 2월께부터 준비되어온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의 5.18수사 공소장에 따르면, 신군부는 유신시절에 폐지됐던 보안사 정보처를 80년 2월부터 부활시켜 이른바 시국수습 에 군이 투입되어야 하 는 상황을 예정하고 주도면밀한 준비를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공소장은 全斗煥이 權正達과의 논의를 통해 비상계엄확대를 필수수단으 로하여 대학가의 민주화시위 제압학생시위 배후조정세력 예비 검속주요 정치인과 재야인사를 국기문란 및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 수사계획을 4월 중에 수립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계획대로 신군부는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 일원으로 변경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내용들이 포함된 계엄포고 10호를 발령한데 이어 일시에 계엄군을 배치한다.

그러나 신군부는 18일이 닥쳐서 계엄군을 전면 배치한 것은 아니었다.

신 군부는 5.17비상계엄 전국확대 실시안이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의결되 었을 뿐,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전제로 계엄군을 각 지역에 배치, 이동시켰다.

실제 계엄군의 이동과 배치는 전군주요지휘관 회의에 5.17조치가 논의되기 훨씬 이전인 5월초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계 엄사 상황일지와 특전사 전투상보를 통해 확인된다.

5월 2일=소요사태에 대비한 수도군단 사전정찰
5월 6일=수경사 33단, 야간폭동진압 훈련 수도군단,학생소요사태에 따른 공중 정찰용 헬기 요청
5월 7일=계엄사, 소요사태 악화시에 대비한 특전여단 이동지시 수경사, 충정작전 참모회의 (수경사, 30.20사단, 특전사 각 여단 참모)
5월 12일=공수특전 11여단 중앙 기동예비대로 운용할 계획으로 APC 장갑차 10대 김포에서 9여단으로 이동
수도권 진압작전 대비, 가스살포기 및 장치대 11공수에 지원 5월 14일=정호용 특전사령관, 대학생 데모 첩보에 따라 예하대 7개여단 출동준비 지시(1,3,5,7,9,11,13공수여단) 광주의 전교사 885수자대, 7공수에 2.5톤 트럭 31대지원 수도군단, 서울 방송국에 경계병력 배치
5월 15일=경계병력 철수 20사단 직할대, 61연대, 62연대 부대이동지시(전방주둔지에서 잠실체육관, 효창구장으로) 수경사, 정부종합청사, 치안본부, 보안사, 주미공관 일대에 병 력 및 장비투입(22:00 다시 철수)
5월 16일=20사단 60연대 전방에서 육사로 이동 7공수여단 이동(금마에서 대전, 광주, 전주로) 충정작전 해당부대 작전요원 정상근무 지시 해병사단 3연대, 2연대 부산, 대구 도착 2군에 배속

육본 작전명령 제 12-80호 및 제 18-80호, 제 19-80호에 의해 수도권 및 전국에 배치된 계엄군은 제 3.7.9.11여단등 공수특전여단이었다.(이하 국방 부 특전사 전투상보)

光州에는 제 7공수 특전여단(여단장 육군준장 신우식) 병력이 최초로 투 입됐다.

18일 0시 光州에 도착한 7공수 33대 대원들은 새벽 1시께 全南大 구내에 진입, 교내에 남아있던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 연행하기 시작했 다.

그러나 이 소규모의 구타와 연행이 5.18의 도화선은 아니었다.

全南大학생회는 5월 16일 光州횃불시위이후 만약 계엄이 확대될 경우 도청앞으로 모이자는 막연한 약속을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당시의 全南大시위는 일단 아침 일찍 학교에 집결, 스크럼을 짜고 도청앞으로 행진해가면서 시민들을 규합하고 동원하는게 하나의 정형이었 다.

이에따라 18일 오전 8시30분 무렵, 全南大로 속속 도착하던 학생들은 휴 교를 알리는 안내판과 함께 장갑차가 진주한 학교 정문에 가로 막히게 되 고 여기서 계엄군을 향해 투석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주먹 만한 돌멩이 세례에도 아랑곳않고 돌을 던지는 학생들을 민첩하게 추격해 곤봉세례를 가하는 계엄군들에 혼비백산한다.

주로 머리와 안면부를 겨냥해 내려치는 진압봉에 중상을 입은 대학생들이 속출했다.

피범벅된 얼굴로 동 료 학생들의 부축을 받은채 도청으로, 도청으로 모입시다라고 외치는 학 생들의 모습은 연도의 시민들을 흥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이것이 초기 강 경진압 의 모습이다.

신군부측의 변명대로라면 5.18은 이 초기강경진압이 예상외의 시민적 저 항을 불러 일으켜 걷잡을 수 없는 유혈사태로 번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5.18 광주학살 고소인단의 견해는 사뭇 다르다.

고소인들은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소요의 진압을 목적으로 투입된 것이 아니라, 시민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투입된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고소인단의 고소장 일부를 인용한다.

...공수부대는 다른 부대와는 달리 한미연합사 소속부대가 아니기 때문에 미국측과 사전에 협의하거나 출동과정에서의 마찰이 빚어질 염려가 전혀없 다.

그래서 피고소인들은 12.12군사반란과 동시에 수도권의 경비를 담당하는 수경사와 이 특전사를 장악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수부대는 고도의 군 기를 유지할 수 있으며 기동성이 뛰어난 부대이기 때문에 피고소인들은 광주에 이 공수부대를 축차적(逐次的)으로 투입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공수부 대는 일상적인 훈련과정이 적의 후방에 침투하여 게릴라전을 행하는 것이 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은 거의 본능화되어 있고, 조건 반사적으로 행동하 게 되어있다.

특히 공수부대는 철저한 상명하복의 명령체계를 생명으로 하 고 있을 만큼의 군기유지와 전투력이 뛰어난 부대이다.

이러한 부대를 광주에 투입, 진압초기부터 광주시민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는 잔인한 학살을 자 행케 한 것이다...

왜 光州였나. 이 물음에 대한 답은 全斗煥. 鄭鎬溶 등 신군부 수뇌부의 고백이 아니고선 쉽사리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일찍이 朴正熙와 5.16쿠데타를 인생의 전범(典範)으로 삼았던 全斗煥등 신군부가 金大中등 민주화요 구세력의 상징인 호남을 전시적군 개념으로 상정하고 그 구체적 타격대상 으로 光州를 택한 것이었다면, 한국 현대사는 너무도 큰 범죄를 담고 있는 셈이다.

제 17회 NODIS라는 美 국무성 극비전문
5.18이후 全斗煥의 새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음
 
   허가경로외 배포금지(No Distribution Outside of Approved Channels). 약칭 NODIS라는 美 국무성 극비전문이 美國의 한 언론에 의해 공개되면 서 5.18 光州학살과 관련한 16년전 美國의 대응이 낱낱이 밝혀졌다.
1996년 2월 마지막주에 美國의 저널 오브 커머스지와 한국의 시사저 널에 동시 게재된 이 전문은 美國이 12.12이후부터 5.18까지 남한의 신군 부와 긴밀한 접촉을 가졌으며 남한의 혼란을 수습하는데 군대가 동원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고 5.18이후 全斗煥의 새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음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80년 5.18직후부터 팽배했던 의혹, 즉 한국군의 작전권을 갖고있는 美國이 승인하지 않고서 어떻게 군대가 양민학살에 동원될 수 있겠는가는 의혹이 입증된 셈이다.

더욱이 美國은 국제사회의 예미한 문제에 대한 코멘트를 요구할때는 전 통적으로 지켜온 NCND(Neither Conform Nor Deny) 즉 시인도 부인도 하지않겠다는 관행을 벗어나 지난 89년 한국국회 5.17특위 공개질의서에 대해 美國은 5.18진압에 대해 군이 투입된 사실을 몰랐다 80년 5월 全斗煥 장군이 전국적인 시위에 대처하기위해 군을 동원하려는데 대해 깜짝 놀랐다며적극적인 거짓말을 했다.

이는 美 국무성의 공식발표에 대한 국제사회에서의 신뢰에 대한 먹칠을 한 셈이 되거나와 인권외교를 표방해온 美 민주당의 노선이 허구적인 것 임을 보여준 치명타다.

결론적으로 美國은 10.26 이후 자국의 언보성 이익을 위해 군부독재집단을 파트너로 삼았고 시민의 항거를 공수부대 동원으로 짓밟은 행위에 동조 했으며 사태가 여의치않을 경우 미군을 직접 투입하려고까지한 비열한 존 재였음이 폭로된 것이다.

그러나 5.18의 진실이 하나씩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우 리의 美國에 대한 분노를 차분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5.18희생자 유족과 光州시민, 그리고 남한의 민주화 세력이 美國에 대해 갖는 분노의 본질은 정확하게는 배신감에 불과하다.

군사독재정권을 응징해 주지않고 대화 파트너로 인정한데 대한 베신감, 光州에 공수부대를 투입하려는 신군부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보내지않고 반대의사를 표시하지 않은데 배신감, 그러고도 부족해 光州등의 항거가 계 속될 경우 주한미군을 직접 동원해 사태을 진압하려고 한데 대한 배신감 이다.

朴正熙정권은 유신말기 카터의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주한미군 감축우 협을 무기로한 남한의 인권신장 압력에 시달려왔다.역으로 당시의 피압제계층, 즉 야당 정치인.학원.노동계.종교계.지성계 등은 그같은 압력을 행사해주는 美國에 대한 일종의 세계경찰로서의 신뢰를 해왔 다.그 신뢰는 사실상 정치.군사.경제적인 식민종주국인 美國에 대해 남한국 민이 가질 수 있는 저항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질량을 갖고 있었다. 이 신뢰가 배신감으로 바뀐 것이다.

이번의 NODIS 폭로로 인해 남한정부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최고의 것은 아마도 80년 당시의 한반도 주변정세상 美國은 남한의 군부등장과 폭력적 光州진압을 묵인할 수 밖에 없었다는 유감성명 정도일 것이다.다만 이 배신감에서 우리가 교훈을 얻으려한다면 자국의 방위와 외교를 자국이 담당하지 않은 국가는 어느상황에서나 주체성의 모슨에 빠질 수 밖 에 없다는 점이다.

이번 NODIS 폭로에 대해 美國정부는 아직 아무런 논평을 내지않고 있다.

다만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美대사와 도널드 그레그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담당자만이 언론과의 회견에서 당시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을 강변하고 있다.

글라이스틴은 2월27일 NODIS문서의 존재를 시인하면서 언론이 美國의 묵인만을 강조보도하고 당시 美國이 남한의 군지도부에 보낸 여러경고와 주의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고있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그는 저널 오브 커머스와의 회견에서 79년 10월 부마사태때 공수부대의 행동으로 보아 우리는 光州에서 그토록 잔혹한 만행이 벌어지리라고는 생 각하지않았다.

우리의 경험으로 볼때 구것은 한국군의 행동범위에서 트게 벗어난 것이었다.

사실 光州에서의 첫조고는 너무 무시무시한 것이어서 그 같은 잔학행위가 벌어졌다는 것을 믿을 수가없는 정도였다라도 말했다.도널드 그래그씨는 80년 5월22일의 백악관회의에 대해 우리의 진정한 우려는 북한이 이같은 남쪽상황을 개입하는 구실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 이었다.

브레진스키(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는 북한이 일으키는 어떤일이 터지기 라도 한다면 미국이 할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며 당시의 미 국이 대북안보를 고려해 광주학살을 묵인했다고 고백했다.

80년 5월22일에 백악관회의는 한편(남한에서의 소요진압에 주한미국의 작전권하에 있는 군병력을 사용해 달라)는 남한정부의 요청에 따라 당시 필리핀에 정박중인 항모(코럴시 호)와 오키나와에 있던 조기경보기 2대를 한국군에 파견했다.

전후설명없이 이 군사적 이동사실만이 외신을 통해 국 내에 보도되자 이미 피를 흘리고 있던 광주시민들은 환호했었다.

드디어 미국이 전두환 공수부대의 이 잔혹한 만행을 응징하러 왔다며 만세를 부른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미국을 믿었었다.

제 18회 신군부가 군사통치의 준비를 착착 진행
崔대통령의 취임과 유신헌법 개정발표, 정치 지도자들의 해금
 

   12.12 이후 全斗煥을 정점으로하는 신군부가 군사통치의 준비를 착착 진행해 나가는 동안 光州의 사정은 어떠했는가.
崔대통령의 취임과 유신헌법 개정발표, 정치 지도자들의 해금등으로 한껏 부푼 80년의 봄은 光州에도 수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 변화가 가장 맹렬하게 진행되는 곳은 대 학이었다.

光州의 대학, 그중에서도 全南大는 다가올 5월의 처참한 항거에 불을 당기는 횃불이 되리라는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80년 1월 벽두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全南大는 그때까지 全南권의 모든 반정부.반유신독재 투쟁역량이 집결하는 곳이자 이데올로기 생산기지였다.

그 용틀임은 제적생 복적에서부터 시작됐다.

전남대 당국은 이미79년 11 월 민준식총장이 학생과의 대화 시간을 마련, 10.26이후 변화한 시국환경 에 따라 특사.복권된 제적생들을 복교시키는 조치를 강구중이라고 밝혔었 다.

全南大는 이어 80년 2월 이들의 복교에 대비한 학칙개정을 마치고 총 38명의 제적생에 대해 복교수속을 밟도록 민총장명의의 서한을 발송한다.

지난 몇년동안 학원사태로 말미암은 격랑과 진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많 은 영재가 상아탑을 떠나는 시련을 겪었다.

70년대의 국가발전 도상에서 빚어진 그러한 애환을 회고.성찰하면서 이제는 국민전체의 협화와 대동단결 을 다져 찬란한 미래를 설계해야할 역사적 시점에서 재적학생들에게 학칙 을 개정, 재입학을 허가한다는 내용의 서한이었다.

71년 민청학년사건 관련 제적생들을 필두로 총 38명에 달하는 제적생들은 이에따라 대부분 3월 등교를 위해 복교준비를 서둘렀다.

다음은 38명의 명단.
법대=이강 김용대 김윤기 최동열(이상 법학과3)
사범대=윤영훈(수학교육과2) 유선규(수학교육과3) 문승훈(국사교육과2)
상대=이평의(경제학과4) 김정길(경영학과2) 이훈우(경영학과2) 한동철(무역학과4) 농대=윤한봉(축산학과4) 박형선(축산학과3) 문덕희(수의학과4) 김윤봉(임학과3) 최철(농학과1) 조봉훈(농경제학과4) 김영종(농화학과2)
공대=정환춘(자원공학과2) 노준현(화공학과2) $문리대=이정호(물리학과1) 김남주(영문학과4) 이학영(국문학과3) 하태수(국문학과2) 김상윤(국문학과3) 성찬성(영문학과3) 전영천(국문학과 2) 안길정(영문학과3) 이택(철학과3) 박변기(철학과4) 김성출(사회학과3) 신일섭(사학과3) 정용화(문리대인문계열1) 박몽구(문리대인문계열1)(이상 전 대신문 80년 2월 21일자).
정동년 한상석 김진등도 이후 복교된다.

형형한 눈빛으로 돌아온 이들은 이내 복적생 협의회란 조직을 구성하 고 이 중 한상석을 실무총책으로 한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킨다.

학원자율화 추진위의 자율화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3월3일. 개학 과 동시 전남대 대강당에서 학.자.추위 주최로 열린 학원자율화 공청회는 강당을 가득메운 학생들의 열기속에 $학칙의 민주적 개정 $학생회 부활 $ 서클연합회 발족 등을 추진키로 했다.

공청회의 공술인은 최용주 양동춘 문석환 한상석등 4명이었다.학생들의 자율화 압력에 따라 3월7일에는 학교당국과 학.자.추위가 공개 대화를 가졌다.이자리에서 김태진 학생처장은 학원사찰이 공식 중단됐다 고 선언하고 학도호국단의 개편을 약속했다.

해직교수들도 강단에 돌아왔다.

78년 우리의 교육지표사건으로 해직됐 던 11명의 전남대 교수중 송기숙 배영남 안진오 명노근 이홍길등 4명의 교 수가 시간강사 자격으로 3월 강단에 섰다.김정수 이석연 이반기 김현곤등 4명의 교수도 4월중순에 복직했다.

3월 17일 전남대 강당에서는 2천여명의 학생이 모인가운데 복직교수.복적 생 환영회가 열려 다가오는 민주주의의 새 세상을 염원하는 흥겨운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마침내 4월9일 총학생회장 선거가 실시됐다.

5명의 후보가 출마한 이 역 사적 선거에는 학.자.추위의 지원을 받은 법대의 박관현 후보가 총 투표인 수 7천8백16명중 4천8백55표라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다.

학원민주화의 새벽기관차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선거에 나선 박관현은 유세때부터 특유의 힘있는 연설로 학생들을 사로잡았으며 야학교사를 하던 농군의 아들이란 민중정 정서로 일시에 전남대의 학원민주화 열기를 상승시 켰다.

변화는 숨돌릴 새 없이 몰아닥쳤다.

학.자.추위는 유신시절 학원탄압과 곡 학아세를 일삼은 어용교수들을 추방하기로 결의, 어용교수 백서를 발표하 고 이들의 사퇴를 촉구하는 공개집회를 열었다.

박관현 회장의 첫 과제는 병영집체훈련의 거부였다.

상대 1학년들이 중 심이 된 이 거부투쟁은 대학 1학년때 삭발을 하고 향토사단에 입교해 신 병훈련과 똑같은 훈련을 20일씩 받던 당시의 병영집체훈련에 대해 학원탄 압과 군사정권의 예속화를 가져오는 이 훈련을 거부한다며 농성에 들어갔 다.

4월이 되자 캠퍼스는 4.19기념행사와 맞물려 연일 시국집회가 줄을 이었 으며 정상수업을 진행하는 단과대학은 의대를 제외하곤 거의 없다시피 했 다.

교수평의회가 구성됐다.

학칙등 학내제반문제를 다루는 최고의결기구인 이 평의회의 발족으로 학원자율화는 이제 거의 완성단계에 오는듯 보였다.4월24일 발족된 이 평의회는 그 첫 성명으로 비민주적인 권력이 대학을 지배할때 용기있게 대처하지 못했던 점을 솔직이 시인하며 앞으로 어떠한 외부세력의 간섭도 철저히 배격한다고 밝힌후 정부는 학원민주화 일정을 공개해 학생들이 학업에 전념토록 하라고 요구했다.

5월이 되자 캠퍼스에선 누구나가 느끼는 긴장과 열기가 감돌았다.

朴正熙사후 예견된 사회전반의 민주화가 신군부의 비상계업으로 공전되고 있으 며 이것이 학원자율화 뿐만 아니라 유신헌법개정등 모든 민주화작업에 반 동장치로 남아 있다는 시국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캠퍼스는 자유 와 자유에의 요구로 활기에 차 있지만 교문밖엔 아직도 군사독재의 암운이 짙음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5월3일 전남대생들은 반민주세력 장례식 이란 이름으로 꽃상여를 앞세운 상징적 집회를 가진뒤 박관현의 주제로 비 상학생총회를 개최한다.다가올 비극을 알리없는 전남대생들은 여기서 비상계엄해제.노동3권보 장.민주화일정 공개등을 강도높게 주장하면서 마침내 도청앞 민주화 대성회 를 준비한다.

제 19회 1980년 5월8일 오후 1시, 전남대 도서관 앞
80년 5월 光州를 민주화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게했던 민족민주화 성회가 출발
 
   1980년 5월8일 오후 1시, 전남대 도서관 앞에는 오전 수업을 마친 학생들 이 모여들기 시작했다.삽시간에 5천여 학생들이 도서관 앞 광장에 자리잡 고 총학생회 주도로 집회를 시작했다.
80년 5월 光州를 민주화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게했던 민족민주화 성회가 출발한 것이다.

전남대 총학생회는 이날부터 14일까지 1주일간 민족민주화 성회 기간으로 선포하고 조선대 민주투쟁위원회와 공동으로 제1시국선언문을 채택해 출 정을 알린다.

이 중대한 시점에서 우리 대학인들이 걸어가야할 길은 조국의 완전한 민 주주의와 평등사회의 도래를 위해 다같이 헌신하여 가슴벅찬 민족정기를 진 작시키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정부 주도의 改憲.휴교령을 거분한다 崔圭夏정부가 정통성이 없음에도 개헌의 정부주도를 주장하는가 하면, 군 부와 결탁해 안보를 명분으로 비상계엄을 유지하고 있다는 통렬한 비난과 함께 채택된 시국선언문은 이제까지 정치투쟁을 억제해왔던 학생들을 열광 케하고 삽시간에 학내는 민주화의 열기로 가득찬다.

이에앞서 의대생 8백여명은 총학생회가 마련한 단과대별 민주화성회일정 에 따라 오전 10시부터 시국토론회를 갖고 반민주세력 척결을 결의했다.

9일 법대생들도 교수들과 함꼐 민주화토론회를 갖고 후문.서방삼거리를 거쳐 의대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12일 농대, 13일 상대, 14일 오전 인사대.공대.자연대.사대로 이어지는 학내성회에는 교수.학생들이 함께 참여해 민주화의지를 불태웠다.그 사이 학생운동권을 비롯한 전국의 운동세력은 가두투쟁 시기를 놓고 강경.온건파로 나뉘어 심각한 찬반토론을 거듭해 오고 있었다.그러나 10일 崔대통령이 난데없이 中東방문을 위해 자리를 비우자 신군부 쿠데타설이 시 중에 파다하게 번졌다.

마침내 전남대 총학생회는 13일밤 가두진출을 위한 세부계획 수립에 들어 갔다.

민주화 요구를 위한 전면적인 정치투쟁이 시작된 셈이다.그리고 14일 학내집회를 마친 학생들은 오후 1시부터 정문과 동문.농대쪽 등에서 수천명 단위로 시내진출을 시도했다.페퍼포그까지 동원한 경찰의 최루탄 살포에 맞서 투석전을 전개하며 학생들은 신역광장.시민관 앞을 거 쳐 도청으로 향했다.공대생 3천여명은 자연대.사대.인사대생들과 합세해 정문돌파를 시도, 투 석전 끝에 기동경찰대의 저지망을 뚫었다.

저지망이 뚫리자 경찰은 갑자기 최루탄을 발사, 아직 학교를 빠져나오지 못한 학생들의 해산을 시도했다.한 학생들은 수업을 마친 학생들까지 가세해 7천-8천여명을 헤아렸다.또 다시 최루탄이 쏟아졌다.그러나 학생들은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종합운동 장 옆철조망.개천을 통과하는데 성공했다.오후 3시, 전남대생과 교수.시민 등 1만여명은 기동경찰의 저지를 뚫고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였다.학교에서부터 스쿨버스로 도착한 교수단을 가 운데로 하고 서클연합회장 문석환(경영3)의 사회로 마침내 제 1회 전남민족 민주대성회가 시작됐다.

국민의례 때는 도청앞을 막고 있던 기동경찰들도 함께할 만큼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였다.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동신실전.목포대.성인경상전문.목포공전.전남대 학 생회와 목포공전 자율화추진위.조선대민투 등 6개 대학 학생들이 채택한 제 2시국선언문을 낭독한데 이어 전남대 총학 총무부장 梁康燮(현 전남도의원) 이 그리고 교수협의회 정명섭회장(사대)의 시국선언문 낭독에 이르러서는 찌를듯한 열기에 기동경찰들도 아예 대회저지를 포기한 듯 다가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4대구호가 채택됐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신현확.전두환 물러가라
북괴는 오판말라

비가 내렸다. 갈수록 빗줄기가 굵어졌지만 계엄철폐를 외쳐대는 구호와 투사의 노래를 합창하는 학생들의 민주화 열기를 말릴 수 없었다.

대학원생들도 결의문을 채택했다. 2백여명의 대학원생들이 참석, 계엄해 제와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적극 동참하겠다며 결의를 다졌다.

13일 전남매 일신문기자 35명이 발표한 5.13언론자유 실천선언을 환영.지지하는 성명도 낭독됐다.

가야했다. 6시20분께 귀교하는 학생들의 선두에 교수단이 앞장섰다. 계엄 령하인데도 교수들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운채 제자들을 이끌고 빗방울이 굵 어진 금남로를 가르며 가두행진을 벌였다.

4.19를 경험했던 시민들에게 교수단의 태극기를 앞세운 가두행진은 또다 시 민주투쟁의 시기가 왔다는 것을 웅변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15일에도 도청 앞에선 민주화 성회가 계속됐다.

전남대생들은 전달과는 달리 경찰의 제지없이 이날 오후 도청앞까지 진출 했고, 일부 고교생까지 집회에 참석, 군중은 2만여명에 이르렀다.

시민들의 호응도 점차 뜨거워졌다.

학생들이 외치는 구호에 박수로 화답했고 인근빌딩 옥상까지 올라가 학생들을 지지.격려했다.연단으로 올라가 즉흥연설을 하는 시민들도 있었다.박관현은 이날 민주화를 위한 횃불대행진을 예고한다.암흑의 시대, 칠흑같은 질곡의 역사를 정말로 우리 민주화의 횃불로 밝히기 위해 모든 전남지역 대학생들의 이름으로 내일 오후 3시 이곳 도청앞에 모여 횃불시위를 거행하겠습니다.

제 20회 민족민주화대성회
군투입 불안속 장엄한 횃불시위/경찰도 동요.. 국민적 궐기 낙관
 
   80년 5월 14일과 15일 全南도청앞 광장에서 열린 민족민주화 대성회는 10.26이후 민주화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속에서도 불투명한 정국에 의문을 품고있던 光州시민, 나아가 전라남도민들에게 하나의 민주주의 포럼역할을 했다.
광장에 모인 수만 군중은 학생대표들의

연설과 재야인사들의 시원한 웅변을 듣고 계엄하 언론이 전하지 못하는 시국상황을 비로소 전해들었으며 지금의 시국이 민주화는 커녕 朴正熙보다 더한 군사독재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는데 대해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뿐만아니라 민족민주화 대성회는 유신과 잇따른 긴급조치로 데모란 엄두도 낼 수 없던 기나긴 압 제의 끝에 너무도 화려하게 핀 꽃과도 같아서 광장에 모인 모두는 분수대 위의 대형태극기를 보며 애국가를 부를 때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다.

목쉰 박관현의 연설은 그대로 하나의 행동강령이 되어 귀에 꽂혀왔고 아 스팔트 바닥에 어깨를 맞대고 앉은 참석자들은 서로가 서로의 단순한 이웃. 시민만이 아닌 동지로 느껴질 정도였다.

전두환이 물러가라를 외치는 광장의 함성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되돌리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않겠다는 준엄한 명령으로 메아리쳤다.

민족민주화 대성회는 또한 가장 효율적이고도 강력한 의식화교육장이었 다. 광장에 모인 수만 시민은 이곳에서 뿌려지는 삐라를 통해 자신들의 집회에 대한 정당성을 인식하고 각종 연설을 통해 자신들이 정부에 요구하는 바가 무엇이며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신 무장을 할 수 있었다.

15일 대성회때 다음날 다시 모이기로한 대학생과 시민들은 16일 오후 3시 의 약속보다 훨씬 먼저 오후 2시께부터 도청앞 분수대에 모여들기 시작했 다.

이보다 앞서 15일밤에는 제 2차 대성회를 마친 전남대.조선대생들이 각각 교내에서 철야농성을 벌였으며 16일 오전 교문을 출발, 도청을 향해 시가행 진을 벌여나갔다.

15일밤 각 대학 총학생회는 1천여개의 횃불용 각목에 솜뭉치를 철사로 다 는 작업을 벌였는데 횃불제작에 매달린 학생들은 과연 우리가 이 솜뭉치에 불을 붙이고 야간 가두행진을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과 설레임을 품고있었 다.

바로 이범, 감격적인 수민시민의 호응으로 민족민주화 성회가 치러지고 있지만 언제 계엄에 의해 학원에 대한 강경탄압조치, 예컨대 소요주동자 체 포나 휴교령 발령 등의 조치가 내려질지 모른다는 불안을 떨칠 수 없었던게 당시 학생운동지도부의 상황이었다.

이에따라 전남대 학생운동지도부는 학원이 도화선이 되어 국민적 궐기를 신군부의 쿠데타 기도를 무산시키고 조기에 새 범국민 과도정부를 구성, 유 신헌법을 철폐토록 한다는 대원칙에 대해 낙관론과 비관론이 교차했다.

낙관론의 근거는 우선 유신독재자 朴正熙의 사망과 잇단 해금조치 및 대 통령의 개헌약속 등 일련의 시국전개가 역사의 당위이며 순리라는 전제하에 서울지역 학원의 총궐기가 유사시 수도권 시민들의 총궐기를 부를 만큼 강 력했다는 점, 민족민주화 대성회의 열기에 비추어 국내 민주화세력이 단합 하면 어떤 난관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는 점 등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다분히 낭만주의적이기까지 한 이같은 판단은 그러나 당시 학생운 동권 수뇌부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판단이었다.

실제로 전남대 총학생회의 경우 14.15일의 도청앞 민족민주화 성회를 교 내에 돌와와 분석하면서 $교수단의 가두시위로 4.19직전과도 같은 시민적 호응을 얻었고 $전남대생들의 자신감과 승리감이 고조돼 각 전문대.중.고교 에까지 시위동참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으며 $경찰이 그동안의 무조건 진압 방침에서 동요를 일으키고 있다며 더욱 가열찬 시위를 계획했다.

특히 경찰의 동조부분에 대해서는 $15일 시위때 光州역앞 경찰력이 시위 행렬에 길을 터주었으며 $대치시 직접 피해를 주지않고 있으며 #대시민 즉 흥연설 때 경찰간부가 메가폰을 빌려주는 일마저 발생했고 $시위종료시 오 토바이 경찰이 학생들의 귀교를 에스코트 해주었고 $시위뒤에 반드시 뒤따 르던 검거작전이 없었다는 점들을 들어 이를 중요한 변수로 판단했다.

또 당시 카터의 민주당정권이던 美國의 존재도 낙관론의 중요한 근거가 됐다. 학생운동지도부는 5월13일자 日本 아사히 신문이 워싱턴발로 지미 카 터가 남한의 全斗煥장군을 비난하는 발언을 한 내용을 주요기사로 다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인권외교를 주장하는 美國과 주한미군이 섣부른 쿠데타를 용납지 않을걸로 낙관했다.

美國의 5.18공수부대 투입묵인.방조가 백일하에 드러난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힌 일이지만 당시로선 美國의 존재가 학생운 동 및 모든 반정부투쟁의 미더운 보루였다.

그러나 비관론은 낙관론보다 한층 음험하고 구체적이었다. 전남대 총학생 회 내부에서는 이미 4월말부터 12.12에 이은 全斗煥의 전면쿠데타가 발생할 지 모른다는 예측이 나돌았다. 이에따라 운동권지도부는 휴교령 발령시 연 락방법 및 행동수칙을 수시로 바꿔가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또 대.내외적으로 궁지에 몰린 全斗煥이 3천의 병력으로 청와대를 장악한 다는 정보와 함께 국회 및 정당해산.휴교령.대대적 검거선풍 등에 대한 유 언비어가 끊임없이 나돌았다.

마침내 16일 오후 3시, 도청앞 광장에 모인 인파는 5만을 헤아리게 되었 으며 제 3차 민족민주회 성회가 시작됐다. 연이은 시위의 피로에도 불구하 고 박관현은 이날 생애 마지막 군중연설로 시민들을 사로잡는다.

...오는 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대행진을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꽃 피우고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뜻이며 꺼지지 않는 횃불과 같이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누리에 밝히자는 뜻입니다...

시민들은 학생들이 나눠준 횃불을 4열횡대로 30명마다 하나씩 받아들고 어두워진 光州의 거리를 물결쳐 나가기 시작했다. 도청앞~유동~光州역~공용 터미널~산수동~도청으로 이어지는 1대와 도청앞~유동~양동~월산동~광주천~ 도청으로 이어지는 2대로 나뉘어 질서정연한 야간가두시위를 마친다.

모두가 감격했고 민주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향한 열망과 애정에 들떴다.

이날의 감동이 있었기에 光州는 5.18공수부대의 충정작전만행에 대해 釜.馬사태에서처럼 단박에 진압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제 21회 예비검속 돌풍 보안사 집권시나리오..비상계엄확대
 

   80년 5월 17일 밤 10시께 동교동 김대중씨의 집대문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총개머리판과 발로 차는 소리였다. 김대중씨는 가족, 비서들과 함께 응접실에 앉아있었다. 대문을 열어주는 김씨의 비서들이 무차별 구타당했다.
무장의 군인7-8명이 군홧발로 들이닥쳤다. 합수부대 요원들은 총검을 김씨의 가슴에 들이댔다. 김씨는 이해 2월 29일 사면복권된지 2개월반만에 다시 연행되는 몸이 됐다. 행선지는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 김씨는 차에 태위지자마자 차바닥에 처박혔다.밖에서 그를 연행해가는 것을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밀폐된 중정지하실은 숨막힐 것 같았다. 방음장치가 되어 있었지만 출입 할때면 옆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괴로움을 못이겨 나도 고문해달라고 수사관들에게 요청했다고 89년 열린 국회청문회에서 증언했다.

검찰조사가 끝나는 80여일동안 가족면회도 허용되지 않았다. 영장도 없는 불법구금이었다. 법이 필요없는 시대였다.

광주에서의 학살이 진행되고 있던 5월22일 계엄사는 수사중간 발표를 한다. 김씨에게는 학생운동을 배후조종하고 사회혼란을 부추겼다는 죄목이 씌워졌다.

최규하대통령은 17일밤 긴급국무회의를 거쳐 이날밤 12시를 기해 비상계엄지역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일원으로 확대선포한다. 국무회의는 집총한 군인들이 늘어서 있고 외부로 연결되는 전화선조차 끊어진 위협적인 분위기에서 열렸다.

계엄사는 18일 새벽1시를 기해 계엄포고령 제 10호를 발표,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시키고 전문대학을 포함한 각대학을 휴교조치한다.

또 이날 권력형부정축재자로 김종필 공화당총재, 이후락.박종규.김진일.의원,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김종락타코마사장, 이세호 전육참총장, 장동운 전원호처장을 사회혼란및 학생.노조 소요관련 배후조종혐의자로 김대중씨, 육춘호의원, 문익환 인명진목사, 시인 고은씨, 김동길 연세대부총장, 이영희 한양대교수, 함세웅신부등 모두 26명을 연행한다.

서울의 봄의 주역인 3김씨중 한사람인 김영삼 신민당총재는 체포는 면했지만 수경사 헌병단에 의해 가택연금됐다. 두사람의 김씨는 부정축재자와 학원소요의 배후조종자로 구금하고 남은 한 김씨는 집에 가두어버린 것이다.

합수부의 연행작전은 치밀하게 진행됐다. 합수부는 계엄사령관에게 체포 조사계획을 보고하고, 이날밤 10시를 기해 일제검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같은 정치인과 재야인사에 대한 연행계획은 이미 신군부의 집권시나리오의 하나로 그전부터 착실히 준비되어오고 있었다.

보안사의 집권시나리오는 17일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와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확대가 의결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됐다.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16일 전국 보안부대 대공과장회의를 소집,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확대되니 학생시위 주동자와 배후조종자를 일제 검거하라고 지시한다.

각 지역보안부대는 지역별 검거자 명단을 작성해 계엄확대 발효전인 17일 저녁부터 이들에 대한 무차별사냥에 나서게 된다. 또 17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보안사집권시나리오팀장인 권정달 정보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허화평 비서실장, 허삼수 인사처장등을 모아 전군 지휘관회의 결의사항을 숙지시키고 시국수습방안추진을 위한 구체적계획을 수립했다.

이가운데 주요인사에 대한 체포계획만 보면 비상계엄확대조치에 따른 집단적인 저항을 봉쇄하기 위해 전문대 이상의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회간부를 예비검속한다.

정치권3김씨를 각각 상이한 명분으로 제거할수 있도록 그들의 과거행적에 대한 자료를 준비하고 연행병력을 대기시킨다. 검열거부한 언론인을 모두 제거한다는 등이다.

정치인 연행과 함께 학생운동권에도 대대적인 체포바람이 불어닥쳤다. 17일 밤 이화여대에서 열리고 있던 전국대학생회장 연합회의의장에 수백명의 기동대원들이 난입, 각대학 학생회 간부 18명을 연행해 갔다.

서울에서의 급박한 소식은 광주에도 전해졌다. 정확한 상황은 알수 없지만 뭔가 심상치않게 돌아가 정치권이나 재야운동권에서도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의 이같은 쿠데타 흐름을 정확히 짚어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예비검속은 광주에서도 예외없이 시작됐다.

5월17일밤11시께. 광주시 장동 녹두서점. 한밤중 정적을 깨는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거기 화순이지요. 아닙니다. 광주입니다 잘못걸린 전화였다. 그러나 곧이어 셔터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점 주인 김상윤씨(47.전남대 국문과 3년.복적생)는 2시간전부터 뭔가 긴박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전남대총학생회장 연합회의장이 기습당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혹시 후배가 왔나해서 셔터를 눈높이까지 올리는 순간 계엄사 합수부의 사복이 목에 권총을 들이댄다. 길가에는 군용지프가 세워져 있었다. 소재를 확인하는 전화를 한뒤 이런식으로 연 행해갔다.

정동년씨(51.당시 전남대 화학과4년.복적생)도 이날밤 10시께 연행됐다. 정씨는 16일 전남도청앞에서 열린 민주화성회에서 시민에게 드리는 말씀을 낭독했던 전남대 복학생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는 학생운동권의 배후라는 이유로 연행돼 갔지만 이후 김대중의 지령에 따라 내란을 꾀했다는 어마어마한 죄를 뒤집어쓰게 된다.

이런식으로 광주전지역에서 무차별적 체포바람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피를 부르는 학살극의 전조였다. 경찰 중앙정보부 보안대로 구성된 합수부는 예비검속자 명단을 들고 광주의 밤을 휘저었다.

전교사 작전일지는 학교에 대한 점령과 예비검속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계엄확대실시 조치에따라 전북14개학교와 전남20개학교에 병력배치완료/ 주모자검거 전북46명중 6명/전남22명중 8명/이와함께 학교에서 체포된 인원 전남대 69명, 조선대 43명, 전북대 34명, 원광대 23명 이시간 전남대총 학생회장 박관현은 17일 저녁후배들과 무등산산장 부근식당으로 몸을 피한 뒤 낚시꾼으로 가장하고 여천돌산면 방죽포부근 전남대 임해연구소로 잠적했다.

70년대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의 한축을 형성했던 윤한봉씨는 예비검속을 피해 이날밤부터 잠적, 미국으로의 밀항과 5.18의 마지막 수배자라는 드라마틱한 요소를 안은채 10여년이 지난뒤에야 회한의 광주를 찾기도 한다.

예비검속의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고 있을 시간,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의 트럭은 완전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을 싣고 질주하고 있었다. 출동지는 광주 조선대와 전남대. 80년 5월17일밤과 18일 새벽은 검거돌풍 과 함께 유혈극의 서막을 예고하고 있었다.

제 22회 충정작전 개시 / 착검 공수부대 새벽녘 대학 난입
 

   공수부대의 화려한 휴가가 시작된 5월 17일밤 전남대 총학생회 부회 장인 이승룡(현37세)총학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사회부장 오진수, 공대학생회총무부장 권창수, 그리고 박관현학생회장의 후배등 모두 4 명이 앉아 있었다 총학 사무실은 서울의 심상치않은 소식이 전해지 면서 위기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박관현 회장등 핵심 총학간부는 이 미 몸을 피했다.
밤11시께 군트럭 한 대가 교내로 진입했다. 이들은 총학간부들에게 통신점검차 들렸다고 둘러댔다. 총학생회 간부들의 위기감은 최고조 로 달했다. 그러나 곧바로 특전사병력이 정문과 후문으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피할곳이 없게 됐다. 이들은 교내 곳곳을 숨아다니다 결국 새벽1시께 공대5호관에서 붙들렸다.

M 16을 들이대며 포승줄로 묶은 뒤 무차별 구타하기 시작했다. 안경 이 깨지고 코뼈가 부러졌다. 이씨는 안경이 깨지면서 생긴 흉터가 지 금도 남아있다. 구타는 한시간이상 계속됐다. 이시간 이같은 무자비 한 구타가 교내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날 붙잡힌 학생들은 대 부분 밤을 새우며 시험공부를 하거나 건축 또는 미술 작품준비를 하 고 있었다.

같은 날밤 조선대 교내 방송국에서는 방송국 개국기념일 및 학원 자 율화를 위한 선후배간담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학교 방송국출신선후 배들이 모인자리였다. 모처럼 자리를 함께한 선후배들은 떡과 술을 마련해 놓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특전사병력이 교내로 들어온 것은 전남대와 같은 밤 12시전후. 당시 조선대생인 진호림은 방송국으로 난입하는 시간 화장실에 갔다가 체 포를 면했다.

그러나 나머지 방송국 선후배들은 모두 붙잡히고 말았 다. 진씨는 수위실에서 숨을 죽이며 하룻밤을 보냈지만 밤새 들려오 던 동료들의 비명과 구타하는 군인들의 욕설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악몽처럼 되개기게 된다 고 말한다.

잔치자리였던 방송국은 부서진 의자와 책상, 개어진 유리조각, 학생 들의 핏자국과 머리카락으로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17일밤 광주투입을 정식 명령받은 7공수여단병력은 쏜살같이 광주를 향했다. 그러나 2군에 배속된 7공수여단이 광주로 간다는 것은 계엄 령확대 이전부터 치밀하게 게획되어있었다.

광주를 향한 7공수여단 33대와 35대대는 이날 밤 12시를 전후해 전 남대와 조선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특전사병력을 군명령계통상 배 속받은 31사단전투상보를 그대로 옮겨보자

"5월 18일 02시 26분 7공수 33 및 35대대 도착과 동시 96연대재배속 (충정명령 제 1호) " 학교점령 33대대 전남대 장교 38명 사병 2백 94명 33대대 1중대 등 등 학교 체류자 체포 전남대 69명 조선대 43명 31사단 96연대는 사단잠정부대에 배속받아 호남신대 서원보건전문대 동신전문대 대건신대 서강전문대 성인경상전문대 기독간전 송원전문 대등 점령.

4개방송국은 장교 5명과 사병 80명이 점령 그러나 보고되는 과정에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7공수여단 2개대대 병력은 대략 밤 12시를 전후해 전남대와 조선대에 투입돼 새벽 2시 께 학교를 완전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7공수의 학교진입직전 31사단 병력이 학교안의 동정을 살펴공수단의 학교투입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은 앞의 두사람의 증언에서 살펴볼수 있다.

또 광주 전남지역 향토사단인 31사단장 정웅소장은 89년 국회청문회 서 계엄확대이틀전인 15일 2개공수부대 숙영지를 마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고 증언했고, 조선대에 진주한 7공수여단 35대대장 김일옥 중 령도 청문회에서 조선대에 도착하니 천막등 숙영시설과 상황전하등 통신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말해 이미 7공수의 학교투입에 맞추 사전 정지작업이 이뤄졌던 것이 입증된 바있다.

최초 광주투입공수단인 7공수여단의 여단장은 신우제 준장. 33대대장 은 권승만중령, 35대대장은 기일옥 중령이었다. 신준장은 육사 15기 의 하나회원으로 육사 11기인 전두환등 신군부핵심세력의 4기수후배 이다.

신준장은 최웅 11공수여단장(육사12기), 최세창3공수여단장(육 사 13기)과 함께 광주학살의 현장 최고 지휘관 3명중 하나로 지목돼 고소됐지만 5.18수사를 맡은 서울지검특별수사본부는 신씨를 불기소 처분했다.

물론 특전사병력이 광주에만 투입된 것은 아니었다. 특전사 전투상보 에 따르면 1980년 5월 3일 육본 작전명령12080호에 의거 9공수여단 을 수도군단에 배속시켰고 6일에는 11공수와 13공수여단을 특전사령 부 및 1여단지역으로 이동시킨 것이 나타나있다.

14일에는 육본작전 명령 0-203호에 의건 수경사에 4개공수여단, 수도군단에 1개공수여 단, 2군에 1개공수여단의 작전통제권을 이양하게 된다. 이에 따라 계엄확대 조치이후 서울 일원의 수도권과 대전 전주 광주 에는 특전사 병력이 투입되게 된다.

특이한 것은 부산지역에만 해병 대병력이 투입되는데 이는 부마사태 당시 자행된 공수단의 만행에 대한 부산 시민들의 거부감때문으로 풀이된다.

군병력의 전국대도시 주요시설무로가 대학에 대한 투입과 정치인 재 야인사 등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고 있는 가운데 5월 17일 밤과 18일 새벽은 지나가게 된다.

이날 광주시내는 고요한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18일은 일요일이었다. 시민들은 주말의 편안함과 여 유로움속에 잠들어 있었다. 시민들은 전남대와 조선대에서 은밀하게 진행되고있는 무차별적 구타와 체포 연행을 알리 없었다. 이러면서 세계사에서 그 유레를 찾기 힘든 시민항쟁의 첫날, 그 운명의 5월 18 일은 밝아오고 있었다.

제 23회 전대앞 최초의 충돌 / 피로물든 5월..광주학살 서막
 
   80년 5월19일자 全南日報(지금의 光州日報) 사회면 머리기사로 작성된 18일 오전 全南大앞 충돌사건기사를 그대로 실어본다. 이기사는 검여로 빛을 보지못했지만 당시 상황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
[학생들이 그후 손에 돌멩이를 집어들고 정문으로 접근, 계엄군에게 돌을 던지자 계엄군이 쏜살같이 달려나와 학생들을 3백m 가량 뒤쫓았다. 이때 2 명의 학생이 계엄군의 곤봉에 맞아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것 이 이날 벌어진 최초의 유혈사태였다] 기사에서 볼수 있듯이 全南大앞에 서의 충돌은 光州민중항쟁의 장엄한 시작이자, 핏빛으로 온산하를 물들게 한 光州학살극의 서막이었다.

5월18일 아침은 여느 봄날의 휴일처럼 무등산에서 떠오른 봄날의 햇살이 光州를 따스하게 안아주고 있었다. 시민들은 17일밤 일어난 일련의 사건의 전모를 알지 못한채 휴일의 노곤함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비상계엄확대와 金大中씨등 정치인 체포 소식으로 하룻밤사이 세상은 뒤바껴 있었다. 온국민의 염원인 서울의 봄은 동토의 제국으로 악몽이 되살아 나고 있었 다.

우선 18일 아침 光州시내 각대학의 분위기를 살펴보자. 계엄확대조치와 함께 풀가동된 당시 全南日報 사회부 기자들이 작성했던 18일 아침 光州시 내 각 대학정문 동정은 다음과 같다.

[朝鮮大=정문에 공수부대 7-8명이 집총하고 출입을 금지시킴. 기자가 학 교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자 일체 안된다고 함. M16과 기관총 설치. 光州교대=7-8명의 공수부대 집총. 교문앞에 블록으로 진지를 구축하고 기관총설치. 군인이 학교앞 통과차량에게 멈추지 말고 가라고 계속 신호함. 全南大=M16 집총군인 7명 출입통제. 교문앞 다리위에서 보니 종합운동 장에 대형막사 20여개 설치됨. 대학앞 상점은 거의 셔터를 내리거나 문을 닫았고 지나가는 행인도 거의 없어 살벌한 분위기] 16년전 작성된 취재수첩에서 보듯 18일 아침 아직 시내 대학교는 외견상으 로는 조용했다. 그러나 全南大앞 충돌사건은 운명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全南大에 주둔한 7공수여단 33대대(대대장. 權承萬 중령) 병력은 정후문의 출입을 일체 통제하고 있었다. 정문앞에는 [정부조치로 휴교령이 내렸으니 가정학습하기 바란다]는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오전 9시가 넘어서면서 삼삼오오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날 학 교를 찾은 학생들은 두가지 부류로 나눠 볼수 있다. 하나는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하기위해 도서관을 찾은 학생들이다.

또 한부류는 16일 도 청앞에서 열린 민주화대성회 이후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그날 오전 10시 학교정문에서 만나자}는 학생회의 호소에 따른 학생들이었다. 학생회의 {휴 교령 선포당일 오전 10시 집결호소}가 결국 장엄한 시민혁명의 시발을 가능 케해준 셈이됐다.

全南大정문에서 약 30m 떨어진 용봉교를 사이에 두고 학생과 공수부대 원들이 대치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숫자는 점점 불어났다. 학생들이 다리 를 넘어서면서 공수부대원들이 나와 밀어내는 대치상황이 한참 계속됐다. 군의 첫경고 방송이 나오지만 학생들의 구호소리가 높아져갔다. 일부학생들 은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소령 계급장을 단 장교가 마이크를 들고 앞에 나섰다. [우리는 상부 지시로 全南大에 왔다. 대학은 휴교령이 내려졌다. 즉시 귀 가하라. 그렇지 않으면 강제해산시키겠다] 장교의 말이 끝나자 정문양편으 로 공수부대원 4명씩이 2열 종대로 대열을 이뤘다. 학생들이 돌을 던졌으나 공수부대원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 M16을 등뒤로 걸쳐메고 손에는 경찰봉 보다 훨씬 긴 진압봉을 들고 있었다.

경고방송이 나가고 난뒤 1분후쯤. 스피커를 통해 돌격 앞으로라는 소리 가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순간 공수단은 1백m 달리기를 하듯 학생들을 향해 달려 들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위학생중 하나만을 지목해 끝까지 추적해 끌고 오는 집요함을 보였다. 경찰의 진압방법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 산이 대략 전10시 30분께였다.

후퇴했던 학생들이 인근 공사장에서 돌멩이를 집어들고 다시 모여들었다. 이때 2차 돌격명령이 떨어졌다. 이런식의 공방전이 수차례 계속된다. 당시 全南大인근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있던 全南高 2년생인 金영씨(현재 33세) 는 학생들을 쫓아온 공수부대원들이 全南大 인근 사설독서실까지 쫓아 올 라와 공부하는 고교생들까지 무차별 구타했다.

두눈을 치켜들고 몽둥이를 휘저으며 달려드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기에 충분했다. 목숨을 걸 고 전진해 달려드는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 재수생이었던 李수범씨(현재39세)는 학교앞에는 학생 70-80여명이 구호 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공수부대원 5-6명이 갑자기 조를 짜서 달려나오더니 학생들을 잡아 무자비하게 구타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원들 은 인근 건물로 도피한 학생들을 피가 낭자할 정도로 두들겨 팬뒤 끌고 나 왔다. 흥분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보도블록을 깨서 던졌다. 그러나 어찌나 잔인하게 행동하던지 학생들은 하나둘씩 시내로 빠져 나갔다고 술회했다.

88년 국회청문회에서 全南大교직원 徐明源씨(현재 48세)는 공수부대는 먼저 머리를 치고 양어깨를 때리는 3박자 진압을 했다고 증언했다. 공수부대원들은 3-4명씩 조를 짜 몰려다니며 청년은 물론 노인들까지 구 타하고 짓밟았다. 건물옥상과 창문에서 이를 지켜본 주민들은 그만 때려 너희 가 국민의 군대냐며 아우성쳤다.

5-6차례의 공방전을 치른 학생들은 오전 11시께 당시 중흥동 사레지오 고교 앞에 모여 토론을 벌였다. 평소 시위를 주동했던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이들은 학교에 들어갈수 없으니 시내로 진출해 시민들에게 만행을 알리자고 결의했다. 학생들의 숫자는 약 3백여명으로 불어났다. 스크 럼을 짠 학생들은 [全斗煥 물러가라] [계엄령을 해제하라] [金大中을 석방하라]며 光州시내로 내달렸다. 5.18光州민중항쟁에 불이 당겨진 것이다.

제 24회 공수부대 / 5.16이후 정치군인 사병화
 
   光州민주항쟁의 단초를 제공한 공수부대는 어떤 성격의 부대인가. 공수 부대의 성격과 군에서의 임무, 그리고 이부대의 지위관들의 권력지향성을 살펴보면 공수부대가 왜 80년5월 光州에 오게됐는지 알 수 있다.
공수부대는 창설당시부터 육군의 어느부대보다 정치적이었다. 육군에 공 수단이 설치된 것은 지난 60년. 그해 6월 全斗煥.崔世昌.張基梧.車智澈등 4명 의 대위가 6개월동안 美國 특수전 교육기관인 레인저 트레이닝 코스를 밟고난뒤 귀국했다.

이들을 주축으로 서울인근인 金浦에 우리나라 최초의 공수부대가 창설됐 다. 우리가 흔히 1공수 부대라고 부르는 부대다. 공수부대 창설의 원조격인 4명의 대위는 5.16과 12.12를 거치면서 모두 정치군인으로 성장했다.

5.16때 1공수 주변사령이었던 車智澈대위는 부대장인 朴致玉대령과 함께 공수부대를 동원, 역사의 물줄기를 朴正熙쪽으로 몰아주었다. 공수부대는 5.16쿠데타 이후 권력의 입맛에 따라 3, 5, 7, 9, 11, 13공수가 잇따라 창설되면서 70년대말까지 7개여단을 거느리는 대부대로 성장한다.

공수부대가 권력에 의해 쉽게 동원될수 있었던데는 5.16이후 공수부대의 작전통제권이 일반군병력과는 달이 미군의 작전통제권에서 사실상 벗아나면서 부터이다. 이런 이유때문에 공수부대는 부마사태나 光州항쟁, 60.70년대의 위수령선포 등 한국현대사의 결정적인 시기마다 권력의 편에 선다.

3공수여단은 80년4월 발생한 사북사태때도 동원됐다. 경찰관 1명이 사망 하고, 7여명이 부상한 사북사태를 3공수여단은 4일만에 완전진압한다.

공수부대의 대부라고 불리었던 12.12사태 당시 특전사령관, 鄭柄宙씨 (12.12사건때 부하에 의해 체포 92년 변사체로 발견, 그러나 사인에 아직도 의문이 많다)는 지난 88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공수부대는 집권자로서 아주 써먹기 좋은 부대다. 기동성이 있고 경량화되어 있어 간편한 부대인데다, 전투력 또한 일당백 아닌가. 더구나 일선보병부대를 빼낼때처럼 미군과의 절차문제를 신경쓸 필요도 없다]고 증언했다.

공수부대 창설요원 4명의 면모는 바로 공수부대의 정치지향성을 단적으 로 드러낸다. 全斗煥은 대통령까지 지냈으나 결국 권력에의 탐욕 때문에 옥 살이를 하고 있으며, 車智澈 또한 유신정권의 호위대 역할을 하다 비명에 가고만다. 육사 12기인 張基梧는 특전사 작전차장, 5공수여단장, 특검단장, 교육사령관을 거쳐 중장으로 예편, 5공때 총무처장관을 지내는등 승승장구 했다.

崔世昌은 3공수여단장으로 5.18당시 光州에 출동한 5.18현장 지휘책임자 중 사람이다. 육사 13기인 그는 12.12사태당시 자신의 직속상관인 鄭柄宙 특전사령관을 총격으로 체포하는 창군이래 유례가 없는 하극상을 저질렀다.

87년 2월 全斗煥 퇴임후 포석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군장성인사에서 합참 의장에 기용됐으며, 6공때는 국방장관에까지 오른다. 崔씨는 검찰의 12.12와 5.18수사 구속되지만 그가 구속된 것은 5.18보다는 12.12당시 자신의 상관 을 체포하고 부관인 金五郞소령에게 총격을 가한 혐의가 짙다.

5.18당시 특전사령관은 육사11기 하나회 출신인 鄭鎬溶 소장이었다. 작전 참모는 全斗煥의 핵심측근이자 12.12사태 당시 신군부의 지휘소였던 30경비 단의 단장을 지낸 張世東 대령이었다. 鄭사령관은 자신의 육사동기가 중심 이 돼 일으킨 12.12사태로 인해 12월13일 있었던 장군인사에서 힘있는 지휘 관인 특전사령관으로 전격 기용된다.

서울의 봄, 온국민이 들떴을때, 공수부대는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5.17계엄확대조치로 출동한 계엄군 가운데 공수부대의 움직임만을 따로 재 구성해본다. 金鍾煥내무부장관은 5울14일 국방장관과 李熺性계엄사령관에게 시위진압을 위한 계엄군 출동을 요청했다. 李계엄사령관은 이에따라 14일 특전사령관에게 특전사 6개여단을 소요사태 진압에 투입할 준비를 하도 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미 5월8일 포천에 주둔한 13공수여단을 서울 거여동 3공수여단 주둔지로, 10일 강원도 화천국 오음리에 주둔하고 있던 11공수여단은 김포1 공수여단 주둔지로 각 이동했다.

육본은 18일 새벽 2시30분께 전국 92개 주 요대학과 국회를 포함한 1백36개 보안목표에 계엄군을 배치했다.

서울지역 은 수경사작전통제하에 1공수여단이 연세대.명지대에, 5공수여단은 고려대, 11공수여단 동국대, 13공수여단 성균관대 서울의대, 9공수여단은 서울대에 배치하는등 5개공수여단이 동원됐다. 운명의 7공수여단은 각각 2개 대대씩 大田과 光州로 분산 배치됐다.

18일 오전 7공수여단 33대대와 학생들간의 全南大앞 충돌소식은 곧바로 서울로 알려졌다. 오후 2시께 공수부대의 추가투입명령이 떨어졌다. 鄭鎬溶 특전사령관은 11공수여단을 파견부대로 결정했다.

이날 오후 3시30분께 鄭 사령관은 11공수여단이 주둔하고 있는 동국대학교를 찾아 崔雄 11공수여단 장을 만났다. 鄭사령관은 [光州에 7여단 2개대대가 계엄군으로 나가있으나 고전하고 있다. 光州에 가서 7여단을 도와 임무수행을 잘하라]고 지시했다.

崔雄여단장은 이후 81년 사단장, 82년 특전사령관, 84년 군특별검열단 장, 5.6공 기간동안 파키스탄 대사까지 지내는등 5.18의 덕을 톡톡히 보게 된다. 이지시에 따라 1공수여단이 증파되며, 또다시 19일에는 3공수여단이 光州로 향한다.

그러나 11공수증파가 결정된 시점이 18일 오후 2시께라는 점에서 우리는 중대한 사실을 발견할 수있다. 18일 오후 2시라면 全南大앞에서의 충돌이후 공수부대는 직접 시위진압에 나선적이 없었다. 시위진압도 하지 않았는데 [고전하고있다]라는 鄭사령관의 말이 공수부대의 추가투입을 미리부터 예상하고 있었지 않았느냐란 의문을 던진다.

제 25회 11공수의 증파 / '사전계획설' 낳은 초강경진압
 
   80년 5월 18일 오전 全南大 앞에서 벌어진 학생들과 7공수 33대대 공수부 대원들과의 충돌은 이내 光州시민들 사이에 급속히 전파되면서 종전과는 다 른 흥분이 감돌았다. 오전 10시 30분 全南大후문쪽에서는 시내버스안에서 후문앞 공수부대원 들에게 야유를 보내던 학생들이 버스를 강제로 멈춘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질질 끌려내려 진압봉으로 난타당했으며 이사실은 시내버스가 시내중심가로 이동하면서 삽시간에 전파됐다.

이를 직접 목격한 부녀자들이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모습에서 청.장년들은 격분했고 벌써부터 도청앞 집결을 외치는 시민도 있었다. 시민들은 아직 이틀전 장엄한 횃불시위의 감동이 꺼지지 않은 상태인데다 수차례의 민족민주학성회에서 대학생을 집중적으로 잡아가려한다는 사실 을 직감적으로 감지하고 너나할것 없이 흥분했다. 12시께 錦南로에는 벌써 1천여명의 학생.시민이 모여 구호를 외쳐대기 시 작했다. 어디서 만들었는지 계엄해제라는 플래카드도 등장했다.

시위대는 錦南로3가 가톨릭 센터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페퍼포그에 밀려 중앙 로로 꺾어진 다음 때마침 忠錦지하상가 공사로 자갈이 나뒹굴던 중앙로에서 일제히 돌을 집어들어 忠壯로 파출소를 향해 내던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유리창이 박살나고 내부에 있던 경찰들이 옥상으로 대피했다.

파출소 습격은 80년대 민주화시위과정에선 흔한일이었으나 당시까지만 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여순반란사건이나 빨치산 전투때 지서나 경찰 서 습격사건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던 시민들은 자신들의 파출소 공격이 비록 우발적인 것이었다고는 하나 그것이 5월 17일까지 광주에서 벌어진 시 위들과는 분명히 다른 성격의 시위라는데 급박한 긴장과 흥분에 휩싸였다.

일단 불붙은 시위대의 군중심리는 경찰에 대한 계속된 공격으로 이어졌 다. 낮 12시 45분엔 山水동 파출소가 습격을 당했고 黃金동학생회관 앞에서 는 도시락을 먹던 경찰들을 시위대가 기습, 경찰이 도주하자 페퍼포그 차 에 불을 질렀다. 이때 이미 錦南로 시위군중은 1천 5백명, 忠壯로 골목골목 에는 1천 6백명의 시위대가 경찰을 향해 음료수 병과 돌을 던지며 시위의 강도를 더해갔다.(시위대수:95년 7월 18일 검찰수사기록)

7공수 33대대로부터 全南大앞 시위상황을 보고받은 계엄사는 잇따라 광주 시내 전역에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시위대에 군병력을 투입 할 것을 지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군병력이란 시위진압을 위해 계엄군자격 으로 光州에 온 제7공수의 33.35대대를 의미한다.

계엄사의 군병력 시내 시위대 투입지시는 따라서 李熺性 계엄사령관-->尹興禎 전교사사령관-->鄭雄 31사단장-->7공수 33대대와 35대대로 이어 지는데 이는 7공수 光州투입 당시 작전지휘권이 31사단에 위임되었기 때문 이다.

이대목에서 鄭雄 31사단장에게 곤혹스런 사실이 나타난다. 공수부대의 시위진압을 끝까지 반대한 의로운 군인이란 칭호로 국회의원까지 당선됐던 鄭31사단장은 기실 5월 18일 오전에는 계엄사의 명령계통에 따라 충실히 공 수부대의 錦南로 투입을 지휘한 장본인인 것으로 검찰은 밝히고 있다.

수사기록에 의하면 鄭雄31사단장은 尹전교사 사령관의 지시를 받고 오후 2시 5분 500MD헬기로 全南大와 朝鮮大를 방문, 주둔중이던 7공수 33.35대 대장에게 지금 시내 시위가 악화돼 경찰이 수세에 몰리고 있으니 오후 4시 를 기해 35대대는 금남로를 중심으로 좌.우측 도로를 차단하고 33대대는 도 청방면으로 압축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라고 명령한 것으로 되어있다.

鄭 31사단장은 이 명령을 내려놓고 부대로 돌아와 尹전교사 사령관에게 오후 4시 군을 투입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李熺性 계엄사령관은 光州현지의 전교사 31사단 명령계통에 군을 투입하라고 지시한 것과는 별도로 이날 낮까지 별도의 공수부대를 光州에 추가투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오전9시부터 잇따라 보고되 는 7공수 33.35대대의 대학생 시위 진압소식을 접한 李사령관은 두 대대 병 력이 6백명에 불과해 추가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 金在明 작전참모부장에 게 1개공수여단의 光州증파를 지시하는데 金은 곧 공수부대의 수장 鄭鎬溶 사령관에게 추가투입부대 문제를 상의한다.

鄭鎬溶이 11공수를 지정한 것 은 언급한바와 같다. 이때 시각이 오후2시. 아직 光州에 있는 계엄군 공수부 대 2개대대를 시위대에 투입해보지도 않은 시각에 11공수의 증파가 결정된 것이다. 바로 이점이 5.18 사전게획설의 강력한 근거가 되고 있다. 듣기에도 소름끼치는 光州유혈 사전계획설은 그나름의 근거를 갖고 그동안 꾸준히 운위되어 왔지만 아직 그 진위는 확실히 밝혀지진 않았다. 사전계획설은 11공수의 납득키 어려운 증파에서 보듯 光州를 잔인하게 진압, 시민 폭동을 유발시킴으로써 계엄의 정당성을 내세우고 신군부 공포정치의 일단을 보임으로써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압하려 했다는 내용으로 지난 16년간 떨치지 못해온 의심으로 남아있다. 더욱이 金大中씨를 정치적 분출구로 삼아온 호남, 그중에서도 光州가 金 大中씨 연행에 격렬히 저항할 줄 뻔히 알면서도 살상 진압을 감행한 사실은 이 소름끼치는 [설]의 타당성을 부여하는 대목이었다.

또한 全斗煥의 동기생으로 12.12과정에서 이렇다할 공이 없는 鄭鎬溶이 鄭柄宙 특전사령관의 자리를 차고 앉아 신군부의 집권에 주도적 역할을 담 당하기 위해 공수특전부대의 계엄업무를 필요이상으로 강경하게 진행한 결 과가 光州의 비극을 낳았다는 관측도 있다.

5월 18일 光州와 영원한 악연을 맺게되는 鄭鎬溶 특전사령관은 金在明 작전참모부장으로부터 공수부대 光州증파작전을 듣고 곧 東國大에 주둔중 이던 11공수 崔雄 공수여단장을 방문하고 光州에 7여단 2개대대가 나가 있으나 고전하고 있다.7여단을 도와 임무수행을 자하라고 지시한다.

崔는 즉시 여단 작전참모와 61대대 1지역대 병력을 선발대로 차출, 성남 비행장을 출발해 光州로 보내고 61대대 나머지 병력과 62.63대대는 오후 5 시 청량리 역 출발 光州행 열차로 출동시킨다.

이제 고된 충정훈련과 공수부대 특유의 악에 받친 이땅의 젊은 병사들은 그들이 앞으로 하게 될 일이 그들의 인생과 국가의 장래, 나아가 민족의 역사에 어떤 일을 초래할지 짐작도 하지 못한채 완전군장 차림으로 밤열차에 몸을 싣는다.

제 26회 무차별 진압 / 돌격앞으로 피튀기는 진압봉
 
   23-24세 가량되는 여성은 상의가 피투성이가 된채 갈기갈기 찢겨져 있고 하의는 완전히 벗겨진 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리를 꼬아 국부를 가린 상태로 트럭위에 세워놓고 공수부대가 장난질을 했다... (김영택 저: 10일간의 취재수첩)
소요진압간 지역주민의 환시리에 폭동주민과 격렬한 충돌 발생, 해산보다 체포 주안, 도피군중 체포과정에서 기물파괴, 가족위협에 대한 야만적 증오 감정유발, 소요진압간 발생된 사상자의 장기노상방치로 시민들의 감정 폭발...(육군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광주소요사태분석)

...5월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에서부터 시작된 공수부대의 진압형태는 단순히 시위를 해산시키거나 주모자를 체포하기 위한 진압이 아니라 시민들이 보는가운데 닥치는대로 초죽음이 되도록 두들기고 발로 짓이겨 피투성이 가 되면 2-3명이 한조가 되어 질질 끌고 학교안으로 들어갔다.

이날 오후부터 시내일원에서 작전을 시작한 공수부대는 시위대만을 상대 로 진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버스를 세워 그안에 타고 있던 젊은 청년들을 무조건 끌어내려 구타하고 실신하거나 개인적 방어자세를 포기하 면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태워 보냈다.

뿐만아니라 이런 광경을 보다 못해 말리거나 나무라는 주위의 나이 든 노인네들까지 곤봉으로 가차없이 머리등을 구타하여 실신시켰으며 연행자를 태울 트럭이 미처 도착하지 않으면 붙들린 청년들을 피투성이가 되게 한후 다시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힌채 도로에 무릎을 꿇려 앉혀놓았다.

심지어 시민들이 보는 가운데 여학생들의 옷을 찢어발기는 등의 행위까 지 서슴지 않았고 특정한 대상이 없이 닥치는대로 붙잡아 곤봉으로 두들겨 패고 군화발로 짓이기고 했다...](鄭東年: 5.18고소인 조사에 대한 진술서)

京畿도 城南비행장에서 11공수 지역대 병력이 光州로 공수되고있던 시 각, 光州의 全南大와 朝鮮大에 주둔하고 있던 제 7공수 33대대와 35대대는 5월 18일 16시 00으로 정해진 시내시위대 진압작전 계획에 따라 이동을 시 작한다.

15시 35분 全南大를 출발한 33대대는 트럭으로 柳동3거리에 도착, 北동 180번지 앞 횡단보도, 즉 錦南로의 끝부분으로 이동해 1천여명의 시위대와 대치한다.

또 朝鮮大를 출발한 35대대 병력은 오후 4시 제봉로 光州전화국 앞과 光 州일고 앞에 포진, 시위대를 향해 자진귀가하라는 선무방송을 시작한다. 마침내 오후 4시 정각 양 대대장은 무전교신과 함께 동시에 진압명령을 내린다.

[돌격 앞으로!]

구호와 함께 공수대원들은 마치 1백m경주선수와도 같이 허리를 낮춘자 세로 쏜살같이 진격, 시위군중을 향해 진압봉을 내려치기 시작한다. 비명소 리와 함께 1천군중은 낙엽처럼 흩어져 달아났지만 공수부대원들은 목표한 시위대 1명씩을 끝까지 추격, 한손으로 허리춤을 쥔 채 진압봉으로 머리통 을 내려치는 가공할 진압을 실시했다.

[공수부대원들은 M16 소총을 등 뒤로메고 손에는 진압봉을 든 상태에서 鎭壓隊形을 유지하여 도청방향으로 진군, 시위대를 압축해 나가다가 돌격 명령이 내리면 함성을 지르며 시위대를 항하여 돌진하면서 진압봉으로 打 擊하는 방법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는데 시위대의 投石으로 부상자가 발생 하자 흥분한 공수부대원들은 인근 점포나 골목, 건물 안까지 추적하여 시위 대를 체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와 시민들을 진압봉 으로 가격하고 도주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체포된 시위대의 상의나 하의, 혁 대를 벗기거나 머리를 당에 처박게 하는 등 기합을 주기도 하였음] (95년 7월 18일 검찰발표 수사기록)

光州일고 앞에 배치된 35대대 공수부대원들은 공용터미널 쪽으로 진격, 시위대중 상당수는 터미널 안으로 대피했다. [수창국민학교 앞에 당도하니 공수들이 5열횡대로 차도를 막고 있었다. 그들은 총을 비스듬히 메고 곤봉을 총검술 자세로 받쳐든 채 지희관의 호루라기 소리에 한발 한발 움직이고 있었다. 20-30명의 학생들이 그들을 항해 돌을 던졌다. 그때였다. 지휘관의 긴 호루라기 소리를 신호로 공수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길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무자비한 살상을 시작했다.

나는 데모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무원인 신분을 믿고 계속 구경하고 있었 다. 그때였다. 뒤족에서 들리는 요란한 군화발 소리에 놀라 돌아다 보았다. 수십명의 공수들이 나를 향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나는 학생이 아니오, 나는 공무원이오하고 황급히 외쳤으나 그들은 곤봉을 내리치고 발길질을 해댔다. 나는 그들의 곤봉에 머리를 맞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구술: 김정섭, 현대사사료연구소 조사. *여기서 김씨는 이시각을 오후 1시께로 구술하고 있으나 작전상황으로 보아 오후 4시직후 일 듯) 작전개시 15분만에 1천여 군중은 태어나 처음보는 무지막지한 진압에 와 전히 해산된다.

그러나 공수 33.35대대의 공식시위진압이 있기 1시간 전부터 이미 중심 지인 錦南로를 주변으로 그랜드호텔앞, 全南여고 후문앞, 동구청 뒷길등에서 는 분대규모의 공수부대원들에 의한 시위진압이 산발적으로 있었다. 그것은 시위진압이라기 보다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한 역시위와도 같은 양상이었다. 오후 3시 30분 錦南로 2가 상황.

[관광호텔안의 이발관에 있는데 밖이 소란스러워 종업원들과 함께 나가봤다. 광주은행 본점 앞에서 1백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데모를 하다 공수들에게 밀려 도망가고 있었다. 뒤쫓아간 공수들이 30-40명의 시민.학생을 동 구청과 관광호텔앞으로 붙잡아 왔다. 공수들은 붙잡혀온 시민.학생의 옷을 벗게 한후 팬티만 입혀 구타와 기합을 주고 머리를 땅에 처박게 했다.] (구술: 김후식, 현대사사료연구소조사)

이때 이미 雙村동의 전교사에는 鄭鎬溶 특전사령관이 도착, 육사선배인 尹興禎사령관에게 시위 강경진압 필요성을 강변하고 있었다. 7공수의 선발 대인 지역대가 성남비행장에서 C-54수송기로 光州에 투입됐는데 鄭은 여기 에 동승했던 것으로 보인다.

鄭은 尹사령관에게 ...계엄확대에도 이렇게 소요가 계속된다면 계속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습니가? 차라리 게엄군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초기에 군중심리를 가라 앉혀야 옳지 않겠습니까? 계속해서 鄭은 그런데 光州시내 기관장들이 대책을 협의하는데 이번 光 州시민이나 학생들 데모가 오히려 정당한 것인양 분위기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말.1988 5월호) 鄭鎬溶은 이렇게 공수대원의 초기투입 강경진압 당위성을 정식 작전지휘 채널의 尹장군에게 강조했다.

제 27회 분노한 시민 / 무자비한 진압 시민 항쟁유발
 
   18일 오후 4시를 전후해 시작된 7공수 33대대와 35대대 병력의 금남로 시 위진압은 시민들의 가슴에 분노의 불을 당겼다, 시민들은 서로의 목격담을 숨죽여 나누며 공분에 치를 떨었다. 시간이 갈수록 光州시내는 뭔가 곧 폭 발할 것같은 폭풍전야의 분위기로 팽팽한 긴장감이 더해갔다.
시민들은 이대로 당할수만은 없다는 無言의 연대로 뭉쳐져갔다. 공수부대 의 잔인한 진압은 오히려 시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했 다.

암울한 유신의 종말과 서울의 봄에도 불구하고 당시 우리의 민주화 수준 은 걸음마 단계였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저항에 움츠려왔던 시민들도 형 제, 자식인 젊은이들의 고통에는 하나가 될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이 시작됐다.

光州항쟁이 일부 학생들의 소극적시위에서 대규모 시민항 쟁으로 변해간 전환점이었다.

당시 光州시청상황일지를 그대로 옮겨본다. 5.17 이전의 학생가두시위에는 시민들이 냉담한 반응을 나타냈으나 5.18 에는 금남로등 시내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때리고 짓밟고 찌르는등의 잔인한 행동을 시민들이 보고 놀라움을 금치못하고 있음.

일부 시민들은 군인들이 경상도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경상도 사람들이 난동을 부린다고 격분하였고, 일부 부녀자는 내자식도 어디가서 저렇게 맞고다닐 것이다하고 울면서 칼에 찔린 청년들을 노상에서 치료해주려고 하였음(군인들이 방해).

특전대원들이 전라도 새끼들 씨를 말려버려야 한다면서 청년들을 폭행한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음. 거부장옥상에서 구경하고 있던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투석하자 군인들이 거부장으로 들어와 3명을 연행한 사례로 보아 일부 시민들이 학생편에 가담할 우려가 있음

이 시청상황일지는 당시 시민들의 심상치않은 동요를 그대로 기술하고 있 다.

전남대 정.후문에서의 피의 진압과 금남로 살육소식에 시민들은 휴일의 나른함을 떨치고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시민과 학생이 하나가 되어갔다.

18일 시위양상은 오후 4시 7공수의 금남로 시위진압시기를 전후해 파출소 등 공공기관에 대한 방화와 투석, 화염병의 등장, 경찰력이 시위대에 밀리 는등 적극적인 양상으로 변해갔다. 全斗煥 물러가라 金大中 석방하라는 정치구호가 시민들의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나오기 시작했다.

금남로에서의 시위가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하자 일부 시민과 학생들은 수백명씩 무리를 지어 태평극장과 光州공원을 중심으로한 光州천일대, 통행 인이 많은 공용터미널일대, 동명동.지산동등 주택가 일대에서 산발적인 시 위를 계속했다. 시민들이 가세한 시위는 서울의 봄 당시의 대학생들만의 시 위와는 달랐다.

오후 4시40분 시위대 3백여명이 지산동파출소에 투석한 뒤 방화하고(전교 사 작전일지), 오후 5시에는 전경 40여명이 시위대에 붙들리기도 했다. 경 찰관이 시위대에 붙들린 것은 光州항쟁 기간동안 이때가 처음이다.

시위대는 전경을 붙잡아두고 경찰버스에 불을 지르는등 기세를 올렸다. 경찰력이 시위대에 밀리기 시작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를 전후해 동명동.지산동. 산수동파출소가 잇따라 피습당하고, 흥분한 시민들은 光州시장 관사에도 돌 을 던졌다. 시민들의 분노가 어울린 적극적인 공세가 시작된 셈이다. 당시 全南大 총학생회 홍보부차장이었던 李광호씨(당시 21세)의 증언.

농장다리쪽에서 경찰차를 포위한 시위대가 40여명의 전경을 인질로 잡았다. 우리는 경찰의 허리끈, 방석모, 곤봉등을 빼앗은후 그들을 앞세우고 약1km 가량 떨어진 장동로터리로 갔다.

이들을 넘겨주고 대신 연행학생들을 석방시켜 달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장동로터리에 도착했을때 공수들이 곳곳에 무리지어 있었다. 우리제의에는 대꾸도 않고 곤봉을 휘두르 며 진압에 나섰다.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우리는 그때 경찰인질을 놓치고 말 았다 (한국현대사 사료연구소편, 光州5월민중항쟁사료전집에서 발췌)

시민들은 공수부대와도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치른다. 일방적으로 밀리고 쫓기기만한 시위에서 직접 마주서는 양상이 된것이다. 수적으로 열세인 공 수부대는 과격진압으로 시위대를 위협했지만 시위대는 점점 늘어가기만 했 다.

오후 6시께 계림동 光州고 부근에서는 시민학생 3백여명이 운집, 공수부 대와 충돌 20~30분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공수부대를 산수동방변 으로 후퇴하게 하는등 공방전의 양상이 光州시내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시위대에 의해 공수부대의 반격으로 순식간에 공포지대로 돌변했다.

이런 와중에 오후 5시 50분 11공수여단 선발대인 61대대 1지역대가 光州 공항에 도착했다. 그들은 숙영지인 조선대로 이동하면서 시내 상가지역에서 위력시위를 감행했다. 오후 6시 11공수여단 3개대대를 19일 새벽 0시를 기 해 31사단장이 작전통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1개 공수여단이 光州로 증파된 것이다.

全南北 계엄분소는 오후 6시 계엄공고 4호를 통해 光州시내 통행금지시간을 밤 9시부터 새벽 4시까지로 연장했다. 통행금지시간연장을 알리는 공고문이 시내곳곳에 나붙었다.

光州의 정신적 지도자인 尹恭熙대주교가 직접 쓴 5.18 비망록중 18일 상황을 보자. 계림동 성당에서 견진성사를 주고 숙소가 있는 학운동 까리따스 수녀원으로 돌아왔다.

계엄령확대와 포고령에도 불구하고 가두시위가 산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거리에는 시위대와 계업군간의 충돌이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마침 카톨리센터 6층에 있는 교구청에 기거하는 李영수 신부가 계업군의 잔혹한 행위를 목격하고 도경찰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계엄군의 이성을 잃은 행위에 대해 엄중항의 하였는데 도경국장은 경찰은 절대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李신부가 내게 전화로 이 문제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어왔을때 갑자기 무어라 대답할수가 없었다. 어떻게 할것인가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광주일보 89년 5월 16일)
尹주교의 상념의 깊이만큼 光州는 대항쟁의 심연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제 28회 공용터미널 광고앞 공방 / 시위대 포위 '찔러총'공격  
 

   18일 오전 11시이후 오후 6시무렵까지의 낮동안 학생과 시민이 가세한 시 위대는 光州시내 곳곳에서 공수부대와 격렬한 공방전을 벌인다. 이중에서도 경찰력이나 공수부대와 직접적으로 맞붙은 곳은 대략 15군데 정도이다.
계림동 光州고앞, 계림극장, 지산동파출소, 동명동파출소, 동명동 구 도교 육위원회(지금의 과학관), 장동로터리, 구 공용터미널(지금은 광주은행 본점 신축중), 한일은행앞, 광주일고앞, 학생회관, 황금동 구시청사거리 일대등이 다. 이중에서도 18일 중 가장 치열한 공방전이 치러졌고 많은 부상자가 난 곳은 역시 구 공용터미널일대와 계림동 光州고앞 시위에서였다.

공용터미널과 光州고앞 시위는 이후 10일동안 전개되는 5.18 전과정을 통 틀어 중요한 기폭제역할을 하게된다. 공용터미널은 湖南의 중심도시인 光州 와 인근 시.군을 연결하는 통행로로, 이곳에서의 시위와 참혹한 진압은 光州 시민들과 같은 정서를 가진 湖南지역민들에게 분노의 불을 붙이기에 충분 했다.

더구나 이날은 5월들어 세번째 맞는 휴일로 볼일을 보거나 결혼식에 참석 하기 위해 光州를 찾은 湖南지역민들이 많았다. 이들은 직접 목격한 공수 부대의 만행을 그대로 이웃들에게 전해주었다. 5.18이 全南과 全北지역으로 확산되는 기폭제가 된것이다.

光州고등학교앞 시위도 그런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최초의 충돌지점은 光州고앞이었지만 인근에 光州최대의 재래시장인 대인시장이 있었다는 점이 다.

잔인한 진압방법을 본 시장상인들 사이에서는 6.25때도 이러지 않았다 나라지키라고 세금냈더니 이제는 국민들을 죽이고 있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이후 5.18 전기간동안 이곳 시장상인들은 모두 철시하고 장엄한 항쟁의 대열에 나서게된다. 특히 재래시장 상인들의 전파력은 무서웠다.

더구나 공용터미널과 광주고앞은 바로 다음날 벌어지는 공용터미널에서의 학살과 최초의 사건으로 본격적인 시민무장항쟁을 가져오기도 한다. 18일 오후 3시무렵, 공용터미널광장에는 자갈을 가득실은 경남번호판의 트럭이 한대 서있었다.

금남로와 충장로 일대에서 밀린 시위대는 그차량을 끌어다 광장 한가운데 세우고 불을 질렀다. 공수부대에 위축된 시위대의 열기를 높이고 돌멩이를 쉽게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잠시후 공수부대가 시위대의 전면과 후면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피하려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총검술하듯 찔러총자세로 공격해오는 공수부대의 대검에 전면과 후면ㄹ에서 미처 피하지 못한 시위대가 찔리고 말았다.

시위대중 일부가 공용터미널안으로 도망쳤다. 곧 뒤쫓아간 공수부대는 밀 폐된 터미널안에 최루탄을 터트렸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유 리창을 깨고 달아났다.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 진압봉에 난타당한 사람들의 신음소리로 터미널안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인근 북동, 유동, 대인동일대의 주택가를 뒤져가며 청년들을 무조건 두들겨 패고 연행해갔다. 시민들은 분 노로 얼어붙었다. <남풍출판사 刊 광주민중항쟁 비망록중에서 발췌>

비교적 객관적으로 작성된 광주시청 상황일지를 인용한다. 당시 동사무 소등 행정력을 통해 작성된 자료란점에서 중요하다. 18일 오후 3시45분, 금남로에서 군인들에게 쫓긴 학생들이 북동쪽 민가에 잠입하자 군인들이 가정집을 수색하고 대학생으로 보이는 장발청년과 여자를 마구때리고 대검을 찌르는등 난폭한 행동을 한후 차에 실어 강제 연 행함

공용터미널에 이러 오후 6시께 광주고 부근에서 청년.학생 수백명이 공수 부대와 충돌했다. 이들의 손에는 어느새 자위를 위한 각목.쇠파이프.식칼등 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무차별 난타로 시위대는 쓰러지며 사 방으로 흩어졌다. 공수부대는 광주고앞에서 수 km 떨어진 산수동.풍향동일 대에 대한 공포의 수색을 해갔다.

당시 친구 아이 돌잔치에 갔다오다 부상당한 李장의씨(당시 30세)의 증 언이다. 광주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계림동 동원예식장 앞을 지나다보니 거리에 공수부대원들이 쫙 깔려있었다. 두려움을 느낀 나는 빠른 걸음으 로 그 앞을 지나쳤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저놈 잡아라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처럼 달려든 공수부대원들이 이렇다 말한마디 없이 곤봉으로 때리고 대 검으로 4군데나 찔렀다
<현대사사료연구소편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중에서>
그러면 18일 오후중 군부대의 움직임을 설명해주는 특전사 전투상보와 전 교사 상황일지등을 그대로 옮겨본다.


*오후 1시30분 2군사령관 작전지도차 내방
*오후 3시 계엄군 장교 38명 사병 2백94명 투입, 시내 진압작전 실시(7공수)
*가톨릭센터 33대대 충장로 35대대
*학생회관부근 페퍼포그 차량 1대전소(전교사 작전일지)
*오후 3시40분 7공수 33대대 가톨릭센터 투입, 가두데모대 강력저지 및 분산(31사단 전투상보 및 특전사 전투상보)
*오후 33시50분 7공수 35대대 충장로 출동(특전사 충정작전보고)
*오후 4시 33대대 금남로 이동 35대대 충장로 이동(특전사 충정작전보고)
*오후 4시30분 33대대 작전완료 1백3명 체포, 31사단 헌병대에 인계(특전사 충정작전보고)
*오후 4시48분 전투교육사령부에 제 11여단 선발대 도착, 장교 45명 사 병 2백13명(전교사 작전 상황일지)

18일 하룻동안 빛고을 光州를 온통 핏빛으로 물들인 공수부대의 작전은 오후 7시 표면적으로는 종료됐다. 공포에 질린 시민들의 종종걸음으로 光州 5월의 밤은 훨씬 빨리 다가오는듯했다. 이시간 光州시내에는 엄청난 폭발 성을 가진 갖가지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었다.

제 29회 유언비어의 진상 / '약물설' '전라도씨말리기'파다 시민들 흥분
 
   18일에만 40명이 죽었고 금남로는 피바다가 되었다. 군인들이 여학생들의 브래지어까지 찢어버렸다. 공수부대들이 대검으로 아들딸을 난 자해 버리고 브래지어와 팬티만 차게 한뒤 장난질을 한다.
공수부대가 몽둥이로 머리를 무차별 난타, 눈알이 빠지고 머리가 깨졌다. 한신대 학생 한명이 다쳐서 죽었다. 학생들 50여명이 맞아 피를 흘리며 끌려 다니고 있다.

계엄군이 출동해서 장갑차로 사람을 깔아죽였다. 카톨릭 센터 앞에 시체 6구가 있다. 진압군은 모두 경상도 군인이다. 광주사람 70%를 없 애도 좋다는 명령을 받앗다고 한다. 전라도 씨를 말리려 왔다고 한다. 계엄군에게 흥분제나 독한 술을 먹였고 군인들의 수통에는 술이 들어 있다

5.18 첫날 광주시내를 휩쓸던 유언비어의 주요내용이다. 공수부대 약물설과 전라도 씨말리기설은 5.18초기 광주시민들 사이에서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지금의 관점으로 볼때는 잘못 알려진 것도 없지 않지만 당시의 상황은 이런 유언비어가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이같은 소문은 공수부애의 잔혹한 진압과 언론의 침묵때문이었다.

5월19일자 전남일보(지금의 광주일보)의 사회면 머리기사는 광주시 일원 통금연장이었다. 여기에 어리둥절.... 바쁜 귀가와 금남로 차량 통행 통제라는 제목의 기사가 각각 5단 크기로 게재돼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이유나 18일의 시위상황에 대한 내용은 전혀 언급돼 있 지 않았다. 이같은 상황은 전국 어느 신문이나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광주에서의 시위가 왜곡된채 언론에 나온 것은 4일이 지난 22일부터였 다.

5.18당시 기동타격대로 활동했던 김현채씨(당시 19세. 식당종업원) 의 증언이다.

18일 오후 조대앞 철도 건널목 부근을 친구와 함께 지나고 있었다. 이부근 술집 여기저기서 공수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공수들이 너희들 어디 가는거냐라곡 물어와 현상소에 간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친구가 제대로 제대로 답을 못하지 꼬투리를 잡았다는듯이 주먹과 발길질을 해댔다. 총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찍고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공수들은 술을마셔서인지 눈이 충혈돼 있었다. 함께 술을마시던 공수 중위가 그만두라고해 간신히 도망쳐왔다

김씨의 증언을 통해 볼때 최소한 공수부대는 작전투입전은 알수 없지만 작전도중에 술을 마셨다는 것이 확인된다. 충혈된 눈으로 끝까지 추적해가는 공수부대의 집요성이 공수부대 환각약물복용이란 유언비어로 유포됐으리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 깅영택씨가 쓴 10일간의 취재수첩의 18일 상황을 인용해본다. 그가 직접 목격하고 쓴 글이라는 점에서 믿을만하다.

18일 오후 금남로 서석병원 앞길에서의 일이다. 22,23세 가량의 아가씨가 눈뜨고 차마 볼수 없는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여자로서 상상 할수 없는 치욕이었다. 하얀 가운 스타일의 웃옷은 피투성이가 돼 갈 기갈기 찢겨진채 걸쳐져 있었고 아랫도리는 완전히 벗겨져 있었다.

군인들은 이 여자를 트럭에 올려놓고 악을 쓰거나 낄낄 웃고 있었다. 심 지어는 좋다라고 소리치며 우롱도 했다. 이때 40대 남자가 이아가씨에게 하얀 가운을 던져 주다가 붙들려 몽둥이 찜질을 당하기도 했다

공수부대는 시위대를 위력으로 제압하는 과정에서 옷을 벗겨버리는 효 과적인(?)방법을 동원했는데 이를 여성들에게까지 적용했던 것이다. 이같은 공수부대의 진압방법은 시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겉 잡을수 없을 만큼 부풀어갔다.

더구나 광주에서의 살상에 침묵하고 있던 언론으로 인해 시민들은 진원지를 알수 없는 갖가지 유언비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5.18이 끝난지 5년이 지난 85년 국방부가 발표한 광주사태의 실상 중 유언비어 부분을 인용해본다. 국방부는 5.18초기단계 광주에 광범위 하게 퍼져있던 공수부대 관련 소문들이 시위주도 학생들에 의해 조작돼 시위와 무관한 시민들을 격분케 했다는 학생들에 의한 의도적 유포설을 주장했다.

유언비어의 유통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10대들의 말초신경 자극에서부터 중년층의 격분,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대계엄군 투쟁의식 유발등으로 연결되는 계획적인 일면을 찾아볼수 있다. 물론 이런 유언비어는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광주사태 사망자에 대한 검 시결과 18일 사망자는 없었으며 더구나 총사망자 1백91명 가운데 칼에 찔려 사망한 여자는 단 한명도 없다. 더구나 대한민군 군부대내에 어 느 특정지역 출신자로만 조직된 부대는 존재하지도 않고 또한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보면 당 시 유포됐던 유언비어는 학원소요를 배후조정한자들이 군에 대한 일반 적인 상식도 없는 (군미필자) 불순분자가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유포 한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현역장교출신인 오윤수씨가 쓴 군부정치여 안녕 (길한문화 사刊)에 기록된 광주투입 공수부대원들의 증언을 살펴보자. 직접 광주 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의 증언은 국방부의 학생의도적 유포설이 잘 못됐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우리는 경찰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경찰이 쫓기고 있는 곳으로 달려가 곤봉으로 두들겨패고 군화발로 이단옆차기를 하면서 반항을 못하게 두들겨팼다. 그리고 옷벗어. 팬티만 입고 싹벗어라고 소리쳤다. 올챙이 포복, 원산폭격등의 기합도 주었다. 다시는 데모를 못하게 창피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우리의 초기진압 작전의도는 빗나갔다. 우리는 당황하지 않 을수 없었다 옷을 벗겨놓으면 도망가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시위하면 큰코다친다는 생각을 갖고 겁을 먹게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부대가 특수부대로서 특수훈련을 하면서 과감성, 담력, 목적달성을 위해 순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필코 임무를 수행하는 용의주동성 등이 엉뚱한 곳에서 발휘된 것이다.

어떤 경상도 출신 지휘자가 기합을 주면서 전라도 놈들 죽여버려라 고 경상도 사투리로 말한 것이 발단이 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같은 유 언비어는 허무맹랑한 것이다

공수부대원들의 증언을 통해볼때 공수부대원들은 시위초기부터 의도 적인 강경집압으로 일관했으며, 이같은 위력을 통해 시위를 초기단계 부터 잠재우려했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결국 5.18초기 광주에 퍼져나갔던 소문의 상당부분이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며 그리고 사실이 아니라도 그 진원을 결국 공수부대의 강 경진압이란 것을 알수 있다

제 30회 18일 저녁 광주 / 한밤중까지 가택수색..'공포의 밤'
 
   핏빛 노을이 광주시가를 덮어가고 있었다. 18일 기나긴 날이 어두워가 고 있었다. 어둠이 깃들어가면서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한 공포는 온 시 가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공포감과 함께 이제는 목표가 뚜렷해진 적대감과 분노감에 떨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시민들이 가세하기 시작한 시위대는 광주시내 곳곳에서 공수부대, 경찰들과 쫓고 쫓기는 숨바꼭 질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오후 7시께 광주시 동구 충장로 학생회관 정문앞. 3백여명의 시위대가 황금동쪽에서 나타났다. 이들은 전두환을 죽여라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반대쪽에서 경찰 가스차와 트럭이 무등극장 골목을 돌아 나와 학생회관 정문앞에서 시위대와 마주쳤다.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경찰을 포위해 들어갔다. 수적으로 밀린 경찰들은 달아날수 밖에 없었 다.

시위대는 가스차를 넘어뜨리고 경찰이 버리고간 무전기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시위대는 가스차의 연료탱크를 깨고 흘러나온 기름에 불을 붙였다. 가스차는 화염에 휩싸여다. 화염이 초저녁의 광주하늘을 밝혔다.

하루종일 공수부대와 경찰에 쫓겨다니고 두들겨맞았던 시위대 는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오후 8시를 전후, 광주시 동구 장동 청산학원앞길과 노동청 부근에 서는 2천여명의 시위대와 공수부대가 또다시 맞섰다. (전교사 작전상황일지)

그러나 공수부대의 진압 방법은 여전했다. 어둠이 짙어갈수록 공수 부대는 잔인해졌다. 어둠을 이용해 주택가로 뛰어든 청년들을 끝까지 추적해 잡아낸 공수부대는 마구잡이로 곤봉질을 해댔다.

이후 8시15분께 금남로 3가 카톨릭센터앞과 한일은행 부근에서도 시 위대 6백5여명이 경찰의 저지에 맞서 시위를 벌였다. 이곳에서의 시위 는 경찰이 투입돼 해산시키게 된다.

금남로 일대에서의 시위를 전후해 계엄사는 공수부대를 중심지에서 빼내고 경찰병력을 시위진압의 전면 에 내세운다. 산발적인 시위는 광주시가가 완전히 어둠에 휩싸인 뒤에 도 계속됐다.

그러나 밤10시를 전후해 광주시내에서 시위대의 모습은 사라진다 . 이미 이날 오후6시 전남북 계엄분소는 계엄포고령 4호를 통해 밤9시 로 통금을 3시간 앞당긴다는 포고문을 발표한 상태였다.

야간시위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시위대는 통금시간동안 어둠속에 서 시내를 배회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 했다.

시내의 상가들은 오후들어서면서 이미 거의 철시를 한 상태였다. 통 금이 시작된 밤9시부터는 광주는 죽음의 거리로 바뀌어 버린듯했다. 군용차량이 질주하고 이따금씩 통금위반자를 적발하는 호각소리만 요 란할뿐 시가는 고요하기만 했다.

경찰은 시민들에게 귀가를 종용하고 있었다. 경찰은 빨리 돌아가시오. 통금이 9시부터입니다 통금에 걸 리면 혼납니다라는 식으로 위협과 권유를 섞어 시민들을 귀가시키고 있었다.

공용터미널과 광주주역에서는 밤9시 이후 도착승객들을 위해 야간 통행증을 발급해주고 있었다. 외지에서 광주를 찾은 사람들은 광주의 공포에 쌓인 분위기와 빨라진 통행금지 시간에 의아해하며서도 종종걸 음으로 목적지를 향했다. 이들은 차량통행이 끊긴 거리를 걸으면서 수 없는 검문을 당해야만 했다.

이시간 시민들은 대문을 꼭꼭 잠그고 불을 끈채 불안에 떨었다. 시 내에 사는 젊은이들은 가택수색을 피해 변두리 친지의 집을 방황했다. 공수부대가 주둔한 전남대.조선대 주변 주택가는 자정이 넘도록 공수 부대의 가택수색에 시달려야했다.

시민들은 시외전화를 통해 광주의 소식을 외부의 친지들에게 전하는 한편, 어떻게해서 광주소식을 들은 친지들의 안부전화받기에 바빴다. 대학생 자녀가 있는 잡안에서는 자 녀단속에 밤을 지샜다.

광주에서의 만행은 전화선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 런 전화를 받은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설마 대한민국 군인이 그럴리가...하는 식이었다.

이영수 신부(현재 소수선원동 성당)의 증언이다. 직접 목격하고 혹은 주위분들의 얘기를 듣고 도저히 참을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안병하 도경국장에게 항의전화를 했다. 그러나 군인들이 하는 일이니 경찰의 권한 밖이다라는 힘없는 얘기를 들었다. 이때부터 광주에서의 잔인한 진압이 뭔가 계획되어있지 않았는가라는 생각 을 어렴풋이 하게됐다

이신부의 경우처럼 광주시내의 행정기관이나 경찰.언론기관 등에는 시민들의 항의와 하소연이 하루종일 계속됐다. 그러나 광주에서의 유 혈은 이들의 책임이 아니었다.

공수부대를 외곽으로 빼낸 계엄사는 밤11시20분 계엄군 1개지대(장 교 1명, 사병10명)와 경찰 2개분대씩 약30여명을 묶어 광주시내 경찰 서.파출소등 공공지점과 도로교차지점등 전략요충지 36개지점에 합동 배치시킨다(2군 사령부 계엄상황일지)

야간에 있을지도 모르는 기습시위를 차단하기 위해서였지만 이들은 밤늦게 귀가하는 젊은이들을 검문하고 구타하는 만행을 계속했다. 조선대 공대 인근 자취방에서 18일밤을 목격한 박세영씨(당시 21세. 전5.18광주의거 청년동지회장)의 증언이다.

집에서 놀다가 돌아가던 친구들이 조선대 공대옆 건널목에서 공수 부대원들에게 초죽음이 되도록 두를겨 맞았다. 동네엔 공포감이 감돌 았다. 밤이 깊어 가면서 검문은 더욱 심해지고 젊은 사람들은 건널목 을 건너오려다 봉변을 당했다. 무조건 뒤통수를 갈기고 하수구를 낮은 포복으로 기도록 만들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내 요소요소에서 여관 투숙객 들중 젊은 사람은 무조건 구타하고 끌고가는등 18일밤과 19일 새벽 광 란의 만행을 저질렀다.

18일 하룻동안 대학생 1백14명, 전문대생 35명, 고교생 6명, 재수생 66명, 일반시민등 모두 4백5명이 연행됐다. 이중 12명은 중상을 입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공식적인 기록으로 확인된 것이 이렇다면 그정도 는 훨씬 심할 것으로 보인다.

제 31회 18일 군부동향 계엄군감축 결정속 광주만 증파
 
   18일 오전8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은 총장 접견실에서 5.18 조치에 대한 후속조치를 논의하기 위한 계엄대책회의를 가졌다.
이날 회의에서 결정된 주요사항중 하나가 주요 보안목표에 배치된 병력은 단계적으로 감축토록한다는 것이었다. 즉 서울.광주등 전국 각지의 대학과 주요 보안 목표물에 배치된 계엄군을 단계적으로 축소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후 유일하게 광주에서만은 계엄사의 방침과 달리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광주에는 17일밤 최초의 공수부대, 7공수여단에 이어 18일 오후 3시 11공수여단의 증파가 결정되는등 최강의 정예인 공수부대가 축차적으로 투입됐다.

11공수 여단의 증파와 관련, 주목할만한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즉 현지지휘관의 추가투입 건의가 없는 상황에서 계속적인 증파가 이뤄졌고 현지파 견 공수부대가 상급지휘부대인 지역책임부대에는 정확한 보고를 않고 특전사에 상세하고도 직접적으로 보고했으며 7공수부대의 광주시내 진압작전 투입전에 이미 11공수여단의 광주추가 투입이 결정됐다는 것등이다.

즉 육군본부(중앙계엄사)-2군사령부(2군지구 계엄사)-전교사(전남북 지구계엄분소)-31사단 사령부(전남지역 계엄분소)-7공수33대대, 35대대라는 정식 명령계통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또 보안사는 보안사 나름대로 광주지역을 책임진 505보안부대를 통해 광주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당시 공수부대의 사령탑인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누구인가. 육사 11기로 5공출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5공때 내무,국방장관을 역임한다. 노태우 수경사령관과는 경북고 동기(32회)이며 74년 나란히 장성진급을 한 죽마고우다. 정사령관은 노태우와 함게 각각 7공수,9공수 창설 여단장을 2년반도안 지낼 때 동기인 전두환은 한발 앞서 소장을 달고 최정예 수도권 방위부대인 1사단장을 지냈다.

정사령관은 12.12당시 대구의 50사단장을 지내다 동기들이 주축이 된 쿠테타의 논공행상에 따라 특전사령관이 됐다. 12.12사태때 별다른 공헌을 하지 못한 정호용은 5.18을 통해 신군부 정권장악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됐다. 정사령관의 광주개입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88년 7월5일 당시 평민당 정웅의원의 대정부 질의에서였다.

정의원은 80년 5월18일 광주에 내려와 11여단 3개대대, 20일에는 3공수여단 5개대대 증파, 21일에는 20사단 증파, 25일 최종진압작전 등을 전보안사령관과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직접요청해 승인을 얻었다고 주장, 정사령관을 광주관련 주동자로 몰았다.

정의원은 이와함께 국회청 문회에서 31사단장으로서 5.17계엄확대와 관련, 광주의 기존병력으로 시위 진압이 어렵다는 예견이나 견해를 보고 한 적이 없다고 답변, 광주에 공수부대의 파견자체가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사령관은 증언을 통해 육군작전참모부장 김재명 소장이 18일 점심직후 전화로 광주사태가 악화될 조짐이 있어 3공수여단을 증파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줘 내가 3여단 보다는 11공수여단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자 11여단으로 교체된 것이라고 밝혔다.

즉 육군수뇌부에서 증파가 결정된데 대해 자신은 소속부대장으로서 의견만 개진했다는 얘기다. 또 그는 18,19일의 시위상황은 전혀 보고받은바 없으며 육본의 결정에 따라 휘하부대를 보낸것이라며 자신의 무관함을 강변 했다.

정사령관의 증언에 따르면 11여단 추가증파 결정은 오후1시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시점에서의 광주시위는 전남대앞에서 공수부대의 일방적인 유혈 진압에 밀린 학생들이 50-1백명 단위로 소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을때였다.

이같은 신군부의 움직임을 통해 세울수 있는 가장 설득력있는 가설은 신 군부가 김대중씨의 정치적 고향인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시위가 민중봉기로 발전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 그리고 자기들의 계획을 방해하는 어떤 세력의 저항도 가차없이 분쇄할 의지와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대량학살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11여단을 증파했다는 것이다.

11공수여단의 증파가 결정된 시점과 거의 맞물려 주목되는 것이 이날 오후 1시께 당시 신군부의 배후인물인 진종채 2군사령관(중장)이 작전지도차광주 현지를 방문한다.(전교사 전투상보)

진사령관의 광주방문이후 공수부대의 광주시가 시위진압투입명령이 떨어졌다. 오후 2시 2군사령부는 전교사를 통해 31사단장에게 7여단을 광주시내에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정사단장은 시위규모가 크지 않아 경찰력만으로도 충분히 진압할 수 있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오후 2시30분 2차 군투입명령이 떨어진다. 오후 3시 3차 독촉명령이 떨어졌다. 정사단장은 할수 없이 자시의 전용헬인 50MD로 조선대와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35대대와 33대대를 방문했다.

정사단장은 이자리에서 대대장에게 인명피해 없이 신중하게 진압할 것을 지시했다. 여기서 살필수 있듯이 전남북 계엄분소장이자 전투교육사령관인 윤흥정 중장이나 7공수여단에 대한 최종적 지휘권을 가진 31사단장에게는 포괄적 임무를 규정한 훈령형명령이 아닌 명령형 명령만 떨어졌다. (국회광주특위刊, 광주민중항쟁 백서)

이같은 계엄사의 11공수여단 증파는 육본의 폭동진압 작전교범에 비춰봐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진압대상이 일반적인 시위로서 물리적인 힘에 의한 진압이 요구될시에는 수적으로우세한 보병부대를 요청하고 소요사태가 극렬화하여 무장폭도 들이 특정시설을 거점으로 항거할 시에는 특공작건을 수행할수 있는 특수부대를 요청한다 광주에 대한 공수부대 증파는 육본의 작전교범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당시 광주에는 전남지역에서 차출된 경찰 병력만도 1천8백여명이 배치돼 시위를 진압하고 있었으며, 특정시설을 거점으로 무장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11공수여단은 수도경비사령부로부터 작전통제권이 해제돼 광주로 증파됐다. 18일 오후 4시 11공수여단 선발대장교 45명과 하사관, 사병 1백23명은 성남 16K비행장에서 C-123수송기 5대에 분승 광주로 향했고 여단 본대는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열차편으로 광주로의 이동을 완료했다. 도착과 동시에 11여단은 2군 작전통제를 받게되며, 19일 유혈진압의 주인공이 된다.

제 32회 분노의 19일 / 공수대원 길가는 여성 옷벗겨 희롱
 

  기나긴 어둠의 밤에도 어슴푸레 새벽은 왔다. 光州시민 대부분은 꼭박 밤잠을 설쳤다. 전날의 그 끔찍했던 지옥같던 하 루를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더욱이 새벽까지 여관등지를 돌며 투숙객 들중 젊은사람은 무조건 구타하고 끌고가는 공수부대들의 만행앞에 언제 당할지 모르는 두려움이 光州시내를 휘감고 있었다.
80년 5월 19일 월요일,먼동이 떠오는 光州의 아침은 전날의 핏빛 잔영이 채 가시지 않고 있었다. 보통때라면 가족들과 평온한 휴일을 보내고 새 기분의 가쁜한 몸짓으로 출근을 서두렀을 시민들이다. 학생들은 등교길에 부산을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날의 끔찍했던 상황을 되새긴 시민들에겐 오늘 당장이 걱정이었 다. 시민들은 라디오의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시내 상황을 듣고자 했다. 그러나 18일 光州의 상황은 전혀 언급되지않았다. 신문 역시 시민들의 기대 를 영 저버렸다. 계엄상황아래서 언론통제가 강화된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젊은 사람들을 시골로 피신시키거나 집밖을 나가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어린 학생들이 있는 가정에서는 이날 등교를 시켜야할 지 여부를 몰라 학교에 전화를 걸기도 했다.

이른 아침부터 시민들은 하나둘씩 금남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제밤 상 황이 궁금했던 것이다. 단순히 금남로로 운집하던 시민들은 그러나 공수부 대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모른 상태였다. 더욱이 밤새 공수부대가 증파돼 있다는 사실은 알 턱이 없었다.

18일 새벽 비상계엄 확대실시와 함께 곧바로 光州에 투입된 7공수여단이 진압작전을 펼친 한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신군부는 11공수여단의 투입 을 결정했던 것이다.

물론 95~96년에 걸친 검찰의 5.18사건수사에 의해 당시 신군부들이 치밀 한 계획임이 밝혀졌지만 이전까지 공수부대 증파의 원인은 光州시민들에 게 돌려져 있었다. 다시말해 이들 신군부측은 光州의 소요확산으로 공수부 대를 증파하지않을 없는 상황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8일 새벽에 파견된 7공수의 진압작전이 채 하루도 지나지않은 이날 오후3시께 11공수여단의 증파가 결정됐다. 당시 서울 동국대에 주둔하 던 11공수부대의 증파결정시간인 오후3시께면 光州에서 그다지 큰 시위상 황이 없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때문에 신군부측이 주장하듯 소요확산에 따른 증파결정은 누가보더라도 계획적인 투입이었다.

이러한 공수부대와 맞닥뜨린 光州시민에게 19일은 光州민주항쟁 전 기간 중요한 분수령이 된 날이기도 했다.

이는 18일 공수부대의 무차별적 진압에 힘없이 대항하던 光州시민이 19 일에 들어서면서 이들 학살자들에 대해 공세적 자세를 취했다는 의미를 지 닌다.

또 시위의 중심층이 학생들이었던 18일 상황과는 달리 19일은 학생보다는 일반 시민들로 시위의 주세력이 옮겨졌다는 점이다. 이들 시위대에는 학 생,젊은 사람들은 물론 4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시민들,특히 여성들도 합세 했다. 야만적인 공수대원들의 만행에 순수한 시민들의 분노가 불붙는 것이 었다.

이날 공수부대의 진압은 전날의 광기(狂氣)를 더해 금남로의 시위대는 물 론 달아나는 시위대들의 뒤를 쫓아 상가,관공서,학원등에 난입, 군화발로 차 고 대검과 진압봉을 휘두르고 찔러댔다.

이날의 상황에 대해 光州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풀빛刊)은 이렇게 적고있 다. 분노와 공포의 밤을 지새운 시민들은 시내상황을 살피기위해 아침 일찍 부터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초.중.고등학교와 관공서,일반 기업체는 정상근 무를 계속했으나 시내의 상가들은 대부분 철시했다.

대동고와 중앙여고등 일부 고등학생들이 교내시위를 주도하게 되고,오후 로 접어들수록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날 오후 시내 중고등학생들을 귀가조 치시켰다.

7공수여단이 11공수여단에 배속되고 31사단 병력을 재배치시키 는등 전열을 정비하고...공수들의 잔인한 진압에 시위군중은 방화와 투석,화 염병 투척으로 맞섰다.

녹두서점을 비롯한 시내 곳곳에서 화염병이 대량으 로 제작되었다. 화염병은 투석이나 도로변의 대형 화분을 바리케이드로 이 용하는 소극적 방어와는 달리 공격용으로 등장한 새로운 무기였다.

이처럼 심각하게 진행되는 시위상황은 11공수여단장으로 하여금 현장점 검에 나서게 했고,현지 지휘관은 시위진압을 위해 1개 공수특전단을 증원해 주도록 요청했다 시위대의 중심세력이 일반 시민들로 변화한 이날 시위는 그러나 공수부 대의 잔혹함과 야만성을 막지는 못했다. 공수부대원들의 잔학하고 살인마적 인 진압방법은 전날보다 더욱 광적이었다. 대검과 진압봉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 장갑차까지 동원, 시위대 사이로 돌진해 달리는 비인간성을 드러내보 였다.

팬티만을 입힌 채 시민들에게 기합과 구타를 가하고 트럭에 내던져 무차 별 연행해 갔다. 더욱이 대로상에서 길가는 여성들을 팬티와 브레지어마 입힌 채 옷을 벗기고 희롱하는등 차마 국민의 군대라고는 볼수 없는 잔학성 을 표출했다. 상가나 건물,학원등지에 난입해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구타하 고 연행한 행위는 더더욱 공분을 샀다.

이같은 공수대원들의 만행에 시위진압에 나선 경찰조차 혀를 내둘렀다. 어떤 경찰간부는 골목길을 서성이는 시민들을 향해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공수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며 울먹이기까지 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치를 떤 시민들은 비로소 항쟁의식이 고조되면서 두려 움보다는 고통에 안긴채 공세적 입장에 나섰다. 민중의 항쟁이 드러나보이 고 시민의식이 야만적인 공수부대에 적극적으로 대항한 것이었다.

인근 공사장에서 쇠파이프,각목등을 가져와 자체 무장화 단계로 접어들었다. 젊은 사람들의 무장과 함께 중년여자들은 보도블럭등을 깨뜨려 투석전에 용이하 도록 도움을 주는등 시민들의 시위대는 자생적으로 발전을 거듭해갔다.

이날 시민들의 공세적 입장과는 달리 오후에 접어들면서 주목할 만한 사 건들이 일어났다. 우선 계림동 광고앞에서는 光州민중항쟁기간 첫 발포가 있었다. 21일 도청앞 집단발포처럼 의식적인 발포는 아닐지라도 궁지에 몰 린 공수부대원이 방어본능에서 발사한 것으로서 앞으로 공수부대가 같은 민족앞에 얼마든지 총부리를 대고 발포할수 있음을 미리 엿보게했다.

19일 하루동안 이어진 공수부대의 만행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그렇다고 시민들은 마냥 당하고만 있지않았다. 분연코 일어선 민중의 힘이었다. 민중의 분노였다. 시민들의 분노는 신군부들의 하수인인 공수부대들에 대항하는 光 州민중항쟁의 거대한 도화선으로 발화됐다.

19일 오전 금남로에 대량의 최루탄이 발사돼 자욱한 안개를 이루고 있다. 공수대원들의 야만적인 진압에 분노한 일반 시민들은 이에 맞선 본격적인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제 33회 19일 오전 시위 / 유혈낭자한 시민에 군화 발길짓
 
   19일 아침 이른 시간부터 시민들은 錦南路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간밤의 상황이 궁금했던 시민들은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어떠한 진실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거리에 나와 직접 눈으로 상황을 확인하려는 생각들이었다.
도청앞에는 경찰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순식간에 불어나는 군중들과 대 치하고 있었다. 오전 10시가 넘어서면서 군중들의 숫자는 3~4천여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계엄군 물러가라는 군중들의 구호소리가 더욱 거칠어져 갔다. 어제의 악몽에서 미처 깨어나지 못한 군중들은 국민의 군대라는 공수부대의 만행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이날 오전의 상황에 대해 한 종교인의 고뇌가 적힌 비망록을 인용한다. 천주교 光州대교구 尹恭熙대주교가 지난 89년 光州日報에 최초로 공개한 비망록 가운데 19일 오전 상황은 이렇다.

항상 출근하던 길로 아침 8시30분께 아침길을 나섰는데 금남로로 통하는 길이 통행이 금지되어 있었다. 바오로씨(운전기사)에게 다른길로 돌아가 자고 하여 광주경찰서 앞길을 지나서 가톨릭센터에 도착했다.

6층 사무실에서 잠시 업무에 관한 서류를 검토한뒤 창문을 통해 금남로를 내려다보니 대여섯명의 계엄군들이 무장한 채 황야의 무법자처럼 어슬렁거리며 십보간격의 거리를 왔다갔다 하면서 거리를 지나가는 시민들을 훑어보기도 하고 젊은 사람이 눈에 들어오면 계엄군 앞으로 불러세우고 무엇인가를 물어보는등 다소의 긴장감은 있었지만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길모퉁이마다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곧 바로 시민들이 보도쪽으로 밀려들어오고 그 숫자가 계속 늘어갔다. 이때부 터 군인들은 충장로로 통하는 상업은행과 제일은행사이의 시민들을 밀어붙 이며 몽둥이를 높이 들고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중아로 지하도 공사장쪽에서 계엄군들이 서 있는 곳을 향해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이때 군인 대여섯명이 젊은 시민 한 사람을 몽둥이로 때릴듯이 달려들며 와! 와!하고 소리를 지르며 항의했다. 시민들은 군인들이 쫓아오면 도망했다가 다시 모이는등 점차 밀고 밀리는 빈도가 많아졌다.

계엄군의 지휘자인듯한 군인이 무전연락을 취하는 모습이 보이고 금남로 5가(수창국교)쪽에서 군인트럭이 길게 줄을 서고 군인들의 숫자도 많아졌 다.

계엄군들의 몽둥이가 허공을 가르며 험악하게 바뀌었다. 쫓기 쫓기며 계엄군들과 시민들의 감정이 상충되어가고 있었다. 길가 인도에 서있는 젊 은 사람을 향해 계엄군들이 쫓아가며 몽둥이를 휘두르니 시민들이 일제히 와! 와! 와!하는 함성을 지르며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시민 몇사람을 붙잡아서 금남로 한복판으로 끌고와서 몽둥이로 때려눕히고 구둣발로 걷어 차기도했다. 시민들이 우우 소리를 지르면서 콜 라병,환타병,돌등을 던지기도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때 주변의 여러건물과 상가의 사람들이 이 광경을 숨죽이고 바라보고 있었다. 계엄군 한 사람은 얼굴에 돌을 맞아 고 통스러워했고 또 한사람은 정강이에 돌을 맞아 절룩거리자 동료군인들이 부 축해줬다.

가톨릭센터 6층에서 이쪽과 저쪽의 창문을 옮겨다니며 금남로와 가톨릭센 터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보고있는데,금남맨션 골목쪽에서 시민 들이 도로 안쪽으로 밀려나와있고 군인 서넛이 골목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때에 군인들이 서있는 가운데에 한 사람이 얼마나 어떻게 얻어맞았는지 흰셔츠을 입은 앞가슴과 잔등에 유혈이 낭자한채 길바닥에 질펀하게 주저 앉아 있다가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군인들이 점령하고있는 금남로 방향 을 향해 몇걸음 옮기려다 그 자리에 쓰러지곤했다.

가톨릭센터의 이방 저방에서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목국장 이 영수신부가 금남로를 내려다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금남로에는 군인 들이 잡아온 시민들을 길 한가운데 한사람씩 엎어 땅바닥에 눕혀놓고,목을 군화발로 밟는 야비한 발길질을 하고 있어서 이영수신부가 야단을 치고 있 었다.

관광호텔쪽에서도 10여명의 시민들을 붙잡아서 길바닥에 딩굴딩굴 구르게 하는 시합을 시키면서 잘못한 사람을 발기로 차는 모습이 보였다. 점심때가 이르기전까지 금남로에는 많은 수의 계엄군 트럭이 광남로부근 까지 길게 점령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계엄군의 행동은 거칠어져 여기저기서 머리를 아스팔트에 대고 몸을 돌리게 하고,어쩌다 시민을 잡아온 군인들에게서 인계를 받 은 다른 군인들은 허공으로 높이 솟구쳐 오라내려오면서 군화발로 사정없 이 짓밟아 대기도하고,붙잡힌 사람들의 옷을 벗기고 곤봉으로 내려치기 도하는 등 계엄군들의 진압방법이 사뭇 극렬해지기 시작했다...

19일 오전 상황에 대한 尹대주교의 비망록은 光州상황에서 무력할 수 밖 에 없었던 종교지도자의 고뇌로움이 적나라하게 기록된 것이다. 이는 우리 가 믿는 종교지도자의 눈으로 똑똑히 목격된 제나라 국민에게 그토록 가혹 할수 있겠느냐를 낳게한 공수부대 만행에 대한 숨길수 없는 역사의 진실이 기도 하다.

19일 공수부대는 이처럼 가톨릭센터 6층에서 바라본 행태 이상 더욱 참 혹한 진압작전을 벌여 피의 일요일에 분노한 시민들을 더욱 격앙시켰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특전사전투상보중 19일 상황은 5.18 작전 이후 시민 감정악화하여 일부 시민이 주동자의 선동에 이해 데모대에 가담. 11시께 금남로 일대 폭도 3~4천명 운집.경찰과 대치 택시 3대 소각시키고 경상도 출신 군대가 광주시민을 죽이러 왔다는 구호를 외치고 40~50대 가량 가세. 부녀자까지 합세하여 수가 증가 경찰과 치열한 투석전으로 더 이상 제지할 능력 상실.로 기록됐다.

분노한 시민들의 저항을 폭도로 왜곡, 잔학한 진압방법을 동원한 공수부 대의 만행인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다. 학생들의 모습보다는 40~50대 중년의 남자와 돌 깨는 부녀자들의 모습이 더욱 또렷한 이날 오전 시위에서 시위군중들은 공수부대의 무차별 진압에 도 굴하지않고 골목 골목으로 달아났서도 다시 금남로에 모여들어 시민항 쟁의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19일 오전 단순히 시위진압만을 나섰다는 공수부대는 그러나 금남로 인근 건물에서 시위를 지켜보더 일반 시민들을 향해 더욱 무서운 진압을 해댔 다. 그들은 시위자를 찾는다며 일반 건물,상가등지를 무단 난입하기 시작했다.

제 34회 공수부대 만행 / 여관 난입 신혼부부까지 구타 연행
 
   19일 오전 시위군중인 학생,시민들은 공수부대원의 잔악성을 당해낼수가 없었다. 담력과 잔악성에서 전문적인 훈련을 쌓아온 공수부대원에게 맞서는 자체가 무리였다.
오전 錦南路를 가득 메웠던 군중들은 피신하기에 바빴다.

이때부터 공수부대원들은 전날처럼 지나는 행인은 물론 사무실과 주택으 로 들어가 젊은 사람이면 남자 여자를 가리지않고 곤봉과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팬 후 질질 끌고 나와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끌어올려 싣기 시작했다.

40대 부부가 금남로 길에서 붙잡혔다. 두 부부는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 러내린 채 붙잡혀 갔다. 죄가 없다며 호소하는 부인의 애원에도 공수부대원들은 아랑곳하지않았다. 밝은 색 옷을 입은 이들 부부은 온통 피투성이었다.

금남로 주변 2,3층 건물유리창을 통해 이러한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을 지켜 보던 시민들은 경악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 이를 의식했는지 공수부대원들 은 마이크로 주택과 빌딩을 향해 문을 닫아라 커튼을 치라 내려다보면 쏘아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금남로와 충장로 일대의 상가는 이러한 상황속에서 일찍 문을 닫고 철 수했고 관공서와 회사들도 낮 12시가 되자 직원들을 퇴근시켜며 몸 조심 하라고 타일렀다. (사계절刊 金泳택 著 10일간의 취재수첩중에서 발췌)

달아나는 시위군중을 뒤쫓던 공수부대원들은 상가,여관,민가등 어디든지 난입했다. 시위군중에 포함됐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성난 사자마냥 젊은 사람만 보면 닥치는데로 곤봉으로 후려치고 개머리판으로 찍어댔다.

96년 1월 光州지검의 5.18현장조사 당시 피해자로서 참고인조사를 받았던 朴弼鎬씨(당시 25세.光州시 南구 月山동)는 미도장 난입사건의 현장 목격자 다. 朴씨는 당시 미도장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19일 오전 10시 30분에서 오전 11시 사이로 기억한다. 갑자기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여관안으로 뛰쳐들어왔다. 곧바로 뒤따라 13~15명쯤으로 보이 는 계엄군들이 들이닥쳤다. 붙잡힌 청년이 얼마나 두들겨 맞았던지 맞아 죽어나가는지 알았다.

이 상황을 말리던 지배인,경리과장등 직원 5명까지 무작정 구타하고 연행해갔다. 여관방에도 들어간 이들은 신혼부부가 늦게나 온다며 신랑을 폭행하고 끌고 갔다 朴씨도 이 광경을 지켜보자 공수부대원으로부터 사람 숨겨놨지라는 말에 안 숨겼다고 응답하자 곤봉으로 손을 때리고,군홧발로 허리를 차고 대검으로 쿡쿡 찌렀다고 증언했다.

당시 미도장 2층 객실담당이었던 張翊秀씨(당시 23세)는 이 청년과 맞닥뜨 린뒤 201호 객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궜다. 곧이어 뒤따라온 군인들이 객실문을 차부수려고 해 욕실로 피했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욕실문을 발로 차고 들어온 군인에게 곤봉세례와 함께 짓밟혀 정신을 차릴수 없었다

5층에서 객실 청소를 시작하고 있던 金榮大씨(당시 23세) 역시 영문도 모른채 군인들의 발길에 채이며 구르다 쫓겨내려왔다. 그리고는 1층에서 張 씨와 청년이 군인들에게 무참하게 얻어맞는 모습을 목격했다.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40대 투숙객 2명도 저와 같이 끌려 내려왔는데 손님이라고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이들은 가톨릭센터 앞으로 양손이 뒤로 돌려지고 팬티만 입은채 끌려나와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린 속칭 원산폭격을 받았다. 쓰러지면 또다시 곤봉이 날라들고 발길에 채이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날 영문도 모른 채 계엄군에게 끌려간 미도장 직원 5명은 21일 모두 풀 려나 박윤식외과등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 후유증으로 아직까 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다.

미도장에 난입한 공수부대원들의 만행과 마찬가지의 상황이 비슷한 시각 금남로 일대의 주변 건물에서 속출했다. 오전11시가 넘어 무등고시학원으로 시위대에 쫓긴 학생들이 뛰어들어갔다.

金낭(木변에 良)浩씨(당시 21세.光州시 北구 新安동)의 증언이다. 계엄군에 쫓긴 시위대 3명이 학원으로 들어왔다. 이후 계엄군이 뒤따라 들어와 당 시 학원에 있던 1백98명의 학원수강생들을 강제로 연행했다.

연행 당시 곤봉및 개머리판으로 머리와 왼쪽어깨를 얻어 맞았다. 31사단으로 이송,조사 를 받은뒤 21일 풀려났다. 29일 학원에 가 보니 계엄군의 강제연행 당시 학원생 10여명이 3층과 4층에서 뛰어내려 크게 다쳤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무등고시학원 수강생이었던 朴時炯씨(당시 19세.麗水시 德忠동)도 연 행됐다가 21일 풀려난 경우. 계엄군이 할아버지를 구타하는 장면을 목격한 학원생들이 야유하자 계엄군 10여명이 학원에 몰려들었다. 막 깍은듯한 박 달나무로 학원생들을 무차별 구타하며 끌고 갔다

19일 낮12시를 조금 넘긴 시각 광주은행 뒷편 실내야구장에서 바둑을 두던 崔炳貴씨(당시 29세.光州시 西구 良동)도 아무 이유없이 공수부대원들 로부터 구타당했다. 실내야구장내 평상에서 친구와 함께 바둑을 두고 있는데 학생들이 계엄군에 쫓겨들어왔다.

바로 뒤따라온 계엄군이 다짜고짜 곤봉으로 머리를 내리쳤다. 곧 의식을 잃었고 깨어나보니 YMCA앞이었다. 당시 그 곳에는 시민 7명이 기합을 받고 있었다. 헌병에게 연행된 순간 또 다시 개머리판으로 발목부분을 얻어맞았다.

헌병 소령이 와서 가까운 병원으로 옮기라는 지시를 했고 헌병들이 부상당한 학생 1명과 함께 인근에 있는 홍안과로 옮겨 응급치료를 받았다. 병원으로 이송되는 순간 순간 착검 상태의 계엄군들이 곤봉으로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하는 장면이 계속 눈에 띄었다

당시 光州시 東구 大仁동 朴仁天씨 집앞의 양화점직공이었던 崔영철씨 (당시 20세)도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에 몸서리를 쳤다. 19일 출근할 때부터 거리에 공수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뭔가 심상치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그 날 갑자기 밖에서 와 하는 함성과 펑 하는 소리가 들리고 코가 맵기 시작 했다.

밖을 내다보니 공수대가 학생 시위대를 밀고 내려오면서 사람을 닥치 는대로 때리고 짓밟는 것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의 안면 을 때려 넘어뜨리고는 지근지근 밟아버리는가 하면 교련복 입은 학생의 온 몸을 후려쳤다. 또한 박인천씨 집안에 숨어있던 여학생을 끌어내어 뺨을 때 리는 광경이 훤히 내다보였다.

19일 오전 시위군중을 향한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진압은 금남로뿐만이 아닌 인근 상가,학원,여관등지의 건물에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골목 골목으 로 달아나면서도 공수부대의 잔학성에 치를 떨던 시민들은 항쟁의 도화선 을 이룬 이날 오후 대반격을 위해 또다시 도청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제 35회 가자, 도청으로 / '죽음은 두렵지않다' 시민들 항거
 
   19일 오후2시께 尹興禎전교사령관 주재아래 光州지역기관장회의가 열렸 다. 이 회의석상에는 도지사,교육감,검사장,光州시장,중앙정보부 분실장,지방 노동청장,우체국장,31사단장,11공수여단장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지역 기관장들은 군의 진압행동이 너무 과격하다 어느 나라 군대인지 의심이 간다 고교생들까지 동요하고 있다면서 연행자 전원 석방과 명단 공개를 요구했다.

尹전교사령관은 지역 기관장들의 의견에 신중한 태도를 보인뒤 참석한 鄭雄 31사단장과 崔雄 11공수여단장에게 가혹한 진압방법을 사용하지 말고 주동자가 아닌 사람은 석방하도록 지시했다.

같은 시각 光州시내 금남로는 오전의 일방적 진압상황과는 달리 술렁거 렸다. 공수부대 병력이 조선대로 철수해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 시위 대들이 다시 모여든 것이다.

오후 1시 30분께 시민,학생등 시위대 4~5천명 이 가톨릭센터 앞에서 금남로를 차단하고 있던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 을 던졌다. 이때의 상황을 신동아 1985년 10월호에서 인용한다.

금남로에 진주해 있던 공수부대 병력이 조선대로 점심식사를 하기위해 빠져나간 오후 1시 반께부터 시민,학생들이 시위에 나서기 사작했다. 가톨릭센터앞에 모인 시위군중은 4천~5천명에 달했다.

이들은 금남로를 차단하고 있는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몰아붙였다.청년들은 금남로2가 제일교회 신축공사장에서 사용하는 두 개의 기름통에 불을 붙여 군 경저지선에 힘껏 굴러보냈다. 군과 경찰은 갑자기 시위대로 접근,곤봉과 총,대검을 휘둘렀다.

흩어졌던 시위대는 다시 모여 도로변의 대형 화분과 공중전화 부스등으 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계속 돌을 던졌다.오후3시께 군경저지대는 진압화기 가 바닥난 듯 방패를 앞세우고 곤봉을 손에 쥔 긴장된 모습으로 제자리를 고수했다.

이때 갑자기 가톨릭센터 앞에서 함성이 터지면서 2백여명의 청년들이 가 톨릭센터안으로 들어갔다. 7층 옥상에서 6명의 무장공수대원이 시민들의 시 위상황을 무전기로 연락하는 것이 목격된 직후였다.빌딩안으로 올라간 청 년들중 몇몇은 공수부대원의 대검에 찔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수많은 청년들이 집중적으로 돌세례를 퍼붓자 공수부대원들이 비 틀거렸다. 그러자 청년들이 달려들어 몽둥이로 때려눕혔다. 한 청년이 그 들로부터 빼앗은 M16 소총 한 자루를 치켜올리자 도로의 시위대들이 함성 을 질렀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을 인질로 삼는 것도 잠시였다. 오후 3시20분께 점심 을 끝낸 공수병력이 도청앞과 광남로 사거리에서 점차 포위망을 좁혀왔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캐리버 60 기관총으로 무장한 장갑차가 무서운 속력으로 시위대를 향해 돌진해 왔다. 바로 이 순간 가톨릭센터 안으로 올라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인 질로 잡은 공수부대원을 지키고 있던 청년들은 일시에 들이닥친 공수부대 에 의해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이곳에서 수많은 살상자가 생겼다.

내용중 오후 3시께 일어난 가톨릭센터 사건에 대해 1995년 7월 18일 검 찰의 5.18관련 사건 수사결과문은 이렇게 적시해놓고 있다.

오후3시 15분 께 가톨릭센터 7층에 있는 기독교방송국 경계 병력인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 병력 9명을 공수부대원으로 오인한 시위대가 이들을 넘겨줄 것을 요 구했으나 가톨릭센터측이 공수부대원이 아니라고하자,

시위대는 차고에 있 던 승용차 4대를 불태우고,분말소화기를 뿜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7층까지 밀고 올라가 경계병력의 M16 소총 1정을 빼앗아 건물 아래로 던 지는등 방송국을 점거했으며,공수부대 병력이 다시 시내에 투입됐다는 말 을 듣고 해산했으나 일부 시위대는 현장에서 체포됐음. 이러한 상황에서 군용 헬리콥터가 저공으로 비행하며 학생 시민 여러분, 이성을 잃지 말고 해산하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여러분은 불순분자들의 책동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량한 시민들은 절대 보호하겠으니,즉각 해산하십시오.이미 연행한 학생들은 모두 방면하겠습니다하며 해산을 종용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공중의 헬리콥터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욕설을 퍼부어 댔다.그 말을 맏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기 때문이다. 이같이 금남로를 중심으 로 온 시가에서 시민들이 공수부대와 공방전을 펴고 있는 동안 계엄군에게 흥분제 약을 먹였다 독한 술을 먹였다 물통에는 술이 들어있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씨를 말리러왔다는 풍문이 파다하게 퍼져 시민들을 더욱 흥분하게 했다.

오후3시 27분께 문화방송국앞에 집결한 시위대 3천여명은 광주 상황을 보도하지 않는 방송의 태도에 격분,방송국 건물에 돌을 던졌다. 이들은 다 시 취재차량 1대를 불태우고,문화방송 사장이 직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전자 제품점 문화상사에도 불을 질렀다.

光州시 東구 壯동 전신전화국앞 사거리에도 오후 4시 15분께 시위대가 1 천5백여명까지 늘어 도청쪽으로 진출하려다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에 분산됐 다. 곧이어 光州공용터미널앞에서 시민,학생 1천여명이 합세,가드레일과 공중전화 부스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공수부대원들과 치열한 투석전을 벌 였다.

같은 시각 光州소방서쪽에서 시민들의 시위참가를 호소하는 가두방 송이 시작되면서 시위대들을 더욱 격앙시켰다. 북동사무소앞에서는 공수 부대원 3백여명이 가택 수색을 하면서 학생들을 진압봉으로 가격했다.

특전사 전투사보의 이날 작전 경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1여단장은 금남로 양쪽에서 폭도를 분쇄하기로하고 35대대는 도청쪽에서 중소기업은행쪽으로, 11여단은 중소기업은행에서 도청쪽으로 압축할 결심.

15시 15분께 도청광장에서 하차,부대전개후 5분간에 걸쳐 경고문 방 송과 군가를 제창 폭도 기세 제압. 앞으로 전진하다 CBS방송국 전방에서 폭도들 투석이 시작되자 즉시 돌격 개시 폭도 분산 와해.

16시께 유동4거리까지 진출,11여단과 연결 폭도 완전분산. 16시20분 분산된 폭도 충장로 일대 재집결해 다시 출동 해산시킨 후 17시께 도청이 재집결,양림교 경유 소방서를 지나 20시 30분께 종합터미널에 가서 야영. 이때 화학탄은 사용안 함.전과및 피해 무(無).

19일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과정은 단순히 거리의 시민들에게만 느껴 진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초초한 심정으로 거리의 상황에 궁금해 하던 고교생들에게까지 분노의 심정을 안겨줬다. 숨죽였던 학생들은 그 심정을 드디어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제 36회 거리에 나온 고교생 / 공수부대 만행에 중고생도 분노
 
   당시 대동고 3학년 학생이었던 李덕준씨의 증언이다. 일요일 공수부대원 들의 잔혹성을 보고 느낀 고교생들의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준다.
19일 학교에 가니 전날 자행되었던 공수부대의 잔악한 만행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 졌다. 수업할 분위기도 아니었고,선생님들도 조회시간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이쪽 반에서 저쪽 반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주위상황 에 대해 누구 형이 어쨌다더라,누구의 외삼촌은... 옆집 사는 사람은...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분위기는 고조되어 있었다. 누구의 선동이랄 것도 없이 1교시 시작을 전후 해 3학년들이 전부 복도로 나왔다. 말리는 선생님들을 밀치고 자연스럽게 1,2학년 교실을 돌아다니면서 선동했다.

우리의 형과 누나가 죽어가는데 우 리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등학생들이 총궐기하여 나가자는 요지의 말 을 하면서 운동장에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우리를 제지 할 힘이 없었다.우리는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돌면서 전두환이 물러가라를 목청껏 외쳤다.

오전 11시께 시내 진출을 위해 우르르 밀고 나가는데 군인들이 학교앞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어 나가지 못하고 다시 운동장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조를 짜서 요령껏 학교를 빠져나가 시내로 진출,시위대에 합류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샛길로 빠져나갔다. 나도 친구 몇명과 샛길 로 나와 25번 버스를 탔다.

당시 대동고 교사였던 朴행삼씨(당시 43세)의 증언에는 교사로서의 심정 을 잘나타낸다. 19일,암울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학교에 출근했다. 1교시 수업이 있어 교실에 들어갔더니 어떤 학생 하나가 울부짖듯이 말했다.

선생님,지금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합니까. 우리들의 부모형제가 죽어가는데 원수를 갚아야 하지 않습니까? 나도 똑같은 심정이었으므로 선생이라는 입장도 잊어버리고 분필을 집어 던지며 함께 울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비극의 역사속에서 눈물만 흘리고 살아야 합니까? 순식간에 교실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때부터 학생들은 의자를 부숴 몽둥 이를 만들어 들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민주교사 합세하라, 민주학생 합세하라, 광주 시민 학살한 공수부대 때려죽이자

이렇게 외치면서 많은 학생들이 운동장을 돌았다. 교무실에 돌아와 울고 있는데 교장선생님이 찾아와 학생들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다급하게 말했 다.

공수부대가 학교 밑에까지 진주해 있고,하늘에서는 헬리콥터가 빙빙 돌 고 있다는 것이었다. 순간 학생들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운동장으로 뛰 어나갔다.

여러분들의 심정은 내가 충분히 압니다. 그렇지만 지금 여러분들이 나간다는 것은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의 아가리에 거저 몸을 주는 것이나 마 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의 생명도 귀중합니다. 그래도 나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나를 밟고 가십시오.

그러면서 나는 교문앞에 누워 버렸다. 학생들은 땅바닥을 치면서 통곡을 했다. 그렇게 학생들을 달래놓고 학급별로 담임이 연락해 학부모들을 오시 게 했다.학생들을 무사히 귀가시킨 후 집에 왔는데 아무래도 불안해 다음 날 해남으로 피신했다. 전남도교육위원회에서는 20일부터 각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풀빛刊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중에서 발췌)

19일 오전 11시 15분께 대동고 2학년 3반 학생 60여명은 교실에서 수업 을 거부한채 노래를 부르며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계엄사 상황일지)

대동고생들의 학내시위가 가열되던 오전 10시께 중앙여고에서도 일단의 학생들이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에 분노했다. 전교사 작전일지는 이날 중앙여고 앞에서는 학생회장 박찬숙을 비롯한 학생 6백여명이 민주주의가 말살되었다. 학생이 많이 죽었다고 외치며 교내시위를 기도,학교당국이 자체적인 제지로 낮 12시께 귀가조치됐다고 기록했다.

반면 계엄사 상황일지에는 오전 10시 광주 중앙여고 1천4백여명이 교내 집결-경찰 4/179명 교문대기로 기록,중앙여고생들의 시위에는 대다수 학생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중앙여고 학도호국단 연대장은 교실을 돌아다니며 대학생 언니,오빠들이 데모를 하다 다치고 죽었다. 조의를 표하기위해 교복의 칼라를 떼자고 선동했다.

연대장의 선동에 학생들은 칼라를 떼고 한 두시간 수업을 받 은뒤 운동장에 모여 시위했다. 이들은 몇몇 교사들의 만류에 곧바로 해산했 다.

이후 광주지역 고교생들의 시위상황에 대한 기록은 이렇다.
낮 12시20분:광주일고생 2천여명 교내시위 기도,학교당국 자체 제지,시차 별 귀가조치(전교사 작전일지)

오후 2시25분:대동고 3학년생 2백명 운동장에서 시위 농성 (계엄사 상황일지)

오후 2시35분:송정리 광산여고 학생회장 3학년 김영란(18)은 정광고 학생 회장과 점심시간에 만나 5교시가 끝나면(오후 2시35분) 교외로 나가자고 합의하고,다시 동교 실장 5명을 소집하여 행동통일토록 결의함 (계엄사 상황일지)

오후 3시35분:대동고1,2,3학년생 1천여명이 운동장에서 농성중이며 교외로 진출할 예정임

오후 4시:대동고,19일 오후 3시를 기해 무기한 가정학습에 들어갔으며,학생 들은 2개 파트로 나눠 1개 파트 5백명씩 짝을 지어 스크럼을 짜고 정의가 를 부르면서 운동장에서 시위중

오후 4시30분:대동고,전원 귀가 상황끝(이상 계엄사 상황일지)

광주민중항쟁기간 고교생들의 역할은 참으로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항쟁 기간 시위대,시민군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물론 유인물을 몰래 제작해 배포 하기도 했고 여학생들 중에는 교련구급낭을 메고 부상자를 치료하는 학생도 등장했다.

이 기간 숨진 고교생들의 확인된 공식 사망자수는 모두 14명으로 집계됐 다. 고교생들의 현실 참여행동은 당시 朴正熙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80년 서 울의 봄의 해빙무드로 대학등은 물론 고교까지 이같은 영향을 받아 학내민 주화를 요구하면서부터인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일부 사립고교에서 일기 시작한 교내 민주화운동의 주요 이슈는 학 생회장 직선,보충수업폐지등이었으며 일부 학생들은 의식화수준까지 올라 19일 교내시위를 주도하게됐다.

제 37회 공용터미널 충돌 / 잔혹한 진압 '혈육파티'전주곡
 
   19일 오후 공용터미널 부근 소방서앞길등지에는 시위대와 공수부대원간에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됐다.
15:00 다시 공용터미널에 시위대가 모이자,공수부대는 투석과 화염병 투 척으로 맞서는 시위대를 대량의 최루탄으로 해산시키는등 공방전이 계속되 었고,그후 공용터미널 앞에 모인 시위대 2~3천여명이 공수부대와 투석전을 벌이던 중 수십명의 시위대가 공수부대원에 쫓겨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자, 이를 쫓아간 공수부대원들이 대검,소총 개머리판,진압봉으로 시위대를 가 격하였음 (1995.7.18 검찰, 5.18관련 사건 수사보고중에서)

공용터미널은 시체가 발견됐다는 증언(미확인 상태)까지 나오는등 공수들 의 만행이 한층 더해진 상황임을 느끼게 해주는 충돌지역이였다. 이 상황을 黃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전남사회운동협의회編)에서 인용한다.

공수대 중대병력이 구역 부근의 소방서를 지키고 있었다. 물러났던 시민 들은 다시 로터리 가운데로 서서히 물려들었다. 천여명의 군중이 집결되 자,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하나가 앞쪽으로 나오더니 울음을 터뜨리며 자기 친구가 공수대원에게 맞아죽은 경위를 얘기하고 우리 모두 친구와 형제들 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외치고 나서 직접 앞으로 나아가 공중전화 부스 와 가드레일을 부수자 시민들이 일시에 합류하여 순식간에 공용터미널 후 문 구역 방향으로 바리케이드가 쳐졌다.

그들은 보도 블럭을 깨어 돌조각을 많이 만들어 확보했다. 용감한 청년 들 몇 사람이 넘어진 공중전화부스 뒤에 몸을 숨기고 전화부스를 엄폐물로 삼아서 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공수부대와의 거리가 50여미터로 좁혀지자 일제히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최루탄이 날아오면 잠시 물러났다가 또 전 진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계엄군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장갑차가 갑자 기 정면으로 뛰어나와 바리케이드를 부숴 버리고 길 한복판의 시민들을 양 쪽으로 갈라놓았다.

그러나 시위군중들은 또다시 모여들었다. 치열한 공방 전이 계속되는 중에 시민은 3천여명으로 늘어났고,갑자기 금남로 부근의 광 남로를 따라서 공수부대를 실은 군용트럭 10여대가 들이닥쳤다. 공수대는 시위대의 후면 공용터미널 로터리 부근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공수대원쪽에서도 흩어지면 시위군중들에게 포위되어 죽음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는 좀처럼 군중속으로 깊숙이 추격하지는 못하고 1개 소대 혹은 중대 규모로 열을 지어 다가왔다. 그들은 시위대가 흩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갑자기 방독면을 쓰더니 최루탄을 수없이 쏘아댔다.

시위대는 주변 골목으로 흩어지기도 하고 바로옆 공용터미널 빌딩 3층 옥 상에 올라가 돌을 던지기도 했다. 잠시후 그곳에서 붙잡힌 학생들과 청년 15명 정도가 로터리 한가운데서 머리를 땅에 처박은 채 줄지어 엎드려 있 었다.

그때 그중에서 고등학생 하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북동 청과물 공판장 골목으로 죽자사자 달아났고,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3명 의 공수대원이 곤봉을 휘두르며 달려오자 시민들은 일시에 와락 달려들었 다. 공수대원들은 혼비백산하여 다시 쫓겨갔다.

공용터미널 지하도속으로 쫓겨갔던 시민들은 아무도 보지않는 어두컴컴한 지하도속에서 공수대원들 멋대로의 요리가 되었다. 공용터미널 사무실까지 몰려들어간 병사들은 여러 방을 뒤져 안내양들을 끌고갔다. 이 때문에 시 외버스의 발착은 광주역 앞에서 이루어지게됐다.

이날 공용터미널 충돌이후 사망자발생에 대해 金영택著 10일간의 취재수 첩에는 증언내용과 함께 구체화하고 있다. 오후 6시께 대인동 공용버스터 미널 주차장에는 7,8구의 시체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특히 이들 시체는 공용버스터미널 로터리 광장에서 시위하던 군중들이 차량으로 수송된 공수 부대원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K씨(40)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저는 이날 낮 시골에서 올라오는 어머니를 마중하러 공용터미널에 갔었 습니다. 그러나 시외버스들이 제대로 운행되지 않아 돌아오려고 광남로 쪽 으로 나 있는 문을 나와 걸어오는데 시외에서 버스가 들어오는 입구 안쪽 에서 시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어요. 아마 7,8구는 되었을 것입니다. 더 욱 제가 놀란 것은 맨 위 시테가 엎어져 있었는데 등에 X표로 칼자국이 나있더군요.

한편 이날 공용터미널부근 광주소방서앞 상황에서는 공수대원들이 화염방 사기를 사용했다는 증언이 있다. 이는 아직까지 화염방사기사용에 대해 공 식적으로 인정되지않은 상황이지만 화염방사기사용시비를 불러일으키는 첫번째 목격자 증언이기도 하다.

당시 木浦에서 오토바이대리점을 운영하던중 물건구입을 위해 光州에 왔다 가 이날 소방서앞에서 계엄군에 붙잡힌 崔충용씨(당시 29세)의 증언이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앞에 운집한 시민들이 소방서부근에 진을 치고 있던 공수들에게 돌을 던졌다.

계엄군들이 달려오면서 화염방사기를 공중을 향 해 쏘아댔다. 총구에서 불이 뿜어나오는 살상용 화염방사기를 쏘아대는 것 을 보자 한편 두렵기도 했지만 공수들의 잔악함에 치가 떨렸다. 화염방사기 는 공중을 향해 발사,공포용으로 사용한 것같았다

이밖에 공용터미널 대합실에서 공수대원의 만행에 대해 1996년 1월 光州 현장조사때 光州지검에 자진출두한 梁建相씨(당시 35세.전도사)는 공용터 미널 대합실을 지나던중 계엄군에게 쫓겨온 학생 7~8명중 한 여학생이 내 게로 와 오빠라고 해달라고 애원했다.

군인들에게 여동생이락 했으나 거짓말한다며 대검으로 여학생의 가슴부 분을 그어 피가 낭자했고 여학생은 군인들에게 끌려갔다.나 또한 성직자라 고 신분을 밝혔으나 개머리판으로 심하게 구타당했다고 밝혔다.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인 시민들은 그러나 공수대원들의 강력한 진압에 해산했다가 또다시 몰려들어 시위를 벌이곤 했다.

검찰의 5.18사건관련 수사결과에는 이후 공용터미널 상황을 이렇게 정리 하고 있다. 17:30 공용터미널부근 5백여명의 시위대가 계엄군과 대치하 고, 17:40께 공용터미널 앞에 다시 시위대 1천여명이 집결했으나 계엄군의 강력한 진압으로 해산하였음 19:30께 공용터미널에 시위대 1천여명이 공 수부대와 대치하다가 해산하였음

제 38회 19일 밤 / 대검난무..공포의 암흑천지
 
   19일 광주도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하늘에 검은 먹구름이 끼더니 저녁무렵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도로마다 얼룩진 핏자욱이 빗물로 더욱 선연히 드러났다. 가랑비를 맞으며 시민들은 모두 광주의 눈물이라고 했다. 하늘을 쳐다보며 울분에 찬 눈물을 흘리는 시민들도 많았다.

이틀동안 광주에 찌들었던 최루탄 가스가 씻겨졌다. 도로 곳곳마다 얼룩 졌던 핏물은 지워져가고 있었으나 부서진 공중전화 부스며 깨진 유리병 조 각,타버린 차량의 시커먼 골재,부서진 보도블럭등은 아직도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점차 빗줄기가 굵어지자 집으로 돌아가는 시민들은 한결같이 빗 물에 씻겨진 핏자국처럼 이제 제발 더이상 살륙이 없기를 간절히 바랬다.

오후 6시 광주공원에는 수천명의 시민들이 모여 전두환 타도등 구호를 외 치며 시위를 벌였다. 30분후쯤 광주공원 광장에서 공수부대원들이 대학생 8 명을 팬티만 입힌 채 속칭 원산폭격이란 기합을 주고있었다.(시청 상황일 지)

광주공원에 수천명이 집결해 있던 시각은 오후 5시께부터. 광주천을 사 이로 시내 중심가와 마주하고 있는 공원광장은 지역적 특수성때문에 시위 대의 퇴각로 역할을 해냈다.

또 이곳에서 거점사수 임무를 맡은 계엄군중 1명이 시위대에 쫓겨 적십자병원쪽으로 달아나다 수명의 학생으로부터 구 타를 당하고 총기를 피탈당하는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계엄사 상황일지)

공업사를 운영하던 裵성진씨(당시 30세)도 당시 서동에서 건물공사를 하 던중 시위군중들에 역습을 당해 공수부대원들이 쫓기는 광경을 목격했다. 서동에서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공원다리를 보니 많은 시민들이 있었다.

시민들은 군인들에게 돌멩이를 던지고 있는 가운데 공수들 2명이 시위하는 사람들을 쫓아왔다. 순식간에 공수부대원 2명은 시위군중에 둘러싸이게 되 었다.

그중의 한 명은 운좋게 포위망을 빠져나갔으나 다른 한 명은 다급했 던지 광주천 풀밭으로 뛰어내렸다. 부근의 시위군중들은 그에게 일제히 돈 을 던져 거의 초주검상태로 만들었다. 그러자 지켜보고 있던 시위군중들이 함성을 올렸다.

밤 8시가 가까워온 시각이었다. 광주고속버스 터미널 부근 청과물시장앞에 서는 인근 자동차정비공등 시위대 1천여명이 몰려 대형 아치를 불태우며 공중전호 부스와 대형 화분을 부숴 바리케이드를 쳤다. 이때 시위대는 경 남 번호판을 단 8t짜리 화물트럭 한 대를 불질러 버렸다.

트럭에는 각종 플라스틱 제품들이 가득 실려 있었는데,군중들은 경상도 출신 공수대원들이 광주시민을 학살하러 왔다는 소문이 치를 떨고 있던 터 였다. 군중들은 운전수도 경상도 사람이니까 죽여버리자고 흥분했지만 누군 가가 만류했다.

그 운전수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XXX이 죽일 놈이고 공 수부대가 천인공노할 놈들이지라는 설득에 모두들 물러났다. 그들은 타오 르기 시작한 트럭을 몰고 공용터미널앞을 지키는 공수부대쪽으로 몰려갔 다. 시위대는 새정부를 선전하는 구호가 적힌 대형아치를 불질렀다(黃晳映 기록.전남사회운동협의회編.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중에서 발췌)

밤8시 30분께 공수부대의 진압에 밀려 달아나던 시위대 5백여명은 북구 청에 투석했다. 또 이들은 계엄군에 의해 저지되자, 다시 누문동파출소,역 전파출소,임동파출소,양동파출소등 4개 파출소을 공격해 파괴시켰다. 이중 임동파출소는 전소됐다.

이어 밤9시께 7공수여단 33대대가 광주역에 다시 출동했다. 밤 10시 가까 이 시위대 60여명이 역전파출소를 재점거했고,KBS광주방송국에 시위대 1백여명이 침입하여 기물을 파괴했다.

밤 10시 25분께 시위진압 병력은 역전파출소 점거 시위대를 해산시킨뒤 북구청 주변의 빌딩,여관,다방,주택가에 대한 수색을 실시해 파출소 방화 관련자 13명을 검거했다. 이후 7공수 33대대는 밤10시 50분께 주둔지인 전 남대로 복귀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의 가택수색은 잠자고있던 무고한 시민들을 대검으로 찌르고 군화발로 차는등 무자비한 진압을 재현한 것이었다.

당시 신안동 광주고속터미널 인근 세차장에서 일하던 李禱炯씨(당시 23 세)도 엉뚱하게 잠을 자던중 변을 당했다. 1996년 1월 검찰의 광주현장조사 때 참고인조사를 받은 李씨는 검찰에서 당시를 증언했다.

19일 밤 10시께 내가 근무하고 있는 세차장에서 동료 3~4명과 잠을 자던중 계엄군들이 세 차장에 난입,오른쪽 허벅지를 대검으로 찌르고 곤봉으로 수차례 구타한뒤 서부경찰서로 끌고 갔다.

세차장 방에 작은 유리창이 하나있는데 깨진 유리 차응로 풀래쉬를 비춰보던 계엄군이 안에 사람이 있다면서 무작정 들어 와 대검으로 찌르고 구타했다. 李씨는 이후 폭도라는 진술서를 쓰도록 강요받다가 20일 상무대로 끌려간뒤 21일 풀려났다.

밤 11시께 누문동파출소에는 서부경찰서 소속 경찰이 출동해 시위대를 진 압했고, 양동파출소에는 경찰기동대와 31사단 96연대 1대대 병력이 출동해 시위대를 진압하고 파출소를 탈환했다.

이날의 시위진압과정에서 공식적 사망자는 金안부씨(당시 36세.光州시 西 구 月山동)였다. 金씨는 광주공원옆 광주시 서구 서2동 전남양조장 공터에 서 처참히 일그러진 시체로 발견됐다. 막노동꾼인 金씨의 사망발견당시 모 습은 안면이 일그러지고 전신이 온통 타박상을 입은 채였다.

군 발표에 따르면 이날까지 공식사망자는 18일 금남로 지하상가공사현장 에서 숨진 金경철씨(당시 28세)와 金씨등 2명.농아인 金경철씨는 공용터미 널에서 처남을 전송하고 돌아오다 아무 죄없이 무자비한 구타를 당한뒤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됐다 19일 오후 3시께 결국 숨졌다. 말못하는 자신 의 입장을 온몸으로 설명하려다 오히려 더욱 두들겨 맞고 실신한 金씨였다.

한편 19일 군경 24명과 학생,시민 수십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부상자중 崔 승기(당시 20세.학생),金인윤(당시 21세),李인선(당시 27세),崔미자씨(여.당시 19세)등 5명은 자상을 입었다.

이같은 사실은 1995년 7월 18일 검찰의 5.18사건관련 수사결과에 명시된 것으로 그동안 신군부의 거듭된 부인에 도 불구하고 진압에 나선 공수부대원들은 이미 시위진압초기단계부터 대검 을 사용했음을 명백히 해주고 있다.

제 39회 유인물 등장 / 계엄군 만행 고발한 시민의 신문
 
   계엄군의 참상을 본 시민과 학생들은 우선 이같은 사실을 알리는 방법을 찾았다. 시민들도 사실을 알지못한 상태였기때문에 외부에 공수부대원들 의 만행을 알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더욱 언론에서는 18일의 광주상황에 대해 왜곡보도아니면 일체 보도를 하 지않고 있어 시민들은 갑갑한 상황에서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19일 광주민중항쟁기간 시민들의 유일한 정보제공자료가 된 유인물이 최 초로 등장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자연 발생한 것이었다.

유인물 작업은 주로 학생.지식인층.노동자에 의해 이뤄졌다. 全南大 대학 의 소리 발행팀이 유인물을 제작,배포하기 시작했고 光川동 들불야학팀 이 尹祥源씨(당시 30세.노동운동가.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계엄군의 발포 로 사망)를 중심으로 발행했다. 또 문화팀 광대가 朴효선씨(당시 29세.교 사)를 주축으로 유인물을 제작하고 있었다.

尹祥源씨는 1950년 光山군 林谷에서 尹석동씨의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 났다. 光州 북성중과 사레지오고를 거쳐 71년 全南大 정외과에 입학한 그 는 대학 2학년까지만 해도 성격이 쾌활하고,연극을 좋아하는 평범한 대학 생에 불과했다.

그가 사회현실에 눈을 뜬 건 75년 군제대 후,복학하면서 金 相允씨등 민청세대들과 만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그는 유신체제의 질곡 속에 신음하는 민족.민중들과 만나게되고,78년 졸업과 동시에 가까스로 취 업한 서울모은행을 6개월만에 팽개치고 귀향했다.

光州시 西구 光川동 한남 플래스틱공장에 노동자로 취업한 그는 70년대 후반기의 光州노동운동과 야 학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행하면서 朴관현씨등을 만났다.

들불야학의 강 단을 조직해 강학을 하던 시절,5.18을 만나 尹씨는 이양현.정상용.박효선씨등 과 함께 도청항쟁지도부를 구성,대변인을 맡아 활동하던중 27일 계엄군의 도청진압작전에서 숨졌다. 최근에는 尹祥源賞이 제정돼 매년 5월이면 그 를 기리고 있다.

19일에는 朝鮮大 민주투쟁위원회이름의 민주시민아 일어서라는 유인물 도 거리에 붙여졌다.

光州민중항쟁기간 가장 대표적인 유인물은 투사회보다. 이 투사회보는 尹祥源과 들불야학에 의해 주도한 것으로 21일 1호를 시작으로 25일 밤 8 호까지 발간됐다가 26일부터 호수는 계속 9호를 사용하면서 제목을 민주 시민회보로 변경,발간했다. 그러나 마지막호였던 제10호는 27일 새벽 계엄 군의 진입으로 미처 배포하지 못한채 압수됐다.

당시 투사회보를 발간하는 책임을 맡았던 田龍浩씨(당시 22세.당시 全南大 경제학과 3년)는 투사회보는 5.18의 상황이 정부와 언론에 의해 폭도들의 난동,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악선전에 휘말려든 폭동으로 왜곡되는데 대항해 서 光州의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뜻으로 출발했다고 회상했다.

특히 田씨는 투사회보로 제호를 붙인 것은 시민들의 위대한 승리를 의미하고 있으며,당시 상황은 모든 제도언론이 침묵을 지켜 시민들이 진실을 알수 없 었기 때문에 진실을 알리기위한 언론매체의 출현은 절박한 것이었다고 덧 붙였다.

때문에 尹祥源과 들불야학팀이 19일 光州시민 민주투쟁회보라는 이름으 로 발행한 호소문은 투사회보의 효시가 되는 셈이며,최초의 유인물이기도 했다. 光州시민 민주투쟁회보명으로 80년 5월 19일 제작,배포된 호소문 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주 애국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말입니까? 웬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죄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죽이고,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에 실어가며, 부녀자를 백주에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 까?

이제 우리가 살 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학생들을 보호하고,유신 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특전단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의 젊은 학생 들이 그렇게 소리 높여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도 아닙니 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바로 유신 잔당과 전두환 일파들입니다.

죄없이 학생들과 시민들이 수없이 죽었으 며 지금도 계속 연행당하고 있습니다. 이 자들이 있는 한 동포의 죽음 은 계속될 것입니다. 지금 서울을 비롯하여도처에서 애국시민의 궐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가 하나로 단결하여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를 영원히 추방할 때까 지 싸웁시다. 최후의 일각까지 단결하여 싸웁시다.

그러기 위해 5월 20일 정오부터 계속해서 광주 금남로로 총집결합시다!

이같은 유인물등장에는 光川동 들불야학과 녹두서점(光州시 東구 壯동 구 청산학원옆에 위치했었음)이 모체가 됐다.

18일 저녁무렵 녹두서점을 찾아온 尹祥源씨는 예비검속 당시 검거된 녹두 서점 대표인 金相允씨의 부인인 鄭賢愛씨(당시 29세)와 당시 상황을 외부에 알리기위한 유인물제작을 논의했다.

그때 운동권의 포스트격인 녹두서점에는 서울.釜山.大邱등 전국에서 光州 상황을 문의해왔고 鄭씨의 친지와 가까운 이웃들로부터는 남편의 연행에 따른 염려의 성금이 답지했다.

鄭씨는 光州의 실상을 확실성있고 체계적으로 외부에 알려야겠다는 생각 에서 성금의 대부분을 尹씨에게 건넸다.

들불야학팀은 이 성금을 기반으로 19일부터 본격적으로 유인물 제작에 나 섰다. 제작된 유인물들은 녹두서점을 통해 시내 각지역에 배포됐다.

들불야학팀은 78년 7월 尹祥源씨를 중심으로 노동야학을 시작한 이래 당 시 1백여명의 노동자 학생을 배출하고 있었다. 19일부터 유인물 제작에 참 여한 인적구성은 야학학생인 光川공단노동자들과 대학생(야학교사)등 20여 명이었다.

21일 투사회보로 제호가 붙으면서 차량임무규정,투쟁 대상을 정 한 구호,보급문제 시체운반등에 관한 사항을 집중적으로 포함시켜 회보를 제작했다. 부서로는 문안작성조(尹祥源.田龍浩),필경조(朴용준.27일 계엄군에 의해 사망),등사조(金성섭.羅명관.윤순호),물자조달조(金경국)등으로 짜고 배포는 주로 근로자들을 통해 녹두서점과 각 지역으로 보내졌다.

19일부터 등장한 유인물은 이후 21일부터 지방신문발행이 완전히 중지된 상태에서 격문이나 플래카드,가두방송이 지니는 일시적인 성격,부분적인 약점을 극복한 활자로서의 지속성.논리성 변두리지역까지 보급될수 있었던 전면성의 장점을 충분히 살린 시민의 신문의 효시가 됐다.

제 40회 녹두서점 / 민주화 불지핀 '시민운동메카'

    光州시 東구 壯동 구청산학원옆에 위치했던 녹두서점은 80년 6월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이 작은 서점은 80년 5월 光州내부는 물론 외지와의 연결고리로 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곳이었다. 또 80년 5월 이전에는 이 지역운동권의 메카였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거기 和順이지요 80년 5월 17일 밤11시께 녹두서점에는 섬뜩한 전화벨소 리가 울렸다. 아닙니다. 光州입니다 녹두서점의 주인 金相允씨(32.당시 全 南大국문과 3년 복적생)는 2시간전부터 돌아가는 긴박한 상황에 뭔가 위 기감을 느끼다 엉겹결에 받은 전화에 아무 생각도 못했다.

곧바로 셔터문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연 金씨의 목에 누군가 권총을 들이 댔다. 어둠속에서 사복을 입은 2명의 청년이 버티어서 있고 길가에는 군용 지프 1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和順이냐고 걸려온 전화는 사람이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한 전화였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金씨는 옷이라도 입고 가야할 것 아니냐는 아내 鄭賢 愛씨(당시 28세.교사)에 의해 겉옷을 챙겨입었다. 金씨는 그대로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갔다.

金씨가 연행된 다음날 이른아침,山水동 金씨의 동생 相集씨(당시 24세)집 에는 형뻘되는 尹祥源씨(당시 29세.5월 27일 도청에서 계엄군에의해 사망) 가 갑자기 찾아왔다. 相允형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이 어젯밤 예비검속령에 모두 연행됐다.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다.네가 대신 녹두서점에 나가 일을 보고,내가 상황을 연락하겠다.

尹씨는 당시 光川동에서 들불야학을 운영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사회의식 을 일깨워온 노동운동가였다. 그는 낮동안에는 녹두서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相集씨가 녹두서점에 도착하자 일부 친지들과 예비검속된 가족들이 몰려 들었다.

모두들 서로를 위로하면서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 대처방 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18일 오전10시 30분께,尹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 다. 全大 정문앞인데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을 무차별살상하고 있다.학생 들이 신역부근으로 이동할 것같으니 다시 연락하마.

相集씨는 尹씨의 연락을 받자마자 형수인 鄭賢愛씨와 함께 상황판을 만 들기 시작했다. 상황판은 시위학상들의 이동경로에 따라 일어나는 상황들을 약도형식으 로 표기하고,별도의 기록지에 상황을 시간대별로 메모해 나갔습니다.

상황판을 만들기로 한 것은 전국 각지에서 문의해 오는 光州상황을 신속 하고 정확하게 알리기위한 때문이었다. 尹씨는 신역앞과 공용터미널부근의 상황도 속속 전해왔다.

낮 12시께는 相集씨도 시위대에 합류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상황을 목 격하기위해 시위대들이 몰려있는 가톨릭센터쪽으로 달려갔다. 도청쪽으로 밀고가려던 수천명의 시위대들이 경찰의 진압에 의해 5~6차례 밀리기 시작 했다.

相集씨는 맨손가지고서 경찰과 대항할수 없다고 판단,서점에 돌아오자 화 염병을 만들기 시작했다. 멀리 白雲동 부근 주유소에서 구해온 휘발유로 화염병을 만들었다.

이날 오후 몇차례 시위현장에서 시험발사를 해 보았으 나 번번히 불발이었다. 오후4시께부터 시내에서 공수대원의 진압이 시작됐 다는 급보가 날라들었다.

이때는 일부 운동권 선후배들도 녹두서점을 포스 트로 상황을 연락해왔다. 이미 그전부터는 서울.釜山.大邱.仁川.全北등 각 지에서 녹두서점에 光州상황을 문의해 오고 있었다.

오후 4시30분께 일단의 시위대들이 동명다리 부근에서 壯동 로터리쪽으로 내려오다 50여명의 경찰이 탄 버스를 에워 싸고 노동청쪽에 대치중인 경찰를 향해 협상하자 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즉 포로가 된 경찰과 예비검속된 인사들과 맞바꾸 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0분쯤후 갑자기 공수대원들을 가득 태운 트럭 들이 나타났습니다. 차량에서 내린 군인들은 착검을 한채 시위대들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었습니다

尹씨와 相集씨는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다수의 시민들을 목격했다. 그날 오후 7시께 녹두서점에 모인 尹씨와 相集씨,鄭賢愛씨,그리고 박효선씨(당시 29세)등은 현상황을 이대로 방관할수 만은 없다고 결론짓고, 光州의 실상을 확실성있고 체계적으로 알리기위해 홍보물을 발행키로 의견을 모았다.

鄭씨는 이날 친지와 가까운 이웃들로부터 남편이 연행된데 따른, 염려의 성금 으로 받은 금액을 모두 尹씨에게 건넸다. 당시 들불야학팀의 교장이었던 尹씨는 이 성금을 기반으로 19일부터 본격적으로 유인물을 제작하기 시작했 다.

제작된 유인물들은 녹두서점을 통해 시내 각 지역에 배포됐다. 19일 상황 도 살벌했다. 계엄군들의 무차별 진압은 상황판 곳곳에 나타났다. 相集씨는 이제 光州상황을 전화답변만이 아닌 직접 알려야겠다고 생각하 고,서울지역의 광민.동녘.한마당.광정서적등 출판사에 낱낱이 상황을 전했 다.

그리고 이날 저녁 서점에는 괴전화가 걸려왔다. 30대 중반쯤으로 느껴 는 어느 남자가 군부대 이동및 진압군내부의 상황을 알려왔다.

형님의 친구다.지금 光州에 와있는 공수부대는 3.7.11공수이고,20일 오후 에는 미순양함이 釜山항에 도착할 것이다. 미순양함에서 헬기가 떠 光州상 공을 정찰비행할 것이다. 20일에는 전방부대가 光州인근으로 이동할 것이 다. 군내부에서는 강경진압에 대한 찬반이 일고 있다.

相集씨는 이 제보가 정확한 것이라는 것을 그뒤 확인할 수 있었다. 제보 자는 정보기관에서 종사하는 이 지역 출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녹두서점 에서본 19일은 오후부터 외신기자들의 취재활동에 계엄군들의 진압이 다소 둔화된 느낌이었다.

들불야학팀의 무작위로 살포된 유인물의 배포창구였던 녹두서점은 시위의 상황실 비슷한 역할을 했다. 17일 예비검속을 기화로 그때까지 시민투쟁의 선도적역할을 했던 학생지도부가 거의 잠적하다시피 해버렸기 때문에 학생 청년들이 수시로 드나들곤 하던 녹두서점이 자연스럽게 그같은 장소가 되었 던 것이다.

당시 녹두서점에 있던 鄭씨와 相集씨,鄭씨의 동생인 鄭賢順씨(당시 26세) 등 일가 3명은 27일 아침 계엄군에 연행됐다. 녹두서점과 끈끈한 연을 맺었 던 尹씨는 이날 새벽 도청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산화했다.

鄭씨는 폭도서열 60번이란 죄명아래 넉달후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相集씨는 소요죄등 죄목으로 11개월,鄭賢順씨는 2개월만에 특별사면과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지난 77년부터 농민.노동및 학생.여성운동관계서적들을 공급하며 이 지역 운동권의 메카로 등장했던 녹두서점은 80년 6월부터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녹두서점은 5.18민중항쟁기간 光州의 정신적 샘터였음은 참여한 든 이들의 가슴에 또렷이 남아있다.

제 41회 항쟁주체 "위대한 민초"총칼맞서 온몸 항거
 
   5.18 光州민주화운동 과정에서 光州에 내려온 계엄군에 대항한 光州사람 들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나.
표면적으로 우리는 5월 18일부터 27일 상황속에서 몇가지로 나눠볼수 있다. 우선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내려진 비상계엄확대속에 5.18의 첫 충돌로 보는 전남대앞 상황이다. 예비검속속에 많은 학생들과 재야인사들이 붙잡 힌 상태에서 대학생들은 18일 새벽 학교에 주둔한 7공수부대원들과 학교정 문앞에서 부딪혔다.

이후 학생들을 중심으로한 시위군중은 도청앞을 향해 나가면서 곳곳에서 계엄군들의 저지를 받는다. 그러나 문제는 공수부대의 급격한 추가배치로 18일 상황은 급전되면서부터. 18일 시위의 주도적 역할을 하던 학생층은 공수부대의 진압에 상당한 충격을 받고 연행됐다.

때문에 이후 시위의 주도적 역할을 하던 학생들보다는 시민,즉 민중이 시위를 주도하게 됐다. 시위를 주도한다기보다는 학생과 시민에 대해 무차별적인 진압을 일삼는 공수부대원들의 행동에 치미는 분노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었다.

시민이 주축이 된 시위군중들은 21일 도청앞 집단발포이후 무기탈취로 무장을 한뒤 불려지는 시민군의 출현전까지 공수부대원들에 항거했다.

1995년 7월 18일 검찰의 5.18사건관련 수사결과에 나타난 光州항쟁발생 원인분석이다.

사태의 발단이 된 전남대와 전남도청앞에서의 학생과 공수부대의 충돌은 다른 지역에서는 소요가 발생하지 않은 점에 비춰 이례적이기는 하나, 이미 학생회 지도부에 의하여 휴고시의 행동치침이 내려져 있어

이에따라 전남대 앞에 상당수의 학생들이 모이게 됨으로써 시위를 시작할 수 있는 구심점을 갖게 된데다가 학생들이 계염군의 기습적 대학 점령, 잔류 학생들에 대한 구타, 무조건적인 해산조치에 분격하고, 계엄확대를 통한 군의 전면 등장과 김대중 등 정치 지도자자와 학생 지도부의 체포에 반발하여 군병력의 출동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감행하였고,

이에 강한 기질을 가진 공수부대가 폭동 진압식의 강경진압을 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한 것으로 판단되며, 이후 사태가 악화된 원인은 계엄군의 입장에서는 군의 등장과 그 위력만으로도 시위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공수부대의 출동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발생하였을 뿐만아니라

방패나 방호복등 방호장비없이 군복만을 입은 채 시위를 진압하고 주모자등을 체포해야하는 상황에서 동료부대원들이 시위대의 투석으로 부상을 입자, 강력한 공격적 진압과 체포를 위주로 작전을 하면서 남녀노소 시위가담여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가격하거나 체포하여 부상자가 발생하고

극도의 분노감과 적개심을 야기한 데다.보도통제로 인하여 정확한 실상이 알려지지 않음으로써 악성 유언비어가 발생하고,그것이 다시 광주시민들로 하여금 고립감과 아울러 격렬한 저항감을 야기함으로써 마침내 공수부대를 몰아내자는 결의를 하고.

공수부대 출현이 光州항쟁의 기폭제였음은 검찰의 분석이 아니더라도 이미 입증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공수부대의 오산을 적시한 부분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계엄군의 입장에서는 군의 등장과 그 위력만으로도 시위가 발생하지않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공수부대의 출동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발생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수부대원 자신들의 판단 역시 군부대에 감히 힘없는 시민들이 가만일 수 밖에 없을 것이란 크나큰 오산이 있었음을 스스로 밝히는 부분이다.

이를 입증하듯 당시 光州에 투입됐던 공수부대원들 사이에 어쩌구니없는 4단계란 자조섞인 농담이 유행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95년과 96년 검찰의 12.12및 5.18사건 수사기록에 들어있는 것으로 당시 시위진압을 지휘했던 朴琮圭3공수 15대대장이 5.18직후 육군본부에 제출한 체험담의 일부와 함께 자세히 소개된 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어처구니없는 1단계= 공수부대만 보면(시위대가) 똥줄이 나게 달아나야 하는 데도 달아나지 않는 단계
어처구니없는 2단계= 달아나지는 못할 망정 접근은 안해야 하는데도 접근을 자유롭게 했던 단계
어처구니없는 3단계= 공수부대앞에서 집결하면 얻어맞으니까 집결은 못하고 게릴라식으로 모였다 흩어졌다 하다가 공공연하게 대형을 갖추고 시위를 한 단계
어처구니없는 4단계= 공수부대를 돌로 쳐서 폭도가 공수부대가 되고 공수부대가 민간인만도 못한 힘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단계
이같은 농담은 유사시 적후방에 침투하는 최정예부대인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의 위세에 눌러 형편없는 존재가 돼버렸음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을 하면 光州시민들이 금방 해산할 줄 알았다가 강경진압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많은 시민들이 시위에 가세하자 어리둥절했고 당황했음을 시시하고 있다.

19일의 시위군중의 중심세력은 시민들이었다. 金영택 著 10일간의 취재 수첩(사계절刊)는 이날 항쟁의 주체를 설명하고 있다. 오전 10시쯤 되자 군중은... 누가 모이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사람 두사람 모인 것이 이렇게 큰 무리를 이룬 것이다.

군중에는 학생이나 젊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40대의 허름한 아낙네도 있었고 60이 넘는 노인도 있었다...주로 소상인이나 자유업을 하는 청년들이 많았다. 조직적인 동원이 있었던 것이 아니요 오직 분통이 터져 나온 사람들이었다.

19일 오후 4시 40분께는 이같은 시위군중들에게 호소하는 가두방송이 시작되기도 했다. 光州소방서쪽에서 시민들의 시위참가를 호소한 사람은 全玉珠씨(본명 全春心)였다.

지금 군인들이 학생들을 무자비하고 난폭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꽁꽁 묶여서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한분이 빠짐없이 참여하여 학생들을 구합시다.

光州항쟁기간 얼굴은 모르지만 처절하면서도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애처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던 全씨 역시 누군가의 각본에 의해 방송을 한 것도,시위에 참여 한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자발적인 시민정신의 발로였으며, 무자비한 공수부대를 비롯한 신 군부에 항거한 光州의 의미를 고양하는 것이었다.

18일과 19일 光州민주화운동의 첫 단계의 항쟁주체는 학생층을 시작으로 해서 젊은 층,40~60대 아주머니,중년남자,노인등 光州시민 모두가 망라돼 있었다.

제 42회 진압군 재배치 / 각본대로 공수부대 잇따라 증파  
 
   80년 5월 18일 밤 9시께 鄭雄 31사단장은 31사단 상황실에서 작전평가 회의를 열고, 7공수여단 33,35대대 병력을 도청을 중심으로 주요 시설및 교 차로등 거점에 배치해 시위대가 집결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에따라 이날 밤10시 30분부터 밤 11시 20분사이 7공수 33대대는 경찰 지.파출소와 도로 교차점을 중심으로 한 17개 거점에 배치됐으며, 35대대는 19개 거점에 배치됐다. 각 거점에는 장교 1명,사병 10명으로 구성된 공수부 대 1개 지대와 경찰 2개 분대 24명씩이 배치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11공수여단의 추가 투입으로 진압군은 다시 배치돼야만 했다.

이날 밤 11시 40분 작전회의에서 鄭雄 31사단장은 7공수여단 33,35대 대 배치거점을 11공수여단에 인계토록 지시했다.

다음날인 19일 새벽 4시 7공수여단 33,35대대는 11공수여단 61대대에 거점을 인계하고, 33대대 는 전남대로 35대대는 조선대로 각각 복귀했다.

11공수여단이 光州에 도착한 시각은 19일 새벽 0시 50분이었다. 11공수 여단 62,63대대는 31사단의 작전통제하에 새벽 2시 10분께 조선대로 이동했 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11공수여단의 추가투입이 의미한 것이 무엇이 냐는 점이다. 즉 光州항쟁 초기 소요 악화에 대한 대비책으로 공수부대를 추가투입했다는 당시 신군부측의 주장과는 달리 7공수-11공수-3공수로 이어지는 연속적 증파는 신군부 쿠데타 성공을 위한 치밀한 사전계획이란 점이 검찰수사등을 통해 거의 정설화하고 있다.

지난 88년 12월 9일 국회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선 崔雄 당시 11공수여단 장의 증언을 통해 당시 투입과정을 살펴보자.

(崔雄증인) 80년 5월 18일 새벽,당시 11여단은 서울에 있는 동국대학에 주둔했다.

주둔을 하고서 숙영편성을 거의 마칠 무렵인 오후 3시쯤됐다. 참 모로부터 光州지역으로 증원준비 지시가 내려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질문)그때 증파이유는 무엇이라고 했나?

(증언)숙영편성을 하다 다시 거둬들이는 상황에서 그 당시 鄭鎬溶 특전사 령관이 동국대학으로 왔따. 와가지고 하는 얘기가 광주에 7여단 2개 대대 가 계엄군으로 나가 있는데 소요 진압작전을 못하고 매우 고전하고 있다.

그 러니 崔장군이 지휘하는 11여단이 거기에 나가게 되었으니 가서 임무수행 을 잘하도록 하라고 한 것으로 기억한다.

(질문) 그때 특별하게 다른 얘기는 없었는가? 가령 현지에서 어떤 유언비 어가 있고...

(증언)좋지 않은 유언비어가 있는데 경상도 사람들이 와서 光州사람을 괴 롭힌다는 내용이었다.

崔 11공수여단장의 증언은 정호용특전사령관을 만나 光州 투입 사실을 전 해들은 시각은 증파 이유와 光州상황과는 맞지않아 증파 각본이 이미 결정 돼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말해 崔여단장이 증파 지시를 전해받은 18일 오후 3시 光州에는 별다른 상황이 없었다.

전교사 작전상황일지를 통 해 보면 18일 오후 3시 50분에 7공수 33,35대대는 경찰과 함께 최초로 시위 진압에 나섰다는 점과 차이를 두고 있다.

鄭사령관이 7여단 2개 대대가 소 요 진압작전에 고전하고 있다는 말은 그런 점에서 맞지 않다고 보여지며, 따라서 증파결정은 사전에 나 있었음을 판단할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증파된 11공수여단은 19일 오전 6시 30분 7공수여단 35 대대를 배속받아 光州 동구권 지역을 담당하고 7공수여단 33대대는 31사단 예비대로 배속 전환하라는 사단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이에따라 도청및 光 州 남부지역은 경찰이, 光州 서부 일부및 북구권은 31사단 96연대가 담당하 게 됐다.

19일 기존 7공수여단과 증파된 11공수여단의 光州진압상황을 특전사 전 투상보를 통해 시간대별로 옮겨본다.

<7공수여단> 04:00 거점 인계(33,35대대-11여단 61연대에). 11:00 33대대 1중대 광주 제일고앞 출동,그러나 첩보불량으로 즉시 복귀.
31사단장 35대대 방문.
금남로 3~4천여명 시위중 출동준비하라.
15:04 35대대 출동준비 완료.
15:15 35대대 출동(충장로,금남로).
15:40 33대대 출동 개시(31사단장 의명).
15:55 33대대 30(장교수)/250(사병수) 출동.
35대대는 도청에서 금남로쪽으로 진압.
33대대는 계속 기동하면서 진압.
16:20 35대대 도청방향으로 재배치.
17:00 도청앞 재집결.
18:30 전남대 복귀완료 전과:35대대 X 33대대:9명 체포,31사에 인계. 20:00 31사에서 작전회의(출동준비 재점검).
21:00 33대대 광주역 점령.
21:20 35대대 광주 종합터미널 점령.
22:50 33대대 전남대 복귀.

덧붙여 11공수 전투상보에 나타난 작전개요부분은 구체적으로 19일 11공수의 활약상을 설명하고 있다.

19일 광주로 이동한 여단은 04:00시부터 7 여단 33대대의 임무를 인수하여 시내 주요파출소및 목진지를 점령 소요사 태 예상지역을 거부하고 2개대대는 동일 10:00부터 시내 주 도로에 무력시 위를 위해 차량 30대로 출발하였음.

10:40분경 충장로 일대에 학생 2백여명이 집결하여 경계근무중인 계엄군에게 투석전과 화염병을 투척,이를 제지하자 소요군중은 순식간에 2천여명으로 증가되어 무력시위중인 62,63대대가 현장에 중원되어 소요를 진압.

14:50분경 금남로 한일은행앞에 군중 1천여명이 집결하여 계엄군과 대치중 15:00시경에는 2천여명으로 증가되어 여단 3개대대와 7여단 35대대가 출동 주요목을 점령후 소요군중을 해산시켰으나 16:45분경 해산된 군중이 시외버스 터미널에 재차 집결 여단은 시외터미널에 61대대,한일은행앞에 62대대,광주고교앞 63대대,광주소방서앞 에 35대대를 배치하여 소요군중 제압.

이후부터 소요군중은 폭도로 급변하여 시내 주요 관공서및 파출소에 방화를 하며 계엄군이 배치되지않은 취약지역에 테러활동을 하였으나 계엄군은 상기지역에서 계속 산발적인 소요군중은 진압하며 금남로 일대의 군중 집결을 저지시켰음.

치밀한 진압작전에 증파된 11공수여단등의 보다 참혹한 진압방법을 동원, 계엄군 철수를 외치는 시민들을 무차별 가격했다.

이러한 신군부측은 7공 수와 11공수를 光州로 끌어들인 것에 만족하지않고 19일 오전 9시 30분 尹 興禎 전교사령관에 의해 1개 공수여단의 증원이 또다시 요청됐다.

제 43회 전교사 상황실
전씨 비선통해 훈령시달..기관장회의자료등 파기된채 81년해체  
 
   전교사는 전투교육 사령부(CAC)를 이른다.
전교사는 全南.北 계엄분소로서 공식 지휘계통상 光州에 투입된 모든 계엄 군의 지휘를 총괄하는 최상의 부대였으며, 光州민주화운동기간 작전을 총지 휘한 곳이었다. 또 계엄법에 따라 행정.사법의 지휘통제권까지 보유하고 행 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도 아울러 가졌다.
당시 尹興禎 전교사사령관은 항쟁 초기 도지사 이하 유관기관장들을 불러 수시로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전교사의 이러한 형식상 권한은 어디까지나 행정기관과 검찰등 유 관기관에만 적용된 것이었을 뿐 군부 내의 위상은 또다른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진압작전에 투입된 공수부대에 대한 지휘권을 가진 전교사와 향토사 단의 훈령이 무시된 채 비공식 지휘계통을 통해 신군부의 핵심으로부터 하 달되는 훈령들만이 이들 진압군에 먹혀들어 간것은 내.외부적으로 각각 다 른 전교사의 위상과 권한을 드러낸 증거이기도 했다.

19일 오후 2시 尹전교사령관은 사령관실에서 도지사,교육감,검사장,光州시 장,중앙정보부 분실장,지방노동청장,우체국장,31사단장,11공수여단장등이 참 석한 소위 光州지역 기관장회의를 개최했다.

이날의 대책회의는 다음날인 20일에도 尹전교사령관의 주재로 한 차례 더 열렸다. 그러나 이러한 대책회의의 자료에 대해 군은 모든 관련자료를 파기해 버 려 공식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국방부는 지난 89년 국회 광주특위청문회 당시 평민당 김영진의원이 자료제출을 요구한 기관장회의의 개최일시, 참석자 인적사항,회의자료,회의록 및 녹음테이프에 대해 81년 전교사 해체로 모든 비밀문서를 파기해 현재 보관하지 않고 있다며 제출을 거부했다.

19일 대책회의에 대해 1994년 7월 18일 검찰의 5.18사건관련 수사결과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지역기관장들은 군의 진압행동이 너무 과격하다,어 느 나라 군대인지 의심이 간다,고교생들까지 동요하고 있다면서 연행자 전 원 석방과 명단 공개를 요구하였고,尹興禎전교사령관은 鄭雄 31사단장과 崔雄 11공수여단장에게 가혹한 진압 방법을 사용하지 말고 주동자가 아닌 사람은 석방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지역기관장들은 당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상황을 전교사령관에게 항의했고, 분명 전교사령관은 이에대해 향토사단장과 공수여단장에게 동시 에 가혹한 진압방법을 사용하지 말라고 지시했음이 분명하지만 이후 진압 과정은 전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완화된 분위기는 전혀 느낄수 없었다.

이러한 점에 미뤄볼때 당시의 군 내부 지휘권에 상당한 문제가 있음을 알수 있다. 더욱이 일선 진압부대인 3,7,11공수여단과 20사단이 상급지휘부대인 전교 사와 31사단에는 작전상황을 전혀 보고하지않았으며, 육본 역시 비선(秘線) 계통을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반면 진압작전과 직접 관련이 없던 黃永時 당시 육군참모차장과 鄭鎬溶 당시 특전사령관은 서울과 光州를 분주히 오가며 무력진압을 독려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지난 95년과 96년 검찰의 5.18 재수사과정에서 尹전교사령관이 검찰에 진 술한 내용은 이같은 상황을 더욱 극명하게 전해주고 있다. 계엄군의 무차 별 살상행위는 19일 오후 2시께 열린 광주지역 기관장회의에서 기관장들이 공수부대의 살상행위를 거론하며 거세게 항의,처음 알게 됐습니다.

당시 광주지검장이었던 裵命仁검사장은 이것은 계엄군의 진압해위가 아니 라 살인행위다라며 강력히 항의한 기억이 납니다 군명령체계상 말도 되지 않는 소리지만 엄연한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전교사에서 이같은 기관장들의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를 확인해달라고 공 수부대에 지시했으나 위협사격을 가한 것은 사실이나 살상행위는 없었다며 오히려 거짓보고를 했습니다

전교사로부터 계엄군의 진압작전과 시위상황을 보고받고 이를 육본에 보 고해야할 책임을 맡았던 2군사령부 陳鍾埰사령관도 검찰에서 이와 비슷한 진술을 했다.

내가 광주사태때 한 일은 19,21,23일 등 세차례에 걸쳐 계엄 분소인 전교사령부를 방문,현지상황을 보고받고 尹사령관으로부터 계엄군 의 시외곽 철수를 건의받아 이를 李熺性계엄사령관에게 전달한 사실밖에 없습니다.구체적인 작전상황이 2군사령부로 보고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도 보고가 안돼 2군사령부 작전처에서 전교사상황실 담당자에게 확인을 받아 연행및 부상자수를 일부 파악하는게 당시 실상이었습니다

이같이 일선 진압부대들의 작전 상황과 시민들의 피해상황이 현장 지휘책 임을 맡은 전교사등에 전혀 보고되지않은 이유는 光州에 투입된 계엄군의 지휘권이 형상 지휘권과 실질적인 지휘권으로 갈라져 있는 지휘권의 이원화 때문 으로 풀이된다.

光州민주화운동 당시 진압책임을 맡은 계엄군의 정식 지휘라인은 李熺性 계엄사령관- 陳鍾埰2군사령관- 尹興禎 전교사령관(22일 오전10시 이전).蘇 俊烈전교사령관(22일 오전 10시 이후)-鄭雄31사단장-3,7,11공수여단장 順.전 교사는 전투교육 사령부(CAC)를 이른다.

전교사는 全南.北 계엄분소로서 공식 지휘계통상 光州에 투입된 모든 계엄 군의 지휘를 총괄하는 최상의 부대였으며, 光州민주화운동기간 작전을 총지 휘한 곳이었다. 또 계엄법에 따라 행정.사법의 지휘통제권까지 보유하고 행 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도 아울러 가졌다.

당시 尹興禎 전교사사령관은 항쟁 초기 도지사 이하 유관기관장들을 불러 수 시로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전교사의 이러한 형식상 권한은 어디까지나 행정기관과 검찰등 유관기 관에만 적용된 것이었을 뿐 군부 내의 위상은 또다른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진압작전에 투입된 공수부대에 대한 지휘권을 가진 전교사와 향토사단의 훈령이 무시된 채 비공식 지휘계통을 통해 신군부의 핵심으로부터 하달되는 훈 령들만이 이들 진압군에 먹혀들어 간것은 내.외부적으로 각각 다른 전교사의 위 상과 권한을 드러낸 증거이기도 했다.

19일 오후 2시 尹전교사령관은 사령관실에서 도지사,교육감,검사장,光州시장,중 앙정보부 분실장,지방노동청장,우체국장,31사단장,11공수여단장등이 참석한 소위 光州지역 기관장회의를 개최했다.

이날의 대책회의는 다음날인 20일에도 尹전교사령관의 주재로 한 차례 더 열 렸다. 그러나 이러한 대책회의의 자료에 대해 군은 모든 관련자료를 파기해 버려 공 식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국방부는 지난 89년 국회 광주특위청문회 당시 평민당 김영진의원이 자료제출을 요구한 기관장회의의 개최일시,참석자 인적사항, 회의자료,회의록 및 녹음테이프에 대해 81년 전교사 해체로 모든 비밀문서를 파기해 현재 보관하지 않고 있다며 제출을 거부했다.

19일 대책회의에 대해 1994년 7월 18일 검찰의 5.18사건관련 수사결과는 이 렇게 적고 있다. ...지역기관장들은 군의 진압행동이 너무 과격하다,어느 나라 군대인지 의심이 간다,고교생들까지 동요하고 있다면서 연행자 전원 석방과 명 단 공개를 요구하였고,尹興禎전교사령관은 鄭雄 31사단장과 崔雄 11공수여단장 에게 가혹한 진압 방법을 사용하지 말고 주동자가 아닌 사람은 석방하도록 지 시하였다.

이 지역기관장들은 당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상황을 전교사령관에게 항 의했고, 분명 전교사령관은 이에대해 향토사단장과 공수여단장에게 동시에 가혹 한 진압방법을 사용하지 말라고 지시했음이 분명하지만 이후 진압과정은 전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완화된 분위기는 전혀 느낄수 없었다. 이러한 점에 미뤄볼 때 당시의 군 내부 지휘권에 상당한 문제가 있음을 알수 있다.

더욱이 일선 진압부대인 3,7,11공수여단과 20사단이 상급지휘부대인 전교사와 31사단에는 작전상황을 전혀 보고하지않았으며, 육본 역시 비선(秘線)계통을 통 해 상황을 파악하고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반면 진압작전과 직접 관련이 없던 黃永時 당시 육군참모차장과 鄭鎬溶 당시 특전사령관은 서울과 光州를 분주히 오가며 무력진압을 독려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지난 95년과 96년 검찰의 5.18 재수사과정에서 尹전교사령관이 검찰에 진술한 내용은 이같은 상황을 더욱 극명하게 전해주고 있다. 계엄군의 무차별 살상행 위는 19일 오후 2시께 열린 광주지역 기관장회의에서 기관장들이 공수부대의 살상행위를 거론하며 거세게 항의,처음 알게 됐습니다.

당시 광주지검장이었던 裵命仁검사장은 이것은 계엄군의 진압해위가 아니라 살인행위다라며 강력히 항의한 기억이 납니다.

군명령체계상 말도 되지 않는 소리지만 엄연한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전교 사에서 이같은 기관장들의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를 확인해달라고 공수부대에 지시했으나 위협사격을 가한 것은 사실이나 살상행위는 없었다며 오히려 거짓 보고를 했습니다

전교사로부터 계엄군의 진압작전과 시위상황을 보고받고 이를 육본에 보고해 야할 책임을 맡았던 2군사령부 陳鍾埰사령관도 검찰에서 이와 비슷한 진술을 했다.

내가 광주사태때 한 일은 19,21,23일 등 세차례에 걸쳐 계엄분소인 전교 사령부를 방문,현지상황을 보고받고 尹사령관으로부터 계엄군의 시외곽 철수를 건의받아 이를 李熺性계엄사령관에게 전달한 사실밖에 없습니다.구체적인 작전 상황이 2군사령부로 보고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도 보고가 안돼 2군사령부 작전처에서 전교사상황실 담당자에게 확인을 받아 연행및 부상자수를 일부 파 악하는게 당시 실상이었습니다

이같이 일선 진압부대들의 작전 상황과 시민들의 피해상황이 현장 지휘책임을 맡은 전교사등에 전혀 보고되지않은 이유는 光州에 투입된 계엄군의 지휘권이 형식상 지휘권과 실질적인 지휘권으로 갈라져 있는 지휘권의 이원화 때문으 로 풀이된다.

光州민주화운동 당시 진압책임을 맡은 계엄군의 정식 지휘라인은 李熺性계엄 사령관- 陳鍾埰2군사령관- 尹興禎 전교사령관(22일 오전10시 이전).蘇俊烈전교 사령관(22일 오전 10시 이후)-鄭雄31사단장-3,7,11공수여단장 順.

그러나 실제 지휘라인은 신군부 수장인 全斗煥합수본부장을 정점으로 신군부 대부격인 黃永時참모차장-鄭鎬溶특전사령관-3,7,11공수여단장이었다.

반면 光州지구 보안부대는 이 기간 무척 바쁘게 돌아갔다. 19일 보안사는 光州 지구 보안부대의 상황 보고및 조치가 미흡하다는 全斗煥보안사령관의 지적에 따라 보안사 기획조정처장 崔禮燮준장을 光州에 파견하였으며,오후 4시께 송정 리 비행장에 도착한 崔禮燮준장은 李在于 光州지구 보안부대장의 건의를 받고 보안사에 연행자 조사요원과 예산의 지원을 요청했다.

崔준장은 전교사 부사령관 부속실과 光州지구 보안부대장실 옆방에 머물면서 光州상황을 보안사에 보고하고,전교사 작전회의에 참석하거나 金基錫 전교사 부사령관과 함께 시민 협 상대표를 만나는등 임무를 수행하다가 27일 오후 보안사로 복귀했다.

또 李鶴捧보안사대공처장의 지시로 20일 오전 8시 光州에 도착한 洪性律 1군 단 보안부대장(대령)은 이날 오전 9시 30분께 光州시내로 들어가 직접 상황을 파악하고,21일 이후 시내에 은신하면서 24일까지 시위대의 위치,무장 상황,이동 및 공격상황,시민들과 수습대책위원회의 동정등을 파악,보고하다 6월 8일 보안 사로 복귀했다.

형식상 최상의 권한을 보유했던 전교사는 그러나 신군부 라인에 눌린 허수아 비에 지나지않는 모양새속에서 81년 5월 1자로 해체,육군교육사령부및 1관구사 령부로 재창설되는 운명을 맞았다.

제 44회 곤봉 대 투석 / 맨몸 시민 상대 무차별 진압
 
   19일 공수부대원들의 무자비한 진압에는 곤봉이 우선 사용됐다. 시위군중의 진압에 나선 공수대원들은 그 자체가 흉기였다. 정예훈련으로 닦은 전투력과 곤봉.군홧발.그리고 여기에 M16소총과 대검.최루탄에 장갑차를 갖춘 무장군인들이었다.

이에 맞선 시민들은 그야말로 맨주먹이었다. 무자비한 곤봉세례와 대검사용에 맨주먹의 시민들이 무장한 것은 겨우 돌과 화염병, 인근 공사장에서 구한 각목.쇠파이프등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군부측은 光州항쟁의 진압과정에서 대검 사용을 극구 부인하고 있다.

당시 7공수여단 35대대장 金一玉중령의 중언이다.

*光州사태 전기간 중에 대검은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光州사태 전기간 동안 공수부대가 단 한 번도 대검을 사용한 일이 없다....

*예. 맞습니다.

-육군본부 발행 전교사 작전상황일지 1980년 5월 18일 밤 8시 15분 7공수 '총검진압...' 이 문서는 육군본부 문서가 아니고 어디 다른 괴문서입니까.

*저희들이 분명히 대검이나 총검으로 진압한 일이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작전이 끝나고 나서 거기서 회의를 했고 지역대장이나 중대장으로부터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없는 것으로 현재 알고 있습니다.(1989년 1월 26일 국회청문회中)

당시 투입된 공수부대대대장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공수대원들의 대검사용에 대한 피해자 증언은 많다.

96년 1월 光州지검의 5.18현장조사에 참고인 진술을 한 李禮炯씨(당시 22세.仁川시 동구 송림동)는 대검의 직접 피해자다. 19일 밤 10시께 光州시 北구 新安동 舊 광주고속 인근 세차장에서 동료 3~4명과 함께 잠자는 李씨는 갑자기 들이닥친 공수부대의 대검에 찔리고 구타 당한 뒤 끌려갔다. "난입한 계엄군들이 오른쪽 허벅지를 대검으로 찌르고 곤봉으로 수차례 구타한 뒤 서부경찰서로 끌고 갔습니?quot; 이후 李씨는 폭도라는 진술서를 강요 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안고 끝까지 버텨 21일 풀려났다.

李弼鎬씨(당시 24세.光州시 南구 月山동)는 당시 미도장 직원이었다. 19일 오전 학생 한 명이 미도장으로 도망쳐 들어오자 뒤따라 난입한 공수대원 13~15명에 일을 당했다. 朴씨는 "지배인과 경리과장도 끌고 나가고 운전기사를 연행해 가고 나머지 직원들도 무작정 구타했습니다. '사람 숨겼냐'고 다그치자 '안 숨겨놨다'고 했더니 나의 손을 곤봉으로 때려 아직도 제대로 손을 못 쓸 정도입니다. 또 군홧발로 허리를 차고 칼(대검)로 쿡쿡 찌르며 위협했습니다"고 증언했다.

전도사인 梁建相씨(당시 35세)도 대검사용 목격자이자 피해자다. 19일 공용터미널 대합실에 있던 梁씨는 자신에게 급히 달려온 여학생들이 결국 공수대원에게 참혹하게 당하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학생인 것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오빠라고 해 달라'해서 뒤쫓아온 공수대원에게 '내 동생이다'라고 했지만 계엄군이 여학생 앞 가슴을 대검으로 그어 피가 낭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대로 끌고 가 버렸다. 나 역시 머리를 찔리고 개머리판에 오른쪽 팔을 두들겨 맞았습니다"

당시 29세로 全南제사 노조지회장이었던 鄭香子씨도 무자비한 계엄군의 진압방법에 시위를 벌이던 중 대검을 사용하는 공수대원들을 보게됐다. "19일 공중전화를 하고 있는 학생의 등을 대검으로 긁더니 군용차에 싣더군요. 우리는 너무나 분해서 벌벌 떨면서 '저런 개만도 못한 놈들! 나쁜 놈들!'이라고 외치며 싸웠습니다"

공수대원의 대검사용은 그러나 공수부대측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검시록 등을 통해 검찰의 확인으로 이미 공식화하고 있다. 95년 7월 18일 검찰 '5.18사건관련 수사결과'에서는 '19일 시위 진압 과정에서 金안부(남.36세)가 전두부 열상등으로 사망하였고, 군경 24명과 학생.시민 수십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부상자중 최승기(20세.학생), 金인윤(남.21세), 李인선(남.27세), 崔미자(여.19세)외 1명은 자상(刺傷)을 입었음'이라고 기록, 공수부대의 대검 사용을 공식 확인해 주고 있다.

19일에는 또 공용터미널 부근 광주소방서앞 상황에서 공수대원들이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는 아직까지 화염방사기 사용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화염방사기 사용 시비를 불러 일으키는 첫 번째 목격자 증언이기도 하다. 당시 木浦에서 오토바이대리점을 운영하던 중 물건을 구입해 光州에 왔다가 이날 소방서 앞에서 계엄군에 붙잡힌 崔충용씨(당시 29세)의 증언이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앞에 운집한 시민들이 소방서부근에 진을 치고 있던 공수들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계엄군들이 달려오면서 화염방사기를 공중을 향해 쏘아댔습니다. 총구에서 불이 뿜어나오는 살상용 화염방사기를 쏘아대는 것을 보자 한편 두렵기도 했지만 공수들의 잔악함에 치가 떨렸습니다. 화염방사기는 공중을 향해 발사, 공포용으로 사용한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무장병력에 대항한 시민들은 거의 맨주먹으로 맞서 싸웠다.

'19일 오전 금남로에 모인 시위군중들은 대형화분과 공중전화 부스를 부셔 바리케이드를 치고 보도블록을 깨 투석전으로 대항했다.

충장로 지하상가 공사장에서 일하던 인부들도 톱과 쇠파이프.철근을 들고 합세했다. 그러자 철수한 공수부대원 대신 경찰이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면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군중들은 물러가지 않고 돌멩이와 화염병을 던지며 맞서 싸웠다'(사계절刊 金영택 著 '10일간의 취재수첩'중 발췌)

시위군중들이 사용한 화염병은 주로 녹두서점에서 尹祥源씨(당시 29세.5월 27일 도청에서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등이 중심이 돼서 자체 제작한 대항을 위한 유일한 시위대의 '불꽃 무기'였다.

19일 오후 시위군중들은 오전 계엄군들의 만행에 다시금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돌과 각목을 들고 금남로등 시내중심지와 공용터미널등 시내외곽지역에서 대공세를 취했다. 그러나 공수대원들은 아예 장갑차까지 동원, 시위군중은 물론 근처를 지나는 시민까지 붙잡아 대검으로 찌르고 곤봉으로 마구 때린 뒤 트럭을 이용해 연행해 갔다.

돌과 각목에 의존한 시위군중들을 장갑차.대검에 곤봉까지 휘두르면서 물리력으로 억제하려 한 공수대원들이지만 시민들은 이들의 만행이 거세질수록 이를 물리치려는 시민의식을 더욱 더 강하게 다지고 있었다.

제 45회 신음.절규 뒤덮인 피의 수요일
시민들을 상대로 이같은 사정을 직접 설명해 달라  
 
   19일 오후 光州시 구 鷄林동에 자리한 광주고등학교. 7교시 체육 시간을 맞아 운동장에서 공을 가지고 놀던 2학년 4반 학생들은 갑작스런 총격 소 리에 우르르 도로쪽 담장으로 몰려가 밖을 내다봤다.

일단의 군인들과 시민 들이 마주해 있고 군인들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고 있는 모습이 보였 다. 光州에 주둔한 계엄군이 이날 오후 5시께 시민들에게 첫 발포를 하는 순간이었다.

계엄군은 20일 밤 11시께도 光州역에서 차량 돌진을 감행하는 시위대에 발포를 해 시민들을 주검으로 만들었다. 21일 새벽까지 이어진 시위에서 발생한 발포는 그러나 집단적인 것이 아닌 산발적 형태를 띠고 있었다.

21일 아침을 맞으면서 全南도청과 光州교도소 등 극히 일부 지역을 제 외하면 계엄군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날 도청앞 錦南로는 수많은 인파로 발디딜 틈 조차 없을 정도였다. 이 시각 시민들은 협상 대표를 뽑아 장형태 全南지사를 만나 4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 사항은 계엄군의 작전과 관련된 것이어서 장형태 지 사가 답변할 내용이 아니었다. 협상 대표들은 이에따라 장 지사에게
시민들을 상대로 이같은 사정을 직접 설명해 달라고
요구했고 장 지사도 승낙했다. 장지사는 그러나 약속과 달리 시위 군중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東구청 앞쪽에 있던 시민들이 이에 분개, 도청쪽으로 전진해 갔다.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돼 갔고 오전 10시가 넘어서면서 도청 광장에 군용 헬리곱터의 이·착륙이 빈번해 졌다. 잠시 뒤 도청에 배치됐던 11공수여 단 61대대와 62대대 병력들에게 실탄이 지급됐다. 당시 이곳에 주둔했던 공수부대의 한 하사관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5월 21일 금남로 10시쯤의 상황은 이미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달리 고 있었습니다. 강경진압에 시민들이 무서운 힘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저 희가 위치했던 선두를 후미와 바꾸고 대신 저희 부대원이 와서 위치를 바 꾸어 도청 분수대 옆으로 가니 지휘관이 실탄을 분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장교나 하사관들에게만 10발씩 분배 했습니다. 많은 실탄은 없었습니다. 최소 한의 비상용 실탄만 휴대하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지급받은 실탄을 탄창에 삽입하고 언제라도 사격할 수 있도록 총에 결합을 하지않고 바지 옆주머니 에 넣었습니다. <실천문학사 刊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당시 61대대장 안부응 중령은 지난 89년 국회 5·18 청문회에서 이날 지 급된 실탄이 모두 1천6백80발이었으며 이는 31사단에서 공급 받은 것이었다 고 밝혔다. 정웅 31사단장은 그러나 이 시각 31사단 병력이 도청앞에 배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반대 증언을 했다.

시위대는 점차 계엄군에 다가섰고 마침내 양측의 간격이 5~6m로 좁혀졌 다. 팽팽한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계속되면서 시 위대 뒤편에 있던 대형버스와 장갑차가 시위대 앞쪽으로 움직였다. 이를 뒤따라 수십대의 차량이 도청을 향해 서서히 진격해 나갔고 시민들은 박수 와 함성으로 이들을 격려했다.

오후 1시께 시위대 앞에 있던 버스 2대가 계엄군의 저지선을 향해 돌진 했다. 바로 뒤이어 장갑차 1대가 질주했다. 이때 도청 옥상에 설치된 스피 커에서 애국가 리듬이 울려퍼졌고 이것이 신호인듯 요란한 총성이 錦南로 를 가득메웠다. 피의 수요일로 기록된 도청앞 집단 발포가 이루어진 것이다.

1시 정각이었다. 도청 옥상에 네 방향으로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애국 가의 리듬이 장중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가사 없이 곡만 흘러나온 것이다. 그러자 애국가에 때를 맞춘듯 탕탕탕, 탕탕탕 요란한 총성이 일제 히 터졌다.

그동안 산발적으로 몇발씩 총성이 울린 적은 있지만 이렇게 많은 총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발포가 시작되자 군중 들은 다소 동요의 빛을 보이는 듯 했으나 오후 1시10분쯤 1천여명이 다시 한국은행 광주지점 앞에 집결했다.

이때부터 공수부대는 장갑차 1대씩을 금남로와 노동청 쪽으로 돌려놓고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오후 1시16 분 10여명의 사격수들은 금남로 쪽 큰 길을 향해 앉아 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창작시대사 刊 실록 5·18광주민중항쟁>

실탄 지급 상황을 증언한 위의 하사관은 같은 글에서 시위대의 장갑차 에 2명이 치어 1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자 한 장교가 「사격해 버려」라는 명령을 해 이에따라 2~3분간 일제히 사격을 실시했으나 공중을 향한 공포사 격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는 이어 저격수 요원들이 금남로 쪽을 향해 엎드려 쏴 자세로 저격 자세를 갖추고 있다. 저지선으로 다가오는 차량과 시위대에 정확한 조준 사격을 가했고 장갑차에 탑승, 해치를 열고 돌진해 오는 한 청년에게는 저격수가 장갑차에 설치된 캘리버 50 기관총을 겨누고 있다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고 말했다.

계엄군의 저지선으로 달려들던 장갑차와 버스는 멈춰섰고 시위대열 앞에 있던 시민들이 힘없이 쓰러져 갔다. 도청앞 일대는 일순간 아수라장으로 변 했다.

도청앞에서 앉은 자세로 쏘아대는 총탄은 끊임없이 금남로에서 움직이 는 모든 물체를 쓰러뜨렸다. 처음에는 일부 시민들이 공포탄이거니 생각하 고 피하지 않았다가 아차 하는 순간 총탄은 여지없이 심장을 꿰뚫었다.

총성은 계속 들렸고 시민들은 양편 골목으로 흩어져 몸을 피했다. 금남로 는 순식간에 수많은 시민들이 쓰러져 고통에 찬 신음과 살려달라며 몸부림 치는 처절한 절규로 가득찼다. 한번 넘어진 후 다시는 움직이지도 못한 채 핏물만 흥건하게 쏟아내는 시체들이 즐비했다 <도서출판 南風 刊 광주민중항쟁비망록>

10여분 동안 계속된 집단발포와 도청 주둔 계엄군이 朝鮮大로 철수할 때 까지 계속된 조준 사격으로 錦南로는 침묵속으로 빠져 들었다. 여기저기서 간간이 구호 소리만 들려올 뿐. 비슷한 시각. 全南大 앞에서도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시위대는 더이상 맨주먹으로 당할 수 없다고 생각, 징발했던 차량 편으 로 和順과 羅州를 향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무차별 총격에 대항하기 위 해서는 실질적인 화력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경찰서 등에 보관중인 소 총등을 탈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시위대가 무장 을 하고 조직력을 갖춘 시민군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제 46회 망자 그리움 품은채 16년 한의 삶
"내남편은 시민의 편에 섰다"  
 
   5.18 당시 光州시장으로 재직하며 시민들 편에 섰다는 이유로 光州가 진압된 뒤 시장직을 떠나야 했던 具龍相씨와 당시 全南도 경찰국장을 지내며 신군부의 강경 진압 지시를 거부,
합수부에 끌려가 가혹한 조사를 받 고 공직을 사직해야 했던 安炳夏씨.

이들은 지난해 말과 지난 88년 각각 세상을 떠 이미 고인이 됐지만 이들의 미망인은 지울 수 없는 기억을 일기 와 남편의 명예회복을 위한 변(辯)으로 남기고 있다.

故 安炳夏씨의 미망인 全任淳씨(64)는 지난 93년 7월 光州시에 5·18 피 해자 추가 신고를 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安씨는 지난 88년 국회에서 5 ·18 특위가 가동되면서 국회와 재야 관계자등 수많은 사람들이 5·18 당 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뒷받침해 줄 증언과 관련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하고 접근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이같은 상황에 서 全씨가 그 누구의 도움이나 부추김없이 자발적으로 피해 신고를 한 것 은 5·18에 대한 새로운 사실 확인이 가능할 것으로 점쳐졌다.

아니나 다를까, 全씨는 피해 신고서에서 80년 5월 18일 光州민주화운동 당시 시위 군중에 대해 발포 등 강경 조치를 통해 진압하라는 계엄사의 지 시가 있었지만 남편은 수천명에 이르는 경찰이 총기를 사용할 경우 시민들 의 피해가 엄청날 것으로 생각, 오히려 경찰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회수 해 따로 보관케 하고 경찰의 자중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는 신군부가 계엄군을 光州에 공식 파견하기 전 이미 경찰을 통해 총기 등을 사용한 무력 강경 진압을 시도했었다는 것을 뒷받침 하고 있다. 이 와함께 光州에 주둔했던 계엄군이 시민들의 무장시위에 대항하기 위해 자 위권 차원에서 발포를 했다는 점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全씨는 또 『남편이 이같은 지시를 거부, 경찰의 발포를 막음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구실로 5월 26일 계엄사 합수부에 연행돼 11일 동안 구금 상황에서 협박과 고문을 당하고 특수 조사요원들이 光州 현지에 파견돼 남편 개인 비위 여 부까지 정밀 내사를 했다』며 『특정한 혐의가 밝혀지지 않자 치안본부로 인계돼 하룻동안 연금 당한뒤 사표를 강요당하고 이에따라 6월2일 全南도 경 국장직을 사임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全씨는 남편 安씨가 강제 사직 당한뒤 고향 襄陽을 잠시 다녀왔을 뿐 외 부 출입을 하지 않은채 거의 두문불출 했으며 당시와 관련해 계엄사에 끌려가니 죽고만 싶더라라는 말 이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安씨는 그러나 光州을 잊지않았으며 光州 사람들에 대해 고마워 하는 한편 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많은 고민을 했었다고 전했다.

시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지 못하게 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하고 공직을 박탈당한뒤 이로인한 후유증으로 남편을 사별한 全씨는 지난 93년 남편의 체취가 남아 있고 5·18의 피해자로 光州시민과 똑같은 고통을 나누겠다 며 光州로 와 光州시 東구 光山동에 식당을 개업했으나 빚만 진채 사업에 실패하고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12월 30일 남편 具龍相씨를 여의고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李玗宣 씨는 요즘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가족들과 지내고 있다.

李씨는 5·18에 관해 누가 물으면 가급적 대답을 피한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고 단지 다른 사람이 전해준 이야기를 듣고 이에대한 느낌 만 가지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느냐는 것이다.

李씨는 그러나 이같은 심경 을 5월 15일 부터 도청이 진압된 5월 27일 까지 일자별로 일기를 기록했 다. 이 일기에서 李씨는 5·18 기간동안 거의 집에 들어오지 못한채 시청 에서 날밤을 새우고 있는 남편 具씨에 대한 걱정과 함께 사태로 인한 光州 시민의 생필품 부족, 그리고 光州의 장래 등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기록하고 있다.

5월18일. 따끈한 커피로 그이와 요사이 여러가지 시름을 달랬다. 18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오늘 오후 부터 학생들의 데모 양상이 달 라졌고 공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돼 데모대와 드디어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루머인지 모르나 경상도 군인이 투입되어 지역감정이 대립돼 공기가 험악 하다는 이야기들… 하오 6시20분 장형태 지사님 모친께서 돌아가셨다 한다

李씨는 19일 일기에서 오전 시청 백합회 회원 몇사람과 張炯泰 前全南지 사 집에 문상을 다녀온 뒤 시민들로 부터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계엄군의 실상을 전하는 전화를 받았다고 적으며 광주은행 앞은 피바다라고 아우성이다.

시장이 없으면 부인이라도 나와서 직접 보라 한다며 도지사는 상주라고 들어앉으면 제일이냐는 전화.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저 떨리 기만 하다고 해 당시 張前지사에 대한 시민 불만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5월 21일 광주와서 어쩌다 이런 시련을 겪는지… 어제부터 광주 외곽과의 통신 단절도 또한 교통도 완전 마비, 시내는 온통… 이것이 생지옥인 지. 그이는 헬리콥터에 타서 열심히 시민들에게 호소, 아니 절규하고 있 단다.

가끔 헬리콥터에서 들리는 그이 목소리인지 분간조차 안되지만 시민 여러분! 필사의 외침 뿐이다. 그이하고는 소식이 없다

李씨는 이처럼 시장 부인이기 전에 한 남자의 아녀자로서 생지옥과 다름 없는 상황에서 집에도 들어오지 못한채 시민들을 향해 울부짖는 남편의 생 사를 크게 걱정했다.

또 연락이 왔는데 그이가 도청앞 수십만 군중이 모인 앞에 나갔다. 시민의 분노를 가라앉힐 작정으로 나갔다 한다. 이따금 들 려오는 말은 그이가 총에 맞아 죽었다느니 인질로 잡혔다느니 별별 무시 무시한 소식뿐. 가슴이 오그라들대로 오그라들었다. 오 하나님 그이를 구하 소서!

5월 24일. 라면·분유 등이 동이 나서 없다. 영세민들은 쌀을 비축해 둔 것도 없고 얼마나 어려울까 걱정이다.

5월 26일. 날씨가 춥다. 정세는 아직 유동적이다. 시내의 식료품 등이 유통 공급이 안돼 서민생활에 큰 지장. 은 행문도 5월20일 후 문을 닫고 자금융통마저 끊겨 하루하루 일해 벌어먹는 사람들은 더욱 기가 막힐 것이고 양곡상 마다 쌀이 떨어졌고 오늘이 사태 가 난지 9일째. 모든 것이 봉쇄되고 있으니 정말 걱정이다

李씨는 25일 일기에서 남편이 다음에 (시장을) 그만두더라도 그는 결코 비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것이라면서도 지사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인 듯 하다고 기록, 張前지사가 5·18 기간 동안 사태 수습을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또 26일 그이의 말에 의하면 오늘 저녁 혹 시가전이 일어날지 모른다 한다는 부분에서는 계엄군의 도청 진압 작전이 곧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을 당시 기관장들은 알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제 47회 차량시위 / 시민항쟁 승화시킨 `민주경적`  
 
   20일 동이 터오면서 전날 오후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차츰 수그러들 기 시작했다. '비극의 光州'에 흩뿌려진 피비린내를 씻겨내기라도 하려 는 듯 가랑비가 추적거리고 있었다.
계엄군은 여전히 시내를 장악, 주요 도로에 3개 공수여단 10개 대 대 병력을 배치하고 지나는 차량과 시민들을 검문. 검색했으나 또다시 도청으로의 행렬은 이어졌다.

이날 오전은 비교적 평온한 상태가 계속됐으나 舊중앙고속 터미널 앞 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이 곳에 모여든 5-6명의 택시 기사들이 더이상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 며 우리도 일어서야 한다는 의견을 교환했고 이는 삽시간에 기사 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오후 4시가 되자 기사들은 光州 무등경기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집결장소를 말하지 않았지만 공용터미널이 계엄군에 장악돼 대부분의 시외버스가 이곳에서 승객을 내려줘 자연스럽게 집결지로 선 택됐다. 일부 기사들이 지금 당장 도청으로 가자는 의견을 제시, 오 후 5시께 50여대의 택시를 끌고 光州역으로 몰려나왔으나 계엄군에 의해 저지당해 무등경기장으로 되돌아 갔다.

오후5시께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가격에 분개한 택시기사들이 50 여대의 영업용 택시를 몰고 광주역에 집결, 계엄군을 쓸어버리겠다고 시위를 하였고... '95년 7월 검찰의 5.18관련 사건 수사결과 발표문' '무등경기장에는 어느새 2백여대의 차량이 모여들었다.

비슷한 시각인 5시 50분께. 충장로 입구 쪽에서 5천여명의 시위 군 중이 스크럼을 짜고 도청을 향해 돌진해 가고 있었다. 이들은 맨몸 으로 계엄군과 충돌, 많은 부상자를 내면서도 애국가 등을 부르며 물러설 줄 몰랐다.

이때 유동 삼거리 쪽에서 시민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시민들은 계엄군이 뒤쪽에서 공격해 오는 것으로 생각, 일부가 몸을 피하려 들었다. 이 순간 박수와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수많은 차량들이 비상 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도청을 향해 밀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통운 소속 12t 대형트럭과 고속버스. 시 외버스 등 15대의 차량이 앞장서고 2백여대의 회사 택시가 錦南로를 메운채 뒤따르고 있었다. 트럭위에서는 20여명의 청년들이 태극기를 흔들어 댔다.

'도청 옥상에서 내려다 본 광경은 장관이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유 동 삼거리에서 부터 금남로 4가까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시민들은 우리의 용사들 잘한다. 이기자. 이겨야 한다고 소리 지르고 박수를 치며 열렬히 환영하면서 대열에 끼어들고 있었다. 시위 군중은 순식 간에 수만명으로 불어났다" '김영택著. 실록 5. 18 광주민중항쟁 中' 차 량 행렬이 舊동구청 앞에 이르자 이곳에서 버티고 있던 공수대원들 이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7시 45분께 전일빌딩 앞길에서 장갑차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재차 전열을 정비했다. 시위 차량과 시민들도 이들에 막혀 더이 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20m 가량 거리를 둔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 순간 공수부대원 뒤에 있던 경찰이 엄청난 양의 최루탄을 쏘아대 기 시작했고 이를 신호로 공수대원들이 진압봉과 대검을 휘드르며 운 전 기사와 시위대를 두들겨 패고 연행해 갔다. 이들은 시위차량을 향 해 돌격해 대검이 착검된 소총으로 자동차 창문을 깨뜨린뒤 차 안 으로 뛰어들어 무차별적구타와 연행을 실시했다.

잠시후 자욱한 최루탄 속에 버스를 앞세운 시위대는 군인들과 육박전을 벌여 전일방송 부근의 금남로에는 비명과 함성이 끊이지 않았 다. 20여분간 계속된 이 충돌이 끝나자 시동이 걸린 수십대의 버스. 트럭. 택시사이에는 머리가 깨지거나 어깨가 내려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실신한 부상자들이 여기저기 즐비했다.

안내양 차림의 20대 처녀 2명은 운전사 차림의 30대 남자를 부등켜 안고 통곡했고 쓰러진 환자들을 이송하며 '환자가 위독하니 앰뷸런스를 빨리 보내라'는 목메 인 소리가 유혈극의 참상을 잘 말해 주고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가 5월 22일자에 보도하려 했다.

검열과정에서 삭제된 부분' 시위 군중과 군경 사이에 수십차례에 걸쳐 밀고 밀리는 공방이 계속되면서 일부 시위대가 光州소방서로 몰려가 소방차 3대를 가지고 온뒤 소방호스로 물을 내뿜으며 최루가스를 제거하고 군경저지선의 장갑차 앞으로 밀 어닥쳤다.

그러나 이곳의 방어선은 그야말로 철통 같아 무너뜨릴 수 없다는 판단을 한 시위대는 노동청 쪽을 공략키로 했다. 이곳은 공수 부대가 아닌 경찰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으며 길이 넓어 차량 진입이 비교적 수월했기 때문이다.

차량 시위 소식을 전해들은 광주고속 운전사 배용주씨도 동료 2명과 함께 차고에서 버스를 몰고 밤 9시께 노동청 앞에 도착했다. 대형버 스 10여대가 모이자 시위대는 저지선을 무너뜨리라고 소리쳤다. 버스 가 시위대 전면에 나서자 최루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배씨는 저지선에서 50여m 가량 떨어져 있다 경찰 저지선을 향해 전속력을 내 돌 진해 갔다. 이때 최루탄 한발이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들어와 터지자 배씨는 달리는 차에서 그대로 뛰어내렸고 차량은 시동이 걸린채 경찰 을 향해 계속 돌진, 경찰관들을 깔아 뭉개고 말았다. 이 사고로 함 평경찰서 소속 정충길 순경등 4명이 그자리에서 숨졌고 5명이 중경상 을 입었다.

지난 18일 부터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시민들은 차량 시위 소식 을 접하고 너나 할 것 없이 도청을 중심으로 운집, 밤이 깊어가고 있 었지만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시 외곽의 군.경 저지선이 속속 무너지고 있다는 전언에 사기 충천해 있었다.

계엄군은 이제 도청과 光州역, 全 . 朝大 등지에서만 볼 수 있었다. 밤 11시가 넘어서자 계엄군은 도청 방어에 위태로움을 감지하고 마침내 M16소총 발포를 시작했다.

이날의 차량시위는 지난 18일 부터 계엄군에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 던 시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그동안 수세적 입장에 있던 시민 들이 우리 손으로 光州를 지켜내자는 공세적 자세로 바뀐 것이다. 이 는 光州 시민들이 마침내 민중항쟁의 주체로 떠오르는 순간이었으며 '해방 光州' 를 기약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제 48회 위대한 민초 동시다발 항쟁 / 위대한 민초 동시다발 항쟁
 
   全南의 5·18을 木浦와 光州인근을 중심으로 한 항쟁으로 나눠 보았다. 이제 光州인근지역을 제외한 서남권으로 눈을 돌려보자. 서남권 항쟁중에 서도 海南의 항쟁은 눈여겨 볼만하다. 海南항쟁은 공수부대가 아닌 향토사단과 시위대가 충돌, 대량의 인명피해가 난 지역이기 때문이다.
당시 全南 농민운동의 근거지였던 海南은 朴正熙 정권과 유신에 반대하는 수많은 청년운동가와 민주인사를 배출하는등 전통적으로 야세가 강한 지역 이었다.

21일 당시 海南의 농민운동 인사들은 光州 北동 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농민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光州에 와 있었다. 이때 이들의 공백을 메운 그룹이 청년회의소 회원들. 읍내 JC회원들의 주도로 海南의 자체시위가 시 작됐다.

金덕수씨(당시 JC 회장)를 중심으로 30여명의 JC회원들은 21일 회의를 갖 고 민주인사석방과 민주회복·독재자 추방·계엄해제등 5개항의 요구를 내 걸고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오후 3~4시께 3천여명의 읍민들은 海南교육청 앞에서 성토대회를 갖고 시 가행진에 들어갔다. 이때 光州에서 6대의 차량에 분승한 시위대가 도착, 全南도청앞 집단발포소식을 전하자 열기는 더욱 고조됐다. 일부 청년들은 시위대와 합세, 光州로 향하고 일부 청년들은 20~30대의 차량을 동원, 인근면과 莞島·珍島 등지로 떠났다.

이들은 海南읍~삼산~화산~현산~북평~송지면 등을 경유해 밤 10시 莞島읍까지 진출, 야간시위를 벌였다. 22일 시위대는 새벽부터 海南읍 인근을 돌며 시위를 벌이는 한편 오전에는 康津읍·木浦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이들은 시위도중 계곡지서·옥천지서·월송지서등 6개 지서에서 다량의 무 기를 획득하고 오후 5시30분께는 海南경찰서 무기고를 습격, M1과 카빈 4 백정을 탈취했다.

시위대는 당시 海南의 향토방위 부대인 31사단 93연대 2대대로 몰려가 실 탄을 요구하다 결국 23일 우슬재에서 이 부대의 총격을 받게 된다. 검찰의 「5·18관련 사건 수사결과」문건은 「우슬재 사건」을 다음과 같 이 기록하고 있다.

『海南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2대대는 5월 21일부터 22일 사이 에 수차에 걸쳐 무장시위대가 부대에 접근, 무기와 탄약을 요구하였으나 대대장이 거부하고 이에 시위대가 야간에 부대를 습격하겠다고 돌아가자 2 대대장은 부근 우슬재에 병력을 매복시키고 시위대의 습격을 대비하던중 23일 오전 5시30분과 10시께 두차례에 걸쳐 시위대와 계엄군간에 총격전이 벌어져 그 과정에서 박영철(27) 김귀환(나이불상)이 총상으로 사망하였음』

검찰의 이같은 발표는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과 사뭇 다르다. 金성윤씨(55·黃山면 복지계장)는 사망자 수가 2명이 아닌 최소 4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사회과 보건계원으로 근무하던중 23일 오전 6시께 군부대로부터 사 체를 수습하라는 연락을 받고 이날 새벽 총격전이 벌어졌던 우슬재와 상등 리 고갯길에 가 보니 우슬재 정상 도로가에 사체 3구, 상등리에 1구가 각 각 총상을 입은채 숨져 있었다. 이들을 군부대에서 지급해준 군복으로 갈 아입힌 뒤 연고자가 나타날 것에 대비해 군용천막을 치고 그 천막안에 사 체를 안장해 두었다. 사태후 군부대에 가보니 현재의 수송부 자리에 4기의 묘가 쓰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또 당시 부대 기습 목적도 없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海南 청년들이 주축이 된 시위대들이 21일과 22일 군부대 앞에서 무기를 달라고 시위를 하긴했으나 22일 밤 군부대에 대부분의 무기와 실탄을 반납 한 상태였고 시위대로부터 무기탈취 위협을 느껴 이를 방어하려 했다면 군 부대 근방에 초소를 설치해야 마땅한데 읍에서 군부대로 가는 도로와 전혀 관계없는 우슬재와 상등리에 초소를 설치해 놓고 시위대가 군부대를 습격하 러 오기 때문에 발포했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海南 시위 참가자들은 당시 대대장 張윤태씨(중령·前光州시 北구의회 의원)를 95년 5·18학살자로 고발해 놓은 상태이고 海南신문 편 집국장 朴상일씨(40) 등을 중심으로 이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작업을 벌 고 있다.

海南과 지근거리인 康津에서도 항쟁의 불길은 타올랐다. 21일 오후 1시께 康津에도 光州시위대의 모습이 나타났다. 18일 끝난 도 민체육대회에 참가했던 체육회 인사들은 光州의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았 기 때문에 光州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康津군민들은 체육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시위대에게 밥과 음료수를 제공 하고 숙소를 마련해 주는 한편 시위대를 따라 인근지역을 돌며 시위를 벌 였다. 당시 康津읍 교회 목사는 민주화투쟁으로 지명도가 높았던 尹기석 목사. 교회는 항쟁기간 이지역 항쟁의 본부역할을 하게 된다.

康津에서는 특기할만한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무기들을 이미 군부대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康津은 長興·寶城에 항쟁의 열기를 전파하고 동참을 유도해 내는 역할을 해낸다.

寶城에서도 21일 오후 2시 무장한 시위대 40여명이 트럭을 타고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筏橋를 거쳐 이날 오후 10시께 莞島까지 진출, 지서를 습격했다.

21일 全南 동부권 일부를 제외한 전지역에 전파됐던 시위 상황은 전교사 작전일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莞島 5백~6백명 시위, 靈光주민 25명 투항, 咸平 군부대 총격피습,莞 島 30명 군청 기습점거, 昇州 20명 송지서 습격-21일 밤 12시상황-』

한편 계엄군은 光州 주요 외곽도로를 봉쇄한데 이어 2차로 각 지방도로를 차단, 무장시위대의 光州진출을 막는데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光州진입에 실패한 시위대는 우왕좌왕하기 시작했고 통일성 없이 각지방 에서 각개약진 식으로 이루어진 항쟁은 光州상황이 소강상태에 빠지가 곧 지리멸렬해지고 말았다.

계엄군의 이같은 작전으로 全南 각지에서의 동시다발적인 항쟁은 불발로 끝나 버리고 光州는 더욱 고립무원의 지경에 빠지게 된다.

제 49회 불타는 방송국 / 왜곡보도 항의 한밤의 불길
 

   차량시위와 全玉珠씨의 선무 방송에 힘을 얻은 시민들은 밤이 깊어 갈수록 수가 늘면서 시위 양상도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계엄군 의 저항도 거세졌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光州시내는 장갑차를 앞세 운 군경의 바리케이드 안쪽을 제외하고는 점차 시민들의 수중에 들어 섰다.
이날 밤 9시50분께 光州시 東구 弓동 쪽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면서 주변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혔다. 시위대가 光州문화방송에 불을 놓은 것이다. 시민들의 이같은 행동은 이날 밤 계엄당국이 발표한 보도문 안을 방송사가 아무런 검증없이 오전 7시 뉴스에서 그대로 앵무새처럼 방송한데서 비롯됐다.

친애하는 光州시민 여러분 으로 시작되는 이 담화는 사실과 전혀 다르게 18일과 19일의 光州 상황을 담아 시민들의 분노를 샀던 것이다.

시민들은 이에따라 이날 밤 8시10분께 光州문화방송 앞 길을 지나며 돌멩이와 화염병을 던졌고 일부는 닫혀진 셔터문을 짓부수기도 했다.

밤 9시께 시위가 격해지면서 방송국을 향한 돌멩이와 화염병 세례도 급증했고 화염병 가운데 하나가 부숴진 셔터를 통해 방송국 안으로 날 아들었다.

1층에 있던 세트실의 인화성 높은 물건들에 불이 옮겨 붙었 고 불길은 순식간에 2. 3층으로 옮아가면서 5층 건물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 21시 13분:시위대 MBC 침투, 방화. 기물파손 * 22시:MBC 연소중
* 0시 15분:MBC 전체가 불타고 있으며 옥상에서 시민 1명 구조 요청' 계엄사 상황일지는 당시를 이렇게 적고 있지만 이날 MBC 방화는 각 기록과 증언을 살펴볼때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 20시 15분:MBC 화염병 투척 및 방화 * 20시 25분:소방차 4대 탈취
* 20시 33분:MBC를 포위하므로 경계중인 제 31사단 병력 고립
* 21시:MBC. KBS TV, MBC 라디오 방송중단' <전교사 전투상보>

19시 45분께 문화방송국 앞에 모인 5천여명의 시위대는 방송사에 저녁 8시 뉴스 시간에 광주 상황을 보도할 것을 요구했으나 보도가 되 지 않자

20시 30분께 방송국 건물에 화염병을 던졌고 방송사 직원들은 셔터를 내리고 소화기로 진화하고 31사단 9연대 1대대 소속 경계 병력 도 소화탄을 던지며 진화를 계속했으나

21시 45분께 문화방송국 건물 은 화염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경계 병력은 후문을 통해 전남도청으로 철수 했음' <95년 검찰의 5. 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보고서>

밤 10시께엔 MBC 부근에서 갑자기 폭음이 일며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시위에 의한 화염병 투척이 분명했다. 주위 경계를 맡고 있 던 10여명의 계엄군도 재빨리 철수해 버렸다.

MBC는 무방비 상태에 빠지고 시위대의 수중에 들어갔다. 곧이어 MBC는 화염에 휩싸였다. 방송국의 불길로 전 시가지가 대낮같이 환해졌다 <실천문학사 刊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밤9시40분 쯤에 MBC 건물에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왜곡보도만을 일삼는다고 하여 시위대가 화염병을 던진 것이었다. 시위대가 폭동화 한 것도 이때였다.

MBC가 불타고 있었지만 누구도 손쓸 틈없이 구경 만 하고 있었다. 화염병이 창문으로 던저져 MBC가 불타기 시작할때 건물에는 직원 2-3명과 1개 분대의 군 병력이 있었으나 뒤쪽 비상계단 으로 빠져나가 겨우 피신했다.

소방차도 접근할 수 없었던 이 건물은 화염에 휩싸여 40억-50억원의 재산을 고스란히 삼켜 버렸다 <金良 五 著 光州보고서>

이상에서 알수 있듯이 光州문화방송의 방화는 시간차가 있기는 하지 만 光州사태 를 왜곡보도한데 대한 응징 차원에서 시위 군중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돼있다.

21일 새벽 1시께까지 불길이 계속 이어지 기는 했지만 방화가 순식간에 이루어져 시민들의 기억이나 기록에는 방송국이 불타는 모습만 남아 있을 뿐 자세한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없다.

여기에서 비롯된 의문 가운데 가장 큰 것이 과연 이날 MBC 방화가 시민들의 화염병에 의한 것이었느냐이다. 발화 지점으로 지목된 1층 세트실은 도로에서 던진 화염병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이날 밤 가두방송을 했던 全玉珠씨는 지난 89년 1월 국회 광주청문회에서 문화방송 방화는 시위 군중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민 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全씨는 이날 밤 방송국으로 들어가 있는 그대로 진실을 방송할 것을 요구했으나 방송 국측이 이를 거절했고, 1층 셔터를 내렸으며 방송 여부를 둘러싸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 때 방송국 전원 장치가 있는 곳에서 폭음 소리 와 함께 불이 났다고 밝혔다.

현재 光州시 南구 의회 의원인 徐采源씨도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 했다. 많은 시민들이 문화방송국에 앞에서 공정보도를 요구하고 있었다. 방송국 문이 잠겨 일부가 목재소에서 원통형 나무를 가져와 닫힌 셔터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미 안에서 불길이 일고 있었다. 누 군지는 모르겠으나 이 사람이 방송국 옆에 매달린 변압기를 손댔고 이 순간 불길이 인 것으로 기억난다"

徐씨는 이때 노동청 쪽에서 장갑차가 방송국으로 들이 닥쳤고 장갑차 를 피하려는 시민들로 방송국 앞은 아수라장이 됐다고 말했다. 이들 두 사람의 증언을 종합하면 최초의 불은 전원장치에서 일어났으 며 이 불이 세트실로 옮겨가 점차 전체 건물로 확산됐던 것으로 보인 다. 그렇다면 이 전원장치는 누가 만졌는가.

全씨와 徐씨의 주장대로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시민이 아닌 다른 누구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왜 곡방송에 분노한 시위대에 의한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MBC는 불길에 갇혔고 이곳에서 7백여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光州소방서가 있었지만 시민들이 점령, 소방대원들이 모두 피신하는 바람에 전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채 문화방 송은 불에 탔다.

21일 새벽 3공수여단 병력이 光州역에 합류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지 칠줄 모르고 계속해서 全南大쪽과 現 종근당이 자리한 KBS 방송국 쪽에서 차량 돌진을 감행, 권총과 M16과 E-8 발사기를 발포하며 저지하다 이날 새벽 2시께 KBS에 배치됐던 31사단 병력과 함께 全南大 로 철수했다.

이 바람에 KBS도 불이났지만 MBC와는 달리 1층만 심 하게 탔을 뿐 큰 피해는 없었다.

제 50회 고립무원 광주 / 통신.교통 완전두절 [육지속 고도]  
 
   18일 부터 光州 전역에서 벌어진 시위는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光州는 점차 고립되기 시작했다.
光州 현지에서 활동하던 기자들이 제아무리 열심히 기사를 송고해도 서슬퍼런 검열관을 통과하지 못해 그대로 사장되기 일쑤였다. 光州에 대한 보도는 계엄분소의 발표문 외에는 전혀 허용되지 않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시민들의 언론에 대한 불신과 분노는 극에 달해 마침내 MBC와 KBS가 불탔던 것이다. 이에 앞선 19일 시위를 취재중이던 CBS 차량이 시민들에 의해 불길에 타오른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비 롯됐다.

거짓을 보도하느니 차라리 입을 닫자 는 생각이 이 지역 모든 기자들에게 확산돼 20일 밤 8시30분께 CBS의 방송 중단을 필두로 MB C 라디오가 밤 9시25분께, 그리고 VOC(전일방송)가 11시10분께 전원 스위치를 내리고 방송 송출을 중단했다.

TV는 MBC가 이날 밤 8시25분께 중단됐다. KBS는 밤 10시5분께부터 TV 방영은 중단한 채 라디오 방송은 계속하다 시위대의 방화 로 일시 중단됐으나 21일 오전 7시30분께 부터 송신소에서 방송을 재 개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정부및 계엄사의 선무방송에 지나지 않아 光州 시민들은 光州 소식을 듣기 위해 단파 라디오에 매달려야 했으며 심지어 北韓 방송을 청취하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신문쪽도 사정은 마찬가지. 계엄당국의 검열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서 光州의 진실을 제대로 보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시민 항쟁 이 시작되면서 왜곡 보도로 시민들의 불만이 날로 커가고 있는 마당에 光州를 담지 않는 신문을 냈다가는 어떤 낭패를 당할 지 모를 일이었 다.

더욱이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제작 거부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에따라 당시 光州에서 발행됐던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은 결국 20일 발 행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서울쪽 신문도 현지에서 光州의 진실을 알리는 기사를 열심히 출고했 지만 신문에는 단 한줄도 실리지 않았다.

이때 동아일보는 김재곤 사회부차장을 반장으로 한 8명의 특별취재반이 구성되어 있었다. 물론 이때까지 광주민중항쟁에 관한 공식 발표 가 일체 없었다.

기자들은 열심히 기사를 보냈지만 지면에는 단 한줄 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계엄사의 검열과정에서 모두 삭제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매스컴의 무기력에 시위 군중들은 ' 전국 언론인에게 보내 는 글' 을 발표하는 등 질타하게 되지만 기자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김영택著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光州에서 피비린 내 나는 상황이 연일 계속되고 있었지만 모든 언론 이 입을 다물어 光州에서 벌어지는 온갖 살육과 만행이 외부에 알려지 지 않은 채 점차 고립화 하고 있었다.

光州 외곽을 포위한 계엄군의 저지선을 어렵게 뚫고 외지로 나간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만 光州는 조 금씩 알려질 뿐 이었다. 더욱이 21일 새벽 2시가 넘어서면서 시외로 통하는 모든 전화마저 두 절되고 말았다.

이제 光州는 완전한 고립무원의 상태에 이르렀다. 당시 체신부는 시외전화 불통 이유에 대해 회선 절단은 아닌 것 같으며 현지에서의 특수한 상황 때문 같다. 고 밝혔으나 시민들은 光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위해 계엄당국이 고의 로 회선을 끊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21일 새벽 1시쯤엔 광주세무서가 불탔으며 새벽 2시 무렵엔 광주역 부근에 있는 KBS방송국이 화염에 휩싸였다. 그리고 광주로 부터 외 부로 통하는 모든 시외전화는 ' 고장' 이라는 이유로 두절되었다.

광주의 ' 피내음' 은 더이상 전류를 타고 시외로 빠져나갈 수 없었다. 밤 에 불타버린 두 방송국과 함께 전남일보, 전남매일의 편집이 중담됨으 로써 광주시는 완전히 고도(孤島)로 화했다 <실천문학사 刊 작전 명령 화려한 휴가>

광주시내 전화와 시외전화는 새벽 부터 두절된데 이어 고속버스와 열차 등도 시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광주시와 가까운 송정리에서 승객 을 내려놓았다. 승객들의 불편함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생사의 기로 에서 주변을 살펴야 하는 부담감을 안겨 주었다.

외부와의 연락이 일 체 단절되었기 때문에 칠흑같은 어둠으로 부터 시작되는 21일의 새벽 은 무겁기만 했다. 눈과 귀가 막히고 활동이 억제된 상태에서 시민들 은 울타리 안의 미친개처럼 사납게 울부짖고 있었다.

이젠 서로가 서 로를 물어뜯는 상황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밖으로는 계엄군의 총탄 세 례가 불을 튕기고 안으로는 폭력 시위대로 인하여 불안이 가중되고 있 었다" <金良五 著 光州보고서>

光州와 서울, 木浦와 서울간 고속버스가 21일 오전 부터 운행이 중단됐다. 서울에서 光州와 木浦를 잇는 호남선 열차도 이날 밤 9시30분 서울발 179호 특급열차를 시작으로 전면 운행 중단에 들어가 光州는 통신 뿐 아니라 교통까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혼자만의 光州로 변했다.

孤島로 변한 光州는 그러나 시민들에게는 ' 해방공간' 과 자치구로 다 가섰다. 21일 새벽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시위대와 맞닥뜨렸던 계엄군 이 물러나면서 光州는 너나 할 것없이 한마음으로 위대한 光州를 노래 하며 질서 유지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또 모든 시민들이 하나가 돼 시위대에 주먹밥과 물을 전해주었고 민주주의의 만개를 고대했다. 忠壯로와 錦南로 상인들은 담배를 내놓고 최루가스를 견디는데 좋다 며 치약도 나눠줬다. 일신방직과 전방에서 실타래를 돌리던 여공들도 도로로 뛰쳐나와 시위대에 빵과 음료수등을 건넸다.

제 51회 태극기에 덮인 시신 시민군 태동 촉발한 민주의 넋
 

   21일 새벽 光州역 전투에서 밀린 계엄군이 시위대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물러나면서 먼동이 터 올 무렵에는 全南도청과 光州교도소를 제외하고 光州시내 전역이 시민들에 의해 장악됐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치를 떨며 밤을 지새우고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한 시민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 둘 도청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날 아침 6시께 柳동 삼거리. 태극기에 덮인 수레 1대가 지프 뒤에 연결된 채 도청 쪽을 향해 錦南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시민들은 모두 이 수레를 둘러싸고 울분에 차 있었다. 태극기 아래 2구의 시신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시신의 다리는 부어 올라 있었으며 여기 저기 핏덩 어리가 굳어 있었다. 시민들이 지금까지 말로만 들었던 계엄군의 학살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 시신은 이날 새벽 光州역을 방어하던 공수부대원들과 시민들이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 위기를 느낀 공수부대의 발포로 빚 어진 희생자들이었다.

나중에 확인 결과 光州역 발포로 숨진 시민은 金在華씨(당시 26세)와 金萬斗씨(당시 45세),그리고 李北日씨(당시 28세)로 밝혀졌다.

金在華씨는 이날 자정께 부터 시위대 선두에서 시위를 벌이다 가슴 한복판에 총탄을 맞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고 金萬斗씨는 조카를 찾아 光州역에 나왔다 총격을 받았으며 李씨도 시위 도중 귀밑 부분에 총알을 맞아 주검으로 변했다.

金在華씨가 총격을 받은뒤 병원으로 옮겨진 점을 감안할 때 이날 수레에 실린 시신은 金萬斗씨와 李씨었을 가능성이 높다.

『광주역의 충돌은 20일 오후 4시쯤 무등경기장에서 2백여대의 차량이 광주역 광장을 거쳐 시내로 진입할 때 광주역을 경비하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발포하자 시위 대원들이 「가만두지 않겠다」며 광주역에 들어가려고 기도하면서 일어났다…
밤 10시 부터 시위 대원들은 광 주역을 점거하고 있는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트럭에 실린 드럼통에 불을 지른뒤 전지시켰으나 분수대와 충돌, 공수부대원들에게 나아가지 못했다. 군중들은 계속해서 10여대의 차량을 동원해 기습 작전을 폈었다. 이 과정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일제 사격을 가한 것이다』(창작시대 사 刊 實錄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이곳에 주둔했던 3공수여단 11대대장 林守元중령은 지난 89년 1 월 국회 光州청문회에서 시위대를 해산할 길이 없어 E-8 발사총이라는 가스총을 사용했을 뿐 발포는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현장에 있었던 시민들과 인근 주민들은 그러나 이날 새벽 끊임없는 발포 소리를 들었다고 말하고 있고 또 이곳에서 숨진 3명도 모두 총상으로 확인돼 光州역 발포는 숨길수 없는 사실로 보인다.

아무튼 光州역에서 분명히 시민이 숨져갔고 공수부대원들이 철수한 뒤 이날 새벽 5시께 光州역 대합실에서 2구의 시신이 시민들에게 발견 된 것이다.

이들 시신을 처음 목격한 것으로 알려진 이관택씨(당시 32세)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21일 새벽 光州역으로 갔는데 시민들이 불타는 방송국을 바라보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대합실로 들어갔는데 한켠에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쓰러져 있어 가보니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숨져 있었다. 다리에 심한 상처가 있었는데 대검에 의한 것 같았다』

이날 光州역 시위에 참여했던 金정기씨(당시 19세)도 역 안에 시체가 있다는 외침을 듣고 달려가 피가 말라 붙은 채 숨져있던 시신을 목격 했으며 잠시 후 또 한구의 시신이 발견됐으나 차마 똑바로 바라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분노에 찬 시위대는 이들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도청으로 향했고 이를 본 시민들은 수레를 뒤따라 도청으로 도청으로 집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까지 시신을 보지 못했던 시민들은 계엄군이 시위대를 무참하게 학살한 모습을 두눈으로 목격하고 전날 트럭에 실려간 수많은 젊은 이들 상당수가 이같은 결과를 맞았을 것으로 예측,이 희생에 대한 대가를 분명히 치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시체 2구가 노점상 리어카에 실려 금남로에 들어섰다. 지난 새벽 광주역에서 총탄에 맞아 사망한 시체였다. 공수부대원은 총으로 죽이고도 얼마나 두들겨 팼는지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었고 두 눈을 부릅 뜬 채 벌려진 입 안에는 피가 가득 고여 있었다…

리어카에 실린 시체 2구는 시위 대열의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맨 앞으로 옮겨져 저지선에 버티고 서 있는 공수부대가 직접 볼 수 있도록 대치 지점에 놓여졌다. 도청을 지키고 있던 일부 군경들도 시체를 보자 숙연해지는 것 같았다. 너무도 참혹하고 명백하게 드러난 공수부대의 만행이었기 때문이다』(도서출판 南風 刊 광주민중항쟁비망록)

수레에 실려 태극기에 덮인 2구의 시신을 바라본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당장 계엄군의 저지선과 맞닥뜨려야 한다는 고함이 여기 저기서 터져 나왔다.

시민들은 그러나 이날 새벽 발포의 공포를 떠올리며 맨몸의 저지선 돌파는 어렵다고 판단,차량 돌진을 감행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도 한계가 있었다. 계엄 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저지선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시위군중 가운데 일부가 공수부대의 장갑차와 맞설 장갑차를 확보하자고 주장했다. 시민들은 이에따라 방위산업체로 장갑차등 군수 물자를 생산하는 아시아 자동차를 자연스럽게 떠올렸고 이는 시민들의 아시아 자동차 접수를 불러온다.

20일 방송용 스피커를 구입하기 위해 모금 운동을 전개,즉석에서 남녀노소 가릴것이 십시일반으로 한푼 두푼 내놓으며 시민군 태동의 첫 징조를 보였고 차량시위로 시위의 질적. 양적 변화를 거친 시민들이 이날 아침 수레에 실린 시신으로 계엄군에 정면 대응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던 것이다.

계엄군의 만행에 이에는 이,눈에는 눈으로 되갚자는 논리가 설득력 있게 다가섰고 이는 시민들이 경찰서 무기고 등에서 각종 화기와 탄약을 탈취,실질적인 화력을 갖춘 시민군으로 발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제 52회 아시아자동차 접수 / 총칼대응 무장 필요성 절감
 
   우리도 저들처럼 장갑차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실질적인 대항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21일 오전 태극기에 덮여 수레에 실린 2구의 시신을 앞세우고 全南도 청을 향해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에서 장갑차 바리케이드돌파를 위해 장갑차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20일 밤과 21일 새벽 버스등 차량 돌격대를 운용, 계엄군과 부딪치며 그 효용성을 확인한 시민들은 계엄군의 총 칼에 대응할 수 있는 보다 강력한 시위 도구와 함께 시위대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많은 차량 확보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날 오전 8시께 錦南로에 모여있던 시위대 가운데 젊은 사람들을 중 심으로 한 시민들은 마침내 光川동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향하기 시 작했다.

이들중 일부는 大仁동 시외버스공용터미널과 新安동 중앙고속 터미널 등으로 흩어져 차량 확보에 나섰지만 光州를 빠져 나갔던 버스 들이 교통두절로 다시 회차하지 못해 차고지가 텅 비어 있고 그나마 차량들도 20일 이미 시위대에 '징발'됐음을 알고 발길을 아시아자동차 로 돌렸다.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 정문에 들이닥치자 근무중이던 20여명의 경비 원들이 막아섰다. 그러나 죽기를 각오한 이들에게 경비원들은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경비원들도 처음에는 완강한 자세로 이들을 제지했으나 공수부대의 만행을 듣고 보았던지라 잠시뒤 물러서 길을 터주었다.

...그때 한 청년이 우리에게도 공수부대의 장갑차와 맞설수 있는 장갑차가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 후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군수품을 갖 고 오자고 했다.

많은 청년들이 동조했으나 운전할 수 있는 사람들만 가기로 했다. 50여명은 몇 대의 차량에 나누어 타고 곧장 아시아자동 차 공장으로 향했다. 정문에 도착하자 공장 직원들이 막아섰다.

그러나 이들은 직원들을 밀쳐내고 들어가서 군납을 기다리고 있는 수백대의 차량중에서 트럭과 버스, 지프등 20여 대를 끌고 나왔다. 군용차량 대열이 금남로에 도착하자 시민들은 함성을 질렀고 일부 청년들은 장 갑차와 탱크가 필요하다며 아시아자동차 공장이 있는 광천동으로 향했 다 < X도서출판 南風 刊 광주민중항쟁비망록〉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시내 중심가에서 4㎞ 떨어진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군중 1천여명이 진입하여 장갑차를 탈취해 시내 로 몰고 들어와 데모대에 가담했다. 모두 사기가 충천하여 들뜨기 시 작했다

전교사 전투상보는 당시를 오전 9시20분 아세아자동차 공장 에이피시 피탈 로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발표된 검찰의 5.18관련 사건 수사 결과 발표문은 (오전 8시께 光州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가 광주공단에서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지프차등 지 휘용 지프차 14대를 탈취 당했는데 이 가운데 하나인) 20사단 지휘 차 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이 오전 9시께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등 차량 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으로 적고 있다.

이날 아시아 자동차 차량 유출 과정에 이 공장과 하청업체 직원들이 상당수 가담,장갑차 확보에 결정적 도움을 줬다. 당시 아시아 자동차 에 근무했던 金정기씨(당시 19세)는 시민 가운데 누군가 혹시 장갑차 가 없느냐고 물어 와 신입사원 교육때 장갑차를 만드는 제3공장을 둘 러봤던 기억이 나서 그 장소를 알려줬다고 밝혔다.

아시아 자동차를 빠져 나온 장갑차와 일반 차량들은 시내 뿐 아니라 和順과 寶城.筏橋,羅州.務安.木浦.靈岩.海南,그리고 潭陽.谷城.求禮.靈 光 등 4방면으로 향했다. 기동성을 갖춘 시위대가 각종 차량에 나눠타 고 光州를 벗어나면서 시위는 全南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 다.

그러나 아직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지 못한 상태여서 光州 시가지를 휩쓸고 다니던 차량들은 운전자의 마음 내키는데로 여기저기를 돌아다 녔고 심지어 일부 차량은 미숙한 운전으로 사고를 낸 채 길가에 방치 되기도 했다.

羅상옥씨(당시 21세)등이 나서 차량 통제를 시작하면서 시간이 지남 에 따라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였고 장갑차를 선두로 한 차량들이 도 청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이때 도청앞 錦南로에는 모든 光州 시민들이 쏟아져 나온 듯 물밀듯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한편 도청 앞 시위 군중은 시시각각으로 불어나 이날 오전 11시 무렵엔 30만에 육박했다. 바로 이때 시위 군중 맨 앞에 도열해 있던 503 벤즈 고속버스가 군경의 저지선으로 돌격하자 계엄군 쪽에서 LMG 기 관총을 난사, 차에 타고 있던 젊은 시위대원 20여명이 몰살하는 사고 가 일어났다. 시위 군중들은 이들 사망자의 시체를 대형 태극기로 덮 어 2구씩 군용 지프차와 리어카 등에 싣고 시내를 돌며 시민들의 참여 를 촉구했다.

차량을 이용한 군 저지선 돌파 작전은 여러차례 시도됐 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 희생자만 늘어날 따름이었다. 계엄군 중 일 부 공수부대원들은 한발 한발 저지선을 압축해 들어오는 시위 군중을 막기위해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에 잠입, 시위의 선두에 선 시민들을 조준 사격하기 시작했다. 사망자는 대폭 늘어났고 시민들은 남녀노소 직업을 불문하고 분노의 일체감을 이루었다

계엄군의 장갑차 저지선을 뚫고 도청을 장악하기 위해 아시아 자동차 등지에서 가지고 나온 차량과 장갑차가 錦南로를 메우고 끊임없이 돌 파를 시도하자 불안을 느낀 계엄군이 발포를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날 새벽과 20일 밤 光州역 등지에서 이미 발포 경험이 있는 그들이 었지만 도청과 교도소등 극히 일부 지역만 남기고 시민들이 대부분을 장악한 상황에서 고립감이 주는 불안은 그 정도를 더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대의 차량돌진이 격렬해짐에 따라 위기감이 극에 달한 계 엄군은 실탄을 분배하기에 이르렀다.

시민들의 결사 항전 의지에 대응하기 위해 비롯된 실탄 지급은 그러 나 피의 수요일로 기록된 도청앞 집단 발포를 불러왔고 이는 필연적으로 화력으로 무장한 시민군 등장을 예비하고 있었다.

제 53회 도청앞 집단 발포 / 계엄군 일제 사격 순신간에 아비규환
 
   19일 오후 光州시 東구 鷄林동에 자리한 광주고등학교. 7교시 체육 시간을 맞아 운동장에서 공을 가지고 놀던 2학년 4반 학생들은 갑작스 런 총격 소리에 우르르 도로쪽 담장으로 몰려가 밖을 내다봤다.
일단의 군인들과 시민들이 마주해 있고 군인들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光州에 주둔한 계엄군이 이날 오후 5시께 시민들 에게 첫 발포를 하는 순간이었다.

계엄군은 20일 밤 11시께도 光州역에서 차량 돌진을 감행하는 시위대 에 발포를 해 시민들을 주검으로 만들었다. 21일 새벽까지 이어진 시 위에서 발생한 발포는 그러나 집단적인 것이 아닌 산발적 형태를 띠고 있었다.

21일 아침을 맞으면서 全南도청과 光州교도소 등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계엄군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날 도청앞 錦南로는 수많은 인파로 발디딜 틈 조차 없을 정도였다. 이 시각 시민들은 협상 대표를 뽑아 장형태 全南지사를 만나 4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 사항은 계엄군의 작전과 관련된 것이어서 장형태 지사가 답변할 내용이 아니었다. 협상 대표들은 이에따라 장 지사에게 시민들을 상대로 이같은 사정을 직접 설명해 달라고 요구했고 장 지사도 승낙했다.

장지사는 그러나 약속과 달리 시위 군중 앞에 나타나지 않 았고 東구청 앞쪽에 있던 시민들이 이에 분개, 도청쪽으로 전진해 갔 다.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돼 갔고 오전 10시가 넘어서면서 도청 광장에 군용 헬리곱터의 이.착륙이 빈번해 졌다. 잠시 뒤 도청에 배치됐던 11 공수여단 61대대와 62대대 병력들에게 실탄이 지급됐다.

당시 이곳에 주둔했던 공수부대의 한 하사관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5월 21일 금남로 10시쯤의 상황은 이미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달리고 있었습니다. 강경진압에 시민들이 무서운 힘을 발휘했던 것입니 다.

저희가 위치했던 선두를 후미와 바꾸고 대신 저희 부대원이 와서 위치를 바꾸어 도청 분수대 옆으로 가니 지휘관이 실탄을 분배하기 시 작했습니다.

장교나 하사관들에게만 10발씩 분배 했습니다. 많은 실탄 은 없었습니다. 최소한의 비상용 실탄만 휴대하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지급받은 실탄을 탄창에 삽입하고 언제라도 사격할 수 있도록 총에 결 합을 하지않고 바지 옆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실천문학사 刊 작전명 령 화려한 휴가>

당시 61대대장 안부응 중령은 지난 89년 국회 5.18 청문회에서 이날 지급된 실탄이 모두 1천6백80발이었으며 이는 31사단에서 공급 받은 것이었다고 밝혔다. 정웅 31사단장은 그러나 이 시각 31사단 병력이 도청앞에 배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반대 증언을 했다.

시위대는 점차 계엄군에 다가섰고 마침내 양측의 간격이 5-6m로 좁 혀졌다. 팽팽한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계속 되면서 시위대 뒤편에 있던 대형버스와 장갑차가 시위대 앞쪽으로 움 직였다. 이를 뒤따라 수십대의 차량이 도청을 향해 서서히 진격해 나 갔고 시민들은 박수와 함성으로 이들을 격려했다.

오후 1시께 시위대 앞에 있던 버스 2대가 계엄군의 저지선을 향해 돌 진했다. 바로 뒤이어 장갑차 1대가 질주했다. 이때 도청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애국가 리듬이 울려퍼졌고 이것이 신호인듯 요란한 총성이 錦南로를 가득메웠다. 피의 수요일로 기록된 도청앞 집단 발포가 이루어진 것이다.

1시 정각이었다. 도청 옥상에 네 방향으로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의 리듬이 장중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가사 없이 곡만 흘러 나온 것이다.

그러자 애국가에 때를 맞춘듯 탕탕탕, 탕탕탕 요란한 총성이 일제히 터졌다. 그동안 산발적으로 몇발씩 총성이 울린 적은 있지만 이렇게 많은 총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발포가 시작되자 군중들은 다소 동요의 빛을 보이는 듯 했으나 오후 1시 10분쯤 1천여명이 다시 한국은행 광주지점 앞에 집결했다. 이때부터 공수부대는 장갑차 1대씩을 금남로와 노동청 쪽으로 돌려놓고 사격 자 세를 취하고 있었다.

오후 1시16분 10여명의 사격수들은 금남로 쪽 큰 길을 향해 앉아 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창작시대사 刊 실록 5· 18광주민중항쟁>

실탄 지급 상황을 증언한 위의 하사관은 같은 글에서 시위대의 장갑 차에 2명이 치어 1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자 한 장교가 사격해 버려라는 명령을 해 이에따라 2-3분간 일제히 사격을 실시했으나 공중을 향 한 공포사격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는 이어 저격수 요원들이 금남로 쪽을 향해 엎드려 쏴 자세로 저격 자세를 갖추고 있다 저지선으로 다가오는 차량과 시위대에 정확한 조준 사격을 가했고 장갑차에 탑승, 해치를 열고 돌진해 오는 한 청년에게는 저격수가 장갑차에 설치된 캘 리버 50 기관총을 겨누고 있다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고 말했다.

계엄군의 저지선으로 달려들던 장갑차와 버스는 멈춰섰고 시위대열 앞에 있던 시민들이 힘없이 쓰러져 갔다. 도청앞 일대는 일순간 아수 라장으로 변했다.

도청앞에서 앉은 자세로 쏘아대는 총탄은 끊임없이 금남로에서 움직이는 모든 물체를 쓰러뜨렸다. 처음에는 일부 시민들이 공포탄이거니 생각하고 피하지 않았다가 아차 하는 순간 총탄은 여지없이 심장을 꿰 뚫었다.

총성은 계속 들렸고 시민들은 양편 골목으로 흩어져 몸을 피 했다. 금남로는 순식간에 수많은 시민들이 쓰러져 고통에 찬 신음과 살려달라며 몸부림치는 처절한 절규로 가득찼다. 한번 넘어진 후 다시 는 움직이지도 못한 채 핏물만 흥건하게 쏟아내는 시체들이 즐비했 다<도서출판 南風 刊 광주민중항쟁비망록>

10여분 동안 계속된 집단발포와 도청 주둔 계엄군이 朝鮮大로 철수할 때 까지 계속된 조준 사격으로 錦南로는 침묵속으로 빠져 들었다. 여 기저기서 간간이 구호 소리만 들려올 뿐.

비슷한 시각. 全南大 앞에 서도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시위대는 더이 상 맨주먹으로 당할 수 없다고 생각, 징발했던 차량 편으로 和順과 羅州를 향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무차별 총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화력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경찰서 등에 보관중인 소총 등을 탈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시위대가 무 장을 하고 조직력을 갖춘 '시민군'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제 54회 임신부의 죽음 / 만삭의 몸까지도 무참히 총세례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望月동 제3묘역. 묘지 번호 1백35번. 80년 5월 남편을 마중나갔다 全南大 앞 평화시장 입구에서 계엄군의 총격으로 숨진 崔美愛씨(당시 24세)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崔씨는 사망 당시 임신 8개월의 만삭이었 음에도 불구, 계엄군들은 무참하게 총부리를 겨누었고 崔씨는 결국 뱃속에 생명을 안은채 이곳에 묻혔다.

崔씨의 어머니 김현녀씨가 지난 89년 국회 光州청문회에서 딸의 끔찍한 죽음과 딸의 죽음이 가져온 고통의 나날을 절규했던 내용과 증언을 통해 당시를 재구성해 본다.

崔씨는 당시 어머니와 함께 평화시장 근처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숙을 치고 있었다. 崔씨는 간호전문대를 졸업하고 光州 모고교에서 영어교사로 있는 사람과 결혼, 어머니의 하숙일을 돕고 있었다. 崔씨 는 이때 8개월된 아이가 하나 있었고 뱃속에 8개월된 태아를 잉태하고 있었다.

21일 아침. 光州시내 모든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 있었지만 崔씨의 남편은 이날도 학교에 볼일이 있다며 12시까지 들어오겠다는 말을 남기 고 밖으로 나갔다.

崔씨의 어머니 金씨는 全南大 쪽에서 탱크가 굴러가는 소리를 듣고 안되겠다 싶어 18일 부터 다락방에 숨어있던 하숙생들에게 밥을 차려 먹게한 뒤 이들에게 차비를 쥐어주며 '사태'가 끝날 때까지 고향에서 머물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조금지나 마을 주민들이 찾아왔다. 우리 도 시위대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金씨 하숙 생들이 먹고 남은 밥에 식초를 치고 김가루를 뿌려 주먹밥을 만들어 밖으로 가지고 나갔다 마침 지나가던 차량에 전해 주고 다시 집에 돌 아와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잠을 깨보니 이웃에 사는 연 탄집 아저씨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뛰어들어 무슨일이 생겼구나 하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맨발로 뛰쳐 나갔다. 청천 벽력이었다. 崔씨가 공수부대원의 총에 맞았다는 것이었다.

金씨가 잠든 사이 12시 까지 돌아오다던 남편을 마중하기 위해 딸이 밖에 나갔다 총을 맞은 모양이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을 밀어붙이 고 길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니 남색에 붉은색 무늬가 있는 崔 씨의 임부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신없이 다가가 상체를 붙잡고 일으켜 세워보니 머리 뒷부분이 사라지고 없었다. 총탄이 머리를 관통 했던 것이었다.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없었다. 멍한 상태로 넋을 잃고 있던 金씨에게 대학생들이 이렇게 있다간 사체마저 빼앗길지 모른다고 외쳐댔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崔씨의 시신에 달려들 어 팔과 다리를 붙잡고 집안으로 옮겼다.

崔씨의 총격 장면을 목격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崔씨가 평화시 장 골목길 맨홀 뚜껑위에 서서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부근 전봇대 뒤에 있던 공수부대원이 총을 겨누었고 곧바로 총소리가 났다 고 했다.

崔씨는 일단 거실에 안치됐다. 이때 崔씨의 배가 불룩거렸다. 어머니의 죽음을 모른 태아가 뱃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 지켜 본 金씨는 "아이라도 살려야 한다" 며 연락이 가능한 병원에 모두 전화 를 했다.

하지만 어쩔수 없다는 것이었다. 12시에 온다던 사위가 1시를 넘겨 집에 돌아왔다. 金씨는 말문을 열지 못하다 자네 마누라가 죽었네라는 한마디를 내뱉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날 외곽으로 철수하는 공수부대의 무차별 발포 과정에서 빚어진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임신부에 가해진 총격이었다. 전남대 앞 평화시 장 입구 골목에 서있던 최미애는 정조준된 총격에 머리를 맞고 그자리 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시내에서 全南大로 철수했다가 다시 광주교도 소 쪽으로 이동하던 제3여단 공수부대원들이 쏜 총알이었다. 이미 숨 을 거둔 최미애씨의 뱃속에는 8개월된 태아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출 생을 두달 남겨둔 태아는 뱃속에서 몸부림쳤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죽은 임신부의 배가 거세게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있던 동네 사람들은 그만 고개를 돌려버릴 수 밖에 없었다. 총알 한방에 두 생명이 동시에 숨을 거둔 비극이었다"< X창작시대사 刊 실록5.18광주민중항쟁〉

23일 장례를 치렀다. 관은 어떻게 해서 구했으나 공동묘지까지 시신 을 싣고 갈 차량을 구할 길이 없었다. 마을에서 사용하던 리어카를 이 용하기로 했다.

마을 주민과 崔씨 아버지 친구들이 리어카를 앞세우고 매장지를 찾아 무작정 집을 나섰다. 동일실고 앞 길을 지나는데 계엄 군이 총을 겨누고 있어 사람들에게 건(巾)을 나눠주며 머리에 두르라 고 했다.

건을 쓰고 있으면 그래도 총질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 문이다. 함께가던 마을 주민 한사람이 교도소 앞 변전소 위쪽에 공동 묘지가 있으니 그곳에 일단 매장하자고 제의, 방향을 돌렸다.

崔씨를 매장한지 18일이 지나자 光州지검에서 검시를 해야한다며 매 장지를 파헤치라는 연락이 왔다. 자식을 두번 죽일 수 없다며 반대하는 金씨에게 검찰은 임신부가 죽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를 확인해야 한다. 끝까지 반대하면 유언비어 날포죄로 처리하겠다고 협박, 무덤을 파 崔씨의 시신을 朝鮮大병원으로 옮겼고 검시가 끝나자 望月동에 묻으라고 했다.

5월23일 최미애씨는 뱃속에 든 아이와 함께 리어카에 실려 교도소 건너편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장례식은 꽃상여 대신 리어카가 이 용되었다.

그로부터 10여일 후에 광주지검에서 사체를 검시한다며 다시 최씨를 파내라고 했다. 조선대병원에서 검시를 마친 그녀는 6월7일 망월동에 안장되었다< X도서출판 南風 刊 광주민중항쟁비망록〉

미애를 望月동에 묻은지 얼마 있다 내 손으로 중매를 해 사위를 재혼시켰습니다. 8개월 된 손자가 엄마를 찾을 때면 늙은 내 젖을 물려 주곤 했습니다

金씨는 5.18이 끝난뒤 崔씨가 생각나면 20리길을 걸어 望月동을 찾았 다. 묘라도 바라보고 어루만져야 자식 생각이 덜했기 때문이다. 望月동 에 다녀온 뒤는 심한 몸살을 앓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슬퍼런 군사독재의 충견들이 望月동에 가는 것을 막고 감시해 그들의 눈을 피할 수만 있으면 족했다. 金씨는 이처럼 기막힌 사연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당시 공무 원이던 崔씨의 아버지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될까봐서였다.

그러다 지난 89년 국회 光州청문회에 증인으로 선정돼 오랜 망설임 끝에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처음 입을 열었다. 사랑스럽기만 하던 딸과 세상 구경도 못하고 저세상으로 간 손자를 가슴에 묻은 채.

제 55회 무장한 시민들
 
   20일 밤부터 21일 새벽까지 계속된 '光州역 전투' 도중 계엄군의 M16 자동소총에서 공포탄이 아닌 실탄이 내뿜어지고 21일 오후 全南도청 앞에서 본격적인 집단 발포가 이루어지자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앉아서 이대로 당할 수만 없다. 우리도 무장을 해야한다'는 절박감에 시민들은 총기 등 화력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표는 다량의 화약을 가지고 있는 광산 및 총기를 보유한 예비군 무기고였다.

이날 최초의 무기고 피탈 시각은 계엄군이 도청앞에서 행한 집단발포와 관련, 과연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느냐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난해 검찰이 발표한 5.18 관련 사건 수사문은 당시 피탈상항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시위대는 차량을 이용하여 인근 광산.영광.함평.화순.나주.영암.해남.강진.완도.승주.고창 등지로 진출하여 무기를 확보해 무장을 했다.

13시께 광산 하남파출소에 시위대 80여명이 차량 3대를 타고와 카빈 9정을 탈취하였고 고속버스.트럭 등 10여대의 차량에 탑승한 광주 시위대가 함평에 도착해 군중 시위를 벌이고 신광지서에서 총기 1백여정, 실탄 2상자를 확보했다.

13시35분께 화순 소재 4개 파출소에서 총기 4백60정과 실탄 1만발을 탈취하였고 14시께 나주 남평지서 무기고에서 카빈 20여정과 실탄 7~8상자를 탈취하고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와 나주 시위대가 합세하여 나주경찰서에 진입, 군용 레커차로 무기고를 파괴해 카빈 1천1백8정 실탄 1만7천7백60발, 화순동면지서에서 M1 72정 카빈 2백 96정 LMG 1정 실탄 1만4천여발을 탈취했고 그밖에도 이날 하룻동안 일신방직.호남전기.연초제조창.영암경찰서.화순경찰서.지원동 석산 화약고.한국화약.강진 성전파출소 등을 습격하여 카빈 M1.AR.LMG 등 총기 4천9백여정과 실탄 13만발.TNT 10여상자.수류탄 2백70여발을 탈취하였음"

검찰 수사 발표문은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첫 무기피탈이 도청앞의 집단 발포가 있던 시각과 같은 오후 1시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전교사 전투상보에는 첫 피탈 시점이 :"14시 지원동 석산 화약고(민수용) 피습 TNT 4상자 탈취"로 나타나 1시간의 차이가 발생한다.

전교사 전투상보의 무기 등 피탈 상황은 이후 "15시 비아지서 파괴후 무기탈취(1백67정), 15시24분 화순지역 지서 기습 총기 탈취후 파괴(카빈 10정), 15시40분 선무방송헬기 방송중 대공사격으로 3발 관총, 16시5분 영암경찰서 기습 무기 탈취후 도주(5백20정), 17시40분 화순광업소 피습TNT 탈취(13상자), 19시33분 노안지서 도착 트럭 3대 방화, 나주 남평지서 기습 무기 탈취(13정)"로 적고 있다.

아무튼 시민들은 계엄군과 같은 논리로 자위를 위해 무기고와 화약고를 기습, 무장에 필요한 각종 무기를 확보해 光州로 되돌아 왔다.

오후 2시30분께 중앙로 지하상가 공사장 부근에서 연좌 농성을 벌이고 있었고 도청 쪽에서는 계속 총구가 불을 뿜고 있었다. 이때 무기를 가지고 돌아온 시위대가 카빈소총 30여정과 실탄 1클립씩을 나눠줬다.

이를 시작으로 각지에서 가져온 각종 총기들이 분배돼 시민들이 무장을 하면서 마침내 시위대가 '시민군'으로 바뀌었고 계엄군과 실질적인 교전에 들어갔다. 처음 총기 휴대는 사격 경험이 있는 군 전역자들에 제한됐다. 고교생들도 계엄군에 당당히 맞서길 원했지만 사고를 염려한 시민들이 적극 제재하고 배급을 받은 시위대는 간단하나마 인전 사항을 기록, 사후 관리 체계를 갖춰TEk.

"시 외곽지역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빼앗은 다량의 총기류와 탄약이 광주에 반입된 오후 3시30분 이후 수백명의 무장 청년 시위대는 도청앞 군경 저지선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공수대원과 청년 시위대와의 총격적이 개시된 것이다. 광주사태는 어느새 시가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온 시내는 그야말로 귀가 아플 정도의 총성에 휩싸였다. 계엄군의 공수부대원들은 도청 건물과 관광호텔, 전일빌딩을 중심으로 각종 돌출물을 은폐물 삼아 사격을 향해 응사했다. 이같은 시가전은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한 오후 5시30분까지 계속되었다. 수많은 부상자와 사망자가 거리마다에 쓰러져 있었다"<실천문학사 刊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그러나 시민군은 계엄군과의 교전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M1과 카빈 등으로 무장한채 오합지졸로 움직이는 시민군에게 M16 자동소총에 일산불란한 지휘체계를 갖춘 계엄군은 마치 '다윗의 골리앗'과 같았다. 따라서 錦南로를 중심으로 한 교전에서 시민군 측의 부상자만 계속 늘어날 뿐이었다.

계엄군의 일방적인 시가전이 계속되고 있던 오후 4시40분께 몇 명의 청년들이 全大병원 12층 옥상에서 부산히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후 LMG 2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총구는 全南도청을 향하고 있었다.

시민들이 계엄군의 M16소총에 대항하기 위해 특공조를 편성, 기관총을 설치한 것이다. 탄환이 단 1발도 발사된 적이 없지만 화력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계엄군에 이 LMG는 엄청난 위협이 됐다. 더구나 全大병원과 도청은 가까워 충분한 사정거리 내에 들어있었다. 이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도청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은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이미 도청이 무장 시민군에 포위돼 통신망을 제외하고는 다른 부대와 고립돼 있었기 때문이다. 기관총 제거냐 철수냐로 논란을 빚던 계엄군은 상부로 부터 지시를 받고 5시30분께 마침내 도청을 포기한 채 光州 외곽으로 철수, 光州는 '해방구'가 됐다

제 56회 해방 光州
 

   무장한 시민들과 도청앞 錦南로 등지에서 교전을 벌이고 있던 계엄군은 화력과 지휘체계 면에서 시민군을 월등히 앞섰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위기감이 일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장 시민들이 점차 늘어나는데다 도청에 주둔한 계엄군이 외부와 단절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특히 오후 4시께 도청에서 3백여m거리에 있는 全大병원 옥상에 기관총 2정이 설치된 것을 확인한 계엄군의 긴장은 극에 달했다. 만약 이 기관총이 사격을 시작하면 엄청난 희생이 뒤따를 것은 불을 보듯 훤했던 것이다.

이에따라 계엄군은 특공조를 투입, 이 기관총을 제거키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이날 오후 2시부터 이희성 계엄군사령관과 각 군 참모총장등이 참석했던 국방부 장관 주재 회의에서 계엄군의 光州시 외곽 철수가 결정되고 현지에서 이들이 기관총 제거를 위한 행동에 들어가기 직전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특전사 전투상보는 철수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6시께 도청 철수 지시를 받은 35대대와 11여단은 APC로 폭도를 견제하면서 11여단, 35대대 순으로 철수하되 APC가 엄호하도록 하였다.

16시 30분께 후미대대인 35대대는 습격대 본부 11지역대 12지역대순으로 철수를 시작, 충분한 개인 간격을 유지하면 최대한 은.엄폐하면서 폭도의 원거리 사격을 피해 17시50분께 무사히 조선대에 도착, 도착 하자마자 바로 철수 준비에 들어갔다.

조선대 철수는 11여단 통제하에 도보 제대와 차량 제대를 편성, 각각 상이한 철수로를 선정했다. 차량 제대는 맨앞에 APC, 지역대가 21/2x5에 분승하여 차량대로 후송 1/4x8, 1/2x17, APC 수능로 철수하고 차량 철수로는 조선대-도청-15번 도로를 따라서 철수, 도보제대는 조대 뒤산을 이용하여 11여단과 7여단이 상이한 통로로 이동, 7여단은 35대대 11지역대가 선두에서 통로 개척"

계엄군은 이처럼 도청을 포기하고 철수 작전을 펴면서 도로 양쪽에 기관총을 무차별로 난사했다. 장갑차가 한차례 위협 사격을 한 뒤 곧이어 10여대의 군용트럭이 도청을 빠져나와 和順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트럭에 탑승해 있던 계엄군도 예외없이 M16 소총과 기관총을 마구 쏘아댔다.

이곳에서 쏟아져 나온 총알들은 심지어 주택 안방까지 날아들어 희생자가 잇따랐다. 당시 光州역 부근에 있던 회사에서 지원동 집으로 가던 택시회사 직원 全정호씨(당시 55)가 집 근처에서 이들이 철수하며 난사한 총격에 가슴을 맞고 숨졌으며 임신 8개월의 崔미애씨도 시내에서 처룻, 全南大를 거쳐 光州교도소로 이동하던 3공수여단 공수대원의 정조준 총격에 그 자리에서 숨졌다.

도청에서 철수한 계엄군은 光州외곽지역에 포진, 光州봉쇄작전에 들어가 시민들의 光州출입을 완전히 차단했다.

"계엄군이 물러갔다. 우리가 마침내 계엄군을 몰아내고 승리했다" 光州시내는 시민들의 환호성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18일부터 처절한 죽음의 저항을 해 왔던 시민들이 자력으로 계엄군을 몰아내고 교도소를 제외한 光州시내를 완전히 장악한데 대한 기쁨이었다. 그러나 이는 엄청난 희생을 불러와 시민들은 기쁨과 함께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도청을 접수한 시민군은 조를 편성 시외곽 지역에 대한 경계에 들어갔다. 언제 또다시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함께 사실상 통제력을 상실한 무장 시민들의 절제된 행동이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총기가 시가지에 산재해 있는데다 계엄군을 몰아냈다는 승리감에 도취된 시민들이 시내를 차량으로 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총기 회수 작업이 벌어졌다. 21일 오후 光州에 처음 총기가 반입될때는 군경험이 있는 예비군을 중심으로 신상명세서를 받은 뒤 총기가 분배됐으나 차츰 무분별한 휴대가 이루어져 오발 사고등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光州공원과 유동삼거리 등에 분산돼 있던 총기류가 도처으로 회수되기 시작했다.

계엄사는 이날 도청에 모아진 무기가 카빈 2백2백40정.M1 1천2백25정.38구경 권총 12정.45구경 권총 16정.기관총 2정등 총기류가 3천5백5정이었으며 실탄 4만6천4백 발.TNT 4박스.뇌관 1백개.장갑차 5대.무전기.방독면 등이었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자율적으로 질서를 회복하려는 노력들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질주하는 차들을 네거리에서 통제해 주는 교통정리반도 생겨났다. 뚜렷한 목적없ㅇ 동서남북으로 치닫는 차량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시민군들을 실어나르는 수송차도 보였고 붉은 페인트로 호송.취사라고 쓰여진 차량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누가 특별히 시킨 일도 아니었고 다만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찾아 소신껏 처리하고 노력했다. 이날부터 여성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위 계엄 확대조치 이후 남편들의 행방에 관한 소식이 너무나도 궁금하고 가슴이 타서 YWCA부근에 모이거나 서성거리는 여인들이 많았었다.

그러다가 이들은 놀라운 참상을 자주 듣거나 더러는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시민의 일원으로서 자신들도 무엇인가 할 일을 찾고자 했다. 이들은 21일부터 일감을 선별하여 헌혈반.취사반.홍보반.리본반.방송반.헌금반으로 나뉘었다. 이 여인들은 여고생.여대생.가정주부.술집 호스티스 등 여러계층의 사람들이었다"<金良五 著 光州보고서>

시민들의 손으로 일궈된 '해방공간'에서 이들은 미숙하나마 '자치'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27일 새벽 光州가 계엄군에 의해 재장악 될 때까지 일시적이지만 자율과 질서속에 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제 57회 당시의 기관장들 / 당시역할 불투명한데 "소임다했다"  
 
   16년이 지나고 全斗煥·盧泰愚 등을 포함해 당시 학살 책임자들이 법 의 심판을 받고 있는 오늘까지 張炯泰 전 全南지사는 5·18과 관련된 자신의 행적을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全斗煥의 光州방문 등 5·18의 핵심 사안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모르겠다로 일관하는 張씨는 언제 까지 철옹성 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것인가.

張씨는 특히 21일 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기 전 시민대 표들을 만나 시위대 앞에 직접 나서기로 했으나 이같은 약속을 어겼고 이 약속이 깨지면서 시위대가 더욱 과격해져 계엄군과 충돌, 피의 수요일로 일컬어지는 집단 발포로 이어졌다. 물론 이날 張씨가 군중 앞에 출현했다 하더라도 발포가 '필연'이었을지 모르지만.

21일 오전 도청 앞 錦南로에 운집해 있던 시민들은 더이상의 희생자 를 막자며 全玉珠씨와 당시 朝鮮大 4년 金範泰씨 등 대표를 선정했다. 이에앞서 全씨는 도청앞에 진을 치고 있던 7여간 35대대장 金일옥 중 령에게 계엄사측과 직접 만날수 있도록 주선을 해달라고 요청, 우여곡 절 끝에 도청안으로 들어가 張씨를 만났다.

이들은 張씨에게 계엄군의 유혈 진압을 도지사가 1차 사과할 것, 연 행된 시민.학생들을 전원 석방하되 어려우면 소재 파악이라도 해줄것. 21일 정오까지 계엄군의 철수 등을 요구했다.

張씨는 그러나 상부의 지시없이는 어떠한 사과도 할 수 없고 특히 군작전에 대해서는 그 무 엇도 답변할 수 없다며 이들의 요구를 계엄분소에 전달하겠다고만 대 답했다. 全씨등은 이에따라 그렇다면 시민들 앞에 나서 이같은 상황을 직접 전달해 달라고 주문했다.

제 58회 미망인들의 회고 / "내 남편은 시민의 편에 섰다"
 

  5.18 당시 光州시장으로 재직하며 시민들 편에 섰다는 이유로 光州 가 진압된 뒤 시장직을 떠나야 했던 具龍相씨와 당시 全南도 경찰국장을 지내며 신군부의 강경 진압 지시를 거부, 합수부에 끌려가 가혹 한 조사를 받고 공직을 사직해야 했던 安炳夏씨.
이들은 지난해 말과 지난 88년 각각 세상을 떠 이미 고인이 됐지만 이들의 미망인은 지울 수 없는 기억을 일기와 남편의 명예회복을 위한 변(辯)으로 남기고 있다.

故 安炳夏씨의 미망인 全任淳씨(64)는 지난 93년 7월 光州시에 5.18 피해자 추가 신고를 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安씨는 지난 88년 국회 에서 5.18 특위가 가동되면서 국회와 재야 관계자등 수많은 사람들이 5.18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뒷받침해 줄 증언과 관련 자료를 확보 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하고 접근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全씨가 그 누구의 도움이나 부추김없이 자발적으로 피해 신고를 한 것은 5.18에 대한 새로운 사실 확인이 가능할 것으로 점쳐졌다.

아니나 다를까, 全씨는 피해 신고서에서 80년 5월 18일 光州민주화 운동 당시 시위 군중에 대해 발포 등 강경 조치를 통해 진압하라는 계 엄사의 지시가 있었지만 남편은 수천명에 이르는 경찰이 총기를 사용 할 경우 시민들의 피해가 엄청날 것으로 생각, 오히려 경찰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회수해 따로 보관케 하고 경찰의 자중을 지시했다고 밝 혔다.

이는 신군부가 계엄군을 光州에 공식 파견하기 전 이미 경찰을 통해 총기 등을 사용한 무력 강경 진압을 시도했었다는 것을 뒷받침 하고 있다. 이와함께 光州에 주둔했던 계엄군이 시민들의 무장시위에 대항 하기 위해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를 했다는 점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全씨는 또 남편이 이같은 지시를 거부, 경찰의 발포를 막음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구실로 5월 26일 계엄사 합수부에 연행돼 11일 동안 구금 상황에서 협박과 고문을 당하고 특수 조사요원들이 光州 현 지에 파견돼 남편 개인 비위 여부까지 정밀 내사를 했다며 특정한 혐의가 밝혀지지 않자 치안본부로 인계돼 하룻동안 연금 당한뒤 사표 를 강요당하고 이에따라 6월2일 全南도경 국장직을 사임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全씨는 남편 安씨가 강제 사직 당한뒤 고향 襄陽을 잠시 다녀왔을 뿐 외부 출입을 하지 않은채 거의 두문불출 했으며 당시와 관련해 계엄사에 끌려가니 죽고만 싶더라라는 말 이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安씨는 그러나 光州을 잊지않았으며 光州 사람들에 대해 고마워 하는 한편 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많은 고민을 했었다고 전했다.

시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지 못하게 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하고 공직을 박탈당한뒤 이로인한 후유증으로 남편을 사별한 全씨는 지난 93년 남편의 체취가 남아 있고 5.18의 피해자로 光州시민과 똑같은 고통을 나누겠다며 光州로 와 光州시 光山동에 식당을 개업했으나 빚 만 진채 사업에 실패하고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12월 30일 남편 具龍相씨를 여의고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李 玗宣씨는 요즘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가족들과 지내고 있다. 李씨는 5.8에 관해 누가 물으면 가급적 대답을 피한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고 단지 다른 사람이 전해준 이야기를 듣고 이에대한 느낌만 가지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느냐는 것이다.

李씨는 그러나 이같은 심경을 5월 15일 부터 도청이 진압된 5월 27일 까지 일자별로 일기를 기록했다. 이 일기에서 李씨는 5.18 기간동안 거의 집에 들어 오지 못한채 시청에서 날밤을 새우고 있는 남편 具씨에 대한 걱정과 함께 사태로 인한 光州 시민의 생필품 부족, 그리고 光州의 장래 등 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기록하고 있다.

18일. 따끈한 커피로 그이와 요사이 여러가지 시름을 달랬다. 18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오늘 오후 부터 학생들의 데모 양 상이 달라졌고 공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돼 데모대와 드디어 싸움이 벌 어지고 있다. 루머인지 모르나 경상도 군인이 투입되어 지역감정이 대 립돼 공기가 험악하다는 이야기들... 하오 6시20분 장형태 지사님 모친 께서 돌아가셨다 한다

李씨는 19일 일기에서 오전 시청 백합회 회원 몇사람과 張炯泰 前全 南지사 집에 문상을 다녀온 뒤 시민들로 부터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계엄군의 실상을 전하는 전화를 받았다고 적으며 광주은행 앞은 피바다라고 아우성이다. 시장이 없으면 부인이라도 나와서 직접 보라 한다며

도지사는 상주라고 들어앉으면 제일이냐는 전화. 아무것도 모르 는 나는 그저 떨리기만 하다고 해 당시 張前지사에 대한 시민 불만 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5월 21일 광주와서 어쩌다 이런 시련을 겪는지... 어제부터 광주 외곽과의 통신 단절도 또한 교통도 완전 마비, 시내는 온통... 이것이 생지옥인지. 그이는 헬리콥터에 타서 열심히 시민들에게 호소, 아니 절규하고 있단다. 가끔 헬리콥터에서 들리는 그이 목소리인지 분간조 차 안되지만 시민 여러분! 필사의 외침 뿐이다. 그이하고는 소식이 없다

李씨는 이처럼 시장 부인이기 전에 한 남자의 아녀자로서 생지옥과 다름없는 상황에서 집에도 들어오지 못한채 시민들을 향해 울부짖는 남편의 생사를 크게 걱정했다.

또 연락이 왔는데 그 이가 도청앞 수 십만 군중이 모인 앞에 나갔다. 시민의 분노를 가라앉힐 작정으로 나 갔다 한다. 이따금 들려오는 말은 그이가 총에 맞아 죽었다느니 인 질로 잡혔다느니 별별 무시무시한 소식뿐. 가슴이 오그라들대로 오그 라들었다. 오 하나님 그이를 구하소서!

5월 24일. 라면.분유 등이 동이 나서 없다. 영세민들은 쌀을 비축해 둔 것도 없고 얼마나 어려울까 걱정이다. 5월 26일. 날씨가 춥다. 정세 는 아직 유동적이다.

시내의 식료품 등이 유통 공급이 안돼 서민생활 에 큰 지장. 은행문도 5월20일 후 문을 닫고 자금융통마저 끊겨 하 루하루 일해 벌어먹는 사람들은 더욱 기가 막힐 것이고 양곡상 마다 쌀이 떨어졌고 오늘이 사태가 난지 9일째. 모든 것이 봉쇄되고 있으 니 정말 걱정이다

李씨는 25일 일기에서 남편이 다음에 (시장을) 그만두더라도 그는 결코 비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것이라면서도 지사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인 듯 하다고 기록, 張前지사가 5.18 기간 동안 사태 수습을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또 26일 그이의 말에 의하면 오늘 저녁 혹 시가전이 일어날지 모른다 한다는 부분에서는 계엄군의 도청 진압 작전이 곧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을 당시 기관장들은 알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제 59회 지휘권은 따로 있었다.
 
   光州유혈극은 누가 지휘했는가?

지금까지 숱한 의문에 싸여 있던 이 질문은 더 이상 '의문'이 아니다.

5.18 光州의 비극은 全斗煥-李熺性-黃永時-鄭鎬溶씨를 축으로 하는 신군부 실세에 주도됐다. 보안사와 중앙정보부.군을 완전히 장악한 全斗煥 등 신군부세력은 정식지휘계통을 무시하고 光州를 유혈진압했다. 정식 지휘계통을 무시한 채 공수부대들이 독자적인 실세에 의해 지휘되고 있었다는 지휘권 이원하의 증거는 많다.

먼저 *全斗煥보안사령관이 독자적인 계통으로 光州현지 보고를 받고 지휘했으며 *지휘계통에 있지 않았던 鄭鎬溶 특전사령관이 공수부대의 추가 투입을 건의하고 부대를 선정했으며, 5.18기간동안 3차례나 광주를 방문했었고 *공숩대가 강경진압자제라는 정식명령을 듣지 않고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등 당시 지휘계통에 있었던 鄭雄 31사단장이나 尹興禎 전교사 사령관이 사실상 지휘권에 배제됐던 점 *두차례 군부대끼리의 오인사격으로 인해 군인 10명이 사망하는 등 이원화가 노출된 점 *형식적인 자위권 보유천명이 있기 전 이미 다른 지휘계통에 의해 집단발포가 이뤄지고 있던 점 등은 바로 당시 지휘권이 '둘'이었다는 증거들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비공식 루트 지휘권에 의해 光州의 유혈진압이 전개되고 있었던 셈이다.

검찰도 지난 해 7월 발표한 1차 수사결과 발표에서는 "鄭鎬溶특전사령관이 光州현지를 방문하고 병력 투입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것은 사실이나 대부분 특전사 병력이 31사단의 지휘를 받았다"고 인정했으나 2차 수사결과에서 "정상적인 지휘계통외에 全斗煥.李熺性.黃永時.鄭鎬溶씨를 축으로 하는 또 다른 지휘체계가 있었으며 이를 통해 光州의 과잉진압 및 양민학살이 자행됐다"며 지휘체계가 양분됐음을 분명히 했다.

즉, 全斗煥씨의 경우 崔禮燮 보안사 기획처장 등 보안사 간부 4명을 光州에 파견, 수시상황보고 및 연행자 조사를 하도록 했고 鄭鎬溶씨도 光州의 전교사 감찰참모실에 사무실을 만들고 전교사 기밀실에 특전사 전용상황실을 마련, 전용무전기로 상황을 보고받고 예하 공수여단장들과 진압대책을 논의하는 등 이들이 光州진압을 주도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지휘권 이원화와 관련 가장 주목을 받는 인물은 鄭鎬溶. 鄭鎬溶은 지금까지 드러난 바에 따르면 서울과 光州를 오가며 全斗煥 등 신군부의 光州평정작전을 입안, 지휘한 핵심인물이다. 鄭특전사령관은 검찰 수사결과로도 光州를 3차례나 방문했으며, 4일동안 光州에 머문 것으로 밝혀졌다.

첫 번째 방문은 19일 낮 12시. 전교사 기밀실에 상황판을 설치하고 옥상에는 전용무선기를 설치해 공수단으로부터 직접 상황보고를 받을 수 있은 시설을 갖췄다. 鄭씨는 이에 대해 지난 15일 열린 22차 공판에서 "나는 19일에는 간적이 없고 23일에 처음 갔기 때문에 이 말은 거짓"이라고 밝혔으나 당시 전교사 작전참모였던 白南伊대령은 이날 증인신문에서 "19일날 전교사령관실에서 鄭씨를 분명히 보았다"고 진술했다. 두 번째는 22일 오후 2시께로 증파된 崔雄 11공수여단장을 격려한 뒤 상경했고 세 번째는 23일 오후 5시께로 光州교도소와 효천역 오인사격현장, 통합병원 등을 둘러본 뒤 상경했다.

유의해야 될 부분은 첫 번째 방문으로 주파수가 다른 공수여단 전용 무선망을 설치하고 현지 공수부대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았다는 것은 공수부대가 31사단장이나 전교사 사령관과는 다른 지휘계통상에 있었다는 증거다.

鄭특전사령관이 全南.北지역 계엄분소장인 전교사령관을 배제하고 독자적으로 공수부대를 지휘했다는 증거도 분명하다.

지난 15일 5.18사건 22차 공판에서 증인으로 나온 당시 전교사부사령관 金基錫씨는 鄭피고인의 질문에 "당시 鄭사령관이 전교사에 연락장교도 파견하지 않고 상황보고도 하지 않았다"며 鄭씨와 공수부대의 직라인이 있었음을 진술했다.

白南伊 당시 전교사 작전참모도 "공수부대로부터는 일체의 상황보고가 들어오지 않아 참모들을 사복차림으로 내보내 정보를 수집했으며 심지어 초기 강경진압에 대한 얘기는 시민들의 항의전화를 받고 내용을 파악했고 부대간 오인사격도 보고받지 못할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23일 오후에 있었던 공수부대와 보병부대간의 오인사격도 지휘권 이원화의 결과. 같은 지역에서 작전을 하고 있는 군부대가 서로 다른 통신망을 사용하면서 작전을 했기 때문에 아군을 적군으로 알고 사격, 10명의 사망자를 낸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5.18 당시의 정식 지휘계통은 계엄사령관 李熺性 육군참모총장-陳鍾埰 2군사령관-尹興禎 전교사사령관(22일 오전 10시 이후 蘇俊烈)-鄭雄 31사단장(21일 오후 4시까지)-제7.11.3공수여단장(申우식.崔雄.崔세창)-공수부대대장 라인이다.

그러나 鄭雄사단장은 지난 25일 5.18사건 24차공판과 지난 88년 국회청문회에서 한결같이 "이미 20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는 나의 작전통제권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그 구체적인 증거로는 3공수여단이 19일 내가 무혈진압을 지시했는데도 20일 여전히 유혈진압을 했으며, 20일 오후 3시무렵 공수여단장을 소집했는데 모두 전교사에 가 있었으며 서울에서 온 정鄭鎬溶사령관과 함께 있었다"고 말했다.

21일 오후 1시께 있었던 도청앞 집단발포라는 5.18 최대의 비극도 鄭사단장이나 尹사령관 모두에게 전혀 보고된 사실이 없다는 증언에 비춰 尹사령관.鄭사단장 모두 지휘권에서 벗어나 있었거나 사실상 배제됐음이 증명된다. 20일밤 11시 20분에 내린 2군사령부의 군 작전지침 추가지시는 '발포금지, 실탄통제'라는 명령은 지휘권 이원화의 한 증거. 그날밤 10시30분 이미 光州역에서 3공수에 의해 다량의 발포가 있었으나 2군사령부는 '발포금지'멸여을 그때야 내리고 있다. 신군부는 이를 무마하기위해 21일 오후6시 공식적인 자위권을 발동한다.

보안사의 역할도 눈여겨볼만하다. 光州와 관련한 보안사의 최초동향은 19일부터다. 光州에서의 소요사태에 대한 상황보고와 조치가 미흡하다는 全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崔禮燮기획정보처장이 光州에 파견돼 전교사 작전회의에 참석하고 金基錫전교사부사령관과 함께 시민협상대표를 면담, 통상적인 보안사업무를 뛰어 넘는다. 또 李鶴捧 보안사 대공처장은 崔경조대령을 光州에 파견, 光州지역 합동수사단장에 임명한다.

제 60회 발포 명령이었다 / 자위권 발동이전 실탄배급  
 
   80년 5월 光州민중항쟁 당시 시민들에 대한 공수단의 발포는 어떻게 이뤄졌을까.
신군부의 주장대로 과연 자위권의 발동이었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는가.
이 문제는 光州비극의 책임자를 규명하는 핵심적인 문제다.
지난 1월 5·18사건 특별수사본부의 수사후 검찰은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검찰은 집단발포의 책임자에 대해 光州시위대를 무장폭도로 규정,그 정을 모르는 계엄군으로 하여금 실탄을 지급한 뒤 자위권 발동이라 는 명목으로 발포케 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더라도 조속히 진압할 것을 결의하고 이를 그대로 실행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이를 결의한 사람들로 全斗煥.黃永時.周永福.李熺性.鄭鎬溶씨를 지목하고 이들에게 모두 내란목적 살인죄를 적용했다.

5.18학살 책임자들을 기소, 법정에 세운 검찰은 光州에서의 발포 핵 심인물로 이들을 꼽은 것이다. 최종 명령자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 으나 사태 전체를 주도한 인물이 명백하기 때문에 핵심인물에게 발포 책임을 물은 것이다.

光州에서의 최초 발포는 19일 오후 4시30분께다. 光州시 東구 鷄林동 지금의 동원예식장앞길에서 시위대에 포위된 공수대 장갑차로부터의 발포로 조대부고생 金永贊군(당시 19)이 총상을 입었다.

다음의 발포는 20일 光州역 앞. 이날 새벽까지 金在華씨(당시 26) 등 시위대 3명이 光州역을 지키고 있던 3공수여단의 발포로 숨졌다. 이같은 일련의 발포가 행해졌던 당시 정상적인 군 명령계통상의 지시 는 분명히 발포금지였다.

20일밤 11시20분 2군사령부는 발포금지, 실탄통제라는 군 작전지침을 추가로 내리고 발포를 금지하고 있었다(전교사 전투상보).

이미 그날 밤 11시에 집단발포가 이뤄진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崔世昌 前3 공수여단장은 지난달 29일 12.12 및 5.18사건 25차공판에서 이날 상황 을 대대장들의 요청에 따라 서울에서부터 갖고 간 실탄을 위협용으로 사격했고 그 과정에서 4-5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말하고 실탄분배와 사격지시는 내가 시킨 것이라고 진술했다.

21일 오전 계엄사령관실에서 모인 군 수뇌부는 자위권 발동을 결의 했고 이는 20일 밤 光州역 발포 이후에 이뤄졌다. 따라서 21일의 자 위권 발동 결정은 20일에 자행된 불법 발포행위를 무마시키려는 사후 조치의 성격이 짙다.

20일 밤 자정께 尹興禎 전교사사령관은 李熺性 계엄사령관에게 전화 를 걸어 공수단의 철수를 건의, 승인을 받아놓은 상태로 발포까지 해가며 시위를 막을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었다.(88년 12월 8일 국회 제17차 청문회중 尹興禎 증언)

본격적인 발포는 21일 오후 1시께 도청앞 시위대를 향한 공수단의 집단발포다. 발포가 있기전인 21일 오전, 시민들은 전날밤 光州역 앞에서 숨진 2구의 시신을 앞세우고 도청앞에서 계엄군과 근접 대치한 상태에서 張炯泰도지사 면담을 기 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앞에 나오기로 했던 도지사가 나오지 않자 12시 58분께 일부 흥분한 군중이 관광버스 2대를 몰고 도청광장 으로 쏜살같이 들어가 분수대를 돌았다.

이 순간 버스에 사격을 했고 그 중 1대의 운전기사가 총에 맞고 숨져 버스는 분수대옆에 서고 말았다. 이어 1분뒤, 시위대쪽에서 장갑차 1대가 전속력으로 질주 해 수협 全南도지부앞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을 치어 權용운 상병이 즉사하고 1명은 중상을 입었다.

계속되는 상황을 이날 도청에서 지켜보고 있던 당시 동아일보 金영택 기자의 증언을 들어보자. 1시 정각이었다. 도청 옥상에 네 방향으로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의 리듬이 장중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 다. 가사없이 곡만 흘러나온 것이다. 그러자 그 애국가에 맞춘 듯 따따 따, 따따따 요란한 총성이 일제히 터졌다

공수부대원들은 더욱이 미리 준비했고 미리 나눠준 실탄으로 사격자세를 취한 채 정확한 조준 사격을 해 계획된 발포였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도청앞 광장 주변건물 옥상에는 저격수가 배치됐고 저격병들은 사격명령에 의해 총을 쏘았다.

申佑植 당시 7공수여단장(63.당시 준장)은 21일 도청앞 발포때 사용한 실탄은 공수부대원들이 진압을 위해 시위현장에 출동할 때 이미 갖고 갔던 것이라고 증언했다(중앙일보 93년 5월 18일자).

당시 도청앞 진압에 참여했던 11공수 63대대 8지역대 소속 曺영준하 사(42.가명)는 사격능력이 뛰어난 저격수들이 시민군과의 대치선에서 엎드려쏴 자세로 사격을 했으며 일부는 옥상에 올라가 사격했다는 충격적인 증언도 했다(광주일보 95년 12월 5일자).

曺하사의 엎드려쏴 증언외에 많은 목격자들은 앉아쏴 자세를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89년 2월 22일 제28차 청문회, 黃원길.金영택 증언).

또 당시 전경으로 근무하며 全南도청안에 있었던 郭炯烈씨(38.현재 교사)는 지난 94년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집단발포가 시작된 이후 30 대의 공수단 장교가 하늘을 향해 공포탄을 쏘는 병사들에게 욕설을 하며 '조준사격을 하란 말이야'라고 소치리는 것을 보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날 집단 발포를 두고 군부 관계자나 현장 지휘관들은 자위권 발동 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鄭鎬溶 당시 특전사령관. 시민들이 먼저 무장을 해서 자위상 부득이 위협사격을 했다(88년 12월 7일 제16차 청문회).

安富雄 61대대장도 조준사격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많은 목격자들과 맨손으로 직접 시위에 참여했다 조준사격 을 받고 숨져간 희생자들은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가를 말 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자위권 발동시

①3회이상 정지를 명할 것
②가능한 한 위협발사를 하여 해산시킬것
③정황이 급박하더라도 생명에 지장이 없는 신체하부를 사격할 것이라는 계엄사 훈령조차 지키지 않아 누군가의 별도 지시에 따라 처음부터 의도된 사격을 하고 있지 않 았는가하는 징후를 뚜렷이 보여줬다.

또 육군교범에 나오는 자위권은 무장폭도들에 의한 조직적인 도시게 릴라의 공격이 있을때 발동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으나 집단발포 당시 도청앞은 게릴라전은 아니었다.

정작 공식적인 자위권발동 명령은 도청앞 발포가 있고 난 5시간 뒤 인 21일 오후 6시 7공수여단에 '방어를 위한 발포가능」이란 지시가 처음(특전사 전투상보)이었다는 사실은 특히 눈길을 끈다. 李熺性 계 엄사령관은 방송을 통해 이날 밤 7시30분 공식 천명한다.

80년 5월 光州의 발포는 무기도 없는 시민에게, 자위권 명령도 있 기 전에, 미리 준비한 실탄으로,조준사격에 의해 이뤄졌다.

제 61회 공수부대 逐次투입
 
   그 해 5월 17일 자정을 기해 濟州道를 포함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이 발령됨에 따라 육군의 중앙기동 예비대인 공수특전단이 光州에 출동, 배치된다. 공수부대의 光州투입은 `5.18 비극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해답을 준다.

계엄사령부는 5.17 조치 전후에 이미 공수부대를 차례로 光州에 투입시킬 계획을 수립했었다. 이른바 축차투입계획.

光州지역을 중심으로 배치된 공수특전단의 출동상황을 보면(88년 국회청문회에 제출된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18-80호) 光州출동후 각 대학을 점령한 제7공수여단에 뒤이어 18일 오후 3시에는 제11공수여단, 19일 오전 6시30분에는 제3공수여단(여단장.崔世昌준장)이 항공 또는 철도를 이용해 각각 `출차투입' 된다.

鄭雄 31사단장의 지난 7월 25일 12.12 및 5.18사건 24차 공판 증언을 들어보자.

-李鎭江변호사=5월 14일 오후 2시 전교사에서 열린 학생가두시위대책 합동회의에 申우식 7공수여단장도 참석했습니까?

▲鄭씨=그렇습니다.

-李변호사=7공수여단병력의 光州행은 결정돼 있었습니까?

▲鄭씨=5월 14일 이미 결정된 것으로 압니다. 충정작전계획에 따라서였습니다. 5월 15일 오전 10시께 全南大.朝鮮大에 2개대대 숙영지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李변호사=7공수부대 투입은 요청한 것 아닌가요?

▲鄭씨=공수부대 투입은 천재지변이나 부마사태처럼 반드시 시위현장 지휘관의 요청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가지 부마사태와 사북사태 두 번밖에 없었습니다. 병력을 요청한 적은 절대 없습니다

鄭雄 31사단장의 이같은 법정증언은 80년 光州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계엄사는 5.17조치 전인 15일 공수부대 2개 대대를 光州에 투입해 31사단장의 지휘하에 둔다고 31사단에 통보했었다. 이에 따라 鄭雄 사단장은 5월 17일 오후 2개 대대 병력 숙영을 위해 全大.朝大운동장에 각 12개씩의 천막을 미리 쳤다.

또 계엄사는 5.17계엄조치가 발효되기도 전인 17일 오후 全北 益山 金馬면에 주둔하고 있던 제7공수특전여단(여단장.申佑植준장) 제33.35대대에 光州이동을 명령했다. 이들은 79년 10월 18일 부마항쟁에 투입됐던 경력을 가진 부대였다.

金馬를 이날 밤 10시30분에 출발한 제7여단 33.35대대가 全南大에 도착한 것은 18일 새벽 1시10분께.

全.朝大에 주둔하고 있던 제33.35대대는 18일 오후 2시25분께 鄭雄 31사단장으로부터 "오후 4시부터 시위진압에 나서도록" 명령을 받는다.

그런데도 서울 동국대에 주둔하고 있던 제11여단(여단장.崔雄준장)에는 18일 새벽 光州로 내려가도록 예비명령이 내려져 있었고 이날 오후 3시쯤 鄭鎬溶 특전사령관은 11여단을 직접 찾아가 "지금 光州에 우리 7공수 애들이 고전하고 있다. 유언비어가 난무해 사태가 악화되고 있으니 임무수행을 잘하도록 하라"고 崔雄여단장에게 지시했다.

하지만 鄭사령관의 말과는 달리 光州에 파견된 7공수가 시내 시위진압에 나선 시각은 이날 오후 3시50분께(전투교육사령부 작전상황일지). 공수부대와 光州시위대가 충돌한 시각이 최소한 18일 오후 3시50분 이후인데도 鄭사령관은 光州 파견 계엄군이 소요진압작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증파를 지시한 것이다.

공수증파는 계속된다. 11공수가 시위진압에 나서기도 전인 19일 새벽 6시30분 3공수여단은 육군본부로부터 이동명령을 받는다. 즉 가장 먼저 光州에 투입된 7공수가 현지에서 시위진압에 나서기도 전에 11공수를, 11공수가 光州에 도착한 뒤 병력부족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3공수여단을 `축차투입'한 것이다.

金泳鎭의원은 지난 88년 12월 19일 국회청문회에서 이같은 상황을 두고 "11공수와 3공수의 순차적인 투입은 光州의 시위가 악화된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5.17쿠데타와 정치인의 구속으로 예상된 저항을 단숨에 무너뜨려 버리거나 혹은 일부러 저항을 불러 일으켜 `光州의 희생'을 발판삼아 권력을 거머쥐기 위해 사전음모된 철저한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鄭鎬溶사령관의 光州관련설도 바로 이처럼 공수 축차투입의 전면에서 맹활약한 그의 행적 때문이다. 그는 5.17조치를 취하자고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고 18일 3공수를 직접 찾아 光州파견을 지시했으며 光州 주둔지를 찾아 여단장들에게 상황보고를 듣고 설명을 한 장본인이다.

축차투입이 계획된 것이라면 신군부의 쿠데타인 12.12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군부 핵심세력은 국내 소요가 거의 없던 80년 2월 18일 소위 `忠正작전'을 실시할 것을 전군에 명한다.

李熺性 계엄사령관은 88년 12월 9일 국회청문회에서 鄭昌和의원(민정)의 "3월까지 충정훈련 완료배경이 뭔가"라는 질의에 "80년초는 정치권력이 미약한 시기였고 장기간의 유신체제하에서 국민들이 억압을 당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평불만이 봄이 되면 분출될 시기로 보고, 그 이전에 폭동진압훈련을 완료해야될 것으로 판단했다"고 답변했다.

신군부는 내각의 비상계엄전국확대결의 이전부터 계엄군, 특히 공수부대의 사전출동조치를 내렸다. `특전사 전투상보'에 따르면 80년 5월 3일 육본작전명령 12-80호에 의거, 9공수여단을 수도군단에 배속시키고, 6일에도 11공수와 13공수여단을 특전사령부 및 1여단지역으로 이동시켰다. 5.18을 4일 앞둔 14일에는 육본에서 李계엄사령관과 全斗煥보안사령관, 盧泰愚수경사령관 등 실세들이 회동, 육본 작전명령 0-203호에 의거, 수경사에 4개 공수여단, 2군에 1개공수여단의 작전통제권을 이양준비하도록 지시했으며 15일에는 20사단(사단장.朴俊炳소장)을 중부전선에서 서울로 이동시키고 공수여단도 각 기지에서 서울로 옮기도록 하는 등 군사적 조치를 내렸다.

14일 오후 6시에는 전교사885수송중대에 金馬주둔 7공수 이동을 위한 2.51t트럭을 보내도록 하는 차량지원요청이 있었다(육본계엄상황일지), 2개대대 7백50명 병력이었다. 공수 光州투입이 최고 실제투입 1주일 이전에 세워졌음을 짐작케하는 대목.

5월 14일 光州에는 비가 내렸고 시국성토대회가 평화롭게 치러졌다. 그럼에도 계엄군의 光州투입 충정작전은 진행되고 있었다.

제 62회 유언비어 / 시민흥분 부추겨 유혈진압 촉발
 
   항쟁 발발 나흘째가 되던 날인 1980년 5월 21일 이희성 계엄사령관 은 이런 對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지금 光州지역에서 법을 어기고 난동을 부리는 폭도는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략) 상당수의 타지역 불순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사태 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해 光州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 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방화.장비 및 재산 약탈행위를 통해 계 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해 이같은 사태 가 발생했습니다

담화문은 이어 폭도들의 행패가 가열되고 있어 부득이 소탕하지 않을 수 없다고 극한적인 용어를 써 공수부대의 폭력.과격.강경진압과 살상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불순분자들이 악성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이에 光州시민들 이 흥분하면서 과격 시위로 이어졌고 사태는 악화됐으며 결국 군은 강경진압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다.

또 1985년 국방부가 발행한 '광주사태의 실상'이라는 책자를 보자. 유언비어의 유포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10대들의 말초신경 자극에서부터 중년층의 격분, 그리고 지역감정을 자극한 對계엄군 투쟁의 식 유발 등으로 연결되는 계획적인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유언비어는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광주사태 후 사망자들에 대한 검 시 결과에 의하면 18일 사망자는 없었으며 더구나 총사망자 1백91명 중에는 칼에 찔려 사망한 여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더구나 대한민국 군부대 내에 어느 특정지역 출신자들로만 조직된 부대는 존재하지도 않고 또한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상의 사 실들을 종합해 보면 당시 유포되었던 유언비어는 학원소요를 배후 조 종한 자들 중에 군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도 없는(군미필자?) 불순분자 가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유포한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서는 유언비어의 유포를 학원소요를 배후 조종한 자, 좀 더 구체적으로 해석하자면 학생들이 조작했다며 책임을 덮어씌우고 있다. 당시 흘러 다녔던 유언비어를 살펴보자.

5월 18일부터 광주에는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러 왔다, 계엄군이 여대생의 유방을 칼로 도려냈다, 임산부를 대검 으로 찔러 태아를 꺼내 길가에 뿌렸다는 등의 군의 강경진압과 지역 감정에 관한 소문이 퍼지면서 시민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또 "계엄군에게 환각제를 먹였다" "독한 술을 먹였다" "물통에는 술이 들어있다"는 등의 풍문에서부터 "계엄군이 전남대생 3명을 학살,도청앞에 전시한 것을 본 전남대 총장이 실신, 실려갔는데 자살설이 유력하다" "광주사태로 죽은 민간인이 2천여명에 이르며 하수구로 밀 어넣거나 쓰레기차.헬기로 싣고가 화장했다는 등의 다양한 유언비어 까지 파다하게 퍼졌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거나 "광주사람 70%는 없애도 좋다"는 등의 루머는 진압작전에 투입된 부대원 중에 상당한 수 가 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썼던 데서 나온 오해였을 것이다.

18일 오후 금남로에서 시위를 진압하면서 경상도 소리로 떠들며 소리지르는 병사들이 있어서 경상도 군인으로만 착각한 줄 알고 있다. 하지만 절대로 경상도로만 골라서 조직된 군대는 아니다. 당시 광주 에 투입됐던 한 공수부대 하사관이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尹재걸)라는 책의 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 부분에 밝힌 진술이다.

환각제나 술을 먹였는지에 대해서도 공식 확인된 바는 없으나 대검으 로 찌르고 몽둥이를 휘두르는,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르자 시민들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역시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11공수 63대대 출신 曺영준하사(가명)는 당시 진압에 참여했던 공수부대원들은 거의 매일 잠을 자지 못한 채 작전을 펼쳐 피곤한 상태여서 대부분 눈이 벌겋게 충혈돼 있었을 뿐 이라고 루머를 부인했다.

그러나 여대생의 유방을 칼로 도려냈다는 것은 광주지검이 5.18관련 사망자 1백93명중 군인을 뺀 1백65명을 검시, 작성한 검시조서를 보 면 사실로 드러난다. 검시조서는 당시 19세였던 孫玉禮양(광주시 西구 雙村동)이 두발의 관통총상외에 왼쪽 젖가슴이 칼 등에 찔렸다는 뜻인 좌유방부 刺創으로 숨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대검에 가슴을 찔리고도 살아난 崔美子씨(당시 19세.光州시 西 구 花亭동)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19일 오후 7시30분께 전남대병원 근처에서 계엄군에 쫓겨 인근 골목길로 도망쳤다가 한 군인이 대검 을 들이댄 후 기절했다는 것이 崔씨의 말이다.

임산부관련 소문도 임신 7개월이었던 崔美愛씨(당시 25세)가 교사인 남편을 기다리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사실에서 결코 완전 허구만은 아니었음이 증명됐다.

그렇다면 과연 악성 유언비어는 누가 유포했고, 왜 유포했을까?
당시 군부의 주장대로 과연 불순인물이나 고정간첩들이 유포했을까?
아니면 시민들었을까.

분명한 것은 당시 시위군중들이나 항쟁지도부 어디에서도 '간첩'을 잡 았다는 근거는 없다.

여기에서 군부에 의한 계획된 유언비어 유포설이 등장한다. 계엄사나 이후 5공정권은 사태의 악화를 노리고 지역감정이나 시민들의 흥분을 유도하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퍼뜨리고 이에 흥분한 시민들을 역이 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5월 18일 오후 3시 서울 동국대에 주둔해 있는 11공수여단을 찾아간 鄭鎬溶 특전사령관은 光州에 유언비어가 횡행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시간에는 공수부대가 아직 진압작전에 투입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공수부대가 시위진압을 못하고 밀리는 상태도 아니었고 유언비어가 나돌 아무런 이유가 없었는데도 이미 유언 비어가 퍼져있는 것처럼 말한 것이다.

24일밤 도청안 독침사건이나 진압후인 5월 31일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光州사태의 전모에 나오는 계엄군은 26일밤 시내에 은밀히 폭도로 가장, 침투시켰던 요원과 매수했던 부화뇌동자로 하여금 도청 내 폭 발물 신관을 제거라는 부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오히려 군이 조직적 으로 루머를 퍼뜨렸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물론 사태를 악화시켜 강 경진압의 빌미를 잡을 계산에서다.

반면 시민들은 대검과 몽둥이가 난무하는, 6.25보다 더한 참상을 보고 이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다소 과장한 부분이 있었으나 군은 오히 려 이를 악용했던 것이다.

제 63회 고립후 초토화 노린 작전상 후퇴 / 계엄군 도청철수
 
   한 바탕 살육전쟁을 치른 공수부대는 21일 일제히 외곽철수명령을 받는다.
오후 4시께 全南大에 주둔하고 있던 3공수여단은 31사단병력과 교대 해 교도소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특전사 전투상보' "全南大 앞 시위대와 대치중 오후 4시에 교도소로 이동명령을 접수하고 철수 준비. 철수준비가 완료되자 전차량은 출발 대기선에 집결. 본부 및 1개대대는 후문 배치. 1개대대는 차량의 엄호 를 위해 선두에서 이동하는 계획을 수립. 오후 4시30분 철수준비가 완 료되자 선두부대 차량의 출발과 동시에 정문지역에서 폭도들의 공격 을 받고 공격하여 2㎞ 지점까지 퇴각시키고 후문으로 이동하여 교도소 로 철수 완료. 선두인 15대대는 폭도의 사격으로 1명 경상" 교도소에는 오후 7시 20분 도착한다.

도청앞에 진주해 있던 7공수부대도 비슷한 시각인 오후 4시50분 朝鮮 大로 철수, 대열을 정비, 지원동으로 빠진다. 11공수 역시 朝鮮大와 학동-지원동을 거쳐 주남마을로 철수한다.

이것이 계엄군의 이른바 외곽철수작전 이다. 이로써 光州항쟁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光州는 이른바 '해방기간' 을 맞고 계엄군은 외곽을 완전 봉쇄, 외부와의 차단으로 光州를 고립시킨뒤 27일 완전소탕 을 노리는 준비기간을 갖는 셈이다.

光州는 흥분했고 시민들은 승리의 환호를 올렸으며 '해방' 을 맞는다. 대한민국 최고의 정예부대, 대검과 M16을 무차별적으로 난사하던 그 무도한 공수부대가 철수를 한 것이다. 텅 빈 도청과 도청앞 광장을 차 지하고 光州만의 공화국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이같은 환희도 잠시, 계엄군은 27일 재진입을 착실히 준비하 고 있었다. 철수 이후 木浦.潭陽.光山.和順.全北 방면 등 光州로 드나드 는 모든 관문은 봉쇄된다.

그렇다면 계엄군은 왜 갑자기 도청에서 철수했을까?

시민들의 거센 저항으로 세의 불리함을 느꼈을까?

시민들의 무장 때문이었을까?

소문대로 全南大병원 옥상에 설치된 LMG의 위력과 그에 따른 피해방지를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발포로 시민들을 자극해놓고 사태악화.치안부재 라는 명분을 얻은 뒤 완전소탕을 노린 철저한 작전때문이었을까?

여기서 잠시 당시 정황을 더듬어보자. 계엄군의 외곽철수가 최초로 계획된 시점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光州역앞에서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하는 시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실시해 3명을 사살한 20일 밤이 지난 시각, 21일 새벽 4시30분부터 5 시45분까지 1시간여동안 육군본부에서는 신군부 핵심이 참여한 가운데 회의가 열린다.(지난 5월 6일 12.12 및 5.18사건 7차공판에서 李熺性.황 영시 등의 피고인신문 진술)

이날 회의에는 周永福 국방부장관, 李熺性 계엄사령관, 黃永時 육 군참모차장 등이 참가했다.

李熺性의 증언.
-무슨 회의였나?
*崔대통령에게 자위권 발동을 건의하기 위해서였다.
-20일밤 사격 때문이었나?
*아니다.
-평화적 해결은 논의 안했나?
*모르겠다.
분명히 진술은 않았지만 이날 신군부측이 새벽에 회의를 할 만큼 시 급한 현안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 그날 오후 2시 李熺性 계엄사령관과 각군 참모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국방부 장관 주재회의에서 계엄군 외곽철수가 최종 결정된다. 20사단 1개연대 추가투입도 여기서 결정됐다.

새벽 비상 수뇌부회의에서 대강을 결정하고 오후 2시 각군 지휘관들 에게 통보하는 형식이다. 결국 계엄군의 철수계획은 최소한 光州역앞 발포 이후인 21일 새벽 육군본부회의석상이 가장 유력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 하나가 있다. 특전사령부가 항쟁후인 80년 6월 30일 光州지역 소요사태 진압작전 (총괄)의 6.석과 교훈 편을 보자.

작전 실시면에서의 분석을 통해 특전사는 *(6)작전계획과 불일치된 선무활동(도청군중에게 12시부터 철방송을 했는데) 진짜 철수명령 17시 이후로 (군중 자극)이라고 적고 있다. 다시 말해 실제 철수시각이 오후 5시 이후로 이미 알려져 있었고 어떤 경로였는지는 모르나 시민들에게 그같은 상황이 알려졌다는 이야기다.

전대병원 옥상에 설치된 기관총이나 학생들 또는 시민이 무장한 데에 겁을 먹은 것일까? 당시 군은 무장폭도 들과의 충돌로 시민의 피해가 클것으로 여기고 일시 후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개소대만 錦南로에 풀어도 막혔던 길이 뚫릴 정도의 실력을 가진 계엄군이 시민들을 두려워했을까하는 의문이 나온다. 5천명이 넘 는 막강 공수부대요 시외곽에는 20사단과 31사단, 전교사병력이 지키 고 있었다.

카빈이나 M1 몇정과 의대 옥상의 LMG 2대가 위협적이었다는 것은 납득키 어려운 상황이다. 맘만 먹으면 특공조를 보내 소탕, 제거할 수 있는 기관총 2대였다.

당시 사태를 지켜봤던 동아일보 金영택기자는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혹시 후퇴한 후에 닥쳐올 엄청난 혼란을 예상한 어떤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는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내가 갖는 의문인 것이다.

만약 이때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하지 않고 타협과 양보로 수습되었다면 27일 새벽의 진압작전에서 발생한 많은 인명피해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 아 닌가. 당시 계엄군의 철수는 이 진압작전을 전제로 한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어느 정도의 인명피해를 각오하고 철수했다고 볼 수 있 다" (실록 5·18 光州민중항쟁).

21일 오후 신군부측은 또 다른 결정 하나를 내린다. 신군부측은 오후 4시를 기해 鄭雄 31사단장을 작전계통에서 완전 배제하고 11개 부처 장관을 경질하는 개각을 발표하면서 尹興禎 전교사령관을 전격 예편시 키고 전교사령관에 蘇俊烈소장을 발령한 것.

그리고 나서 그날 밤 9시 서울에 있던 20사단의 나머지 1개연대인 60 연대를 光州에 증파한다. 당시 군이 발표한 무장폭도들과의 충돌로 시민의 피해가 클 것이 예상됐다면 병력을 철수해야 할 일이었다. 고립후 초토화'를 뒷받침하는 증거다.

재진입을 위한 명분쌓기용 이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21일 오후부터 언론에게 光州보도를 허용한 것이다. '폭도들이 난무하는 光州를 알리고 진압의 명분을 찾자는 속셈이다.

또 신군부가 21일 23일 이후로 폭도소탕작전을 25일 새벽이후에 의명개시로 유예기간을 둔 것은 美정부와의 협상시간 벌기라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도청철수는 도망이었을까, 계획된 작전상 후퇴였을까.

제 64회 헬機 기총소사
 
   헬기 기총소사는 있었는가, 없었는가.

光州 5.18민중항쟁을 이야기할 때 꼭 거론되는 쟁점의 하나가 바로 헬기 기총소사 여부다.

헬기기총소사 문제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두 차례의 검찰수사등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확인되지 않은 `쟁점'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당시 출동했던 군이나 신군부세력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헬기에서 사격하는 장면을 보았다는 목격자들이 증언과 헬기 기총소사를 뒷받침하는 군의 각종 자료 등으로 미뤄볼 때 `헬기 기총소사'가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은 아니다"는 데 이 문제의 중요성이 있다.

헬기기총소사에 대해 95년 7월 18일 발표한 검찰의 1차 수사결과 발표문은 이렇다.

"5월 21일 2군사령부가 전교사에 수송용 헬기인 UH-1H 10대와 무장헬기 AH-1J(일명 코브라) 4대를 지원했고 사태 기간중 헬기가 48시간 무력시위를 하였다는 기재외에 실제 공중사격 실시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재를 발견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과연 헬기가 출동은 했으나 사격은 없었을까.

우선 80년 직후 전교사에 의해 작성돼 지난 89년 국방부가 국회 光州특위에 제출한 `光州소요사태분석'의 항공관련부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시위진압에 동원된 헬기가 무장을 했었고 다량의 탄약을 사용한 것으로 돼있어 군 기록에 의해서도 헬기 기총사격 사실이 뒷받침되고 있다.

이 분석집은 항공작전의 문제점으로 `불확실한 표적에 공중사격요청'을 지적으로 있으며 세부내용으로 ▲표적지시의 불확실▲요청표적 위치에 아군병력 배치▲공중사격 감행시 피해확대 우려등의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헬기가 상부로부터 사격지시를 받았고 최소한 사격을 할 의사가 있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신군부측은 물론 검찰까지도 "전교사 교훈집의 `유류 및 탄약의 높은 소모율'이라고 기재된 것은 교훈집 작성시 헬기 사용의 일반적 교리상의 문제를 육군 항공 운용교범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적시해 놓은 것이고 실제 다른 사례에 비해 光州지역에서 유류나 탄약을 많이 소모했다는 것이 아닌 점등에 비추어 헬기 장착무기에 의한 사격으로 인명피해를 야기한 사실은 없었다"(검찰 1차수사결과 발표문중에서)는 주장을 펴고 있다.

"탄약의 높은 소모는 없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작전 기간중(7일) 탄약을 1인당 평균 59발 소모했다"는 교훈집 기록이나 "항공대에 20mm 발칸포 탄약 1천5백발 지급"이라는 충정작전상보 등의 기록과 상치된다.

헬기사격이 있었음을 반증하는 또 다른 자료.

95년 7월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문 1백16쪽을 보면 "5월 22일 오전 10시45분 31항공단 103항공대로부터 AH-1J(코브라)헬기 2대와 500MD헬기 5대가 도착하여 전교사의 작전통제에 들어갔으며 黃永時 육군참모차장, 金在明 육본 작전참모부장, 李相勳 육본 작전처장은 金舜鉉 전교사 전투발전부장에서 AH-1J헬기로 조선대 뒷산에 위협사격을 하여 겁을 주어 시위대를 해산시키라고 지시하였으나 항공단의 반대의견으로 실시하지 아니하였음"이라고 적고 있다.

당시 얼마나 많은 헬기가 출동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전교사 교훈집에 따르면 "5.18당시 5월 21일부터 29일까지 光州일대에는 항공 제1여단 31항공단과 61항공단 군인 1백8명이 500MD 12대, UH-1H 11대 등 모두 다섯 기종에 31대의 헬기가 동원"된 것으로 돼있다. 병력공수와 선무활동, 무력시위를 위해 운항한 시간만도 무려 8백27시간으로 적고 있다.

이번에는 당시 헬기사격을 보았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80년 당시 27세의 승려였던 李光榮씨(43.부식납품업.光州시 東구 山水동). "월산동 로터리부근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어요. 그래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더니 헬기에서 불을 뿜는 것이 순간적으로 보였지요. 동시에 우리가 탔던 지프에 총격이 가해졌습니다" 李씨가 헬기기총소사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시각은 5월 21일 오후 1시부터 2시사이. 자신을 비롯 6명이 군용지프를 타고 도청을 향하던 중이었다는 李씨는 월산동 로터리부근에서 갑자기 나타난 헬기에 당했다고 주장했다.

李씨가 주장하는 5월 21일 오후 1시부터 2시사이라는 시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목격자들이 주장하는 대부분의 시각이 이 무렵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당시 鷄林동성당 신부였던 曺비오신부(현 光州봉선동성당 주임신부)의 증언은 李씨가 증언한 기총소사 시각과 위치를 비교할 때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21일 오후 2시께 금남로의 상황을 파악키 위해 호남동 성당을 막 나서는데 光州시내 사직공원 상공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어요. 처음에는 `드드득' 불빛이 번득이며 연달아 세 번 지축을 울렸어요" 호남동 성당쪽에서 바라본 사직공원쪽은 李씨가 주장한 월산동 로터리부근과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다. 지난 89년 MBC가 방송한 `어머니의 노래'에서 이 같은 증언을 했다가 당시 무장헬기를 지위한 조종사들에 의해 고소를 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던 曺신부는 "본 것을 말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95년 4월 光州를 방문, 헬기기총소사 목격을 증언한 미국인 피터슨목사의 증언을 보자. 당시 선교사로 있던 피터슨 목사는 자신의 저서 `5.18광주사태'라는 체험기를 통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오후 3시15분쯤 헬기가 거리에 있는 군중에게 총을 쏘기 시작한 이후 사상자들이 병원에 매우 급작스럽게 몰려들기 시작했고 병원에 접수된 첫 사망자는 오후 3시30분쯤에 들어온 중학교 여학생이었다"고 밝혀 헬기사격을 주장하며 자신이 찍은 당시 헬기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95년 5월 천주교 光州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공개리에 5.18당시 헬기기총소사 피해자나 목격자를 찾았는데 10여명이 증언해 왔다. 이 가운데 光州시 南구 眞月동에 사는 徐모씨(여.43)는 "당시 光州大앞에서 사진관을 경영하고 살았다. 21일 오후쯤 방안에 있다가 많은 총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었다. 한참 뒤 남편이 들어와 모두 살아서 다행이라고 해 정신을 차려보니 지붕 천장에 구멍이 뚫려 기왓장 틈으로 하늘이 보였고 벽에도 수도 없는 총탄이 박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지금까지 증언들을 종합해 볼 때 ▲5월 21일 오후 3시를 전후한 시각에▲주로 도청쪽에서 光州공원이나 사직공원, 또는 월산동 쪽으로 비행하며 총을 쏘았다는 점 등은 공통적이다.

풀리지 않는 쟁점 `헬기기총소사'는 어떻게 풀릴까.

제 65회 光州를 차단하라

    5월21일 오후 4시를 전후해 계엄군이 외곽으로 철수하면서 `光州'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중단되고 시민들은 해방공간을 갖게 된다. 반면 계엄군은 `光州 완전고립'과 `폭도 섬멸'을 위한 또 다른 준비를 하는 출발점이 된다.

항쟁후인 80년 6월 30일 특전사령부가 작성한 `光州소요사태 진압작전 전투상보'는 당시 작전 개요에 대해 이렇게 구분하고 있다. `2군 계획'이라고 밝힌 작전계획은 ▲1단계:학교점령, 소요군중 선무 및 해산, 국가보안목표방호▲2단계:폭도고립 및 자단을 위하여 시가지 외곽 봉쇄▲3단계:전 특전여단 병력 K-57(光州비행장)기지로 철수 집결, 기동타격대 임무 수행▲4단계:폭도 근거지 및 주요 보안목표에 대한 기습 특공작전 실시, 보병에게 인계후 철수 등으로 기록했다. 물론 이 계획은 처음부터 이렇게 나눠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고 여러 조건들에 따라 변경하면서 작전 최종결과 구분한 것이었겠지만 어쨌건 21일 군의 외곽철수는 5.18기간 동안의 사태전개에 한 분수령이 된다.

시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완전진압에 실패한 계엄군은 21일 오후 `무슨 이유에서인지' 외곽으로 일제히 철수한다. 당시 光州에 있던 병력은 3.7.11공수 3개여단 10개대대와 20사단 병력 등 약 2만여명이었다.

신군부는 21일 오전 李熺性계엄사령관 주재로 대책회의를 갖고 게엄군 외곽철수를 확정짓는다. 이어 그날 오후 3시 35분 李계엄사령관 전교사에 `사태의 전국확산 방지, 선무활동으로 시민.불순분자 세력을 분리, 지휘체계의 일원화로 사기진작, 교도소는 끝까지 몸으로 방어, 光州 외부 도로망 차단, 光州시의 지역 자제 촉구 선무활동 전개'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지시한다. 곧이어 4시부로 그 동안 형식적으로 31사단장에 배속돼 있던 3개공수여단의 지휘권을 전교사령관에 넘기는 한편 전교사령관을 尹興禎중장에서 蘇俊烈소장으로 전격 교체한다.

이같은 과정을 두고 `과잉진압으로 시민 흥분 유도-외곽차단으로 외부전파 차단-무정부 상대 야기후 명분 조성-재진입후 완전 진압'이라는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그때부터 光州를 외부와 완전히 차단시키는 봉쇄작전에 돌입한다. 光州는 고립무원이 되고 길목을 차단하고 있던 계엄군은 참상을 밖으로 알리기 위해 외곽으로 나오거나 외지에서 멋모르고 들어오던 시민과 양민들에게 무참한 총알세례를 퍼붓는다.

공수부대 3.7.11여단과 20사단.31사단 병력은 光州로 통하는 주요 7개도로를 봉쇄한다. 부대별 배치를 보자.

▲31사단=오치(1개중대)▲3공수여단=교도소(順天방향) 1개여단은 潭陽.輿水.順天방면으로 통하는 문화동▲7.11공수여단=所台동(和順)방향 1개여단은 池元동 주남마을 부근 ▲20사단=극락교(光州-松汀간 도로) 白雲동(光州-木浦간 도로) 톨게이트(光州-全州) 통합병원 입구 화정동 등엔 각각 1개 대대씩, 7공수의 경우 朝鮮大를 거쳐 소태동에 도착한 뒤 너릿재 터널 봉쇄임무를 수행한다. 3공수도 全南大서 光州교도소로 철수, 31사단과 임무교대를 한다. 그날 오전 10시에 光州에 도착해 있던 20사단은 61연대가 光州-木浦간 도로를, 62연대는 통합병원과 송정리 비행장에 배치됐으며 光州-全州간 톨게이트와 비아 송신소를 장악한다.

이렇게 해서 이날 밤 늦게 또는 22일 새벽부터 외곽봉쇄임무에 들어간 계엄군은 그야말로 철저한 봉쇄로 시경계를 넘나드는 무고한 양민학살전을 벌인다.

당시 21일의 무차별 집단발포를 경험한 시민들은 이같은 학살을 외부에 알리거나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지방으로 지방으로 내닫는다. 또 21일 밤부터 22일 새벽 사이에는 全南일원으로 진출했던 무장 시위대가 羅州.和順 등에서 다시 光州로 진입하기 위해 이들 도로를 자주 통행하게 된다. 그런데 계엄군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이들과의 충돌은 뻔한 일. 계엄군은 눈에 보이는 대로 무차별 사격으로 통행을 저지한다. 시위대 뿐만아니라 일반차량과 인근 거주 주민들에게 조차 총탄을 퍼부어 무고한 양민들이 살해된다. 그날(21일) 오후 계엄사령관이 발표한 자위권보유천명 지시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계엄군이 21일 밤부터 자행한 양민학살의 참상을 보자.

黃남열씨의 증언이다. "22일 새벽 5시께 光州에 있던 아들을 데리고 木浦로 가던 길이었다. 송암도 공단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주둔해 있던 계엄군들이 검문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빨리 木浦로 가야 되는 상황을 얘기하여 그곳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남평다리 못미친 곳에 있는 야산에 매목중이던 계엄군이 '정지'라고 외치자 즉시 차를 멈췄다. 차가 멈추자마자 30여명의 계엄군이 4-5분에 걸쳐 차를 향해 집중사격을 했다. 그때 운전사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우리 가족 3명은 온몸에 부상을 당해 통합병원으로 옮겨졌다"(풀빛刊.光州 5월민중항쟁사료전집) 잘 알려지지 않은 양민학살사건도 있다.

22일 새벽 4시40분께 光州시 北구 光州교도소 뒤편 호남고속도로상. 전날 밤 11시께 慶南 진주를 출발해 홍도관광길에 나선 경남5가 3077 관광버스에 타고 있던 朴경구씨(당시 52.경남 양산군 기장면 죽성리 234)와 같은 마을에 사는 沈석수씨(당시 66)등 죽성리 주민 30여명은 청천병력과 같은 일을 당한다.

총상 후유증으로 82년 숨진 沈씨 부인 李옥분씨(71)의 증언. 들뜬 기분으로 고속도로를 지나 木浦로 가기 위해 시내로 접어든 일행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문화동 주유소 부근쯤 왔더니 전복된 버스가 불타고 있고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예감이 이상했던지 버스기사는 차를 돌려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했고 교도소 뒤편 미루나무가 많은 부근에 이르자 느닷없이 콩볶는 듯한 총알세례가 쏟아졌다. 급히 차를 멈췄지만 사격은 계속됐다. 朴씨가 총에 가슴을 맞아 쓰러졌다. 사격이 계속되자 안되겠다 싶어 하얀색 의자 커버를 뜯어 창밖으로 흔들었더니 사격이 멈추고 M16을 든 대위 1명과 중사 1명.사병 1명이 다가왔다. 군인들은 사정도 물어보지 않고 다짜고짜 빨리 외곽으로 나가라고 했고 놀란 일행은 일단 潭陽으로 와 응급치료를 했으나 총상이 심해 南原도립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고 진주로 옮겼다.

이들 외에도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에 의해 무참히 숨져간 사례는 많다. 특히 교도소앞 金成洙씨 일가 총격사건, 3공수여단의 潭陽 창평거주 임은택.고규석씨 총격사건, 20사단 화정동 주택가, 양민학살사건, 통합병원앞 총격사건, 주남마을 양민학살사건 등 참상은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다.

제 66회 정권찬탈 걸림돌 제거 혈안 / 광주초토화계획
 
   폭도들이 날뛰는 무법천지의 땅 光州가 신군부의 눈엔 가시였다. 다른 지역은 모두 조용한데 유독 계엄해제와 군부퇴진을 요구하며 온 시 민이 일어나 항거하는 光州가 지독하게도 미웠다.
오죽했으면 전라도 싹쓸이발언까지 나왔을까.
5월22일 박충훈 국무총리서리가 광주를 방문했다. 朴총리는 지역 기 관장, 군장성등과 함께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은밀하게 光州 를 찾았던 鄭鎬溶특전사령관도 참석했다.

당시 이 간담회에 참석했던 鄭雄 당시 31사단장이 지난 7월25일 서울 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12.12및 5.18사건 제24차 공판에서 증언한 내용에 따르면 鄭사령관은 이 자리에서 전라도를 싹 쓸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한 鄭鎬溶의 반박. 저는 별도로 내려갔습니다. 그때는 제가 늦게 가서 그런지 몰라도 간담회 하는데를 들어가 보지도 못했고, 또 그 후에도 누가 간담회를 했다는 얘기도 못들었습니다.

다만 총리께서 오셨으니까 그동안 돌아간 상황들을 보고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도 아시다시피 전투병과 교육사령부는 光州에 있습니다. 거기에 근무하는 군인들은 대부분 光州 또는 全南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앞에서 '전라도 싹쓸어라' '光州놈들 싹 죽여라'는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권찬탈을 눈앞에 둔 신군부의 이같은 절박한 심정은 곳곳에 나타난다.

지난달 15일 역시 같은 법정에서 열린 5.18사건 22차공판.
金基錫 당시 전교사 부사령관의 이날 증인신문 내용을 들어보자. 金 前부사령관은 이날 전차를 동원해서라도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하라 는 지시를 수차례 받았으나 거절했다고 밝혔다.

-검사=黃永時 계엄부사령관이자 육군참모차장이 5월20일부터 26일 사이에 강경진압을 지시하는 전화를 3-4차례 했다는데 맞습니까.
*金=黃차장이 "대화로는 해결이 안된다. 강경한 작전을 실시하라"고 전화를 해왔습니다. 黃차장은 23일 낮 12시30분께 장례식건 등으로 보고할 사항이 있어 내가 전화를 하자 코브라, 500MD등으로 때리라는 지시를 했고 그것 을 메모로 남겼습니다 (메모지 증거로 제출). 전화내용은 이렇습니다. '코브라(무장헬기)로 (시민군이 탈취해 몰고 다니는)APC를 때려라. 시 위대의 차량은 500MD로 공격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검사=金在明 육군참모부장이 강력하게 진압않느냐고 질책한 적이 있었다는데....
*金=시위진압이 미온적이라는 질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시위진압 을 위해서는 탱크라도 동원해서 무차별로 포격해 제압하라는 지시였습 니다.

金 前부사령관은 이같은 지시를 거절했다고 밝혔으나 실제로 5월27일 계엄군 재진입시 전차는 光州시내에 나타났다. 이날 金 前부사령관에 이어 증언대에 선 李龜浩 당시 육군기갑학교장 의 증언은 더욱 생생하다.

李씨는 이날 법정에서 "5월21일 오후 4시께 黃永時 차장이 직접 전화 를 걸어 나 참모차장인데 光州가 폭도들에 의해 점령당했으니 기갑학교에 있는 전차 2개대대를 동원, 光州를 공격하라 고 했다.

黃차장은 이어 4.19때처럼 전차를 빼앗기면 안되니까 모든 전차에 철조망을 감고 화염병 투척에 대비해 전차문을 모두 닫은 뒤 공격하라'며 세부적 인 작전지시까지 내렸다고 증언했다.

李씨는 또 정식지휘계통을 통해 지시해 달라고 말하고 시민군들이 光州에 전차가 들어오면 길에 드러눕는다는 정보가 있고 북괴군도 아닌 光州시민들을 향해 포를 쏠수는 없다고 거부하자 이 자식아 전차포를 쏘면서 들어가면 되잖아'라고 역정을 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黃永時피고인은 법정에서 단호히 없었던 일이라고 부인했다. 이와 관련 金在明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12.12 및 5.18사건 24차 공판에 나온 金씨는 金基錫 부사령관에게 黃차장이 전차동원지시를 했다는데 알고 있습니까"라는 신문에 "한 지역 이 모두 날아가는 무기다. 만약 했다면 위력시위용으로 하라는 소리였 을 것이다. 아마 '왜 사병들만 고생시키느냐. 머리를 쓰라'는 뜻이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사실상 강경진압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총으로 쏘고 대검을 휘둘렀으 며 몽둥이로 마구 구타한 정도의 잔학상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같은 극악무도한,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들이 국민들에게는 도저 히 할수 없는 짓을 마치 '대간첩 작전하듯' 서슴없이 저지른 공수부대 의 만행은 대부분 드러나 있다.

논란이 되고 있지만 특히 헬기 기총소사도 신군부의 光州초토화 작전 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500MD헬기에는 M60이, 코브라헬기에 는 20㎜발칸포가 기본으로 장착돼 있어 언제라도 사격이 가능한 상태 였으며 그같은 헬기는 적어도 당시 光州상공을 누비고 다녔다.

이미 수명의 증언자가 나왔지만 화염방사기 사용도 대량 살상무기의 하나다. 당시 방위병으로 근무하다 계엄군에 끌려갔던 崔모씨(40.光州 시 北구 東雲동).

5월21일 오후로 기억됩니다. 이날 오후 全南大 정문부근에 나갔습니다. 그때 공수부대원들이 젊은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구타하고 마구잡이로 연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다 3~4명의 군 인들이 저를 향해 달려와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쯤 달리다 얼굴 에 뜨거운 기를 느끼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崔씨는 자신의 얼굴에 화상을 입은 것은 화염방사기 사용때문이라고 말했다. 光州엔 대량인명살상무기인 크레모아.수류탄까지 동원됐다.

24일 오후 1시30분께 11공수여단이 주남마을에서 光州비행장으로 이동중 보병학 교 교도대가 이들을 시민군으로 오인, 松岩동 3거리에서 선두의 APC 에 90㎜무반동총 4발을 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는 한편 크레모아를 터뜨렸다.

충정작전 상보에 보면 3공수여단은 22일 크레모아 1백80개 를 지급받았으며 7공수여단도 23일 50개를, 야공단은 25일 20개를 지 급받은 것으로 돼있다.

한꺼번에 수십명 이상을 동시에 사망케 할 수 있는 크레모아가 만약 일반 시민들에게 지급받은대로, 또 오인사격 대상이 시민이었다면 어 떠했을까.

이밖에도 光州를 끝장내겠다는 작전계획이 있었다는 증거는 또 있다. 22일밤 글라이스틴이 백악관에 보낸 전문. 만약 그 혼란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평화적인 방법이 먹혀들지 않을때를 대비해 한국정부는 全 南지역에 보병 제20사단과 '공군', 그리고 특수부대를 비상대기 시키고 있다 이른바 공군 폭격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다.

당시 선교사로 있던 피터슨목사는 이런 증언도 한다. 나는 공군기지에 있는 데이브 힐과 연락을 취했다. 그와 대화하는 중에 遣愿다 시 한번 우리에게 떠날 것을 주장했다.... 후에 나는 그로부터 한국공군 이 공격의 일환으로 도시에 폭탄을 떨어뜨릴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들 었다(피터슨著, '5.18광주사태').

제 67회 교도소를 사수하라
 
   시민군들은 2천7백여명의 복역수들을 탈출시켜 폭동을 일으키기 위해 교도소를 습격했을까.

계엄군측은 지금까지 줄기차게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시민군측은 "단지 교도소 앞을 지나는 시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해와 일방적으로 당했을 뿐"이라고 팽팽히 맞서고 있다.

국방부가 지난 85년 7월 발표한 '光州사태의 실상'의 교도소 습격부분을 보자. "21일 오후부터 22일 새벽까지 5차례 시민군이 장갑차 2대와 차량 9대등을 동원해 공격, 8명의 사망자와 70여명의 부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89년 1월 국회 光州청문회에서 鄭祥容의원의 주장. "3공수여단이 통행을 차단하고 차량과 행인에게 총격을 퍼붓기 시작해 시민군이 공수부대와 총격전을 벌인 것이지 교도소를 파괴, 복역수들을 탈주시킬 목적으로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이와 관련 5.18사건을 수사한 검찰의 견해는 이렇다. "21일 오후 교도소 방어 명령을 받고 도착한 3공수여단 15대대가 고속버스 2대에 카빈을 장착한 시위대의 기습사격을 받음. 이후 외곽봉쇄작전 과정에서 교도소 접근 시위대와 간헐적으로 총격전발생"(95년 7월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 어떤 의도를 갖고 기습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 외곽봉쇄작전 과정에서 발생한 총격전일 뿐이라는 것이 검찰의 시각이다.

단순한 총격전을 교도소 습격으로 조작했다면 '폭도와 간첩들의 배후조종을 받은 불순세력들이 저지른 光州사태'로 몰았던 신군부의 의도와 어떤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교도소를 과연 시민군들이 기습하려 했는지 객관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의 증언을 들어보자.

당시 光州교도소장 韓道熙씨(71)는 중요한 사실을 증언했다. 시민들의 교도소 습격설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는 것.

韓소장은 "당시 교도소는 공수부대원들이 중무장을 하고 있었고 교도소 주변상황이 급박한 것이 아니어서 습격이란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그는 "당시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하려고 했다면 시민군의 시체가 교도소 주변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계엄군이 시민들의 인근 지역 시위확산을 막기위해 먼저 발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당시 교도소 주변은 공수부대의 삼엄한 경비가 있었고 21일 이후 光州-潭陽간 도로가 차단된 상태서 교도소 습격이란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했겠는가하는 설명이다.

3공수부대는 당시 교도소라는 특수성 때문에 옥상에 기관총까지 장치하여 엄중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외곽봉쇄작전에 따라 潭陽쪽으로 빠지는 길목인 교도소앞에는 바리케이드까지 쳐져 있었고 3공수가 차단하고 있었으나 시민군들은 어떻게든지 시위상황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이곳을 빠져 나가려고 했다. 트럭을 타고 지나는 시민군에게 공수부대는 바로 사격을 해버렸던 것이다. 시민군측의 주장은 이를 두고 습격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

당시 光州상황을 취재했던 동아일보 金영택기자의 증언이다. "당시 나는 시민군들의 교도소 습격사건에 대한 정보를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잘못일수도 있지만 그 당시 웬만한 사건은 항쟁지위본부에 들어왔고 또 나로서도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적어두려 노력하고 있을 때 였다. 그런데도 나는 몇차례 있었던 것으로 발표된 교도소 습격사건을 항쟁기간에는 물론 진압작전이 끝난 27일 이후에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직 1985년 이후 당국의 발표에서만 보았을 뿐이다."

국회청문회에 나왔던 鄭雄 31사단장이나 朴俊炳 20사단장은 당시 31사단이나 20사단병력이 교도소를 지키고 있었을때는 교도소 습격이 전혀 없었음을 증언했다. 이는 만일 시민군들이 교도소를 습격하려고 했다면 꼭 막강한 공수부대가 지키고 있을때만 공격을 했을까하는 의문도 제기된다.

당시 시내에 트럭을 타고 다니다 교도소앞에서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을 받고 부상당한 蔡종일씨(당시 19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22일 아침 9시께 회사동료 등 6명이 트럭을 타고 동신고 가까이 가자 시민군 몇 명이 도로 가운데 나와 교도소쪽에 걔엄군이 있으니 총이 있는 사람만 가라고 해 카빈을 보여주고 통과했다. 말바우시장을 지나 현 무진아파트자리 부근에서 계엄군을 봤는데 순간 두 방의 총성이 울렸고 나는 가슴에 관통상을 입었다"

교도소인근에 접근만 해도 이처럼 무자비하게 총을 쏘는데 감히 교도소를 습격할 생각을했을까.

제 68회 악몽의 광주 교도소
 
   5월 21일 오후 4시 光州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3.7.11 3개 공수여단은 외곽철수 명령을 받는다. 全南大에 주둔하고 있던 3공수여단도 명령을 받고 이날 오후 5시35분 철수작전에 들어갔다.
철수장소는 光州교도소. 이후 교도소에 주둔한 공수부대원들은 그곳에서도 총검을 휘둘렀던 시내에서의 진압 못지않 은 잔인한 가혹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당시 그곳에 연행됐던 시민들의 증언은 한결같이 그곳은 바로 한국판 아우슈비츠였다는 것.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잔학행위가 벌어졌고 구타등으로 숨진 시체는 교도소 주변에 마구잡이로 암매장까지 자행했다.

지난 1월 4일 검찰 5.18사건 특별수사본부의 光州현장조사때 증인으 로 나와 80년 당시 光州교도소의 악몽을 밝힌 姜吉祚씨(55.光州시 北 구 龍鳳동.당시 전남방직 노무계장)의 증언을 들어보자.

20일 오후 5시께 光州시 北구 新安동 롯데제과앞에서 계엄군과 시민군의 중재과정에서 중간에 서 있다가 계엄군에게 전남대로 잡혀갔다. 1백8명의 시민들이 잡혀 왔는데 무릎을 꿇고 연일 계엄군들의 구타를 받았다. 다음날 포승줄에 묶여 트럭에 빽빽하게 실린채 어디론가 향했 다.

계엄군은 공기도 통하지 않는 트럭속에 최루탄을 마구 쏘았다. 도 착한 곳은 光州교도소였다. 트럭에서 한사람씩 내리는데 이미 죽어있 는 사람도 있었다.

내리자마자 원산폭격을 시켰고 14명으로 생각되는 데 시체를 일렬로 모아놓고 가슴에 번호판을 대고 사진을 찍고 있었 다. 원산폭격자세로 있으면서 고개를 돌려 이 광경을 보려고 하면 공 수들이 군홧발로 눈알을 찍었다.

그런 후 우리는 교도소안에 있는 창고에 수용됐다. 며칠째 물을 못마 신 우리가 탈진상태에서 물을 달라고 하자 공수 한명이 오줌을 싸서 주었다. 한 사람이 그것을 받아 냉수마시듯 벌컥 들이마셨다.

공수들이 우리에게 행했던 잔혹행위중에 눈동자 고정시키기를 하다가 눈동자가 돌아가면 피우고 있던 담뱃불로 눈동자를 지져버리거나 뒷짐을 지고 가슴을 내밀게 해 가슴을 곤봉으로 구타하곤 했다.

교도소에서도 매일 가혹한 구타가 계속됐는데 강창수 상사라고 자신 을 소개한 군인이 대검으로 한 사람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대로 머리 가 쪼개지면서 뇌가 눈에 보였는데 그 사람도 죽었을 것이다.

강상사 와 함께 잔인한 짓을 한 사람이 바로 김성곤 중위다. 상시 선무방송을 맡고 있었는데 대검을 들고 다니면서 포로들을 위협하고 구타했다. 그 렇게 해서 날마다 죽은 사람들이 밖으로 들려 나갔는데 살아나가면 이 런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사망자를 스스로 셀 수 있는데까지 세어보니 52명이나 되었다.

시신들이 밖에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연일 헬리콥터소리가 들렸다. 이후 상무대로 옮겨졌으나 구타는 계속 되었는데 6월 4일이 돼서야 가족들과 나의 각서를 받고 풀어줬다 단순 히 시위현장에 있었던 무고한 시민을 공수부대원들은 이처럼 무자비하 게 짓밟았다.

역시 全南大에 잡혀 있다 교도소로 끌려가 가혹행위를 당한 朴상옥씨 (34.당시 재수생)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21일 오후에 창문이 없는 탑차 에 실려갔고 차안에 최루탄을 터뜨렸다는등의 증언으로 미뤄 앞의 姜 씨와 朴씨는 같은 차에 실려갔을 가능성이 크다.

교도소에 도착하자 이미 차에서 죽은 사람이 있었고 이런 사람들은 가마니로 둘둘 말아 어디론가 치웠다. 교도소 창고에는 이미 2백여명 의 시민들이 수용돼 있었다. 공수들은 창고안에 몸을 맞대고 종으로 길게 눕게 한뒤 군홧발로 그 위를 달려다녔다. 곤봉등으로 패는 것은 부지기수였다. 대소변은 큰 드럼통에 모두 해결토록 했다

가혹행위의 방법도 다양했다. 21일 낮에 新安동 동사무소앞에서 계엄 군에 붙잡혔다 교도소로 끌려갔던 崔公宇씨(54.光州시 北구 新安동)의 검찰 증언.

교도소로 끌려가 10일동안 구타당하고 잠도 제대로 못자면서 고문을 당했다 역시 지난 1월 검찰의 光州현장조사때 증언했던 宋鉉洙씨(38.全北 全 州시 中華山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1일 후배.동생과 함께 光州교도소앞 4거리를 지나다 총탄을 맞아 왼손과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전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25일 潭陽 집으로 가다 교도소앞에서 계엄군에게 끌려가 2주동안 교도소에 수감 되었다. 2주동안 매일 구타를 당했고 심지어 상처난 부위를 공수들이 담뱃불로 지지기까지 했다

공수부대들의 반인륜적인 잔악행위는 연행자들의 신분이나 나이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차별적이었다는 것이 증언의 공통점이다. 당시 光州역 부근의 한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근무하던 朴해일씨(당시 18세)는 라면을 사러 나갔다 공수부대에 연행됐다. 朴씨는 연행당시 마 구잡이 구타를 당한 뒤 교도소로 끌려갔다.

의식을 잃었다 얼마후 깨어보니 교도소에 누워있지 않겠어요. 교도소에 도착한지 사흘이 지나서야 의식을 되찾았다고 하더군요. 헌 가마 니가 깔린 칙칙하고 음습한 교도소 창고에 누워 있었습니다.

교도소에 있는 군인이 제가 눈을 뜬 것을 보더니 죽지않고 살았다고 군홧발로 온몸을 마구 짓밟으며 온갖 욕을 해댔습니다. 그 순간에 제가 사람인 지 짐승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갇혀 있는 창고에는 50-60명이 함께 있었어요. 제가 의식을 되 찾게된 날부터 조사를 한다고 두명씩 불려나갔습니다. 조사를 하는 사 람은 군무원인지 일반 형사인지 모르나 사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저를 당한 사람은 다짜고짜로 왜 데모를 했느냐며 미리 준비해 둔 몽둥이 로 온몸을 마구 때렸습니다. 반문하거나 대답할 겨를이 없었지요. 그 조사관은 나를 삼켜버릴듯이 눈을 부라렸어요

당시 光州교도소 교도관으로 근무했던 洪인표씨(50)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공수부대가 들어온 21일 저녁식사후 천막을 씌운 트럭 1대가 멈췄다. 70-80명되는 사람들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밀어붙인뒤 곤봉으로 때리고 구둣발로 걷어찼다.

22일 오후부터는 보안대 요원들이 나와 연행자들을 재소자 교육실에서 조사했는데 조사시 가혹행위로 한 명이 죽어 나갔다는 말을 들었 다. 조사할때는 공수들이 곤봉을 막 휘둘러 팼다. 우리 교도관들의 침 소에까지 신음소리가 들려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21일부터 교도소내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심한 공포감으로 근무자들까지도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일반 재소자들은 완전통제되었고 교도소 업무 역시 마비상태였다"

그러나 이같은 잔인무도한 학살행위에 대해선 최근 1심선고까지 마친 5.18사건 수사에서도 누구하나 책임을 진 사람이 없었다.

제 69회 수습대책위원회
 

   계엄군을 몰아내고 해방구를 건설한 광주시민들은 시민군들의 통제 에 의해 질서를 되찾아가는 한편 수습위원회를 구성, 계엄군측과 협상 을 벌였다. 그러나 수습위원회의 역할은 역부족이었다. 광주시민들과 시가전을 방불케하는 일전을 치른 계엄군측은 애초부터 광주시민을 협상 파트 너가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수습위원회는 출발에서부터 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계엄군측은 수습위원회가 협상을 시도하는 시간에 광주재진입 작전을 짜고 있었다.

육본이 22일 10시 尹興禎 전교사사령관을 해임하고 蘇俊烈씨를 전 교사사령관에 취임시키는 한편 20사단을 추가증파한 것에서도 적나 라하게 드러나듯이 신군부는 처음부터 공공기관(도청)을 점령하고 있던 폭도를 소탕해야한다는 것 이외에는 어떤 협상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았다.

계엄군을 몰아낸 다음날인 22일 오전부터 도청에서 丁時采부지사를 중심으로 목사, 신부, 학생, 변호사, 관료 등 15인으로 5,18광주사태 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이들은 몇시간 동안 계속된 회의 끝에 낮 12시30분께 7개항의 요구 조건을 결정, 계엄사와 1차 협상에 나섰다.

7개항의 요구사항은
* 사태수습전에 군 투입을 말라
* 연행자를 석방하라
* 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라
* 사태수습 후의 보복금지
* 책임면제
* 사망자에 대한 보상
* 이상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면 무장을 해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같은 협상안을 들고 수습위원중 8명이 상무대 계엄분소를 찾아 협상에 나섰다. 이날 수습위원회과의 협상에서 전교사 부사령관 金基 錫 소장은 수습위원들이 요구한 7개항중 무기를 반납하면 선별석방하 겠다는 내용과 사태수습 후의 보복금지에 관한 사항에만 동의하고 나 머지는 상부에 제안하겠다고만 약속했다.

즉 1차 협상결과 얻은 것은 선별석방외엔 없었던 것이다. 이같은 결과를 가지고 이날 3시부터 도청앞에 모인 시민들 앞에선 수습위원 들은 일단 무기를 반납하고 보자 며 시민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시민들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이들은 시민들의 야유로 단상에서 내려 올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협상보고대회가 시민궐기대회로 바뀌었다.

이날 오후 전남대생 金창길씨가 이번 사태는 대학생들이 책임을져야 할 성질의 것이므로 우리들이 사태수습에 나서자 고 제안, 1백 여명의 학생들이 남도예술회관 앞으로 모였다.

전남대,조선대에서 각각 5명, 나머지 전문대에서 5명을 뽑아 15인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결 성했다. 明魯勤, 宋基淑 전남대 교수를 지도교수로 하고 위원장 金창길 부 위원장 金宗培, 총기회수반, 차량통제반, 수리보수반, 질서회복반, 의료 반을 두었다.

23일 대학생을 포함해 확대 개편된 수습위는 낮 12시경에 회의를 속개하고 계엄사에 파견할 수습위원과 무기회수문제를 두고 결론이 나지 않았다. 무기를 회수해서 반납하자는 측과 아무런 보장없이 무 기를 반납할수 없다는 측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회의과정에서 이 문제가 타결되지 않자 그렇다면 회수된 무기중에 2백여정을 계엄사에 반납, 계엄군의 반응을 살펴본 뒤 결정짓자고 무기 2백여정을 가지고 계엄사에 출두했다. 그댓가로 그동안 연행돼 있던 34명이 풀려났다.

수습위내 무기회수파가 잠시 득세하는듯했으나 시민들의 피를 담보 로 무조건 무기를 회수할수 없다는 당위론도 만만찮아 무기회수문제 는 계속평행선을 긋고 있었다.

한편 25일이 되자 관료등이 포함된 도청수습위측과 거리를 유지했던 홍남순, 이기홍, 이성학, 송기숙, 명노근, 윤영규, 조아라, 이애신등 민 주인사와 청년대표 정상용, 윤상원씨 등이 사태수습방안에 대한 논의 를 했다.

같은날 오후2시 남동성당에서 다시 모인 재야인사들은 회의를 속개 해 시민여론을 받아들이고 계엄사와의 대화창구를 일원화하기 위해 도청수습위엥 합류키로 하고 최종 협상안을 확정했다.

* 국가 최고원수인 대통령이 광주사태가 정부의 과잉진압 때문임을 인정할 것.
* 사죄하고 용서를 청할 것
* 모든 피해는 국가가 보상할 것
*정치적 보복은 절대로 있을수 없다는 것을 국민앞에 정확히 밝혀둘 것.

26일 김성용신부등 수습위원 11명은 이같은 최종안을 갖고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과 상무대에서 4시간반동안 회의를 했으나 계엄군은 이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1,무기회수 2,군에 반납, 3,그렇게 하면 경찰 로 하여금 치안을 회복하게 하겠다는 일방적인 요구를 하며 12시까지 무조건 수습하라는 최후통첩을 했다.

계엄당국은 당초부터 사태수습은 커녕 수습위와 협상을 하는척하면 서 20사단을 광주에 파견하는 27일 도청재진입을 위한 준비를 착실 히 해나갔던 것이다.

계엄군측은 이같은 입장이 적나라하게 표출된 1985년 국방부에서 발행한 <광주사태의 실상>이라는 문건을 보자.

5월22일 오전10시경 전남도청에서는 부지사의 주도하에 광주사태 시민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일부 지방유지와 온건파 폭도들은 계엄당국과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들은 계엄군 투입금지, 구속학생 전원석방, 계엄군의 데모 과잉진 압으로 인한 사태 악화 인정등 7개항을 결의하고 낮 12시경 수습대표 들이 계엄분소를 방문하고 이의 수락을 요청하였다.

소위 수습위원회의 대표격인 이종기 변호사는 이번 사태가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있 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시민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한편에서는 무장폭도들이 전투조직을 강화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계 엄군에 사과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주 장인가. 무엇을 누구에게 사과하라는 것인가. 정복을 입은 경찰관에게 돌을 던지고 각목으로 때리고 살해한 자를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 인가.

대한민국의 군복을 입은 군인을 공격한자(사실상 적이 아니면 군인을 공격하는 집단은 없다)를 어떻게 하자는 건가. 철시한 거리 를 활보하고 다니는 것은 오직 총기를 휴대한 무장폭도들뿐이었다.

그들은 군용지프와 트럭, 버스를 타고 시가지를 돌면서 위협시위와 요란한 가두방송을 하였는바 심지어 우리 방송은 못 믿으니 북한 방 송을 듣는 것이 좋다고 버스에서 북괴 방송을 틀고 운행하기도 했다 이런상황에서 수습위가 요구하는 그런 종류의 사태 수습은 시작부터 기대를 걸수 없었다.

제 70회 계엄군, 철부지 아이까지 총탄사례
 
   23일 오전 한정된 평화 속에서 수습위가 무기반납을 둘러싸고 내홍을 겪고 있을 무렵, 신군부는 철저한 광주 외곽 봉쇄작전에 돌입했다. 무기를 휴대한 폭도들의 봉쇄선 이탈 절대 거부(20사단 전투상보) 외곽으로 빠져 나가려는 「폭도」들에게 사실상의 사살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이 와중에서 光州 인근지역으로 피난을 가려던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을 당하게 된다.

양민학살의 대표적 사례는 주남마을 사건.

23일 오전 和順으로 빠지는 길목인 池元동 주남마을. 시민과 학생을 태운 채 군의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和順방면으로 달리던 미니버스가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고막을 찢을듯한 총성,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비명과 신음, 살려달라 는 절규, 그리고 피를 타고 터져나온 내장.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10여명이 숨지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

곧이어 이미 숨진 10여명에게 확인사살이 가해지고 3명의 부상자중 2명에 겐 전시에서나 있을법한 즉결심판 처분이 내려졌다.

이른바 주남마을 양민학살 사건.

오빠를 찾기 위해 나섰다가 이 버스에 탑승한 유일한 생존자 洪錦淑씨 (33)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총격이 끝난후 3~4명의 군인들이 버스 안으로 올라와 군홧발로 툭툭 차면서 생사여부를 확인했다. 눈을 다친 남자 1명과 상처가 심한 교련복 차림 의 청년, 그리고 나 3명만 살아 있었다. 경운기에 실려 산속의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높은 사람」이 두사람을 가리키며 『처리해버려』라고 명령하 자 잠시후 산중턱에서 두발의 총성이 울렸다』

洪씨의 계속되는 증언.
『버스에 탄 숫자가 정확히 몇 명인지는 모르지만 총소리가 그치고 군인들이 버스 안으로 들어와 널브러진 사람들을 툭툭 차 며 생사여부를 확인할 때 「모두 18명」이란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당시 녹동마을에 살고 있던 金鍾華씨(49·현재 경남 마산 거주)등과 주남 마을 주민들은 다음날인 24일 오전에도 같은 장소에서 11명의 양민이 학 살됐다고 증언하는 등 제2의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검찰은 이를 단일사건으로 간주하고 있다.

주남마을 학살 이외에 계엄군이 자행한 양민학살의 극치는 송암동 사건. 철부지 어린아이에게까지 총부리를 겨눈 이 사건은 계엄군의 만행을 백일 하에 드러내는 극단적 사례다.

24일 오후1시30분께 주남마을을 출발한 11공수여단 선두는 光木간 도로앞 효덕국교 삼거리 부근에 이르렀다. 트럭을 타고 있던 10여명의 무장시위대 가 발견되자 곧바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서 인근 원제 저수지에서 멱을 감던 房광범군(당시 13세·중1)과 길가 韓氏선산에서 놀고 있던 全재수 어린이(당시 10세·초등4년)가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됐다. 당시 상황을 재수군의 형 재룡씨(37)로부터 들어보자

『폭발음과 함께 격렬한 총소리가 이어진 뒤 재수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현장으로 달려가 보니 동생의 몸은 이미 총격에 일그러진 채 숨져 있었다. 韓氏 선산과 공수부대가 지나던 도로와는 지근거리였다』

형 재룡씨의 말처럼 11공수여단이 지나간 도로와 재수군이 놀던 韓氏 선 산과는 불과 50m거리. 아무리 긴박한 상황이었다 할지라도 어린이란 것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거리였다. 계엄군은 철부지 어린아이에게까지도 총을 겨눈 것이다.

송암동 사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잠시후 오후2시께 선두였던 11공 수 63대대가 효천역앞에 이르자 이들을 무장시위대로 오인한 전교사 보병 학교 병력이 이들에게 90㎜무반동총 4발을 발사하는등 집중사격을 가했다.

63대대도 즉각 응사했다. 계엄군간 오인사격이 벌어진 것이다. 이로인해 63 대대 병력 9명이 숨지고 33명이 부상을 당하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에 격분한 63대대는 무고한 송암동 양민을 상대로 분풀이를 하기 시작 했다. 남녀노소가 없었다. 무장시위대를 수색한다는 미명아래 가가호호에 난입, 젊은 청년 3명을 철로변으로 끌어냈다.

이때 權근립씨(당시 33세)등 3명이 계엄군에게 총살 당했으며 주부 朴연옥 씨(당시 50세)도 무차별로 쏟아지는 총탄세례를 피해 도로가 하수구로 피신 하다 계엄군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이같은 계엄군의 양민학살은 광주교도소 인근·화정동 국군통합병원 주변 등 광주외곽지역 도처에서 자행됐다.

결국 신군부에 있어 시위참여 여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광주안의 모든 사람들은 폭도였을 따름이었다. 그들의 사전에 양민이란 단어는 애초에 없었다.

제 71회 尹祥源과 투사회보
 
   光州민중항쟁 '全南大 3총사', 朴寬賢.尹한봉.尹祥源. 이중 5.18민중항쟁기간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尹祥源(당시 30세)이다. 5.18 현장을 끝까지 지킨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시 全南大 학생회장으로 민주화대성회를 주도, '광주의 아들'이라고 불렸던 朴寬賢도, 70년대 광주재야운동권의 핵심이었던 尹한봉도 5월17일 예비검속령을 피해 도피중이었다.

항쟁기간 내내 투사회보를 제작하는 한편 도청 항쟁지도부 대변인을 맡아 동분서주하던 尹祥源은 27일 새벽 계엄군의 도청 탈환 작전대 최후를 맞이한다. 朴寬賢이 5.18광주민중항쟁의 불을 당기는 도화선이었다면 尹祥源은 항쟁기간 내내 全南도청을 지키면서 광주항쟁을 마무리한 인물이었다.

光州시민들은 최근 항쟁 당시 온몸을 바쳤던 尹씨를 기려 尹祥源상을 제정, 기념하고 있다.

尹祥源(본명 開源)은 1950년 光山군 임곡에서 尹석동씨의 3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나 북성중과 살레시오고를 거쳐 71년 全南大 정외과에 입학했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그가 사회현실에 눈을 뜬 것은 75년 군제대후 녹두서점 주인 金相允씨등 민청학력 세대와 만나면서부터. 이때부터 그는 유신체제의 질곡속에 신음하는 민중들과 호흡을 같이한다. 78년 졸업과 동시에 주택은행 서울 신림동 지점에 취직했지만 6개월만에 직장을 그만두고 귀향,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光州시 西구 光川동 한남 플라스틱 공장에 위장취업, 노동운동에 심혈을 기울이던 그가 야학운동에 뛰어든 그는 당시 光川동에서 노동자를 상대로 야학강의를 했던 들불야학 朴琪順(여)의 간곡한 권유 때문. 그후 尹시는 朴琪順과 함께 들불야학을 이끌며 70년대 후반 광주지역 노동운동과 야학운동을 주도했다.

이때 朴寬賢도 尹씨의 권유로 야학운동에 참여했다. 全南大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 당선됐다. 尹씨는 자신이 은행원으로 근무할 때 입었던 양복과 넥타이.구두 등을 朴씨에게 빌려주며 朴씨를 독려했다고 한다. 朴씨가 도피생활중에도 尹씨에게서 물려받은 옷을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이지역 재야인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일화.

尹祥源은 朴寬賢.朴琪順 등과 함께 광주지역 노동야학의 선구, 들불야학을 이끌다 광주민중항쟁을 맞게된다.

尹祥源하면 떠오르는 것이 투사회보.5.18 당시 광주시민의 눈과 귀 역할을 했던 투사회보는 尹씨와 들불야학의 작품이었다.

6월18일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이 자행되자 들불야학팀은 그 참상을 외부에 알리고 시민들의 동참을 유도하기위해 19일부터 유인물을 제작, 시내 각 지역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21일 계엄군의 만행을 보다못한 시민들이 총궐기, 계엄군을 光州외곽으로 몰아냈다.

尹씨는 계엄군을 光州외곽으로 몰아낸 21일 시민 승리의 날로 규정하고 유인물에 처음으로 '투사'라는 제호를 붙여 제작했다.

투사회보는 21일 1호를 시작으로 25일 밤 8호까지 발간됐다가 26일부터 제호를 '민주시민회보'로 변경, 10호까지 발간했다.

그러나 마지막호였던 10호는 27일 계엄군의 진입으로 미처 배포하지 못한채 압수되고 말았다.

尹씨와 함께 투사회보를 만들었던 田龍浩시(당시 22세.全南大 경제학과 3년)는 "투사회보는 5.18의 상황이 정부와 언론에 의해 폭도들의 난동,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악선전에 휘말려든 폭동으로 왜곡되는 것을 보고 올바른 진상을 알리기 위해 출발했고 19일 '광주시민 민주투쟁회보'라는 이름의 호소문이 투사회보의 효시가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투사회보의 효시인 광주시민 민주투쟁회보는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광주 애국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말입니까. 웬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죄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에 실어가며, 부녀자를 백주에 발가벗겨 총칼로 지르는 놈들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 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그악무도한 공수특전단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가 하나로 단결, 유신잔당과 全斗煥 일파를 영원히 추방할때까지 싸웁시다. 최후의 일각가지 단결하여 싸웁시다. 그러기 위해 5월 20일 낮 12시부터 계속해 광주 금남로에 총집결합시다"

투사회보의 탄생에는 光川동 들불야학 이외에 당시 광주재야의 정신적 메카 녹두서점(光州시 동구 壯동 구청산학원 옆)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尹씨는 18일 밤 녹두서점을 찾아 예비검속으로 검거됐던 녹두서점 주인 金相允시의 부인 鄭賢愛씨(당시 29세.교사)와 광주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유인물 제작을 논의했다.

외부와의 연결통로였던 녹두서점에는 전국 각지에서 광주의 상황을 묻는 전화가 쇄도했고 주인 金씨의 연행에 염려의 성금이 답지했다.

鄭씨는 광주의 실상을 외부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성금의 대부분을 尹씨에게 쾌척했다.

들불야학팀은 이 성금을 기반으로 들불야학의 교실이었던 光川동 시민아파트 앞 양철문 가게에서 본격적인 유인물 제작에 들어갔다.

그들은 문안작성조(尹祥源.田龍浩) 필경조(朴용준), 등사조(金성섭.羅명관.尹순호), 물자조달조(金경국)로 나누어 매일 적게는 5천-6천부, 많게는 4만부까지 투사회보를 찍어냈다.

제작된 투사회보는 주로 노동자들을 통해 녹두서점과 광주시내 광주시내 각지역으로 배달됐다.

투사회보는 21일부터 지방신문 발행이 완전히 중지된 상태에서 격문이나 가두방송이 지니는 일시적인 성격을 극복한 활자매체로서의 지속성.논리성, 변두리 지역까지 보급될 수 있었던 전면성의 장점을 충분히 살린 '시민의 신문'이었다.

들불야학팀과 투사회보를 제작했던 尹祥源은 27일 계엄군의 도청탈환작전에 맞서 도청을 사수하다 장렬히 산화했다.

짧지만 굵게 살다간 尹祥源, 그는 82년 2월20일 들불야학시절 그와 함께 활동하다 연탄가스로 숨진 '노동자들의 누이' 朴琪順씨와 영혼 결혼식을 올리고 망월묘역에 영면하고 있다.

제 72회 全南의 5.18 <木浦>
 
   5.18광주민중항쟁은 지역적으로 光州라는 상징성이 함축돼 있지만 항쟁의 전개 지역은 全南일원이었다. 대문에 혹자들은 5.18의 명칭을 '전라남도 민중항쟁'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5월21일 도청앞 집단발포 이후 항쟁은 光州시내를 벗어나 全南일원으로 퍼져 나갔다.

'앉아서 당할 수 만은 없다' '피로 물든 광주를 구하자'

무장론이 모두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光州의 참상을 두루 알려야 한다는 목적의식과 함께 시위대들은 총을 손에 넣기 위해 차량을 이용, 시외로 빠져나간다.

시위확산의 계기는 계엄군의 잔학성이 그 주 원인이었지만 시위대가 21일 아시아 자동차 접수로 다량의 차량을 탈취, 기동성을 확보한 점과 시위대와 계엄군간의 격전지중 하나가 공용터미널 이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요소.

光州에 일을 보러 왔던 全南지역민들은 18일 공용터미널에서 게엄군의 만행을 목격하고 각지에 이를 전파하는 첨병 역할을 하게 된다.

全南의 5.18에 있어 주목할 만한 곳은 木浦, 木浦는 羅州.和順등 光州근교가 光州의 시위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과는 달리 나름대로 독자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한 곳이다.

"木浦도 투쟁에 있어서는 결코 光州에 뒤지지 않습니다. 다만 희생자만 적었을뿐이지요."

木浦시민 민주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끝가지 시위를 이끌었던 安哲씨(당시 34세 약사)는 光州항쟁에 가려 木浦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데 대해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朴正熙정권이후 정치.경제적으로 극심한 소외를 받았던 木浦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金大中씨가 연행돼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민들의 충격과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다.

5월21일 오후2시께 光州로부터 온 무장시민군 출현은 '木浦항쟁'의 서막을 알린다. 光州에서 시위대 2백여명이 택시 1대와 고속버스 4대에 나눠타고 羅州.咸平.務安을 거쳐 木浦에 도착했다. 이들은 차량시위를 벌이며 피해상황과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는 가두방송을 벌였다.

울분과 분노에 쌓여 있었던 木浦시민들은 이들 시위대들을 열렬히 환영하며 구름처럼 木浦역광장에 몰려들었다. 오후4시께 光州에서 온 시위차량은 상당수의 木浦청년들을 싣고 다시 光州로 갔으나 이때부터 시민들은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며 木浦경찰서.중앙정보부 분실등 공공기관을 휘젓고 다녔다. 소수의 경찰병력은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자진 해산하고 木浦는 무정부상태로 빠져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음날 낮 12시께 교계지도자.시장.목포대학장.정당대표.재야인사등 20여명은 사태수습을 모색하기 위해 木布시 幸福동 安哲씨 집에 모여 木浦시민민주화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安哲씨를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이들은 무정부상태 속에서도 치안은 유지돼야 한다는 것과 光州시민학살 규탄과 군부 및 유신잔당의 정치적 음모 폭로.민주헌정수립을 위한 시민들의 의사결집을 위해 평화적인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한다는데 의견일치를 보고 시 당국에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이시간 이후부터 사태 개입에 대해 추후 정치보복이 없을 것 ▲계엄군이 木浦에 진입하면 엄청난 비극이 예상되므로 계엄군의 木浦진입을 중지토록 요구할 것 ▲시장은 시위학생.청년들에게 대용식을 제공하고 역광장에 방송시설을 준비할 것 ▲시위 장기화에 대비, 시내에 있는 식량의 외부방출을 중지할 것 등을 요구했다.

시민들의 불안감 해소와 질서회복을 위해 총기회수가 급선무라고 판단한 투쟁위원회는 무기회수에 나서 22일 오후 6시께 카빈.M1등 소총 2백여점과 LMG 2정을 목포JC회장인 李형래씨를 통해 제3해역사령부에 이를 반납토록 하는 한편 23일부터 청년 40여명을 선발, '치안대'를 조직해 새벽4시까지 시 외곽 및 시내순찰을 벌이도록 했다.

한편 22일 오후 2시 1만여명의 시민들이 집결한 木浦역 광장에서 木浦시 민주투쟁위원회 주최로 제1차 '민주헌정 수립을 위한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이후로 木浦역 광장은 항쟁 마지막날까지 시민들의 농성과 현장보고.규탄대회 등이 만민공동회식으로 주야로 계속되는 시위의 메카가 된다.

특히 23일 오후 8시부터 10만여명의 시민이 4백여개의 횃불을 들고 시가행진을 벌일 때 木浦항쟁은 절정에 달했다.

"이때는 木浦시민이 거의 다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할머니들까지도 어린애를 등에 업고 따라다닐 정도였으니까"

安哲씨의 회고다.

이렇듯 투쟁위원회 주도로 모범적이고 평화적으로 치러지던 시위는 26일 '木浦에 계엄군이 들어오고 光州가 곧 진압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면서 와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23일부터 이미 헬기가 시내 상공을 선회하며 "폭도들의 준동에 함께 말려들지 말라"는 방송과 유인물을 뿌리며 자진해산을 종용해 와 시민들의 감정은 착잡한 상태였다.

26일 밤 시민투쟁위원회가 安哲씨 집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광주사태 진압을 예상하고 이후 모든 상황을 위원장 安씨에게 위임했다.

마침내 27일 계엄군에 의해 全南도청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계속 싸울것인가. 물러설 것인가로 의견이 분분해지고 투쟁위원회도 한쪽을 선택해야 할 절박한 순간에 봉착했다. 결국 투쟁위원회는 오전 11시 마지막 궐기대회를 열어 '우리 겨레와 세계 자유민에게 보내는 목포시민 결의문'을 채택한 뒤 시위를 종결했다.

그러나 23일 安撤씨 주도의 투쟁위원회와 별도 청년학생을 중심으로 구성된 학생지도부(위원장.朴상규.당시 21세.목포공전2)는 끝가지 싸울 것을 결의하고 대규모 횃불시위를 준비했다.

27일 오후 6시께 木浦역앞 광장.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수만의 인파가 횃불시위에 참여, 꺼져가는 항쟁의 불시를 되살리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시위가 끝난 밤11시께 대부분 시민들은 귀가했고 집행부도 속속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30여명의 집행부는 옥쇄의 결의를 다졌으나 계엄군의 "즉각 해산하지 않으면 진압한다"는 최후통첩에 항쟁을 포기하고 만다.

시위대가 흩어지길 기다리던 경찰은 木浦역 광장에 30여명 남짓한 강경파 학생들만 남게되자 매가 먹이를 나꿔채듯 이들을 체포, 연행해갔다. 8일간의 목포항쟁이 그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제 73회 全南의 5.18 <光州인근>
 
   21일 오후 全南도청앞 집단발포이후 光州에서의 외로운 싸움은 마침내 도내 각지역으로 확산된다.

21일 오전까지만해도 시위대는 羅州.和順.靈光등 光州인근 지역에서 계엄군의 만행과 光州시민의 피해상황을 전하는데 그쳤으나 도청앞 집단발포후부터는 그지역 청년들과 합세해 무기를 탈취하는등 적극성을 보인다.

조직적이고 독자적인 시위를 벌였던 木浦와는 달리 光州인근 지역 항쟁의 주요방향은 총기를 비롯한 각종 시위용품을 光州에 공급하는 보급투쟁에 초점이 맞춰졌으며 각 지방 열혈청년들은 시민군의 예비군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21일 아시아자동차 접수로 차량을 대량 확보한 시위대는 전국적인 시위확산을 위해 全州-서울 방면으로의 진출을 시도했으나 長城의 사남터널 부근에 대기중이던 계엄군에 의해 강력한 제지를 받게 된다. 光州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번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 했던 신군부가 북상하는 길을 원천봉쇄했기 때문이다. 결국 시위대는 북상을 포기하고 全南의 각 시군으로 기수를 돌렸다. 全南 대부분 지역은 게엄군이 북상차단에만 열을 올리는데다 경찰력이 대부분 光州에 투입됐기 때문에 무방비 상태였다.

光州인근에서 대표적인 투쟁지역은 羅州.靈岩.咸平 등지로 지리적 요충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羅州는 光州와 가장 인접해 있는 것은 물론 木浦등 서남권으로 진출하는 관문이고 靈岩 또한 光州와 海南.康津을 연결하는 거점이며 咸平도 羅州와 木浦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이 지역민들은 光州에 인력과 물자를 공급하는 한편 서남권에 시위를 전파하는 첨병역할을 하게 된다.

시민군이 맨처음 도착한 지역은 羅州. 21일 낮 12시께 민간인 시체를 실은 차 2대가 羅州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 "공수부대원들이 光州 사람들을 모조리 쏴죽이고 있으니 우리도 총을 들어야 합니다"고 절규하자 羅州 군민들은 파출소를 안내했다.

시위대는 영강 파출소 등을 습격, 다량의 실탄을 확보했다. 당시 羅州지역에서 확보한 무기는 줄잡아 총 1천여정과 실탄 5만여발, 다량의 수류탄 등이며 무기탈취에 참여한 羅州 청년들은 시민군과 함께 光州로 향했다.

靈岩의 상황도 羅州와 마찬가지. 靈岩의 항쟁은 靈岩읍 보다는 新北에서 더욱 거셌다.

光州시위대의 출현에 고무된 新北청년들은 新北지서를 습격, 무기탈취를 시도했으나 타지역 항쟁소식을 들은 경찰들이 무기를 이미 빼돌려 놓은 상태였다. 무기를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던 新北시위대는 주민제보로 결국 22일 오후 7시께 始終지서 뒷산에서 은닉된 다량의 무기를 찾았다. 여기서 확보된 무기는 羅州군청 앞으로 옮겨져 시위대에게 전달됐다. 이들은 또 靈岩읍을 거쳐 康津.海南으로도 진출했다.

咸平도 21일 오후 1시께 고속버스.트럭등 10여대에 분승한 光州시위대가 咸平읍에 도착하면서 항쟁이 폭발했다.

咸平지역은 鶴橋면은 영산포.靈岩 등과 함께 교통의 요지로 木浦나 務安 방면으로 진출하는 차량들이 반드시 거쳐가는 지역이다. 이미 20일부터 시위대 차량이 지나다니며 光州의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21일 도청앞 집단발포 소식을 알리는 시위차량이 鶴橋면에 들이닥치자 항쟁이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당시 차량시위대들은 務安.木浦에까지 세력을 뻗쳤다.

한편 光州라는 일개 지역을 타격목표로 삼았던 신군부는 예기치 못한 사태확산에 당혹감과 부담을 안게 된다. 신군부는 항쟁의 확산 방지를 위해 21일 오후 7시를 기해 우선 3개 공수여단과 20사단 전교사 병력으로 光州로 통하는 7개 주요도로를 봉쇄해 버린다.

▲31사단=오치(1개 중대), -31사단방면 ▲3공수=교도소(순천방향)1개여단-담양.여수.순천 방면으로 통하는 문화동 ▲1개여단-지원동 주남마을 부근 ▲20사단=극락교(광송간 도로) 백운동(광목간 도로)1개 대대, 톨게이트(光州-全州)1개대대, 통합병원 입구 1개대대 <전교사 전투상보>

시위대는 이같은 차단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채 위 지점을 통과한다. 또는 알면서도 光州로 가기 위해 이 지점을 돌파하려다 집단적인 희생을 당했다. 계엄군은 시위대 차량뿐아니라 일반차량과 통행인 심지어 그 지역 주민들에게까지 총격을 퍼부어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다.

光州교도소 부근.지원동과 주남마을.송암동 일대의 양민학살이 그 대표적 사례.

계엄군이 光州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차단하자 靈岩.咸平의 시위대는 모두 羅州로 집결했다. 시위대는 모두 羅州로 집결했다. 시위대는 光州진입을 줄기차게 시도하나 인성고 부근의 계엄군 바리케이드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송정리 쪽으로 光州진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全南의 시위는 21일부터 시작해 22일 최고조에 달했다. 23일 이후부터는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이는 ▲全南 도내 각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군부대들이 도로의 중간중간을 차단하기 시작한 점 ▲光州로 향하던 시위대가 봉쇄선에 막혀 출구를 찾지 못한 점 ▲光州가 고립되고 더 이상의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운동의 동력이 소진한 점 대문으로 23일 이후부터는 시위가 송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한편 全南지역 시위의 특징은 시위 발발지가 光州 이남 서남권에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이는 全南지역을 분리, 고립시키려는 신군부의 의도도 있었지만 예로부터 全南의 생화권이 호남정맥을 중심으로 서부권과 동부권으로 분리돼 있어 도로망이나 문화권이 서로 달랐다는 데도 그 이유를 찾을수 있을 것이다.

제 74회 全南의 5.18 -海南등 서남권
 
   전남의 5.18을 목포와 광주인근을 중심으로 한 항쟁으로 나눠 보았다.

이제 광주인근지역을 제외한 서남권으로 눈을 돌려보자. 서남권 항쟁중에서도 해남의 항쟁은 눈여겨 볼만하다. 해남항쟁은 공수부대가 아닌 향토사단과 시위대가 충돌, 대량의 인명피해가 난 지역이기 때문이다.

당시 전남 농민운동의 근거지였던 해남은 朴正熙 정권과 유신에 반대하는 수많은 청년운동가와 민주인사를 배출하는등 전통적으로 야세가 강한 지역이었다.

21일 당시 해남의 농민운동 인사들은 광주 북동 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농민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광주에 와 있었다. 이때 이들의 공백을 메운 그룹이 청년회의소 회원들. 읍내 JC회원들의 주도로 해남의 자체시위가 시작됐다.

김덕수씨(당시 JC 회장)를 중심으로 30여명의 JC회원들은 민주회복.독재자 추방.계엄해제등 5개항의 요구를 내걸고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오후 3-4시께 3천여명의 읍민들은 해남교육청 앞에서 성토대회를 갖고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이때 광주에서 6대의 차량에 분승한 시위대가 도착, 전남도청앞 집단발포소식을 전하자 열기는 더욱 고조됐다. 일부 청년들은 시위대와 합세, 광주로 향하고 일부 청년들은 20-30대의 차량을 동원, 인근면과 완도.진도 등지로 떠났다.

이들은 해남읍-삼산-화산-현산-북평-송지면 등을 경유해 밤 10시 완도읍까지 진출, 야간시위를 벌였다.

22일 시위대는 새벽부터 해남읍 인근을 돌며 시위를 벌이는 한편 오전에는 강진읍.목포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이들은 시위도중 계곡지서.옥천지서.월송지서 등 6개 지서에서 다량의 무기를 획득하고 오후 5시30분께는 해남경찰서 무기고를 습격, M1과 카빈 4백정을 탈취했다.

시위대는 당시 해남의 향토방위 부대인 31사단 93연대 2대대로 몰려가 실탄을 요구하다 결국 23일 우슬재에서 이 부대의 총격을 받게 된다.

검찰의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문건은 '우슬재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해남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2대대는 5월21일부터 22일 사이에 수차에 걸쳐 무장시위대가 부대에 접근, 무기와 탄약을 요구하였으나 야간에 부대를 습격하겠다고 돌아가자 2대대장은 부근 우슬재에 병력을 매복시키고 시위대의 습격을 대비하던중 23일 오전 5시30분과 10시께 두차례에 걸쳐 시위대와 계엄군간에 총격전이 벌어져 그 과정에서 박영철(27) 김귀환(나이불상)이 총상으로 사망하였음"

검찰의 이같은 발표는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과 사뭇 다르다.

김성윤씨(55.황산면 복지계장)는 사망자 수가 2명이 아닌 최소 4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사회과 보건계원으로 근무하던중 23일 오전 6시께 군부대로부터 사체를 수습하라는 연락을 받고 이날 새벽 총격전이 벌어졌던 우슬재와 상등리 고갯길에 가 보니 우슬재 정상 도로가에 사체 3구, 상등리에 1구가 각각 총상을 입은채 숨져 있었다. 이들을 군부대에서 지급해준 군복으로 갈아 입힌 뒤 연고자가 나타날 것에 대비해 군용천막을 치고 그 천막안에 사체를 안장해 두었다. 사태후 군부대에 가보니 현재의 수송부 자리에 4개의 묘가 쓰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또 당시 부대 기습 목적도 없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해남 청년들이 주축이 된 시위대들이 21일과 22일 군부대 앞에서 무기를 달라고 시위를 하긴했으나 22일밤 군부대에 대부분의 무기와 실탄을 반납한 상태였고 시위대로부터 무기탈취위협을 느껴 이를 방어하려 했다면 군부대 근방에 초소를 설치해야 마땅한 데 읍에서 군부대로 가는 도로와 전혀 관계없는 우슬재와 상등리에 초소를 설치해 놓고 시위대가 군부대를 습격하러 오기 때문에 발포했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해남 시위 참가자들은 당시 대대장 장윤태씨(중령.前광주시 북구의회 위원)를 95년 5.18학살자로 고발해 놓은 상태이고 해남신문 편집국장 박상일씨(40) 등을 중심으로 이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작업을 벌이고 있다.

해남과 지근거리인 강진에서도 항쟁의 불길은 타올랐다.

21일 오후 1시께 강진에도 광주시위대의 모습이 나타났다. 18일 끝난 도민체육대회에 참가했던 체육회 인사들은 광주의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광주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강진군민들은 체육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시위대에게 밥과 음료수를 제공하고 숙소를 마련해 주는 한편 시위대를 따라 인근지역을 돌며 시위를 벌였다. 당시 강진읍 교회 목사는 민주화투쟁으로 지명도가 높았던 윤기석 목사. 교회는 항쟁기간 이지역 항쟁의 본부역할을 하게 된다.

강진에서는 특기할만한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무기들을 이미 군부대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진은 장흥.보성에 항쟁의 열기를 전파하고 동참을 유도해 내는 역할을 해낸다.

보성에서도 21일 오후 2시 무장한 시위대 40여명이 트럭을 타고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벌교를 거쳐 이날 오후 10시께 완도까지 진출, 지서를 습격했다.

21일 전남 동부권 일부를 제외한 전지역에 전파됐던 시위 상황은 전교사 작전일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완도 5백-6백명 시위, 영광주민 25명 투항, 함평 군부대 총격피습, 완도 30명 군청 기습점거, 승주 20명 송지서 습격 -21일 밤 12시 상황-"

한편 계엄군은 광주 주요 외곽도로를 봉쇄한데 이어 2차로 각 지방도로를 차단, 무장시위대의 광주진출을 막는데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광주진입에 실패한 시위대는 우왕좌왕하기 시작했고 통일성 없이 각지방에서 각개약진 식으로 이루어진 항쟁은 광주상황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곧 지리멸렬해지고 말았다.

계엄군의 이같은 작전으로 전남 각지에서의 동시다발적인 항쟁은 불발로 끝나 버리고 광주는 더욱 고립무원의 지경에 빠지게 된다.
 

제 75회 무기반납
 
   Historical If. 즉 역사적 가정을 해보자. 5.18 당시 시민군이 계엄군에 무기를 반납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인명피해를 줄이고 항쟁을 평화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무방비상태에서 더욱 철저히 당했을까.

23일 오후 1시께 도청상황실 시민수습대책위.

"만약 우리가 무기를 자진 반납하지 않으면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광주시민 전체가 몰살당해 피바다가 될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무기를 반납하자"

"우리의 요구사항이 전혀 관철되지 않는 상황에서 무기를 반납하는 것은 시민들의 피를 팔아먹는 행위다. 무기반납을 절대 불가능하다"

무기반납 문제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양측 모두 계엄군 철수후 시민군이 총기를 휴대하고 다니는데 대해 상당수 시민들이 불안해 할뿐 아니라 총기사고등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에 총기를 회수하자는 데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회수한 총기를 반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온건파들은 잘 훈련된 계엄군과 결전을 벌이는 것은 대량의 인명피해만 야기할뿐이고 많은 시민들이 이미 지쳐있으며 계엄군으로부터 더 이상의 양보를 얻어낼 수 없는 상황에서 실익을 챙기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이라는 논리를 폈다.

반면 강경파는 회수된 무기를 반납하는 것은 완전투항을 의미할뿐 이제까지의 희생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맞섰다.

장휴동등 시민수습위측과 김창길 학생수습위원장은 무기반납에 찬성, 김종배(현 국회의원) 학생수습위 부위원장등은 무기반납 반대의 입장에 섰다.

"나는 그때 무기를 버리고 평화적인 시위를 하자는 쪽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끝까지 싸우는 것이 옳겠지만 그때 당시는 너무나 많은 인명피해를 봤기 때문에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같은 입장에 대해 김종배등 학생수습위원들은 "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구조건이 관철된 상태에서 반납이 고려돼야 한다"며 무기반납에 제동을 걸었다.

강경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조건은 대략 4가지.

▲희생자에 대한 장례식은 시민장으로 한다 ▲광주항쟁으로 인한 구속자는 전원석방해야 한다 ▲광주항쟁을 폭동으로 보도하고 있는 언론은 공개사과하라 ▲피해자 보상은 철저히 해야 한다 등이다.

논쟁을 계속하던 지도부는 문제가 타결되지 않자 그렇다면 회수된 무기중 일부를 전교사에 반납, 계엄군의 반응을 본 뒤 결정짓자고 의견을 모았다.

수습위는 이같은 방침에 따라 우선 8개항의 요구조건을 결정했다.

▲공수부대의 지나친 과잉진압을 인정하라 ▲연행자를 석방하라 ▲계엄군의 시가지 투입을 금지하라 ▲시민.학생의 처벌 및 보복을 금지하라 ▲사망자.부상자의 피해를 보상하라 ▲방송재개 및 사실보도를 촉구한다 ▲자극적인 어휘사용을 금지하라 ▲시외통로를 열어라.

요구조건을 결정한 김창길씨등 수습위 대표들은 23일 오후 그동안 회수된 무기중 2백여정을 갖고 계엄사를 방문했다.

이들은 "계엄사측에서 요구조건에 대해 확실한 보장만 해준다면 목숨을 걸고 무기를 회수하겠다"며 계엄사의 입장변화를 촉구하지만 계엄사는 묵묵부답이었다.

계엄군측은 위의 요구사항은 상부에 보고해야할 사항이지 자체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면서 확답을 회피하며 연행자 34명을 석방했다.

수습위 협상대표는 34명의 연행자 석방이란 전리품(?)을 가지고 도청으로 돌아왔으나 수습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온건파들은 협상이후 무기회수에 박차를 가했지만 강경파들은 요구조건을 하나도 들어주지 않은 상태에서 34명을 석방한 것은 기만책에 불과하다며 강경투쟁으로 선회했다.

이를 계기로 입장을 달리한 수습위는 분열하고 새로운 항쟁지도부가 등장하려는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한편 도청 수습위가 무기회수에 적극 나섰을 때 광주일원에서는 상반된 활동이 계속됐다.

이미 22일 오후부터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무기회수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영암등 광주인근지역에서는 다량의 무기탈취가 계속됐다.

지도부를 믿지 못하는 일부 시민군들이 광주외곽지역에서 계엄군의 만행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위를 위한 무기가 더 필요하다며 추가로 무기확보에 나선 것이다.

23일 오전 10시 영암군 도포에서는 도포지서에 보관하다 급하게 운반중이던 카빈소총과 실탄 2만1천4백여발이 시민군들에 의해 탈취되는등 화순.나주.영암 등지에서 무기확보투쟁이 오히려 치열하게 전개됐다.

도청내에서도 일부 시민군이 이미 무기를 반납하고 떠난 것과는 달리 무기회수 및 반납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광주 외곽지역 방위대를 구성하는가 하면 무기를 추가지급하는 등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진다.

심지어 수습위의 결정에 반발, 회수된 무기를 다시 지급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무기반납을 하느냐 마느냐는 선택사항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무기를 반납했다면 최소한 인명피해는 줄일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계엄군이 광주외곽에서 민간인 살상을 서슴치 않는 상황에서 무기반납이란 우리의 생명을 버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당시 새로운 항쟁지도부 위원장으로 선출된 김종배씨는 당시의 상황이 '선택이 아닌 필수'이었다고 회고했다.

무기반납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히 무기반납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결국 지도부를 개편, 새로운 항쟁지도부를 태동케 한다.

제 76회 항쟁지도부
 
   무기반납편에서 언급한대로 무기반납에 관련된 논쟁은 새로운 항쟁지도부를 탄생케 한다.

광주시민이 전남도청을 장악한 뒤 도청을 무대로 활약한 지도부는 대략 4개 그룹.

먼저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장휴동.최한영(독립운동가).박윤종씨(前시장)등 민관합동으로 구성된 15인수습위 그룹은 22일부터 24일까지 전교사측과 협상을 주도하는등 나름대로 수습활동을 폈으나 22일 오후 시민궐기대회를 기점으로 투항주의로 몰린후 지도력에 큰 상처를 입고 25일부터는 활동을 중단했다.

두 번째 그룹은 양심적 재야명망가를 중심으로 한 '남동성당'수습위. 홍남순.조아라.이애신.송기숙.명노훈.이기홍씨.김성용신부 등을 중심으로 한 이들은 도청시민수습위가 투항주의로 흐르고 있다며 도청수습위에 참여를 기피했던 세력.

세 번째는 학생수습위. 명노훈.송기숙교수를 고문으로 하고 위원장 김창길, 부위원장 김종배, 총무 정해민, 대변인 양원식.허규정 등 15명을 중심으로 결성돼 23일 오전부터 장례.차량통제 등 실질적인 질서유지를 담당하는 등 항쟁 전반기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네 번째는 도청에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윤상원.정상용(前 국회의원).김영철.정현애 등 학생운동 그룹. 이들은 항쟁초기에는 녹두서점과 YWCA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학생수습위원회를 지원하는 한편 잠적해 있던 학생운동권을 규합하는데 주력했다. 항쟁후반부 학생수습위를 장악하고 명실상부한 항쟁지도부를 결성, 광주항쟁을 이끈다.

22일 오후 시민 궐기대회에서 무조건 무기를 반납하자는 주장으로 시민들에게 배척당했던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23일 위원중 5명이 사퇴함에 따라 전남대.조선대생 10명씩을 추가, 30명으로 확대개편됐다.

남동수습위도 23일 도청 수습위에 합류키로 하고 도청을 방문했으나 세부적인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완전 합류에는 이르지 못했다.

5.18 당시 활동했던 제세력을 통합하는데 걸림돌은 물론 무기반납문제.

24일 밤 9시 실질적으로 항쟁을 주도했던 학생수습위가 도청에서 열렸다. 위원장 김창길이 "이날 오후 2백여정의 총을 반납하고 34명의 연행자를 석방케한 협상결과를 이유로 서둘러 무기를 반납하자"고 주장하자 부위원장 김종배는 "지금 이 시점에서 무기를 무조건 반납하는 것은 시민의 피를 팔아먹는 행위다. 계엄군이 피해자 보상등 이미 제시한 4개항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맞섰다.

심지어 일부 강령론자들은 의자를 집어던지며 "차라리 이런식으로 무기를 반납하자고 주장한다면 도청을 폭파하고 자폭하겠다"고 완강히 버텼다.

회의는 자정을 넘어서까지 계속됐다. 25일 새벽에는 학생수습위원들중 일부가 상호의견 충돌로 조직을 이탈하기도 했다. 김창길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와 김종배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의 의견이 좁혀질줄 몰랐다. 급기야 강경파들이 온건파의 투항주의를 비판하며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할 것을 검토하게 된다.

이에 앞서 24일 오후2시 전남도청앞에서 열린 제2차 범시민 궐기대회에 참여한 10만여명의 시민들이 보여준 투쟁열기는 강경파의 입지를 넓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날 도청앞에 모였던 시민들은 이구동성으로 투항주의로 흐르는 수습위를 성토하면서 끝까지 투쟁할 것을 지도부에 요구했다.

김종배는 25일 새벽 윤상원과 논의한 끝에 유인물제작 등 주로 선전활동에 주력하며 YWCA를 무대로 활하고 있던 정상용.윤강옥 등 운동권 출신 1백여명을 도청으로 합류시켰다.

김창길은 김종배에게 "도대체 당신은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 작정인가"라며 거칠게 항의했다.

한참동안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으나 결국 김창길은 자신의 주장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자 학생수습위원장직을 내놓고 도청을 빠져나갔다.

이렇게 해서 온건파는 도청을 모두 빠져나가고 강경파가 도청을 장악했다. 명실상부한 항쟁지도부가 탄생한 것이다.

위원장 김종배, 내무위원장 허규정, 외무위원장 정상용, 대변인 윤상원, 상황실장 김남선, 기획위원 윤강옥.이양현 등이 임원으로 선출됐다.

"수많은 시민들이 민주화를 부르짖다 숨져갔고 목숨을 걸고 도청으로부터 계엄군을 물리쳤는데 아무런 조건없이 무기를 반납하자는 것은 투항이었습니다. 당시 학생수습위에서 숨진 영령들을 시민장으로 하고 피해자에게 보상해 달라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계엄사측이 최소한의 요구를 수용할 기미가 없자 학생수습위 일부와 시민군들이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우자고 결의한 겁니다. 그래서 새로운 항쟁지도부가 결성된 것이지요. 지금도 그 당시 숨졌던 동지들을 금남로에서 시민장으로 치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 항쟁지도부 위원장 김종배씨의 회고다.

항쟁지도부는 전교사측과 어떠한 협상도 거부키로 하고 계엄군과의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옥쇄의 결의를 다진 이들은 각 동별 예비군을 동원, 시민군 조직을 강화하는 한편 부패돼 가는 사체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 29일 장례식을 치르기로 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26일 도청내 시민군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동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됐다. 계엄사 측으로부터 "이제 더 이상 기다릴수 없다"는 최후의 통첩이 여러차례 왔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4시께 마지막 협상차 전교사를 방문했던 조비오신부 조아라여사 등이 항쟁지도부에 들러 "계엄사에서 도저히 요구사항을 들어줄수 없다며 오늘밤 군을 투입한다는데 어쩌면 좋으냐"며 눈물로 협상결과를 설명했다.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모두 죽더라도 도청에서 죽자"는 결의를 재확인했지만 상당수의 시민군이 도청을 빠져 나갔다.

3백여명의 시민군만이 도청에 남아 27일 새벽을 맞는다.

당시 도청을 사수했던 윤강옥씨(47.前5항동 회장)는 "25일 항쟁지도부결성은 처음으로 총을 들었던 시민군과 지도부의 뜻이 일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도청을 접수한다는 최후통첩이 왔어도 피하지 않고 목숨을 내던졌던 그 자체가 광주항쟁 정신과 모든 것을 같이합니다"라고 도청 마지막날의 그 비장했던 분위기를 전했다.

제 77회 양민학살
 

   23일 오전 '한정된 평화' 속에서 수습위가 무기반납을 둘러싸고 내홍을 겪고 있을 무렵, 신군부는 철저한 광주 외곽 봉쇄작전에 돌입했다.

'무기를 휴대한 폭도들의 봉쇄선 이탈 절대 거부' (20사단 전투상보) 외곽으로 빠져 나가려는 '폭도'들에게 사실상의 사살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이 와중에서도 광주 인근지역으로 피난을 가려던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을 당하게 된다.

양민학살의 대표적 사례는 주남마을 사건.

23일 오전 화순으로 빠지는 길목인 지원동 주남마을.

시민과 학생을 태운 채 군의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화순방면으로 달리던 미니버스가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고막을 찢을듯한 총성.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비명과 신음, 살려달라는 절규, 그리고 피를 타고 터져나온 내장.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10여명이 숨지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

곧이어 이미 숨진 10여명에게 확인 사살이 가해지고 3명의 부상자중 2명에겐 전시에서나 있을법한 '즉결심판' 처분이 내려졌다.

이른바 주남마을 양민학살 사건.

오빠를 찾기 위해 나섰다가 이 버스에 탑승한 유일한 생존자 洪錦淑씨(33)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총격이 끝난후 3-4명의 군인들이 버스 안으로 올라와 군홧발로 툭툭 차면서 생사여부를 확인했다. 눈을 다친 남자 1명과 상처가 심한 교련복 차림의 청년, 그리고 나 3명만 살아 있었다. 경운기에 실려 산속의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높은 사람'이 두 사람을 가리키며 "처리해버려"라고 명령하자 잠시후 산중턱에서 두발의 총성이 울렸다"

홍씨의 계속되는 증언. "버스에 탄 숫자가 정확히 몇 명인지는 모르지만 총소리가 그치고 군인들이 버스 안으로 들어와 널브러진 사람들을 툭툭 차며 생사여부를 확인할 때 '모두 18명'이란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당시 녹동마을에 살고 있던 金鍾華씨(49.현재 경남 마산 거주)등과 주남마을 주민들은 다음날인 24일 오전에도 같은 장소에서 11명의 양민이 학살됐다고 증언하는 등 제2의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검찰은 이를 단일사건으로 간주하고 있다.

주남마을 학살 이외에 계엄군이 자행한 양민학살의 극치는 송암동 사건.

철부지 어린아이에게까지 총부리를 겨눈 이 사건은 계엄군의 만행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극단적 사례다.

24일 오후 1시30분께 주남마을을 출발한 11공수여단 선두는 光木간 도로앞 효덕국교 삼거리 부근에 이르렀다. 트럭을 타고 있던 10여명의 무장시위대가 발결되자 곧바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서 인근 원제 저수지에서 멱을 감던 房광범군(당시 13세.중1)과 길가 韓氏선산에서 놀고 있던 全재수 어린이(당시 10세.초등4년)가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됐다.

당시 상황을 재수군의 형 재룡씨(37)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현장으로 달려가 보니 동생의 몸은 이미 총격에 일그러진 채 숨져 있었다. 韓氏선산과 공수부대가 지나던 도로와는 지근거리였다.

형 재룡씨의 말처럼 11공수여단이 지나간 도로와 재수군이 놀던 韓氏 선산과는 불과 50m거리. 아무리 긴박한 상황이었다 할지라도 어린이란 것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거리였다. 계엄군은 철부지 어린아이에게까지도 총을 겨눈 것이다.

송암동 사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잠시후 오후 2시께 선두였던 11공수 63대대가 효천역앞에 이르자 이들을 무장시위대로 오인한 전교사 보병학교 병력이 이들에게 90㎜무반동총 4발을 발사하는 등 집중사격을 가했다. 63대대도 즉각 응사했다. 계엄군간 오인사격이 벌어진 것이다. 이로인해 63대대 병력 9명이 숨지고 33명이 부상을 당하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에 격분한 63대대는 무고한 송암동 양민을 상대로 분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남녀노소가 없었다. 무장시위대를 수색한다는 미명아래 가가호호에 난입, 젊은 청년 3명을 철로변으로 끝어냈다. 이때 權근립씨(당시 33세)등 3명이 계엄군에게 총상 당했으며 주부 朴연옥씨(당시 50세)도 무차별로 쏟아지는 총탄세례를 피해 도로가 하수구로 피신하다 계엄군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이같은 계엄군의 양민학살은 광주교도소 인근. 화정동 국군통합병원 주변등 광주외곽지역 도처에서 자행됐다.

결국 신군부에 있어 시위참여 여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광주안의 모든 사람들은 '폭도'였을 따름이었다. 그들의 사전에 '양민'이란 단어는 애초에 없었다.

제 78회 시민군 와해노린 조작극
 
   신군부는 광주외곽을 봉쇄한 한편 시민군의 요새인 도청에 요원들을 투입 시켜 시민군을 이간질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했다.

신군부의 시민군 교란작전의 대표적인 사례가 도청 독침사건.항쟁지도부가 강·온파로 갈려 심각한 대립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 독침사건은 시민군의 결집력을 약화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 보수언론을 통해 타지역 사람들에게 광주민중항쟁을 일부 불순분자들의 폭동으로 왜곡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합동수사본부에 의해 독침사건 용의자로 4년형을 선고받은 시민군 金용균 씨(당시 23세)의 증언을 들어보자.

『25일 아침 8시께 張계범(당시 21세)이란 사람이 어깨를 움켜잡고 도청 농림국장실로 허겁지겁 들어온 뒤 「독침을 맞았다」며 죽어갈 듯 고통스 런 표정을 지었다. 경비중이던 시민군 신만식(방위병)이 어깨를 살펴보려 고 다가서자 張계범은 「너는 필요없어, 鄭형에게 부탁하네」라며 항상 함께 움직여온 鄭형규(23)를 지명했다. 鄭형규가 장계범의 등을 빨더니 진 짜 독침이라며 입에서 빨았던 피를 뿜어냈다.』

당시 도청에서 치안본부장으로 일했던 金양오씨는 자신의 육필수기인 광 주 보고서에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순간 이들이 프락치임을 느낀 나는 鄭형규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잠시후 鄭형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나의 다리를 붙잡고 빌기 시작했다.

당 시 용공계를 맡고 있던 책임자에게 全大병원으로 張계범 일당을 옮기고 철저히 감시하라고 말했다. 이사건이 나자 외부에 알려지면 시민군이 간 첩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왜곡될 수 있었기에 철저한 보안명령을 내렸다 』

張계범을 全大병원으로 옮긴 뒤 도청에서는 독침을 놓고 지도부가 설전 을 벌이고 있었다.볼펜을 두 동강이 내 한쪽에 나무를 끼워넣었고 그 한가운데에 바늘을 꽂 아놓았다. 바늘 끝에는 노란 액체가 묻어 있었다.이 독침(?)의 소유자는 潭陽에 살고 있던 재수생 金용균군. 그러나 이 독침 은 金군이 호신용으로 쓰기위해 장난삼아 갖고 있던 물건으로 하루전에 분 실한 것으로 판명됐다.

한편 당시 全大병원 담당의사 鄭종길씨(현재 여수 전남병원 근무)를 통해 張계범의 증상을 알아보자.

『의사들은 독침에 접해볼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독침에 맞은 환자를 치료한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의학상식으로 독침에 맞으면 혈압이 떨어 진다거나 의식불명 등의 상태가 나타나게 마련이지만 당시 張계범은 그런 증상이 전혀 없었다』

의사가 진료일지에 적은 張계범의 이상 가능성은 3가지

▲독극물 중독(가능하나 의심스럽다)

▲벌레물림

▲입으로 빤 부위에서 나타나는 피부발진 등이다.

의무기록실 기록에도 독침을 맞았다는 부분은 오른쪽 어깨부분이며 지름 3㎝가량의 피부발진이 있었고 혈압과 맥박은 정상이었다고 장씨의 상태를 적고 있다. 즉 張계범에게는 특별한 증상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떳떳하다면 병원을 빠져나갈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도 병원에 온 지 한시간 만에 병원을 빠져나갔다.

全大병원을 빠져나간 이후 張계범의 행적을 살펴보자. 그는 병원에서 나 온 직후 보안대에 자수했다. 계엄군이 도청에 진입한 27일 새벽, 계엄군에 체포돼 상무대 연병장으로 끌려간 시민군들은 깜짝 놀랐다.張계범이 병원에서 탈출한 옷차림 그대로 얼굴만 수건으로 가린 채 항쟁지 도부 간부 색출작업을 돕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尹석루 당시 기동타격대장은 『張계범은 상무대에서 담배를 피우며 활보하고 다녔고 군인들은 수사가 막힐 때마다 張계범을 불러 대질신문을 했다 』고 張씨의 행적을 낱낱이 소개했다. 張계범이 신군부의 프락치였음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제 독침사건의 장본인 張계범의 주장을 들어보자.

그는 최근 모방송사의 특집프로에 출연 『사건당일 아침 어깨 부위가 뜨끔해서 쓰러졌는데 깨어보니 병원이었다. 鄭씨에게 독침을 빨아달라고 부탁 한 것은 평소 친하게 지내왔기 때문이었다』고 변명했다.

그는 또 병원을 서둘러 빠져나간 이유에 대해 신변에 위험을 느껴서라고 대답했으며 상무대에서 지도부색출작업에 앞장선 것은 부모님이 보안대에 인질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莞島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鄭형규씨도 『며칠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데다 여름이라 몸에서 냄새도 많이 나 張씨의 등에 엎드려서 한참 을 빨다 보니까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쓰러진 것 뿐이다. 張계범이 진짜 독 침에 찔린 것인지는 나도 알 수 없다』고 아리송한 말만 되풀이 했다.그러나 이들의 말을 1백% 믿는다 할지라도 숱한 의문이 남는다.

독침사건이 나자 도청지도부는 외부에 알려지면 시민군이 간첩에 의해 조 종되고 있다고 비쳐질 수 있다며 이 사건을 철저히 보안에 부쳤는데도 사건 직후 전남대 병원에 취재진이 몰려들었고 이날 저녁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이 독침사건을 대대적으로 다뤘다.또 이들이 첩자였음을 결정적으로 밝히는 증언이 있다.

당시 치안질서반원으로 활동하면서 새로 구성된 항쟁지도부의 조사부장을 맡았던 金준봉씨의 증언.『독침사건이 있던 전날 밤 9시께 칠흑같은 어둠속에 소나기가 내리는 것을 보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사무실 한켠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張 계범 일당이 손전등을 켜 놓고 무전기를 조작하고 있었다.

손에는 동물이름과 이상한 이름이 짝지어진 암호문이 들려 있었고 그 암호문을 보며 주 파수를 이리저리 맞추고 있었다. 무전기에서는 그때마다 군인들의 목소리 가 들려나왔다.어디론가 교신중인 듯 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그들은 황급히 하던 일을 중단하고 무전기를 밖으로 가지고 나갔다』張계범은 무전기를 가지고 신군부와 꾸준하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다. 사실 독침사건의 진상은 아직도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다.

張계범이 신군 부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었으며 그 연결고리는 무엇인가가 밝혀져야 할 것이다.아무튼 독침사건은 시민군 내부는 물론 광주시민들을 불안에 떨게 했으며 광주항쟁이 외부 불순세력에 의한 난동으로 왜곡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제 79회 道廳 폭탄뇌관제거
 
   중무장한 계엄군에게 대항하기 위해 시민군들이 광주인근 지역을 돌며 무기확보에 나선 결과, 상당수의 무기와 폭약을 확보하게 된다.

당시 도청 시민군의 화력은 기관총.카빈소총.M1소총등 총기류 2천5백여정, 수만발의 실탄, 다이너마이트등 폭약류, 이중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다이너마이트.

특히 대한석탄공사의 화순광업소 광부들이 8t트럭 분량의 다이너마이트와 도촉선(콤포지션)을 싣고 光州에 와 전남도청 안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한 것은 계엄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다.

광주와 인근지역에서 구한 모든 총기와 탄약류는 일단 도청 2층 식당에 모아졌고 그중 폭약류는 다시 지하실로 옮겨졌다.

이를 관리했던 팀은 폭약류 관리반.

폭약반으로 활약했던 梁홍범씨(당시 20세)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현해보자.

당초 폭약반은 9명으로 시작됐다. 23일 梁씨를 포함한 9명이 처음으로 회의를 열고 위험한 물건이니만큼 철저히 지켜야 하니 원치않는 사람은 폭약반에서 나가라고 하자 2명이 나가고 7명이 남았다. 이후에도 2명이 줄어 항쟁 마지막까지 폭약반에 남은 사람은 모두 5명. 文영동.金영복.梁홍범.朴선재.姜남열씨였고 이중 文영동과 金영복씨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폭약류량은 약 리어카 2-3대 분량. 폭약반은 도청내의 사람들에게도 접근이 쉽지 않았다. 자그마한 실수로 지하에 있는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면 도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인근 지역이 폐허로 변하기 때문이다.

폭약반은 폭약반출을 철저히 금지했다. 어쩔 수 없이 폭약을 주어야 할 경우에라도 폭약을 박스에 반정도만 채우주었고 그럴때마다 책임자들을 불러 함부로 사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막무가내로 폭약을 가져가려는 사람들과 싸움을 벌인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 와중에서 소위 '계엄군과 내통'으로 알려진 뇌관제거 사건이 벌어졌다.

25일 오전 10시께.

폭약관리반 文영동.金영복씨등 3명이 지프를 타고 상무대로 들어갔다. 文씨 등은 당시 전교사에서 金基錫 부사령관을 만나 "우리는 도청에서 폭약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신분을 밝힌 뒤 "폭약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뇌관을 분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이들은 그 증표로 다이너마이트 뇌관 6백-7백개를 가져갔다.

文씨 등은 이날 오후 2시께 도청으로 돌아와 동료들에게 이같은 사실을 알리고 전교사에게 문관이 파견될 것이라고 했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문관파견을 요청한 文씨에게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기도 했으나 폭발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뇌관제거를 해야한다는데 폭약반 모두가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이날 밤 9시께 폭약 제거를 위해 문관 1명이 들어왔다. 문관은 사복을 입었었고 몽키스패너 2-3개와 작업도구를 가져왔다.

그 문관은 촛불을 켜고 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신형 수류탄과 이미 조립해 놓았던 다이너마이트의 뇌관 분리작업을 했다. 새벽1시까지 일을 했으나 폭약이 워낙 많아 그날밤 일을 다 마치지 못했다.

일을 끝내지 못한 문관은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金영복씨의 안내로 도청을 빠져나갔다.

문관은 다음날인 26일 오전 다시 도청에 들어와 폭약반들과 함께 뇌관분리작업을 완전히 끝내고 오후1시께 상무대로 복귀했다.

지하실 폭탄의 뇌관이 제거된 사실이 도청내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은 "폭약관리반이 계엄군과 내통했다}고 비난을 서슴지 않았으나 폭약관리반원들은 이에 당당하게 맞섰다.

그들은 지하실에 있던 폭약류가 너무나 위험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선의에서 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이들이 폭약류를 사용 가능하게 보관했더라면 계엄군 진입 당시 시민군이 이를 사용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럴 경우 光州는 쑥대밭이 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뇌관을 제거해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했던 이들의 행동은 계엄군과의 내통이라기 보다는 시민을 위한 충정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梁씨는 "뇌관을 제거해 안전하게 보관한 자신들이 역사의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며 "지금도 폭약반이 했던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사실 도청 지하실의 폭발물 뇌관 제거는 전교사 金基錫 부사령관과 도청항쟁지도부와의 교감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金基錫 전교사 부사령관은 96년 7월 15일 5.18 22차 공판에서 나와 "전교사 부사령관으로서 광주시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판단아래 25일 항쟁지도부에 직접 전화를 걸어 폭약반을 소개받았고 이날 오후 폭약반 대표 文영동씨등 3명을 만난 뒤 뇌관제거를 위해 특수요원 파견에 합의했다"고 증언했다.

또 지난 85년 6월 7일 尹誠敏 국방장관이 국회 국방위에 출석, 발표한 '光州사태 보고'라는 문건에도 "도청지하실에 모아둔 폭발물의 폭발방지를 위해 폭약반의 양해아래 특수요원 투입, 폭발물의 뇌관과 신관을 분리하는데 성공, 광주시의 파괴를 미연에 방지했다"고 밝힘으로써 신군부와 항쟁지도보와의 사전교감설을 확인해 주고 있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취해졌던 뇌관제거. 결국은 계엄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계엄군이 재진입하면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리겠다며 버텨왔던 시민군. 마지막 보루였던 폭약류의 뇌관이 제거되자 도청은 이제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신군부는 그들의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폭약류 뇌관이 제거되자 상무충정작전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제 80회 충정작전
 
   ▲작전 일시:27일 새벽 0시1분.

▲작전개념:조기진압. 공수부대는 광주시를 3개지역으로 분할, 타격 소탕 한뒤 20사단에 인계후 퇴각한다.

▲타격대상:남도청(3공수여단), 광주공원(7공수여단), 전일빌딩(11공수 여단), 기타 광주시내 주요거점.

▲투입부대:3공수·7공수·11공수·20사단·31사단·전교사 예하 소속부대. 이 모든 작전은 전교사 蘇俊烈 사령관의 지휘아래 실시된다.(전교사 전 투상보)

상무충정작전은 시민군에 의해 장악되고 있는 光州를 탈환키 위한 작전으 로 27일 새벽 0시1분을 기해 실시돼 이날 새벽 5시10분 완료됐다.

작전결과 해방 광주는 막을 내리고 계엄군이 光州를 장악한다.충정작전이 잉태되는 과정에서부터 실행되는 과정까지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작전이 수립되기까지 군수뇌부의 움직임은 광주항쟁에 대한 유혈진압 책임을 규명하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우선 당시 현지에서 작전을 책임지고 있었던 蘇俊烈 전교사 사령관의 국회 증언을 살펴보자. 그는 88년 12월 19일 국회청문회에서 27일 충정작전 입안과정에 대해 다음 과 같이 증언했다.

▲진압작전은 22~24일 동안 대화를 통해서 사태수습을 노력하다 실패로 돌아가자 25일 자신이 구상했으며 육본에서도 지시가 내려왔다.

▲22일 2군에서 평정 진압작전 건의서를 올린 것은 자신은 모르는 사항이 다.

▲27일 작전은 당시 작전참모 白南伊·金순원장군이 자문을 해준 것이다.

▲전교사 사령관으로 내려올때인 20일 전화로 黃永時 육군참모차장으로부 터 9월 군단장 인사때 보직과 관련된 진급을 언질받은 적이 있다.

蘇씨의 증언을 1백% 믿는다해도 광주현지사태를 잘 모르는 2군 사령부가 전교사와 상의없이 22일·23일자로 진압작전을 하겠다고 육본에 건의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할수 없는 일이다.

이뿐아니라 그의 증언은 육본의 소요진압과 그 교훈이라는 문건과도 상치하는 부분이 많다.육본의 소요진압과 그 교훈상에 나오는 충정작전 수립과정을 날자별로 살펴보자.21일 李熺性 계엄사령관실에서 계엄관계 지휘관 및 참모회의를 열어 光州 사태의 대책을 논의, 자위권 발동을 지시하고 계엄군의 외곽 재배치후 폭도 소탕작전은 23일 이후 명에 따라 실시할 것을 결의.

22일 2군사령부는 육본에 23일 조기진압을 주개념으로 하는 충정작전실시 를 건의했으나 충정작전은 한미간 협의사항이니 작전을 24일까지 연기할 것을 지시.

23일 8시50분 李熺性 계엄사령관실에서 陳종채 2군사령관과 관계참모가 참석, 蘇俊烈 장군이 작성한 충정작전을 중심으로 소요진압 작전회의 를 개최, 공수부대는 光州시를 3개지역으로 분할 장악한 뒤 20사단에 인계 하고 퇴각한다는 내용을 확정.

25일 오후12시15분 全斗煥 보안사령관, 盧泰愚 수경사령관, 周永福 국방장관, 李熺性 계엄사령관, 黃永時 육군참모차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蘇 俊烈 전교사령관 책임하에
27일 새벽0시1분 이후에 충정작전을 실시할 것 을 최종결정.26일, 22일부터 미국측과의 협상을 시도한 결과 이날 오후4시 미군의 최종승낙을 받아내자 李熺性 계엄사령관이 충정작전 지침 하달.

27일 충정작전 실시.

육본의 소요진압과 그 교훈이란 문건은 21일 이미 충정작전 실시를 결정했고 23일 소요진압 회의에서 논의된 충정작전의 내용(광주를 3 개권역으로 분리, 접수한 뒤 공수부대는 20사단에게 인계하고 퇴각한다는 부분)이 실제 27일 작전 과거의 일치함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25일 자신의 구상하에 작전을 결정했다는 蘇씨의 증언은 당시 계엄군이 시민항쟁부와 협상을 시도하다가 불가피하게 진압작전을 실시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충정작전과 광주항쟁 金泳鎭著)또 蘇씨가 20일 黃永時 육군참모차장으로부터 진급에 대한 언질을 받았다 는 증언은 신군부가 22일 오전10시 무력진압에 반대해 오던 尹興禎 전교사 사령관을 경질하고 蘇俊烈씨를 신임 전교사사령관으로 발령하면서 무력진 압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육본의 문건과 蘇씨의 증언을 비교해 볼 때 충정작전의 수립과정에서 몇가지 중요한 사실을 도출해 낼수 있다.

첫째, 진압작전의 세부계획은 22일 발령을 받은 蘇俊烈 전교사 사령관이 입안, 2군사령부를 거쳐 육본에 보고됐으며 주요 작전개념은 조기진압이었다.

둘째, 실시 시기만 남겨두었을뿐 무력진압을 결정한 시점은 21일이었다.

셋째, 작전개시일이 27일로 연기된 것은 한미간 협의를하기 위함이었으며 부차적으로 주도면밀한 준비를 위한 것이었다.

넷째,충정작전은 全斗煥·盧泰愚등 신군부 실세들이 참여, 최종결정했다.

다섯째, 미국은 충정작전에 찬성했다.

결국 신군부는 애초부터 수습위와 협상을 통한 평화적 수습은 염두에 두 지 않았고 계엄군을 광주외곽으로 재배치한 직후부터 무력진압을 실시할 것 을 준비한 것이다.

최종적으로 미국의 승인을 얻어내 거칠 것이 없었던 신군부는 부대를 재배 치하고 병력을 확장한 뒤 D데이 H아우어를 기다린다.

제 81회 계엄군 진압작전  
  
 D-1. 26일 오후4시 蘇俊烈사령관등 진압군 수뇌부들은 전교사 상황실에 서 마지막 작전회의를 열고 27일 새벽1시를 H아워로 최종결정했다. 이에따라 도상훈련을 마친 공수요원들도 그들의 상징인 위장복을 벗고 일 반 군복으로 갈아입은 뒤 헬멧에는 피아를 구분키 위한 하얀 천을 둘렀다. 또 기동성 확보를 위해 군화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출동명령이 내려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27일 새벽 1시. 폭도들에 의해 점령된 光州를 재탈환하기 위한 계엄군의 충정작전이 시작됐다.

도청내 3백여명에 불과한 폭도를 소탕한다는 미명하에 특전사 3천3백 27명, 20사단 4천6백37명, 31사단 1천1백95명, 전교사 3천5백2명 모두 1만2천6백62명의 대병력이 일시에 투입됐다.(계엄사 전투상보)

충정작전의 핵심인 全南도청탈환은 3공수여단에 주어졌다. 새벽 1시50분께 조대뒷산에 도착, 도청 진입을 기다리던 3공수 특공대 77명은 이날 새벽 3시30분 도청 으로 은밀한 이동을 시작했다. 같은시각 7공수여단 (광주공원)과 11공수여 단도 목표물(전일빌딩·관광호텔)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외곽에서는 보병 20사단이 鶴동과 瑞坊쪽에서 光州를 옥죄어 들어왔고 나 머지 31사단과 전교사 병력은 외곽 주요지점의 경비를 맡았다.

이같은 계엄군의 움직임을 탐지한 항쟁지도부는 시민군 2~3명씩 조를 짜 도청 건물 곳곳에 배치하는 한편 朴영순(20)·李경희(21) 등에게 가두방송을 지시했다.

새벽공기를 깨고 시가지에 퍼진 목소리. 『시민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모두 일어나 끝까지 싸웁시다』 이같은 호소를 비웃기라도 하듯 계엄군은 계획대로 주도면밀하게 작전을 수행해 나갔다.

가장 먼저 목표지점에 도착한 부대는 7공수. 7공수는 이날 새벽 4시께 시 민군의 본부였던 光州공원에 도착, 시민군과 치열한 교전 끝에 공원을 장 악했다.

4시10분. 3공수 특공대가 도청에 도착했다. 계엄군이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시민군에게 『폭도들에게 경고한다. 너희들은 현재 완전히 포위됐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고 최후통첩을 하는 순간, 시민군이 발사한 총탄에 서치라이트가 박살났다.

콩 볶는듯한 총소리와 함께 계엄군의 파상공세가 시작됐다. 도청뒷담을 넘어들어온 특공대는 일단 도청 옥상을 점령하고 시민군에게 무차별 총탄 세례를 퍼부었다.

이때부터 약 1시간 동안 시민군과 특공대의 교전은 불을 뿜었다. 그러나 구식 무기인 카빈소총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M16으로 무장한 최정예 부대 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11공수도 5시15분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전일빌딩 과 관광호텔을 확보한 11공수는 도청을 측면에서 지원하라는 지시에 따라 이동하다 YWCA 건물앞에서 시민군 30여명을 만났다. 계엄군들은 일단 전 일빌딩 골목에서 일제사격을 한 뒤 건물내로 진입해 3명을 사살하고 29명 을 체포했다.

도청에서 계엄군과 시민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을 때 鶴동쪽에서 들 어오던 20사단이 전대병원 옥상으로부터 총격을 받았으나 간단히 제압하고 도청으로 향했고 瑞坊쪽에서 진입하던 20사단 병력도 鷄林국교 부근에서 시 민군과 조우, 일대 교전 끝에 시민군 1명을 사살하고 포로 16명을 붙잡은 뒤 도청으로 진격했다.

5시30분 3공수여단 특공대가 도청을 완전장악할 무렵 瑞坊과 鶴동쪽에서 도청을 향해 진격해 온 20사단이 도청앞에 도착했다.

20사단 병력은 특공대와 함께 도청안에 있는 시체들을 끌고 나와 현관앞에 늘어놓았으며 시민군 포로들의 손을 뒤로 묶은 뒤 땅바닥에 엎드리게 했 다. 계엄군은 조금이라도 움직인 포로들에게 가차없이 발길질을 해댔다.

계엄군은 시민군의 등에 매직으로 「총기소지」 「극렬」 「실탄소지」라고 쓰면서 「폭도」를 분류했다.

7시 도청과 전일빌딩·YMCA등 주요건물들을 완전장악한 공수부대는 20사단에게 주요거점을 인계하고 철수했다.

27일 충정작전 결과보고에는 무장난동자 사살 17명, 화기수거 3천1백3정 , 체포 2백95명, 피해 전사 2명, 부상 12명으로 기록돼 있다.(전교사 작전일지) 계엄사의 발표대로 이날 작전으로 숨진 시민군이 17명밖에 안 될까. 당시 도청안에 있었던 시민군은 최소 2백70명선(전교사 蘇俊烈사령 관의 국회청문회 증언).

全南도청에 있다 버스로 상무대에 연행된 사람은 1백50~2백명선(45인승 버스 3대로 연행해 갔음). 蘇씨의 증언대로 도청에는 2백70명이 있었다고 가 정해보자. 버스에 실려 연행된 사람은 최대 2백명. 계엄군이 주장하는 사망 자 17명을 뺀다 하더라도 약 50여명의 행방이 묘연하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시민군 기획위원 尹江鈺씨는 『내가 본 시체만도 30여구가 넘었다. 또 계엄군이 도청을 완전 포위하고 공격을 해 왔기 때문에 나는 날아가는 재주가 없는 한 도청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당시 도청에 남은 사람은 약 3백명이었고 상무대에 연행된 사람이 약 2백명이었 다. 계엄군이 도청에 재진입했을때 최소 1백여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생각 한다』며 계엄사의 17명 사살 발표에 강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曺비오 신부도 『27일 새벽 光州공원에서도 요란한 총소리가 30분이상 계속됐다』며 『시민군 본부였던 공원에서도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여학생의 애절한 호소에 잠을 깬 시민들은 총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 하다가 아침을 맞았다.

시민들은 『전 공무원은 7시30분까지 출근하라』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서야 상황이 끝난줄 알게됐다.

출근길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날 아침 도청앞에서는 군가가 울려펴 졌고 곧이어 탱크를 앞세운 트럭들이 집총한 군인들을 태운채 시가지를 돌 며 위력시위를 벌였다. 직장으로 향하는 시민들의 마음은 공포와 울분이 뒤섞였다.

제 82회 상무대 영창
 
    全南도청 진압이 완료된 이후 光州전역에는 검거선풍이 몰아쳤다.
光州를 재탈환한 계엄군이 5·18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재야인사 및 시 민군, 학원사태로 이미 수배를 받아온 학생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 섰기 때문이다.

검거된 사람들은 모두 505 보안수사대로 끌려가 수사를 받고 상무대 영 창에 감금됐다. 당시 상무대 영창은 27일 계엄군의 光州재탈환이후 검거선 풍으로 끌려간 사람들 외에 예비검속자, 시위를 하다가 붙잡힌 사람들로 이미 넘쳐나고 있었다.

당시 상무대에 끌려간 사람들은 크게 3부류. 17일 예비검속으로 연행된 예비검속자, 시위도중 연행된 시위연행자, 27일 진압작전이후 체포된 시민군.

예비검속자는 대부분 17일 자정. 비상계엄 전국확대에 따른 예비검속으로 붙잡혔다. 鄭東年씨등 8명이 505보안대에 끌려갔고 같은날 全南大등 대학 캠퍼스에 남아있던 대학생 1백12명이 대학을 점령한 7공수에 의해 31사단 헌병대에 인계됐다.

시위자 연행은 7공수여단이 시위진압작전에 투입된 18일 오후4시부터 공수부대가 시외곽으로 철수한 21일 오후5시까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全南大, 舊공용터미널 주변에서 잡힌 사람은 全南大에, 도청등 시내에서 검거된 사람은 朝鮮大에 수용된 뒤 상무대로 넘겨졌다.

시위연행자는 대략 1천5백명선. 27일 충정작전때 항쟁지도부등 시민군 2 백95명이 체포됐으며 27일 이후 추가로 3백여명이 상무대로 끌려갔다.

계엄사는 80년 7월 3일 광주사태 중간수사결과를 발표를 통해 5·18과 관련돼 연행된 사람은 모두 2천2백여명이라고 밝히고 그중 1천8백25명을 훈방했으며 죄질이 무거운 3백75명은 구속했다고 덧붙였다.

3백75명의 면면은 金大中으로부터 5백만원의 데모자금을 받아 사태의 발 단을 일으킨 鄭東年과 金大中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주동자에게 주어 투쟁 을 계속하도록 한 洪南淳등 배후조종자 53명.

총기를 탈취하고 光州교도소를 습격하는등 무장폭도화하여 교전한 李금 영등 30명. 무기를 휴대하거나 기타 무기를 가지고 군.경과 대항, 살상을 감행한 申만식(22)등 174명. 세무서,방송국 등 공공건물을 방화하고 중요 시설 및 재화를 약탈한 梁승희(20)등 33명. 악성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 면서 악질적인 배후선동을 한 全春心(31)등 10명. 기타 기물파괴 및 시위적극 가담자 75명이라고 밝혔다.

이들 375명은 상무대에서 계엄군의 만행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군부의 사전각본에 따라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보안부대 수사관들이 신군 부가 이미 짜놓은 각본에 맞추기 위해 이들에게 가혹행위를 서슴지 않았 던 것이다.

한국의 아우슈비츠 상무대 영창.

505보안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해직되는 비운을 맞았던 宋基 淑 全南大 교수는 『전시의 포로들도 이같은 대접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일반연행자는 물론 대학교수들에게까지 몽둥이 찜질등 무자비한 고문을 가 했다. 수사관들은 교수들에게 전두환 정권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문이외에 화장실에서 밥먹게 하기, 팬티만 입게하기등, 주로 수치심을 유발하는데 혈안이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상무대에서 자행된 가혹행위는 다양했다. 곡괭이로 찜질을 하는 구타를 비 롯, 손목에 수갑을 채워 천장에 매달아두기, 물고문, 손톱밑 바늘로 찌르 기, 백열등을 이용한 고문등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기술이 총동원됐다. 고문에 못이겨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속출한 것만 보다도 합수부 의 고문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것이었는가는 짐작할수 있다.

내란수괴를 몰린 鄭東年씨는 화장실에서 스푼으로 자살을 시도하고 항 쟁지도부였던 尹江鈺씨와 金영철씨는 자살하기 위해 벽에 머리를 부딪쳐 중상을 입기도 했다.

이뿐아니라 당시 수사관들은 임신부에게도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임신4 개월의 몸으로 합수부에 끌려간 李모씨(41)의 증언.

『배를 발로채이고 아랫도리를 각목으로 꾹꾹 찌르는등 인간으로서의 아 픔뿐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인권과 모성이 말살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그러 나 나는 나은편이었다. 당시 가두방송을 했던 모씨의 경우, 수사관들의 파 렴치한 성고문으로 아이를 낳을수 없게 됐다.』 그렇다면 이런 고문을 자 행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연행자들에 대한 고문수사는 항쟁초기에는 광주 505보안부대가 전담하 다가 후반에는 27일 창설된 합수부 광주사태 처리 수사국에 의해 진행됐다.

수사국은 보안대를 비롯, 안기부, 검찰, 육국범죄수사단등 수사진 80여명 으로 구성됐고 수사국장은 보안사 기조처장 崔禮燮준장, 부국장 崔경조대 령이었으며 徐의남 505 대공과장, 金기준 광주지검 공안검사 등이 주요간부 였다.

이들은 3개과 1개반으로 구성돼 1과는 재야, 2과는 학생, 3과는 폭도를 담당했으며 1개반인 특명반은 국보위의 지시사항을 수사했다.

특히 특명반은 5공 창출과정에서 부정축재자, 대학교수, 언론인 숙청과 언론 통폐합, 삼청교육, 공무원숙청 등을 자행했다.

이와중에서 여러 가지 가혹행위가 이뤄졌고 이를 못견딘 상당수가 자해하 기도하기도 했다(당시 505보안부대 許壯煥 상사의 양심선언) 수사국은 항쟁가담자들을 내란 국사범으로 전원 치안본부 컴퓨터에 입력한 뒤 80년 8월29일 해체했다.

이같은 조직적인 가혹행위를 받은 뒤 군사재판에 넘겨져 상무대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형이 확정된 사람은 洪南淳씨등 재야인사 13명, 학원사태( 내란)관련자로 지목된 鄭東年씨등 20명,

역시 학원사태(소요 및 포고령 위반)관련자 文석환씨등 35명, 도청수습위(내란) 金宗培등 10명, 기동 타격대 尹석주씨등 29명, 靈岩지방관련자 24명, 木浦지방 관련자 22명, 궐기대회 및 투사회보팀 10명등 모두 421명이나 됐다.

수사국은 제2의 학살을 자행하며 光州를 잠재우고 5공 정권 탄생에 결정 적 기여를 한다. 진실의 승리를 믿는 의지 하나만으로 모진 고문을 견대냈던 연행자들. 그들에게 남은 것 폭도라는 멍에뿐이었다.


제 83회 尹한봉의 옥쇄결의

     光州민중항쟁의 상징적 인물이자 이른바 내란음모 사건의 최후수배자.

光州항쟁 주모자로 지명 수배된 이후 1년 남짓한 도피생활 끝에 81년 4월 29일 밤11시 馬山항에서 화물선 레퍼드호에 올라 35일간의 처절한 생존투쟁을 벌여야했던 비운의 젊은이 尹한봉(다시 32세).

그는 12년에 걸친 미국 망명생활을 끝마치고 지난 93년 8월 불혹을 훨씬 넘긴 40대 후반의 나이로 조국의 품에 안겨 지금은 光州에서 민족미래연구소를 개소, 후배들을 양성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를 통해 5.18 당시 자신이 밀항 즉 옥쇄결의를 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상황을 다시 구성해본다.

48년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에서 태어난 그는 광주일고(11회)를 졸업하고 전남대 축산과에 입학한 뒤 운동권에투신, 70년대 光州.全南운동권의 대부 역할을 하던 중 80년 민주화의 봄을 맞았다.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80년초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주화열풍은 尹씨에게도 희망을 주었다. 비록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이 지역의 민주화운동세력을 조직화하는 등 나름대로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5.17계엄확대 조치로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밀어닥친 검거선풍으로 그는 가까운 후배들에게까지도 연락을 끊은 채 깊숙이 잠적하고 말았다.

5.18에도 직접 참여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종적을 감추기 위해 은신처를 수십번 옮기면서 당국의 감시망을 빠져나가는데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그러나 그가 종적을 감추면 감출수록 당국은 모든 불순한 움직임이 그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그를 더욱 옥죄어 왔다.

光州민중항쟁이후 조심스럽게 조직을 재건하려던 光州운동권은 그것이 큰 부담이었다.

5.18이후 한때 구속했던 鄭龍和씨(현 광주매일 지역사회부장)는 尹씨가 잡힐 경우 그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光州.全南지역의 조직이 완전히 와해된다는 정세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는 尹씨가 영원히 잠적하든지 당국의 추적이 미치지 않는 제3국으로 그를 격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도 尹씨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81년 1월 鄭씨에겐 그렇게 기다리던 尹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鄭씨는 서울에서 尹씨와 만나 光州운동권의 사정과 대책을 숙의했다.

尹씨의 입장에서도 벌써 15차례 이상 은신처를 옮겨 온데다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현재의 상태를 깨기 위해서는 해외망명도 한 전기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尹씨의 밀항작전은 이렇게 해서 추진되기 시작했다.

밀항작전을 구체화시킨 장본인은 당시 경남 거창 YMCA총무로 있었던 鄭찬용씨(현 광주 YMCA 수석간사)였다. 그의 동생이 외항선 사관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81년 4월 29일 밤11시 馬山앞바다. 尹한봉을 싣고 미국으로 향할 레퍼드호(4만t급)가 정박해 있었다.

이에앞서 같은 날 오후6시 馬山 앞바다의 선창이 내려다 보이는 한 여관에서 6명의 낯선 사람들이 모였다. 鄭찬용.尹한봉, 그리고 尹씨를 배에 태울 두 사관, 尹씨를 따르던 후배 金모양, 여기에 비상시에 대비해 필요한 자금을 光州에서 모아온 鄭龍和씨가 뒤늦게 합류했다.

鄭찬용씨는 두 사관을 다른 방으로 따로 불러 미국 도착시 만나야 할 사람과 암호교환방법을 알려주었고 尹씨는 경비초소를 통과하기 위해 사관 수준의 새로운 패션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밤9시 일행은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2명의 외항선 사관들이 술취한 선원으로 가장한 尹씨를 부축해서 경비초소를 지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11시20분 이들은 경비초소에 이르러 경비원과 몇마디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아무일도 없다는 듯 선내로 들어갔다. 경비원도 별의심없이 이들을 들여보내주었다. 화물선에 오른 尹씨는 갑판아래 있는 의무실로 안내됐다. 4만t 이상의 배라면 자격있는 의료인이 타도록 돼 있으니 경비절감을 위해 의료인을 태우지 않는 것이 당시 해운업계의 관행이었기 때문에 의무실이 비어 있었다. 尹씨는 반평남짓한 의무실 화장실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미국항해를 시작했다.

尹씨가 가지고 있었던 거라고는 잣.멸치.새우 한줌과 식빵 두봉지 뿐이었다. 그마저도 식빵은 사흘도 못되어 곰팡이가 슬고 말았다. 尹씨는 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도착해서 누구를 만나야 하는 것인지 아무것도 모른채 항해를 계속해야 했다.

배고픔보다는 반평 남짓된 공간에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고독과 싸우는 것은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尹씨를 무사히 배에 실은 사관 鄭씨는 형인 찬용씨에게 "가지고 간 물건은 모두 잘 팔았다"는 비밀전보를 쳤다. 이 소식이 도착하자 광주의 鄭龍和씨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曺亞羅씨의 도움을 얻어 미국서 목사로 활동하고 있는 曺씨의 친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尹씨가 탄 화물선이 미국에 도착하면 선상기도를 하면서 그를 만나 미국의 적법한 절차를 따라 거주케 해달라는 것이었다.

6월3일 尹씨가 탄 화물선은 35일간의 항해 끝에 시애틀 북방의 벨링헴에 도착했다. 그러나 尹씨는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미국서 그를 안내해줄 누군가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입항한지 닷새째 되던 날 한인목사가 집전하는 선상예배가 있었다. 예배가 끝난 후 사관 鄭씨는 李목사에게 접근했다.

"철쭉꽃을 아시나요" "나는 봉선화를 좋아합니다" 암호가 통하는 순간이었다. 그제서야 尹씨는 李목사라는 한인목사에게 인계됐다.

미국에서의 새생활을 시작한 尹한봉은 민족학교를 개설하는 등 계속해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한국에서 尹한봉의 이름은 잊혀지고 있었다. 암울한 5共시절 마지막 수배자 尹한봉의 이름은 거론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됐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일반에게 회자되고 그의 귀국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됐던 시점은 88년 국회청문회 이후. 그 후로도 그의 귀국이 93년 8월로 늦어진 까닭은 복잡다난한 국내정치상황 때문이었다.

민족학교 텃밭에 채소를 가꾸면서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랬던 尹한봉. 그는 밀항 12년만인 93년 8월 20일 김포공항에 발을 디딤으로써 파란만장한 미국생활을 끝마치고 꿈에 그리던 고향 光州에 왔다.

제 84회 망월묘역 탄압의 땅서 민주성지로 우뚝
 
    1980년 5월 29일 오전 10시.
光州시 東구 錦南로 1가 상무관 앞은 행인마저 뜸한 채 을씨년스런 분위 기였다. 며칠전 인산인해를 이뤘던 모습은 간데없었다. 길 건너 도청 앞에 는 착검한 계엄군과 탱크가 상무관을 응시하고 있었다. 곧바로 상무관에서 관(棺)들이 들려나와 청소차에 마구 실렸다. 유족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상무관 안에는 폭도라는 오명이 싫어서인지 야음을 틈타 유해를 빼내 비어있는 자리도 이곳저곳에서 눈에 띄었다. 오전 11시 10개관씩을 포개어 실은 청소차들이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달려 光州시 雲亭동 시립공원묘지에 다다랐다. 묘지에는 이미 1백여개의 구덩이가 빨간 황토흙을 내뱉은 채 주검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장작업은 기계적으로 이뤄졌다. 구덩이 사이가 비좁은데다 흙더미들 때 문에 제수상은 엄두도 낼 수없었다. 장례식때 공원묘지는 엄격히 통제됐다. 光州시가 사망자 1명당 유족 5명만을 참석하도록 제한했고 유가족이 장운동사무소까지 가면 시에서 공원묘지로 보내주었던 것이다.

유족들은 가슴이 터져버릴 심정이었지만 때가 때인지라 [폭도아들을 둔 사람, 폭도 딸, 폭도 아버지]라고 내몰림을 당할 것만같아 남의 눈에 띌새라 빨리 매장이 끝났으면 하는 심정인 사람도 있었다.

이날의 장례식은 마치 진짜 폭도의 시체를 처리하는 것처럼 숨조차 제 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극도의 공포와 불안속에서 극히 간소하게 치러졌다. 오후5시께나 끝난 장례식에는 모두 1백26기의 유해가 묻혔다.

세계적 민주의 성지로 다시 깨어난 望月동 5·18묘역의 탄생 순간이었다. 5·18희생자가 묻힌 곳은 엄밀히 말해 光州시 北구 雲亭동 산 46 광주시 립공원묘지 제3묘역 1천여평의 땅이었다. 1976년 光州시가 조성한 光州시 공원묘지의 한 묘역에 불과했다.

현재 이곳 3묘역에는 5·18과 관련 당시사망자 1백17기(무연고 11기), 부상후 사망 또는 구속자 사망자 1기등 모두 1백31기를 비롯 87년이후 시 국관련자 32명등 1백63기가 묻혀있다. 또 일반 분묘 3백5기를 합쳐 모두 4 백68기가 있다.

5·18 望月묘지는 실제로는 잘못된 이름이다. 그럼에도 이곳 묘역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그동안 애칭된 까닭의 정설은 없다. 다만 묘지에 가려 면 望月삼거리를 지나가야 하고 정확히 운정·수곡동 묘지라고 부를수도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더불어 望月이라는 이름자의 정서가 묘지 분위기와 어울린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곳 묘지의 넋들 가운데 11기는 지금도 무명으로 남아있다. 묘비의 앞면에 무명열사의 묘, 뒷면에 광주여 무등산이여 민주의 활화산이 여라고 똑같이 쓰여있다.

그 무명의 묘 왼쪽편에 님이여 어디 계시옵니까 고이 잠드소서라는 현수막이 있고, 게시판에 행방불명자 23명의 영정이 붙어 있다. 오른편에는 5·18광주민중항쟁 상이유족회에서 만들어 놓은 게시판에 또다시 54명의 영령이 도열해 있다.

望月은 한참동안을 피탄압의 땅으로 지내와야했다. 5共땐 이 곳에 갔 다하면 죄인취급을 받았는가 하면 망자에 대한 예를 중시하는 이 땅에서 맘놓고 제사 한번 지내지 못하고 노상 최루탄과 함께하는 제삿날이 되곤했 다.

1981년 5월 18일 오전 이곳 묘역에서는 시민·학생등 5백여명이 모인 가운 데 5·18광주민중항쟁 1주기 추모제를 거행했다. 미국은 光州사태의 책임 을 지고 물러가야한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낭독하였으며 시위대와 함께 시 내로 진출하려다 경찰의 저지를 받고 다수가 연행됐다.

이날 추모제를 주도했던 5·18광주민중항쟁 유족회 鄭水萬씨는 체포된뒤 국가보안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혐의로 구속되어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이듬해 2월 만기 출소했다.

1983년 들어 망월동 공동묘지의 성역화를 우려한 5共은 이 지역 상공인들 로 구성된 全南지역 개발협의회등을 동원, 묘지의 분산 이장계획을 은밀히 진행했다. 이른바 5共 정권의 대표적 과오로 꼽히는 이장공작이었다.

그해 3월4일 5共은 최초로 1기를 이장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에 대항하여 유족 30여명은 3월6일 고속버스터미널에 모여 광주의거 진상규명과 아울러 묘 이장 중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4월 18일에는 묘를 이장하면 1천만원의 위로금과 50만원의 이장비를 받는다는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기도 했다. 5월18일 제3주기 위령제를 개최하고 6월13일에는 추모기도회를 거행하였으며 유족회 명의의 호소문을 낭독, 배포했다.

그러나 당국은 이것을 구실삼아 유족들에게 이장을 조건으로 지급하 기로 했던 위로금 1천만원의 지급을 중단할 수 밖에 없다고 일부 소극적 인 유족들을 부추김으로써 내부 분열을 기도했다.

당국의 이러한 부추김에 넘어간 유족 12명이 당시 유족회 회장이던 전계량의 직장과 집으로 폭행과 협박을 가했다. 1984년 4월1일까지 당국의 이장공작으로 이장된 묘가 총 26기로 늘어났다. 이 해 11월 이러한 당국의 시도는 많은 사회단체에 의해 저지, 중단됐다.

5共이 끝날 때까지 망월동 묘지와 그 유족을 둘러싼 이같은 숨박꼭질이 끝없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집요하고 교묘한 공작·탄압에도 불구하 고 사회 전체의 민주화와 더불어 망월동 묘지는 민주화 성지로 전국의 학생·시민들로부터 참배와 숭모·새로운 민주화운동의 결의의 장으로 깨어나기 시작했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망월묘지의 성역화사업은 본격화됐다. 이 해 대통령의 5·13특별담화를 통해 5·18묘역 성역화사업이 확정됐다. 그러나 성역화사업은 5·18희생자 묘역 위치선정을 놓고 난항을 거듭했 다. 위치선정문제는 일부 유가족측이 상무대이전을 강력히 요구하며 한때 농성을 벌이는 등 반발도 거셌다.

결국 5·18묘역은 93년 光州시 北구 雲亭동 산 34 일대로 최종 확정됐다. 현재의 묘역 옆에 위치한 새 묘역은 94년11월 사업이 시작돼 97년4월 완공 될 예정이다.

총 5만7백50평 규모에 조성될 5·18묘역 성역화사업은 3천평규모의 묘지 조성과 함께

▲위령탑및 참배단 1식
▲유영봉안소 2백평
▲기념관 2백50평
▲체험공간외 5종 등이 들어설 계획이다.

이미 묘역진입로 확장공사가 완료됐고 1996년 10월 현재 묘역 토목기반공사와 건축시설 공사발주가 67%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제 85회 논공행상
 
    5.18 光州민주화운동 당시 진압작전에 참가했던 유공자 79명은 80년 6월 20일 충무무공훈징을 비롯해 국무총리 표창까지의 훈포장을 받았다.

발포금지 지시로 무혈진압을 시도했던 鄭 雄 31시단과 尹興禎전투교육사령관은 제외됐다. 그러나 유혈진압에 나섰던 鄭鎬溶 특전사령관.崔世昌 3공수여단장.朴俊炳 20사단장에게 충무무공훈장이 수여됐다. 특히 특전사령부와 보병 제20사단은 단체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당시로선 이들에겐 명예의 훈포장이었으나 누가 학살작전에 공헌을 세웠는가를 극명히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초기에 유혈진압을 지휘했던 7공수여단 33대대장 權承萬중령, 도청앞 집단발포 당시 현장지휘관이었던 11공수여단 61대대장 安富雄중령에게 각각 국무총리 표창이 돌아갔다.

같은해 12월 31일 12.12군사반란에 적극 가담했거나 5.18 光州민주화운동에 직접 참여한 52명에 대해 또다시 태극무공훈장.충무무공훈장.인헌무공훈장.을지무공훈장.화랑무공훈장 등이 한꺼번에 수여됐다. 이들의 서훈 명분은 '국가안보유공'이란 추상적인 내용이었다. 이로써 12.12와 5.18관련 서훈자는 모두 1백31명이 됐다.

더욱이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같은해 8월22일 태극무공훈장과 무궁화 대훈장을 서훈의 구체적 내용도 제대로 밝히지 않은채 수여했다. 여기에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수교훈장 광화대장까지 최고훈장 4개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에 대한 서훈 치탈문제는 거세졌다. 95년 4월 7일 5.18 광주민중항쟁부상자회 朴英恂회장등 2백24명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12.12 군사반란자 및 5.18 광주학살 책임자 서훈치탈'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했다.

더불어 각계에서도 이들의 서훈치탈을 문제삼았고 결국 95년 12월 19일 제정된 5.18 특별법에 '상훈치탈'이 못박았다. 이 법 제7조 '상훈치탈'은 "정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서훈을 받은 자에 대하여 실사한 결과 오로지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것이 공로로 인정되어 받은 상훈은 상훈법 제8조의 규정에 의하여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 등을 치탈한다"고 규정됐다.

그러나 5.18 관련단체등은 이 규정에 만족하지 않는다. "오로지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것이 공로로 인정되어 받은 상훈"으로 규정으로는 국보위설치와 관련돼 포상을 받은 3백여명의 상훈의 취소나 치탈은 불분명하다는 것. 때문에 이들 포상자들이 국가유공자예우를 받는 특혜부분에 대해서도 정부의 취소.치탈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2.12 및 5.18 관련자들의 논공행상은 다만 상훈에 그치지 않고 5.6共기간 내내 국가요직을 '형 먼저 아우 먼저' 식으로 나눠가졌다.

80년 5월 31일. 국가보위 비상대책 위원회가 발족됐다.

이때부터 신군부 정권 탄생의 발원지인 12.12사건의 주역과 5.17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가해자들이 그 실체를 드러내며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5.6共 시절 대단한 권세를 누리며 탄탄한 출세가도를 달렸다.

군의 주요보직을 독차지했으며 군 문을 떠난 뒤에는 장.차관, 국회의원, 국영기업체 사장 등의 노른자위를 차지했다.

5.6共시절 이들은 특전사령관(鄭鎬溶-博熙道-崔雄).수경사령관(盧泰愚-崔世昌-高明昇).보안사령관(全斗煥-朴俊炳-高明昇).육군참모총장(李熺性-黃永時-鄭鎬溶-朴熙道-金振永).국방부장관(尹誠敏-鄭鎬溶-崔世昌).안기부장(全斗煥-兪學聖-張세동)등의 요직을 전유물처럼 나눠 가졌다.

우선 80년 5월 당시 전두환 소장은 이후 중장.대장을 거쳐 최고의 권좌인 대통령에 올랐다. 의리와 인정등 원초적 감정을 중요시한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중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12.12주역인 하나회의 인맥을 중용했다. 친구인 노태우에게 대통령직을 상속하는데서 그 권력의 분수령을 이뤘다.

경복궁 모임의 좌장인 유학성 군수차관보는 안기부장을 거쳐 국회에 진출했다. 황여시 1군단장은 83년부터 최장수 감사원장을 역임했으며, 직속상관인 鄭柄宙 특전사령관을 체포한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합참의장을 거쳐 예편한 뒤 광업진흥공사 사장.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발포명령자, 공수부대 과잉진압이란 의문점의 한가운데 자리한 정호용은 12.12 당일만 해도 대구지역의 예비사단인 50사단장에 불과했다. 이 자리는 통상적이라는 예편을 앞둔 한직이다. 그러나 그는 공석인 특전사령관으로 부임한다. 이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압과정에서 광주 현지에 상주하다시피한 그는 육참차장과 총장 그리고 내무.국방장관을 역임하고 국회에까지 진출하는등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朴熙道 1공수여단장은 육참총장을 거쳐 토지개발공사 이사장을, 張基梧 5공수여단장은 총무처 장관과 근로복지고사이사장을 역임했다. 光州에서 발포가 이뤄진 진압현장의 최일선에 있었던 崔雄 11공수여단장은 특전사령관을 거쳐 대사에 기용됐다.

車圭憲 수도군단장은 교통부장관을 지냈다. 경복궁 모임에서 장소를 내준 張세동 30경비단장은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으로 권세를 누렸다.

朴俊炳 20사단장은 보안사령관을 거쳐 국회에 진출한 뒤 집권당 사무총장을 3차례나 역임했고, 보안사 인맥인 許和平.許三守.李鶴捧씨는 5共 출범 초 나란히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군인 중에는 96년 1월 현재 군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다. 송정동 양민학살부대인 20사단 61연대장 김동진씨는 참모총장을 거쳐 군서열 1위인 합참의장에 오른 뒤 올해 10월 국방장관이 됐다.

7공수 33대장이던 權承萬씨는 준장으로 국방대학원에 입교했으며, 3공수 11대대장 林守萬씨도 준장으로 육본 군사연구실장을 맡았다. 20사단 60연대 3대대장 吉暎喆씨는 2군단 부군단장(소장)이 됐다.

제 86회 삼청교육대
 
    全斗煥등 신군부세력들은 5·17계엄확대와 5·18학살을 통해 탈취한 권력의 칼날을 번득이며 휘두르기 시작했다. 신군부 권력의 전위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주역이었다. 개혁의 이름으로 공공연한 학살이 자행 되어갔다. 6월25일 金鍾泌 공화당 총재가 공직에서 사퇴한 것을 필두로, 芮春浩·李宅敦·孫周恒의원등이 의원직을 사퇴했으며 7월4일에는 金大中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정부발표가 있었다.
7월9일 장관급을 포함한 2급이상 고급공무원 2백32명이 숙정되는등 7·9 공직자大肅正이 단행됐다. 7월15 일에는 3급이하 4천7백60명이 숙정됐다.

7월30일 대학본고사 폐지와 졸업정원제 도입, 과외금지를 골자로한 교육개혁이 발표됐다. 다음날 주간·일간지등 1백72개 정기간행물이 등록취소되는 언론학살이 이어졌다.

삼청(三淸)교육대는 이런 살풍경한 분위기속에서 탄생됐다. 80년 8월4일 국보위는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를 발표하고 폭력·사기·마약·밀수사범에 대한 일제 검거령을 내렸다. 또 계엄사는 계엄포고령 13호(불량배 검거령)를 통해 이를 뒷받침했다.

이에앞서 국보위는 6월13일 전면적인 사회개혁의 4대목표를 발표했다. 「안보강화」 「경제난 타개」 「정치발전」 「사회악일소」였다.

국보위는 삼청교육이 바로 이 사회개혁의 4번째목표인 사회악일소의 한 측면이라고 발표했다. 결국 삼청교육도 신군부 집권시나리오의 하나로 진행됐으며 사회악제거를 명목으로 국민에게는 극도의 공포심을 심어주려는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이때부터 81년1월까지 5개월동안 4차례에 걸쳐 6만7백55명이 불량배의 이름으로 소탕됐다. 5· 16직후 불량배·깡패 1만5천8백여명이 검거됐던 것보다 4배나 많은 숫자였다. 全斗煥등은 쿠데타 선배의 전례를 답습하면서도 그 규모나 과감성에서는 훨씬 앞서갔다.

이들에 대한 심사는 검사·경찰서장·보안사요원·중정요원·헌병대요원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에서 결정됐다. 심사위는 붙잡혀온 사람들을 ABCD 네개등급으로 나눠 죄질(?)을 분석해갔다.

심사 결과 A급 3천2백52명, B·C급 3만9천7백86명, D급 1만7천7백17명이었다. A급은 군사재판에 회부됐으며 B급은 4주교육후 6개월노역, C급은 2주교육후 훈방, D급은 훈방조치됐다. 결국 B·C급은 모두 삼청교육의 순화교육대로 끌려갔다.

각 경찰서에는 할당인원이 내려와있었다. 사소한 경범위반이나 이웃끼리 말싸움을 벌이다 항변조차 해보지 못한채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경우도 적지않았다.

고등학교에도 불량학생이나 의식화 학생들에 대해서는 순화교육을 보내라는 지시가 떨어져있었다. 심사과정에서의 반론권은 없었으며 가족들과의 면회조차 금지됐다. 순화교육이나 근로봉사기간중 군부대를 무단이탈할 경우 무조건 사살되기도 했다.

순화교육중 가혹행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88년12월 국방부는 삼청교육 수용자중 50명이 교육중 사망하고 3백97명이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고 공식발표했다.

치안본부가 국회5공비리특위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입소자중에는 교수 와 교원 13명, 의사 7명외에 고등학생도 9백80명이 포함되어있었다. 삼청교육이 마구잡이식으로 이뤄진 5共최대의 인권유린사건이란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주고있는 통계다.

「三淸」이란말은 폭력 공갈사기 사회풍토문란사범등 3개유형의 범죄자를 깨끗한 사람들로 만든다는 뜻에서 나왔다고한다. 몸과 마음과 정신을 순화한다는 뜻으로 일컬어지는 말이기도한다.

5·18피해자중에서 삼청교육에 끌려간 경우도 적지않다. 5·18관련단체에서는 40여명의 피해자들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것으로 파악하고있다. 李성숙씨(61)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木浦에서 선박관리업을 하고있던 李씨는 19일 光州로 올라왔다가 공수부대의 만행을 목격했다.

그후 木浦지역으로 확산된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수배 를 받다 木浦 보안부대에 자수했다. 李씨는 그후 군사재판에서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가 그해 10월30일 형면제조치로 석방됐다.

李씨는 『석방된 직후인 11월13일 木浦시내 다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다 화면에 나타난 全斗煥을 향해 「저 살인강도, 저놈은 반드시 죽여야한다」고 욕한것이 화근이 돼, 국가원수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강원도 원주의 군부대로 끌려가 한달동안 지옥같은 훈련을 받았다. 그때 갈비뼈가 부러지기도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5·18구속자인 柳석씨(光州대동고 3년)의 증언.

『불기소처분을 받고 학교에 복학했을때 우리학교서는 삼청교육대 입소 학생들을 선별하는 작업이 진행되고있었다. 선생님들이 제자를 삼청교육대로 보내는 비인간적인 행위가 강요됐었다. 우리 학교에서만 6명이 끌려갔다. 약간의 말썽은 있었지만 모두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全斗煥은 88년 국회 5공비리특위에 출석, 『삼청교육은 상습적이고 조직적인 폭력·공갈·사기 ·마약·인신매매등 각종 사회악을 제거하여 사회기강을 확립함으로써 국가적 위기상황을 극복하려는 시국수습대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것입니다…삼청교육은 당시 사회혼란을 틈타 난무하고 있던 고질적인 상습범들에 대하여 예방적차원에서 특별교육을 통해 교정함으로써 민생안정을 도모하자는 것이었습니다』라고 삼청교육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全씨의 이같은 강변이 당시 신군부의 대국민 홍보의 주조였다.

88년6월, 「삼청교육대 진상규명 전국투쟁위원회」가 출범했다. 이들은 95년 참여연대와 함께 제네바 유엔인권이사회에 삼청교육 피해상을 제소하기도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배상과 명예회복은 문민정부들어서도 해결되지 않고있다.

삼청교육 특별법제정에 적극적이던 신한국당도 지난달 특별법제정을 현재 진행중인 소송의 결과를 지켜본뒤 제정한다는 입장을 보이고있어, 피해자 전원의 일괄배상과 명예회복은 아직 요원한 실정이다.

삼청교육 진상규명위원회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과 함께 삼청교육운영과정에서 각종 비인도적 조치로 입소자들을 사망케하거나 치유불능의 후유증을 낳은 일선 부대장들도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있다.

진상규명위측은 『당시 입소자중 상당수가 야당인사였거나 단순히 행정기관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전과자등의 경우도 죄의 대가로 치르는 형벌(?)치고는 가혹했다』 고 밝히고있다.

삼청교육은 인권과 언론및 사법의 암흑시대인 5공정권의 대표적인 인권탄압사례였다. 아직도 삼청교육 피해자와 수많은 그들의 가족들은 삼청교육대 출신이라는 멍에를 짊어진채 살아가고있다.

삼청교육은 신군부의 의도대로 국민들의 쿠데타에 대한 저항을 완전무력화시켰다. 그 반동성과 폭력성은 5공탄생의 기반이 되었으며 그들의 비정통성을 무마시키려는 국민기만술책이었다.


제 87회 광주 미문화원 방화
 
   1980년 12월9일 밤. 光州시내는 심한 바람과 함께 진눈깨비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날씨 때문인지 평소 인파로 북적대던 충장로와 황금동 일대도 초저녁부터 인적이 드물었다.
이날밤 10시께 光州시 東구 黃金동 光州 美문화원의 기와지붕 위로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은 어 둠에 잠긴 光州시가에서 한동안 타올랐다.

美문화원이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있는 시간, 이로부터 약 1㎞ 떨어진 光州공원의 어둠속에 5 명의 청장년이 숨을 헐떡이며 모여들었다. 모두들 긴장된 표정이었지만 美문화원의 불타는 모습 과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에 서로 부둥켜 안고 기쁨을 나누고 있다. 이들이 美문화원에 불을 지른 뒤 1차집결지점인 光州공원으로 숨어든 방화범들(?)이었다.

가톨릭 농민회(일명·가농) 회원 丁淳喆(당시 25세), 金동혁 (당시44세·前가농 全南연합회장), 尹종혁(당시 26세), 朴시영씨(당시22세) 농민 4명과 당시 全南大 경영학과 2학년인 林鍾洙씨(당 시 21세)등 5명. 20대에서 40대의 장년의 농민과 대학생이 어울린 이상한 방화범들은 잠시후 자리 를 옮겨 거사성공의 축배를 들었다.

이틀뒤인 11일 오전, 林씨는 全南大구내에서 光州 서부서 정보과형사에 의해 방화사건과는 무 관한 혐의로 전격연행된다. 경찰에서의 신문내용은 그전에 계획했던 가두시위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경찰의 태도가 돌변했다. 「美문화원 방화사건에 全南大생 1명이 가담했다」 는 첩보와 함께 경쟁관계인 光州지구 보안대에서 林씨를 인도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美문 화원사건을 대라』며 무수한 몽둥이질과 발길질이 시작됐다. 『보안대에 가면 없는 죄도 나온다. 경찰에서 학생신분을 참작받을 때 대라』는 것이었다. 이틀을 버틴 林씨는 결국 사건전모를 실토 하고 말았다.

최근 기자와 만난 林씨는 『이렇게 된 바에야 차라리 이 사건을 공론화할수 있는 재판을 통해 우리가 美문화원에 불을 지른 의도를 알리는 차선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 다. 林씨가 고문속에서도 이틀을 버텼지만 순진한 시골농부였던 나머지는 丁淳喆씨를 제외하고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5·18전까지만 해도 全南大내 비운동권서클인 KUSA(유네스코 학생회)에서 연극활동을 해온 평범한 학생이었던 林씨는 5·18이라는 피의 광란을 목격한 뒤 말할 수 없는 괴로움과 자책에 시 달린 끝에 가톨릭에 귀의하게된다. 그러다 가농회원들과 운명의 조우를 하게된다. 林씨와 당시 가 농회원이었던 丁씨의 회고를 통해 美문화원 방화의 계획과 실행과정을 재구성한다.

가농은 12월5일 호남동 천주교회에서 열릴 예정인 「光州·全南 농민대회」를 이용해 농민들과 全南大·朝鮮大·光州교대생 등 대학생 가두시위를 계획했다. 그러나 5·18이후 최초의 가두시위 계획은 사전에 정보가 누설돼 실패하고 말았다.

12월10일 제2차시위가 계획됐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성공을 장담할수 없었다. 결국 최소인원 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타켓이 무엇인가라는 논의에 들어갔다. 光州 美문화원 방화 사건은 이렇게 태동됐다. D데이는 9일로 정해졌다. 방화 다음날인 10일은 美國의 브라운 국무 장관의 來韓일이었다.

8일 밤 사전답사가 이뤄졌다. 다행히 美문화원과 담장하나를 사이로 붙어있던 2층건물인 오성여 관이 개축공사를 하고 있었다. 밤에는 비어있는 이 건물을 이용하면 美문화원으로의 침투가 가능 했다. 당시만해도 美國공관에 대한 위해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경찰의 경비도 없었다.

D데이인 9시께 丁씨등은 美문화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丁씨와 林씨가 실행행위를, 나머지 3 명은 인근에 흩어져 망을 보았다. 丁씨는 오성여관 2층 창문을 통해 美문화원 담장의 철조망을 자르고 침투해 문화원 지붕위로 올라갔다. 지붕 두어장을 뜯어내고 골판지를 면도칼로 찢어냈다. 그리고 휘발유와 석유 한말을 들이부었다. 도화선으로는 길고 가늘게 만 시멘트 부대가 이용됐다. 불을 붙인뒤 丁씨와 林씨는 오성여관을 통해 빠져나와 집결지인 光州공원 쪽으로 달아났다.

수사당국은 방화사건을 광주사태의 책임자타도와 진상규명, 군부파쇼 집단을 지원·지지하는 미국의 퇴진요구라는 목적과 동기보다는 불평불만이 많은 부랑아들의 영웅심리에 의한 불순행동 으로 몰아붙였다. 2심까지 가는 동안 2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林씨를 제외하고 나머지 3명은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5·18에 적극 가담한 혐의까지 받은 丁淳喆씨는 1년 반동안의 도주생활끝 에 체포돼 징역 5년6월을 선고받았다.

光州 美문화원 방화사건의 의의는 林씨의 항소이유서에 잘 나타나 있다. 『본 방화사건은 5· 18광주사태의 역사적 의의에 연유하지 않고는 별도분리해서 파악할 수 없다. …美문화원 방화동 기는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전세계 양심인들에 대한 메시지로서, 일련의 국내 인권유린책에 대한 고발과 광주사태의 숭고한 이념을 만천하에 표방하는 수단이었다. …저의 방화동기를 바로 인식한다면 미국내의 양심적인 정치인들과 언론들이 2백년이라는 자유민주주의 전통을 환기하여 韓美간의 종속체제를 대등한 주권국가 관계로 개선하도록 노력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 다』

林씨는 『당시 너무도 평범한 학생인 내가 왜 이런일을 해야만 하는가, 이런 고뇌 속에서도 내 가 이 순간 이일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역사는 이런 결단과 선택을 통해 이루어져 간다는 생각이었다. 우리의 행동은 역사에 하나의 씨앗을 뿌 린 것에 불과하다. 마치 산 정상에서 굴린 돌멩이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엄청난 눈덩이가 되는 것 과 같다. 우리의 행동은 바로 이 작은 돌멩이의 역할이었다』고 자평했다.

光州 美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인 丁씨는 여천에서 식당을 운영하고있으며, 林씨는 대학에 복 학, 졸업한 뒤 光州시청 공보실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金동혁씨 등도 지금은 평범한 생활을 하 고있다.

美문화원 방화사건은 당시 통제된 언론에 의해 사실여부조차 보도되지 않았다. 방화사건 다음날 신문은 「전기누전」으로 화인을 추정하는 1단짜리 기사로 이 사건을 취급했다. 재판과정에 대한 보도는 아예 취급조차 되지 않았다. 그 진상은 5共이 끝날 때까지 철저히 은폐되어 왔었다.

그러나 소문으로 떠돌던 光州 美문화원 방화는 82년 3월 金鉉@, 文富軾등에 의한 釜山 美문화 원 방화사건으로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은 5·18당시 美國의 역할에 대한 논란과 함께 한국 사회운동의 혁명적인 변화인 反美운동의 시발로 작용했다. 5·18이라는 피의 학살이 光州를 휩쓴 살벌한 시절에 일어난 光州 美문화원 방화사건은 5共의 칠흑같은 어둠을 깨뜨린 反美의 총성이었 다.
 

제 88회 5共下의 추모제
 

    5.18학살의 狂風이 光州를 휩쓴지 1년이 지난 81년 5월 18일. 光州시내는 아침부터 팽팽한 긴장감으로 달아올랐다.

'추모'라고 쓰인 검은색 리본을 단 시민들과 경찰들간의 승강이가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동신전문대앞.光州교도소앞.망월동 삼거리등 망월묘역으로 통하는 요소요소는 바리케이드로 봉쇄되었다.

경찰은 망월동쪽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모조리 검문해 학생차림의 승객들은 모두 끌어내렸다. 오전10시께 5.18 묘역에는 4백여명의 시민.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검문을 피해 산과 논밭을 돌아 묘역을 찾은 추모객들이었다.

그러나 정착 추모제의 주인격인 5.18 유가족들은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추모제 무산계획의 목표가 주로 이들에게 맞춰졌기 때문이다. '5.18 光州의거 유족회'는 1주기 추모제를 계획했으나 관의 회유와 위협으로 18일 추모제는 무기연기된 상태였다. 말이 연기지 사실상 포기였다.

1주기 당시 5.18묘역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묘비조차 세우지 못한 묘가 태반이었다. 영정이나 제단도 없었다. 5共정권은 비석을 세우되 비석의 뒷부분은 쓰지 못하도록 했다. 공수부대의 총격으로 사망한 임신부 崔美愛씨의 비석 뒷면에 쓰인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글귀를 빌미로 삼은 것이다.

5.18때 동생 지용씨를 잃은 鄭水萬씨(당시 35세)는 이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며칠전부터 경찰서와 동사무소 직원이 집에 찾아와 추모제를 지내지 말라며 협박겸 회유를 해 왔었다. 어머니도 "그냥 집에서 제를 지내자"고 鄭씨의 망월동行을 막았다. 그러나 鄭씨는 '光州의거 1주기 추모식'이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옷속에 숨긴채 시내로 나왔다.

서방에서 국화꽃 1백30여송이를 산 鄭씨는 망월동을 향했다. 묘소마다 국화 한송이씩이라도 놓아두자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가운데 추모제 시간인 오전10시가 다가왔다. 제물을 맡은 유족들도 추모에배를 할 목사도 오지 않았다. 鄭씨는 추모제의 사회를 보면서 우선 자신이 준비한 성명서를 낭독했다. '美國은 光州문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주기 추모제는 분향도 축문도 없이 진행됐다.

행사를 마친 시민.학생들은 만세 3창을 한 뒤 자연스럽게 어깨동물을 하며 망월묘역을 나섰다. 그러나 경찰은 아미 망월묘역 입구를 마곡 있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鄭씨는 체포됐다. 鄭씨는 추모제를 주도하고 反美성명서를 작성, 낭독했다며 국보법위반등 혐의로 구속돼 8개월의 실형을 살게된다. 추모제와 관련한 첫구속자였다.

81년부터 87년까지의 5共치하 추모제는 모두 이런식으로 치러졌다. 5共정권은 추모제행사가 5.18학살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저항의 기폭제가 될 것을 우려해 추모제 자체를 원천봉쇄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권력도 해마다 돌아오는 5.18과 그 추모행렬을 막을 수는 없었다. 5월 18일만 되면 光州시가는 최루가스와 유족들의 추모 오열로 뒤덮였다.

82년 2주기 추모제도 관의 방해속에 치러졌다. 그러나 2주기 추모제부터 제물과 제기도 차려졌다. 제사의 모양새도 중요했지만 1주기 추모제때 鄭씨를 구속한 경찰이 "제물도 없는 추모제가 어디 있느냐"며 트집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추모제 형식을 갖추지 않으면 단순 집회로 간주해 탄압을 할 것이 뻔했다.

82년 5월 18일 오후 광주 YWCA 소심당에서는 '5.18 2주기 추모예배'가 광주 기독연합회등 개신고 단체 주최로 열렸다. 한국목민선교회장 高영근목사는 이 자리에서 설교로 釜山경찰에 체포, 구속되는 고초를 겪는다.

YWCA 행사가 끝난 18일 오후5시30분부터 참석자들이 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이들을 마구잡이식으로 연행해갔다. 이날 시위로 全南노회 교사위 金경식목사(당시 45세), 한국기독청년회 회장 金泳鎭씨(당시36세.현재 국민회의소속 국회의원)등 4명이 구속됐다. 金목사와 金泳鎭씨가 구금된 서부경찰서 앞에는 金목사 교회의 신도들이 멍석을 깔고 철야기도를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83년부터 망월묘역행 버스노선이 새로 만들어졌다. 유족의 편의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사실은 추모제가 끝난 뒤 추모객들이 한꺼번에 시내로 진출하는 것을 막으려한 光州시의 고육지책이었다.

84년 5.18 4주기는 전국적인 추모시위와 함께 시작됐다. 지금까지 光州 이외의 다른지역에서도 산발적인 시위는 있었지만 이때처럼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이때부터 5.18추모제를 정점으로 한 5월 한달동안의 반정부시위 열풍은 5共정권의 심장을 죄어갔다.

이 해 5월18일 서울대.연세대.고려대.외국어대등 전국20여개 대학생들은 '光州민중항쟁 영령 위령제'를 가진 뒤 5.18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가두로 진출했다. 학생들은 위령제에서 "침묵으로 光州항쟁의 의미를 왜곡되게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치열한 가두시위를 벌였다. 80년 '서울의 봄' 이후 최대규모의 시위였다.

이날 光州에서의 시위양상도 지금까지의 수세적 수준에서,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시가에서 투석전을 벌이는등 적극적인 양상으로 변해갔다. 18일 오후3시30분께 망월묘역에서 추모제를 마친 대학생등 1천여명은 호남고속도로를 거쳐 문화동 동광주 톨게이트에서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이날 금남로등 시내에서는 밤 11시께까지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됐다. 光州는 최루탄으로 뒤덮였다.

85년 총선에서 국민들은 5共정권과 기존야당을 외면했다. 金大中.金泳三씨를 주축으로 급조된 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등장하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나갔다. 신민당은 5.18에 앞서 '光州사태 규명 특별조사위원회'의 구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5.18 5주기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외신기자들이 추모제를 취재하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金大中.金泳三씨등 야당정치인의 화한과 함께 야당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추모제도 '光州 5.18 민주혁명 희생자 위령탑 건립 및 기념사업 범국민운동 추진위원회'(위원장.洪南淳) 주관으로 열렸다. 추모제기간인 23일 대학생 73명이 '美國의 5.18 光州학살 개입'을 규탄하며 서울 美문화원을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86년 추모제는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의 거센바람 속에서 진행됐다. 천주교 光州사제단은 5.18 6주기를 앞둔 16일 '광주의거 6주기를 맞아'라는 성명을 통해 "우리의 조국이 이제 민주화의 분수령을 넘었음을 선언한다. 강압적인 통치권력이 민주화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 없음을 확인하다"고 밝혔다.

5共정권은 이미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87년 7주기 추모제는 朴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빚어진 6월 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열렸다. 5共은 경찰력을 총동원해 '고문정국'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추모제 기간 '朴군 고문치사사건 축소은폐 의혹'이 폭로되면서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있었다. 시민들까지 가세한 국민들의 항쟁이 전국을 휩쓸고 있었다. 5.18 7주기는 이같은 국민항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7주기추모제에서는 5.18 배후조종자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金大中 민주협 공동의장의 추도사가 처음으로 있었다. 24일 금남로에서는 1만여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연합예배가 치러졌으며 경찰은 시민들의 기세에 눌려 집회를 사실상 허용하고 말았다. 80년 5.18 당시의 '민주성회'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었다.

현재 5.18유족회장을 맡고 있는 鄭水萬씨는 "5.18묘역과 추모제를 지키기 위해 유족드 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지금은 5.18 묘역이 성역화되고 국립묘지로의 승격까지 거론되지만 80년대 초 5共정권은 죽은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 추모제조차 지내지 못하게 했다. 5.18추모제의 역사가 바로 5.18復權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제 89회 5월단체<上>
 
    光州외곽으로 빠져나가 光州를 고립시키고 있던 계엄군이 27일 새벽 일제히 全南 도청으로 향하고 곧이어 또 한차례 피의 살육이 펼쳐지면서 光州는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그 누구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상황을 말하지 않았다.

光州는 어느새 '폭도의 도시'로 변해 있었고 光州의 참상을 말하는 것 자체가 폭도 또는 그들의 동조자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부모 형제를 잃고 총탄에 반신불수가 되거나 신체 일부를 민주 성전에 바쳤지만 그 대가는 속으로 삭이는 피울음과 가슴앓이 뿐이었다.

그러나 서슬퍼런 계엄당국의 눈을 피해 5월을 기억하고 언젠가 그날의 참상을 알리고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고 있었다. 5월 22일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 발포로 희생된 수많은 주검들이 상무관에 모여들었다. 소식이 끊긴 가족을 둔 많은 시민들이 상무관을 찾아 생사 확인 작업을 하며 자연스럽게 서로의 얼굴을 익히게 됐다. 이들중 가족을 잃은 일부 유족들이 서로의 슬픔을 달래고 나누자며 5.18 직후인 6월 6일 20여명이 주축이 돼 5.18 光州의거 유족회를 걸성했다.

유족회는 출발 당시 월례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고 매월 셋째 일요일 희생자들이 안치된 망월묘역을 찾아 참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족회는 진상규명 투쟁과 유족 복지 향상에 대한 우선 순위 문제로 갈등을 빚어오던 중 81년 1주기 추모제를 계기로 내부의 입장 차이가 크게 벌어져 정부측에 비교적 동조적이었던 기존 지도부가 불신임을 당하고 새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전 집행부와 이해를 같이 하던 회원들이 탈퇴, 새로운 유족회를 만들었다.

이들 유족회는 또다시 지난 93년에 별도의 단체가 구성돼 현재 3개가 있다. 鄭수만씨가 회장으로 있는 光州민중항쟁 유족회가 가장 많은 회원을 확보하고 있으며 光州민주화운동 유족회는 朴옥기씨가 이끌고 있다.

光州항쟁과 관련, 구속된 가족들도 모임을 만들었다. 80년 9월 20일 구속자들의 첫 재판이 있던 날 50여명의 가족들이 '光州사태 구속자회'를 결성한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이 여성들로 이뤄졌으며 종교계나 의료계등과 공조사업을 펴 참여도가 매우 높았다. 구속자 가족회는 82년 12월 5.18 관련구속자 전원이 석방된 뒤에도 꾸준히 활동을 전개, 다른 시국사건으로 구속된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됐으며 지난 85년 '민주화 실천 가족운동 협의회'(민가협)로 발전적 승계, 전국 조직의 모태가 됐다.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사람들도 서울 아픔을 달래며 비공식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퇴원 부상자들이 하나 둘 늘면서 이들도 구체적인 조직 결성의 필요를 느껴 光州기독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부상자들이 구심점을 이뤄 光州 통합병원등 다른 병원 환자들과 연계, 82년 8월 우선 30-40명이 모여 '光州민중혁명 부상자동지회'가 탄생했다. 회원 자격은 5.18로 부상당한 사람 또는 부상후 사망한 사람의 직계 가족 대표등이었다.

부상자회 현재 1개 단체가 있지만 결성 이듬해인 83년 '광주의거 부상자동지회'가 새 살림을 차렸고 85년 다시 '5.18 光州의거 부상자회'로 통합됐다. 그러나 통합단체가 지난 87년 全斗煥 정권의 호헌조치를 받아들이는 쪽의 입장을 표명, 일부 회원들이 반기를 들어 '5.18 光州민중항쟁 부상자동지회'라는 이름으로 독립해 다시 2개 단체로 재편됐으며 지난 93년말 민중항쟁 부상자 동지회의 내부 갈등으로 80여명이 '5월 문제연구소'를 설립, 분리해 나갔다. 이처럼 이합집산을 거듭한 끝에 지난 95년 마침내 3개 단체가 '부상자 동지회'로 통합,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난 82년 12월 온갖 고초를 겪으며 군사법정에까지 서야했던 구속자들이 전원 석방됐다. 이들은 처음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만남을 시작, 단체를 구성키로 논의를 벌이다 지난 84년 8월 유가족과 부상자들을 포함하는 '光州구속자 협의회'를 만들었다. 그러던중 87년 11월 구속자들 만으로 '5.18 光州민중항쟁 동지회'(5항동)를 결성, 구속되지 않았더라도 5.18과 관련해 연행된 사람들까지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이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5항동은 비슷한 성격의 '교도소 생존자 동지회'와 '구속자 동지회' '구속 부상자 동지회'등 소규모 단체와 올해 통합, '5.18 민중항쟁 구속자회'라른 이름으로 확대 개편해 초대 회장을 金현장씨가 맡고 있다.

행불자 가족들도 지난 88년 5월 '5.18 光州민중항쟁 행방불명자 가족회'를 구성, 행불된 가족들의 생사 확인 및 행불자들의 암매장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또 86년 4월에는 5.18사망자의 직계 가족과 부상자 가운데 젊은 사람들로 이뤄진 '5.18 光州민중항쟁 청년 동지회'(5청동)가 조직됐으며 지난 88년에는 5.18 당시 금남로에서 차량 시위를 주도했던 운전자들이 '민주 기사 동지회'를 꾸렸다.

이처럼 5.18과 관련해 각종 단체들이 생겨나면서 이들을 통합, 역량을 결집하고 한 목소리로 5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도 함께 일었다.

85년 아직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5공의 철권통치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5월10일 光州 계림교회에서 洪南淳 변호사를 중심으로 '5.18 光州민중혁명희생자 위령탑 건립 및 기념사업 범국민운동 추진위원회'(5.18추위)가 결성돼 기념사업을 추진해 나갔으며 明魯勤.李光宇 교수를 거쳐 姜信錫 목사가 위원장을 맡으면서 명칭이 '5.18위령탑 건립 및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로 변경했다.

현재 '5.18 光州민중항쟁연합' (5민련)으로 개편된 '5월 운동협의회'(5운협)는 5항동이 결성된 직후인 지난 87년 11우러 5항동의 제의로 창립됐다. 5운협은 전국적인 수준에서 5월 당사자 이외의 구성원까지 포함한 5추위와 달리 순수한 5월단체만을 참여시켰으며 심지어 5월단체이기는 하지만 군부세력의 위협과 회유공작에 동조한 세력은 제외했다. 이에따라 5운협은 출범당시 5항동과 5청동, 5.18 光州민중항쟁 유족회, 5.18 光州민중항쟁 부상자회등 4개 단체 대표자로 이뤄진 협의체 성격을 띠었으며 나중에 민기동이 참여했다.

5운협은 91년말게 기능적 한계와 5월 단체의 부분통합에 대한 성찰 및 관련단체의 분열과 상호갈 등의 비판적 여론등으로 해체된 뒤 92년 1월 5민련으로 확대됐다.

이같은 해체 동기로 그동안 5운협에 가입하지 못했던 구속자 동지회와 구속후 부상자 동지회.부상후 사망자 동지회.교도소 생존자 동지회.행불자 가족회.의거 부상자회를 포함해 모두 11개 단체로 5민련이 탄생했다. 그러나 94년 '5.18 기념재단' 문제로 5항동이 5민련과 갈등을 빚다 결국 5항동의 탈퇴하는 등 5월 단체의 분열상을 또 한 번 노출하기도 했다.

5민련과 5항동의 결별 계기가 됐던 5.18 기념재단은 온갖 우여곡절 끝에 94년 8월 창립대회를 갖고 5월 문제의 총체적 해결을 기치로 출범했으나 최근 있는 2기 재단 이사회 구성과 관련, 5민련측 단체들이 이의를 제기하며 이사장 선출에 불참했을 뿐 아니라 재단 이사직 전원 사퇴를 고려중이어서 자칫 심각한 내홍 위기에 처해 있는 실정이다.

제 90회 5월단체 <하>
 

    全斗煥과 盧泰愚등 5·18 학살 주역들이 1심 재판을 거쳐 항소심 법정에 선 지금, 光州의 5월 단체 회원들은 감회가 누구보다 남다르다. 光州에서 피비린내가 채 가시기 전부터 진상규명과 책 임자 처벌을 요구하다 온갖 시련을 겪고 정치권 논리에 따라 학살자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등 실의와 허탈함을 맛보기도 했으나 실로 16년만에 이들을 사법의 심판대에 세웠기 때문이다.
이같은 5월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은 처음 5·18의 직접 피해자인 유가족과 구속자들에 의해 주 도됐다.

5월단체 가운데 유가족들에 의해 가장 먼저 결성된 「5·18 光州의거 유족회」는 서로의 아픔을 달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지만 9∼10월부터는 5·18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에 나서기로 하고 「光州의거」를 「光州항쟁」으로 변경, 5·18의 성격을 민중항쟁으로 공식화했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회원간 의견차로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며 가끔 노선을 달리하기도 했지만 그 기본원칙 은 대체로 대동소이 했다.

이들의 핵심 구호는 「5·18을 보상하라」「내자식을 살려내라」며 정부 기관에 대한 항의 방문 과 점거농성 및 시위, 각종 성명서를 발표했다. 특히 유족회는 5·18 光州민중항쟁 정신 계승,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민족자주와 통일을 모임의 목적으로 정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 다. 鄭水萬씨가 이끌고 있는 유족회는 또 90년 이후 상금을 내걸고 5·18 당시 암매장 장소에 대한 제보를 받아 자체 조사를 벌이는 등 암매장 가능성을 꾸준히 제기하고 있다.

유족회는 또 지난 81년 서슬퍼런 5공 군사독재하 望月묘역에서 1주기 추모제를 치름으로써 이후 5·18 추모제의 골간을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5·18의 피해 당사자였던 부상자 단체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각종 집회와 농성을 벌 여왔다. 특히 5·18 총상 피해자에 대한 역학 조사를 실시해 지난해 총상으로 인한 부상자들의 납중독 사실을 밝혀냈고 지난해 7월19일 부터 1백70여일 동안 5·18 공대위와 서울의 명동성당에 서 농성을 벌이며 5·18 책임자 처벌을 요구, 全.盧씨등 학살 주역들을 법정에 세우는데 일조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82년 12월 석방된 구속자들도 처음 구속자 협의회에 소속해 있다 87년 구속자들 만으로 「5·18 光州민중항쟁 동지회」를 결성해 광범위한 활동을 했다. 이 단체는 최근 「5·18光州민중항쟁 구 속자회」에 통합됐으나 지난해까지 4백여명에 이르는 대규모 조직을 이용해 지역별·분야별로 동 지회를 꾸려 5·18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기념사업등 항쟁과 직접 관련된 사항뿐 아니라 군부독재 종식및 외세 축출을 외쳐왔다. 이같은 목적을 위해 대중교육과 연대투쟁·국제 교류사 업을 펼쳤으며 특별사업으로 반미 자주화, 군사독재 타도, 5·18 특별위원회를 설치, 운영하기도 했다.

5항동은 또 지난 88년 10월 全·盧씨등 학살자 9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죄로 고소하고 ▲지 난 90년과 93년 光州보상법 무효와 거부투쟁및 위헌청구


▲95년 5·18특별법 제정을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및 5·18 영화 제작 기획 등으로 지속적인 관심을 제고해 왔으며 지금의 5·18기념재단 을 설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5항동은 다른 단체와 달리 연령층이나 학력·직업등에서 사실상 사회 전분야를 망라해 5·18 문제 이외도 정치문제와 노동문제·환경문제 등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운동방식도 정리된 논리와 공격적인 행동력을 동시에 취해 다른 단체와 비교가 되기도 했다.

이같은 피해 성격별로 이루어진 단체들은 필요에 따라 연합체를 형성했다. 지난 92년 「5월 운 동 협의회」의 발전적 해체로 구성된 「5·18光州민중항쟁 연합」이 바로 그것이었다.

5민련은 때로 단체간 마찰로 가끔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표류하기도 했지만 5월 단체의 명실상 부한 대표체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다. 지난 93년 5·18 2차 피해보상때는 1차 보상에서 제외된 구속자들을 특별 상이 부상자로 규정해 보상을 이끌어 냈으며 자체적으로 피해 신고 접수를 받아 상담에 응한 뒤 光州시에 대표를 파견하기도 했다.


지난 94년에는 5민련의 이름으로 5·18 학살 자 처벌을 위한 자료를 수집, 정리해 95년 「5·18국민위원회」와 공동으로 학살자들에 대한 고 소·고발을 했고 같은해 7월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뒤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였다.

이처럼 5월 단체들은 조직 내부의 이견과 갈등으로 분열 현상을 보여 시민들로부터 빈축을 받기 도 했으나 당국의 회유와 협박, 권력에의 굴종을 물리치고 5·18을 부활시키는 주체적 역할을 해왔다.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5·18위령탑 건립 및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와 「5·18기념재 단」및 「5·18학살자 기소를 위한 光州·全南 공동대책위원회」와 「5·18 진상규명과 光州항쟁 정신계승 국민위원회」등 5월 문제를 다루는 관련단체.

지난 85년 5·18과 직접 연관이 없는 인사들까지 포함해 협의체적 성격으로 구성된 5추위는 같 은해 5·18희생자 추모제를 시작으로 매년 5월 행사 전반을 주관하며 5·18의 전국화를 꾀해 왔 다.


5추위는 그러나 지난 90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盧泰愚의 기념사업 약속으로 활동이 약화되기 시작, 93년 2차 보상이 끝난 뒤 관련 인사들의 관심과 참여도가 떨어져 현재 사실상 활동이 정 지된 상태다.

5·18기념재단은 5민련과 5항동의 갈등으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지난 94년 창립돼 정신계승과 기념및 추모사업·문화사업·장학사업 등을 목표로 열정적 출발을 했으나 최근 2기 이사진 구성 과 관련해 5민련측이 반발, 이사장 선출을 미룬 채 표류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5·18공대위는 지난 94년 5·18책임자에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고 이듬해 7월 무혐의 처리방침이 확정되자 全斗煥등 34명을 내란과 내란목적 살인등 혐의로 검찰에 고소한 당사자들에 의해 「학 살자 기소 관철」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공대위는 학살자 처벌 특별법 제정을 위한 1백만인 서 명 운동을 펴고 全·盧씨가 구속 기소된 뒤에는 재판을 모니터링 하는 한편 성명전을 전개하며 엄정한 재판을 촉구했다.

5·18국민위는 지난 94년 결성돼 학살자의 범국민 고발 운동등 5·18공대위와 유사한 역할을 전 개했다. 5·18국민위는 최근 『「정의실현·화해·희망을 향한 국민위원회」(가칭)를 구성, 과거 를 청산하고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화해의 틀을 마련해 희망찬 진보를 거듭하자』고 제안, 관 련 단체들이 이를 적극 검토하고 있다.
 

제 91회 반독재 외침서 반제국 투쟁으로
 
    5·18光州민중항쟁은 사회 각분야는 물론 한국사회 변혁의 전위였던 학생운동에도 질적인 변화 를 가져온다.
80년 이전까지 낭만적이고 다소 순진하기까지 했던 학생운동은 光州민중항쟁이후 철저한 이론무 장과 함께 조직적이고 전투적 양상을 띠게 된다.

또 70년대 유신독재 아래서 반독재민주화투쟁에 집중됐던 학생운동은 5·18을 기점으로 반제국 주의와 민족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함으로써 학생운동의 지평을 넓혔다. 운동권은 반제국주의 자 주화운동의 한 모델로 金日成 주체사상을 받아들였으며 방법론을 놓고 NL과 PD계열로 갈려 치 열한 이념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70년대까지 이념보다는 열정이 앞섰던 학생운동은 光州민중항쟁을 겪은뒤 이론무장과 조직 화에 성공, 80년대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꽃인 6·10항쟁을 이끌어내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 다.

80년 항쟁 직후 5공 군사정권의 서슬퍼런 총칼 앞에 대학생들도 자라목이 됐다. 모든 서클이 지 하로 잠적했고 시위주동자들이 소위 「녹화사업」에 의해 군에 강제 징집되는등 캠퍼스는 암흑의 세월 그 자체였다. 속칭 짭새로 불린 사복경찰이 캠퍼스를 종횡무진 누볐으며 연일 전투경찰과 학생들간의 숨바꼭질이 계속됐다.

「나 태어나 꽥」은 80년대 초반 캠퍼스의 살풍경을 풍자한 신조어. 이는 집회 시작을 알리는 투사의 노래를 부르면 전투경찰이 득달같이 달려와 학생들을 잡아간다는 뜻으로 80년대 초반 대 학가 최고의 유행어였다. 당시 全南大생이었던 姜琪正씨(32·21세기 청년연대 대표)는 「나 태어 나 꽥」이외에 「타잔사건」을 소개하면서 당시 암울했던 상황을 회고했다.

『지상에서 집회를 시작하면 짭새들에게 곧바로 잡히기 때문에 83년 당시 상대에 재학중이던 李 수영씨가 도서관 옥상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면서 집회를 시작하는 방법을 시도했다. 학생들은 李씨를 타잔에 비유했고 이후 시위는 지상전에서 공중전으로 변했으며 이같은 방법으로 시위를 주동하다 추락, 부상을 입는 경우도 속출했다』

이처럼 5공 초기의 대학 캠퍼스는 살벌하기만 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조용했지만 80년대 초반은 5·18이란 거대한 사건을 겪은 학생운동권의 암중모 색기였다. 학생들은 사회과학서적을 탐독하며 이론무장과 앞으로의 투쟁방향 설정에 온신경을 집 중했다.

80년 이후 모두 지하로 들어간 운동권 서클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시점은 83년. 정권안정기에 접어든 5공정권의 유화책과 사회과학원전이 소개되면서부터다. 각종 서클이 성격을 드러내지 않 은채 학교에 정식으로 등록을 하고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全南大의 대표적 사회과학 서클 은 「사회조사연구반」 「고전독서회」 「한국사회연구회」등이었다. 이들의 연결고리는 호국단 산하 서클연합회. 합법공간을 확보한 이들은 84년부터 학회를 중심으로 공개적인 투쟁을 전개하 기 시작했고 심포지엄·문화행사 등을 통해 대중성을 확보해 나갔다. 특히 84년 구성된 「학원자 율화추진위원회」(학자추)는 호국단을 접수하고 80년 이후 최초로 학생회를 출범시켰다.

서울의 주요 캠퍼스도 상황은 비슷했다. 각대학은 학자추를 중심으로 민주화투쟁을 전개하면서 역량을 강화해 나갔다. 연대의 필요성을 느낀 각 대학은 84년 11월3일 연세대에서 전국 42개 대 학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전국민주화 투쟁학생연합회」(전대련)를 출범시킴으로써 전국규모의 대학생조직을 태동시켰다.

85년 5월23일. 80년대 학생운동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사건이 일어났다. 삼민이념(민족통일·민중 해방·민주쟁취)을 모토로한 삼민투의 4일간에 걸친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이다. 삼민투 점거농 성이후 각개약진식이었던 각대학의 운동이 전국적으로 통일화·조직화돼갔다. 이과정에서 민민투 와 자민투의 이념논쟁이 시작되고 현재까지 학생운동세력을 양분하고 있는 NL과 PD가 탄생했다.

NL은 NLPDR(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의 약자로 이른바 민족해 방민중민주주의 혁명론. 한국사회의 주요모순을 한국민중과 제국주의및 그 예속세력간의 모순으 로 규정하고, 식민성을 극복하기 위해 민중이 주체가 되는 혁명을 통해 제국주의및 그 예속세력 을 몰아내고 민주정권을 수립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받아들이고 구체적인 투쟁노선으로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조국통일을 설정했다.

PD는 PDR(People`s Democratic Revolution)의 약자로 민중민주주의 혁명론. PD는 한국사회의 성격을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하고 노동자대 자본가의 계급모순을 기본모순으로 설정 했다. 따라서 이들은 반미·통일운동보다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을 통한 민중민주주의 정권수립을 지향했다.

이들은 대립과 협조속에 그 힘을 더해갔으며 노동운동에 대거 뛰어들었다. 대학생들의 노동계 위장취업은 이시기 가장 특징적인 현상으로 86년 부천 5·3사태를 주도하는등 노동운동의 역량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학생운동권은 노동계뿐 아니라 사회제세력과의 연대도 강화해나갔다.

이제 학생운동권은 한국사회변혁운동의 핵심세력으로 위치를 굳혔다. 이 시점에서 87년 4·13호 헌조치가 발표됐다. 이론무장과 전국조직화에 성공한 학생들은 총궐기, 넥타이부대를 거리로 이 끌어 내며 호헌철폐를 외쳤다. 급기야 정부는 6·29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사실상 항복하게 된다.

한편 光州·全南지역에서는 대학가 이외에서도 반제자주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84년 11월 18일 YMCA 백제실에서 「全南민주주의 청년협의회」(회장·鄭祥容)가 창립총회를 갖고 정식출 범했다. 이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주로 全南大·朝鮮大 제적생으로 5·18구속자도 다수 포함돼 있 었다.

5·18로 미국의 실체를 확인한 이 그룹은 반미자주·통일운동에 그 역량을 집중시켰다.

이후 全南민주주의 청년협의회는 光州·全南의 모든 사회운동단체를 통합한 「전남사회운동협의 회」로 발전적 해체를 했으며 87년 5월18일 결성된 「4·13호헌조치철회및 민주헌법쟁취 범도민 운동본부」(범도민운동본부)의 모태가 됐다.

범도민운동본부는 전남사회운동협의회를 비롯, 5월단체·종교운동권·全南大·木浦大총학생회 등 21개 단체를 총망라한 것으로 6월항쟁 지도부 역할을 했다.

4·13호헌조치등 당시의 급박한 상황은 전국차원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87년 5월27 일)의 결성이라는 열매를 맺게 됐다. 이에따라 全南지역도 기왕에 결성된 범도민운동본부를 「민 주헌법쟁취 국민운동 전남본부」(국본)로 이름을 바꾸고 光州·全南지역 투쟁을 선도했다.

제 92회 6월항쟁
 
 『경찰이 또 일저질렀다지』
『그러게 말이야』
『서울대학생이라지』
『그학생 서울대 무슨과야』
『아마 언어학과라는 것 같지』

87년 초 朴鍾哲고문치사 사건은 한 일간지 민완기자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검찰출입기자인 그는 1월 15일 평소 잘알고 지내던 검사의 방에 들렀다가 「경찰이 또 일 저질 렀다지」라는 말을 듣고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러게 말이야」라고 능청을 떤뒤 취재에 들어 갔다. 추가로 그 학생이 서울대 언어학과에 재학중인 것을 확인한 그는 일단 대학출입기자를 통 해 언어학과생중 장기결석을 하고 있는 학생을 찾아냈다. 朴鍾哲군 이었다. 朴군이 14일 경찰에 연행돼 고문을 받고 숨졌다는 사실을 밝혀낸 그는 「대학생 고문치사」라는 제목으로 16일 기사 를 내보냈다.

87년 벽두에 터진 朴군의 고문치사 사건은 6·10항쟁등 숨가픈 87년 정국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 탄이었다.

19일 치안본부는 기자회견을 통해 서울대 민민투 인문대 책임자였던 서울대 언어학과 3년생 朴鍾哲군(21)이 14일 새벽 그의 하숙집에서 연행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수배를 받고 있던 친구 朴鍾雲군의 소재를 추궁받던중 물고문으로 이날 밤11시20분께 사망했으며 고문에 가담한 경찰은 趙漢慶·姜鎭圭수사관이었다고 밝히고 서둘러 사건을 마무리했다. 朴군의 시신은 가족들의 희망이 라는 이유로 벽제에서 화장된후 서둘러 임진각 부근에서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비는 할말이 없대이』라는 부친의 흐느낌 속에 재로 뿌려졌다.

朴군 고문치사 사건이후 군사독재가 계속되는한 고문은 사라질수 없다는 의식이 광범위하게 퍼 지기 시작했고, 「2·7추도회」,「3·3대행진」등 규탄의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확산됐으나 공 권력의 원천봉쇄로 사건이 일단락 되는듯 했다.

그러나 5월21일 朴군의 죽음은 다시한번 전국민들의 가슴속에 돌이킬수 없는 충격으로 되살아 났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정부가 朴군 고문치사 사건을 축소조작했다는 사실을 폭로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인물을 통해 朴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게한 진짜 범인은 현재 구속기소돼 재 판에 계류중인 趙漢慶경위와 姜鎭圭경사가 아니라 치안본부 학원문화1반 소속 黃正雄경위등 3명 의 경찰이며 이들은 현재 경찰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평위의 이같은 폭로로 정부와 공권력에 대한 신뢰는 돌이킬수 없는 지경까지 실추됐다. 정부 는 국민여론에 못이겨 사건 재수사를 지시하고 潭陽 출신인 李漢基씨를 신임총리에 임명하는등 대폭적인 개각으로 사태의 수습을 꾀했지만 이반된 민심을 돌이킬수는 없었다.

고문치사축소조작 사건은 전국민적인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며 6월 시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6월10일 집권 민정당은 이같은 민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잠실체육관에서 차기 대통령후보로 盧泰愚씨를 지명하고 독단적 정치일정을 강행했다. 이에 맞서 야@과 재야가 주도하는 6·10국민 대회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도시에서 진행되면서 6월 민주항쟁의 역사적 드라마는 그 폭발적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6월10일 당국은 시위의 원천봉쇄를 위해 전국적으로 3백75개중대 5만8천여명의 경찰을 동원하고 재야인사 7백여명을 가택연금 시켰다. 그러나 서울시위는 걷잡을수 없이 확산됐고 14일까지 명동 성당 농성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키워진 불씨는 釜山·光州·大田·晋州등 전국으로 확산됐다.

6월항쟁의 분수령은 6월18일밤 釜山시위였다. 서면에서 부산역에 이르는 4㎞의 간선도로가 30만 여명의 釜山시민에 의해 6시간여동안 장악됐으며 시민들은 수백대의 차량시위대를 앞세워 시청과 KBS釜山방송본부를 위협했다. 釜山시위는 4·19전야와 부마항쟁같은 혁명적 열기를 상기시키면 서 정권에 위기의식을 가져다 주었다.

光州에서도 19일부터 이틀간 시민·대학생 2만여명이 밤샘시위를 벌였다. 이제 시위는 지방중소 도시까지 확산됐고 그간 비교적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던 넥타이부대,즉 중산층이 항쟁대열에 동 참하기 시작했다.

6월20일 국민운동본부는 ▲4·13조치 철회 ▲6·10대회관련 구속자및 양심수 석방 ▲집회및 언 론자유보장 ▲최루탄 사용중지등 4개항을 내놓고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26일 「민주 헌법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을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는 이같은 요구를 일축했다. 끝내 26일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며 전국적으로 평화대행진이 벌어졌다. 서울 18만, 광주 5만, 부산 4만, 기타 7만등 전국적으로 36만여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최루탄이 난사되고 보도블록·화염병이 난무한 살벌한 시위현장에서 시위 군중들은 국민과 더불어 4·13호헌조치 철회 정도로는 절대 만족할수 없다는 결연한 입장을 과시 했다. 정부는 공권력과 물리력의 한계를 절감할수 밖에 없었다.

6월29일 오전 10시 뉴스를 타고 盧泰愚 민정당 대표의 「6·29항복선언」이 발표됐다. 그는 하 루아침에 야당으로 변신한듯 민주주의에 대한 신앙고백과 함께 대통령직선제등 8개항을 낭독했 다. 해방이후 실패와 좌절만을 거듭했던 국민들은 오랜만에 진한 감동을 맛보며 축배를 들었다.

6월 10일부터 26일까지 숨가쁜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민들에게 정권에 대한 치열한 분노와 저항감을 심어주며 항쟁의 불꽃을 지속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젊은이가 있었다.

바로 연세대에 재학중이던 李漢烈군( 20)이었다. 李군은 6월9일 朴鍾哲군 고문치사 사건에 항의 하는 시위를 벌이다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산소호흡기로 27일을 버틴 李군의 모습은 연일 TV 와 신문에 대서특필됐고 투쟁의 열기를 고조하는 촉매역할을 했다. 사경을 헤매던 李군은 결국 7 월 5일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7월9일 李군의 장례식에는 전국적으로 1백50만의 애도인파가 몰려 젊은 민주넋을 위로했으며 光州에서도 5·18이후 최대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李군의 시신 은 망월묘역에 안장됐다.

제 93회 민화위
 
 사태~민주화운동의 일환~민주화운동. 5·18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다. 80년 이후 5·18은 한동안 「폭도」들에 의한 「사태 」로 불렸다.

5·18이 처음으로 「사태」라는 멍에를 벗게된 것은 88년초. 바로 민화위에 의해서 였다. 민화위는 「민주화 운동의 일환」이라는 다소 애매한 표현을 썼지만 5·18에서 「사태」를 떼어냈다. 그후 5·18은 국회청문회를 통해 「민주화운동」으로 거듭났고 정부도 93년 5·13조치 를 발표함으로써 5·18을 「민주화 운동」으로 공식 인정하게 된다.
88년초 열린 민화위는 항쟁 8년만에 光州의 진실을 밝히는 역할을 했으며 光州항쟁을 사태가 아 닌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공식인정함으로써 다소나마 光州시민의 명예를 회복해 주었다.

민화위의 정식명칭은 「民主和合推進委員會」. 제6공화국 출범 직전 盧泰愚대통령 당선자가 전 반적인 국정운영 방향을 수렴하기 위해 출범시켰던 민화위는 李寬求 前신문편집인협회장을 위원 장으로 88년 1월11일 발족, 2월23일까지 한시적으로 활동했다. 민화위는 민주발전, 국민화합, 사회개혁 3개분과로 나뉘어 진행됐으며 이중 光州항쟁을 다루었던 국민화합분과가 가장 눈길을 많이 끌었다.

제6공화국을 원활하게 출범시키기 위해서는 光州에 대한 매듭을 풀어야 했던 차기 정권 담당자 의 의도가 숨어있었고 국민의 관심 또한 컸기 때문이다.

민화위 국민화합분과는 88년 2월1~2일 당시 현장을 찍었던 비디오테이프 5편을 시청하고 이어 4 일간 참고인 증언을 들었다. 「광주청문회」라고 불린 참고인 증언청취는 8년 만에 첫 공식진술 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군지휘관이나 항쟁지도부는 물론 전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으 며 피해당사자에게도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당시 주요 증언자는 蘇俊烈(全南北 계엄분소장) 具龍相(光州시장) 韓道熙(光州교도소장) 丁時采 (全南부지사) 이광로(정부합동조사단) 김용상(全南병무청장) 田桂良(유족회장) 李熺性(계엄사령관) 尹恭熙(대주교) 全春心(가두방송) 李光英(부상자) 裵瑾洙(유족) 朴錫連(부상자) 金成洙(부상자)등 14명 이었다

당시 증인으로 채택된 피해자들은 8년동안 묻혀왔던 그날의 진실을 털어놓았으며 5·18의 진상 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국민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다음은 당시 중요 참고인의 증언내용.

『나는 당시 적십자대원으로 부상자를 병원으로 후송하는등 인도적인 입장에서 활동을 하다 척 추에 총을 맞고 반신불수가 돼 지금도 하루 2차례 이상 진통제를 맞고 있다. 19일 금남로에 1만 여명의 시민이 시위를 했을때 처음으로 공수부대가 나타났다. 나는 전남체육사라는 가게로 7~8명 과 함께 피신했다가 가택수색끝에 잡혀갔는데, 앞의 사람이 대검에 찍힌듯 허벅지에서 피가났고 얼굴은 윤곽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공수부대에 끌려가던중 한 경찰(경위)의 도움으로 도망쳤다.

그날 오후 구시청 4거리에 많은 사람이 쓰러져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갔다. 나는 적십자 완장을 차고 있었기 때문에 현장접근이 가능했다. 4~5명이 쓰러져 허우적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차를 세워놓고 그사람들을 차에 싣는 순간 탕소리와 함께 나는 쓰러졌다. 나는 그후 기독교병원 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으나 반신불수가 됐다. 1년3개월만에 정부의 치료비 중단으로 병원에서 쫓겨났다.

정부는 사망자 1백79명, 부상자 1천여명이라고 하고 있으나 의료활동에 참여한 나의 경험으로 는 사망자가 훨씬 더 많다. 국조권을 발동해 당시의 사망자수등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李光英 부상자)

『光州가 불안해 처와 딸을 태우고 潭陽쪽으로 갔다. 군인이 막고 있어 울며 매달렸다. 가게해달 라고 애원한뒤 출발했다. 그 순간 군인들이 M16을 난사했다. 옆구리에 총상을 입은 나는 척추에 총을 맞은 딸 내향이와 어깨를 맞은 처를 살릴 생각으로 차를 3백m정도 몰다가 쓰러졌다. 딸은 목숨을 건졌으나 반신불수가 됐고 처는 뇌수술을 세번 받고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처는 85년 12월7일 휠체어를 탄 딸을 밀고 가다가 오토바이에 부딪혀 숨졌다』(金成洙 부상자)

『20일 직원들로부터 시위대가 교도소를 기습하려 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31사단에 병력지원을 요청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교도소앞이 3갈래 길인데 3백m전방까지 시민들이 몰려왔다. 시민군은 21일 오후부터 무기를 들고 왔으나 교도소를 습격한 사실은 없었다. 교도소 앞에서 총 격전은 담양쪽으로 나가려는 시민군과 계엄군과의 충돌이었다』(韓道熙 광주교도소장)

이같은 참고인들의 증언은 국민들에게 조금이나마 5·18의 참상을 알리는 계기가 됐고 민화위로 하여금 「과잉진압」이 사태의 발단이었다는 항쟁원인을 도출케 했다.

그러나 민화위는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에 관해서는 전혀 손을 대지 못한채 광주항쟁을 「민주 화운동의 일환」이라고 개념정의를 한뒤 명예회복, 피해자 보상을 정부에 건의하는 것으로 활동 을 마쳤다.

민화위는 정부에 ▲광주시민과 피해자들에 대한 공식사과 ▲사상자들에 대한 재신고 ▲사망자, 유족및 부상자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지원 ▲피해자대표를 중심으로한 민간기구등 치유대책기구 설치 ▲광주망월동 묘지의 공원화및 위령탑건립 지원등 7개항을 건의했다.

88년 2월25일 대통령에 취임한 盧泰愚씨는 민화위의 건의서를 토대로 같은해 4월1일 「광주사태 치유를 위한 정부발표문」을 발표했다.

9개항으로 되어 있는 이 치유방안은 제5공화국 정권아래서 금기시되던 光州항쟁의 진실을 국민 앞에 드러내고 치유하겠다는 정부의 공식입장을 표명하는 것으로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발표문은 사태 발생요인을 『시위수습 과정에서 시민과 군이 충돌하여 많은 희생자를 낸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평화시위를 하던 시민들에게 군이 살상행위를 감행한 것이 사태 의 발단이었음에도 시민과 군이 충돌, 많은 희생을 낸 것이라고 규정해 책임의 일부를 시민에게 전가했던 것이다.

새정부의 이같은 해결책 발표에 대해 광주재야단체는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등 2가지 핵심문제를 피해갔다는 이유로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朴玉在씨(前부상자회 회장)는 『정부가 광주항쟁을 민주화운동의 일환이라고 정의한 것은 광주 시민에 대한 명예회복이라는 차원에서 의미는 있었지만 미증유의 대참극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것은 언어도단이고, 참다운 국민화합을 위해서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색출및 처벌이 이뤄 져야 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결국 진상규명을 외면한 민화위는 6공정권과 5공정권의 차별성을 부각하려고 노력했던 盧泰愚 당선자의 입지를 넓혀주려는 편향적 기구라는 오해를 불식시킬수 없었다.

제 94회 어머니의 노래

 진실은 충격일까. 적어도 89년 2월3일 밤 TV앞에 선 전 국민들에겐 그랬다. 더하여 슬픔과 분노 까지 치밀었다.
밤 9시50분부터 방영된 MBC-TV의 5·18다큐멘터리 「어머니의 노래」. 1시간여동안 국민들은 9년여동안 가려졌던 80년 5월의 진실 앞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한창 진행중이던 5·18청문회의 공방을 지켜보면서도 「설마」했던 계엄군의 학살이 공중파 방 송을 통해 전국을 강타한 것이다.

「어머니의 노래」의 주인공은 光州항쟁 당시 고교 3학년생이던 아들 田영진을 잃은 田桂良씨 (당시 5·18광주민중항쟁유족회장)의 부인 金順姬씨. 평범한 어머니였던 金씨가 자식을 가슴에 묻 은 恨때문에 망월동 묘역 경찰차량방화사건의 주범이 되는등 「반독재투쟁」의 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통해 아직까지 규명되지 못한 光州의 진실을 보여주자는 게 제작진의 의도였다.

「어머니의 노래」는 일본 NHK·독일 NDR 등의 5·18당시 현장화면과 목격자인 시민(세탁소 주인·이발소주인·기독병원 의사 및 간호사·신부 등), 항쟁에 직접 가담했던 정향자(당시 도 청 취사담당), 김준봉(당시 시민군 치안담당), 이양현(당시 시민학생투쟁위 기획위원), 박영순 씨(당시 시민군 방송담당) 등의 인터뷰로 구성됐다.

계엄군의 진군 모습과 시민군을 전쟁포로 다루듯 하는 장면, 유혈이 낭자한 시민들의 시체, 즐비한 관 사이로 통곡하는 유족들….

5·18당시 현장을 지켰던 光州시민들에게는 이 프로가 당시 처절한 상황을 전달하는데 부족하다 고 느꼈을지 몰라도 5·18을 통제된 언론과 가해자측의 일방적인 선전만으로 접했던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충격과 부끄러움을 함께 안겼다.

언론사와 金씨의 집으로 전화가 쏟아졌다. 특히 大邱와 釜山의 시청자들은 왜 그토록 많은 사람 들이 죽어가야 했는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며 책임자들이 국민앞에 사죄하고 피해보상에 앞서 光州의 명예가 꼭 회복돼야 한다고 흥분했다.

당시 光州日報와의 통화에서 시청자들이 밝힌 소감.

▲이상정씨(24·회사원·釜山시 금정동)=마치 다른나라에서 벌어졌던 일 같다. 지금까지 국민들 은 정부에서 말한대로 믿고 따라왔는데 그렇게까지 되었다는 것은 정말 몰랐다.

▲金炳河씨(60·상업·大邱시 산격3동)=같은 한국인으로서 동족에게 그렇게까지 했다는데 심한 비애감을 느낀다. 光州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겠다. 책임자는 사죄해야 한다.

▲金仁淑씨(33·주부·水原시 細柳동)=엄청난 충격이었다. 「군인이 설마 그랬겠나」했는데 사실 이었던 것 같다. 어린 두 아이가 그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두려웠다.

▲金仁光씨(44·상업·全州시 인후동)=당시 알고 있었던 상황과 너무 차이가 나 심한 충격을 받 았다. 책임있는 사람들에게 역사적 심판이 내려져야 한다.

▲崔慶禮씨(33·주부·春川시 사우동)=말로만 들었던 것보다 훨씬 비극적이다. 가장 책임있는 全斗煥씨가 나와 국민에게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져야 한다.

이날 MBC_TV 심의실이 조사한 결과 시청률은 44%. 이 프로그램 방영 1주일전에 있었던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 생중계보다 훨씬 높은 시청률이었다.

그러나 이 방송에 대해 우호적인 반응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왜 옛일을 다시금 들추느냐」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역효과가 우려된다」 「피해자쪽 얘기만 부각하는등 객관성이 결여됐다」는 등 방영이 끝난 직후 MBC 시청자실로 걸려온 4백10통의 전 화중 1백44통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반면 대부분의 긍정론자들은 광주문제가 국회청문회를 통해 정치적으로 해결되는 듯 했으나 그 동안 말만 무성했지 밝혀진 것은 없지 않느냐며 방영의 의미를 높이 샀다. 청문회를 통해 면죄부 를 제시해 주는 듯한 광주민중항쟁 처리의 허구성을 다시한번 드러내 오직 진실만이 광주문제를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줬다고 주장했다.

「어머니의 노래」를 제작한 金潤永PD의 의도도 여기에 있었던 듯 싶다.

金PD는 방영직후 光州日報와의 인터뷰에서 『한마디로 80년 5월의 「光州」가 무엇인가를 이땅 에 사는 사람들에게 밝히려 했다』며 『이 작품을 통해 光州에 대한 해결방법을 제시하고 싶었다 』고 말했다. 6·25전쟁이후 우리민족의 가장 큰 비극이었던 光州의 참상을 말이 아닌 화면으로 보여줘 광주민중항쟁 당시의 실체에 한발짝 다가서 보고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난 9년동안 가해자의 주장을 얼마나 많이 들어왔습니까. 형평이란 숫자의 문제가 아 닙니다. 누가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光州청문회로 궁지에 몰려있던 민정당과 정부의 반응은 대단히 민감했다.

光州특위의 민정당측 간사인 李敏燮의원은 『피해 당사자들의 증언만을 부각, 결론을 유도한 것은 특위의 진실규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 것』이라고 했다. 정부측 대변인 崔炳烈 문공부장 관은 MBC사장에게 공한을 보내 『공정성과 객관성을 유지해야 할 것』이라며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국방부도 『당시 군의 정당한 역할을 무시한채 피해자 일방만을 부각시켰다』고 유감을 표시했다. 민정당 일부 당직자와 전국 지구당 위원장들은 중앙당에 대해 『모처럼 맞은 설날에 지역활동을 어떻게 하란 말이냐』『사전에 방영을 막을 수 없었느냐』며 불만을 터트렸다.

반면 평민당등 野 3당은 힘을 얻었다. 평민당 辛基夏 광주특위간사는 『이번 방영은 온 국민들 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정치군인 집단의 살인만행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고 말했고 金元基 원내총무는 『9년동안 한맺힌 과거를 가슴 태우며 살아온 光州시민들도 다른 지역 국민들에게 진 실을 알리게 돼 퍽 다행한 일』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측도 『MBC의 위대한 결단으로 역사의 현 장이 국민앞에 공개되었다』며 『이번 기회로 정부여당측은 새로운 결단을 내리라』고 촉구했다.

야3당은 광주특위 간사회의에서 全斗煥·崔圭夏증언을 밀어붙이기로 하는등 국민적 여론을 등에 업고 특위정국의 헤게모니를 잡게 됐다.

제 94회 光州특위
 
 88년 6월 15일 '5월 광주'는 합법적인 논의의 장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민다.

4.13 護憲 반대-6.29-與小野大로 이어지는 봇물같은 민의의 함성에 당시 권력의 핵심에 엄존해 있던 가해자들도 어쩔 수 없이 청문회라는 형식의 진상조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국회는 88년 6월 27일 본회의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구성을 결의, 민정 12.평민 7.민주 5.공화 3.무소속 1명 등 28명의 위원을 선임했다.

사건의 철저한 진상규명과 광주시민과 국민들의 명예회복, 피해자배상 및 사후처리, 민족적 비극의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강구, 책임자처벌 등 5개항이 특위의 임무였다.

특위는 이에따라 같은해 7월 8일 평민당의 문동환의원을 위원장으로 선임하고 12월 30일까지 모두 32회 전체회의를 갖고 7월18일부터 90년 1월9일까지 47회의 간사회의, 89년 12월31일 全斗煥 전대통령의 증언청취등 사실상 6개월여동안 진상조사활동을 폈다.

특위는 이 기간동안 정부측에 모두 3백62건의 자료를 요구하여 1백65건을 제출받았고 자료검증소위.현장검증소위.한미관계소위.특별법제정 및 사후대책소위원회를 구성해 청문회.문서검증.유골감정의뢰.미국측의 개입여부 조사등 활동을 폈다.

특히 청문회는 89년 11월부터 다음해 12월 31일 全斗煥의 증언을 듣는 것을 끝으로 모두 19차에 걸쳐 70명의 증인으로부터 증언을 청취했다. 증인선정은 5.18민주화운동의 발발동기.전개과정.사후대책 등 크게 3개범주로 나누었으며 불출석 증인은 崔圭夏 전대통령등 13명이었다. 또 미국측의 개입여부와 관련 글라이스틴 前주한대사, 위컴 前주한미군사령관에게 서면질의해 답변을 받아내기도 했다. 증언을 거부한 최규하증인에 대해서는 불출석의 죄와 국회모욕의 죄로 고발조치했고 출국금지를 요청했다.

소위원회별 활동을 보면 문서검증받은 국방부.육군본부.육군 제1문서보존소.총무처에 대하여 2차에 걸쳐 문서검증을 실시 관련문서에 대한 서류검증을 했다. 자료검증소위는 광주교도소.광주지방검찰청.광주기독교병원.전대병원 등에 들러 5.18수감자 명단.변사조사.부상자 치료일지 등을 챙겼다.

현장검증소위는 암매장된 시신 발굴에 주력, 주남마을.송아동 및 효천지역, 녹동마을앞 부엉산등에 대한 유골발굴 및 검증에 나섰다.

광주특위의 이같은 활동을 통해 '5.17은 구체화된 정권찬탈행위였다'고 검증해 내는등 크게 8개의 진상을 밝혀내는 성과를 거뒀다. 91년 5월 신민당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발간한 광주특위 1차보고서는 당시 특위의 성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5월의 광주항쟁을 경험한 한국사회는 독재권력의 전략적 공세의 지위가 전략적 수세의 지위로, 그 체제와 모순을 극복하려는 민족.민주운동 세력의 전략적 수세의 지위가 전략적 공세의 지위로 변화되어 가는 역사적 연속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따라서 80년 5월 광주항쟁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광주항쟁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국회 조사활동을 통해 밝혀진 객관적인 사실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결국 광주항쟁에 대한 완결적 진상규명은 역사의 과제로 남아 있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역사의 순풍을 거슬러 추악한 양심들에 참회의 새살이 돋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광주항쟁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통해 뼈저린 교훈을 공유하고자 우리는 여기 역사의 한 작은 외침으로 광주항쟁의 주요내용을 밝히려 한다..."

보고서는 이어 ▲신군부세력의 12.12 쿠데타와 광주항쟁의 관계 ▲80년초 전군에 걸쳐 실시된 폭동진압훈련 ▲5.17은 구체화된 정권찬탈행위 ▲소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조작 ▲항쟁초기 계엄군의 과잉진압실상 ▲계엄군의 집단발포와 양민학살의 진상 ▲계엄군의 퇴각이후 광주 상황 ▲광주항쟁의 유혈진압과 미국의 역할등에 대한 진상조사를 특위의 성과로 들었다. 요약하면 신군부는 12.12에서 5.17로 이어지는 정권찬탈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미국은 이를 방조한 의혹이 짙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조사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문동환위원장은 보고서의 권두언에서 "많은 증인들의 출석 거부, 정부의 자료제출 거부, 제출된 자료의 조작, 많은 증인들의 위증 혹은 궤변으로 조사는 계속 난관에 봉착할 수 밖에 없다"고 술회하고 있다.

사실 그랬다. 무엇보다 특위활동 과정에서 진상조사를 어렵게 했던 것은 가해자들이 핵심을 이루는 여당측이 들고 나온 양비론이었다. 군인들의 과잉진압도 있었으나 광주시민들의 폭력시위가 과잉진압을 자초했다는 식의 여당측 논리는 청문회가 가해자들에게 정치적 면죄부를 주려한다는 비난을 살정도로 피해자들을 분노케 했다.

무엇보다 과연 발포 명령자는 누구이고 양민학살에 대한 책임을 누가질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가해자들의 철저한 은폐 때문에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구성 당시부터 태생적 한계를 갖고 출발한 특위로선 더 이상 진상을 밝혀낼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게 '성과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보다 그 이후의 역사진행 방향을 살펴보는게 도움이 될 듯 싶다. 가해자들이 권력의 핵심에 엄존해 있는 상황에서 사법권을 갖지않은 입법부가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가슴아픈 비극이라할 5.18의 진상을 밝히려 했다는게 사실 무리였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광주특위는 89년 12월31일 5공특위와 연석회의에서 全斗煥증인에 대한 증언을 듣는 것으로 사실상 그 활동을 마감한다.

90년 1월 민정.민주.공화 3당의 합당으로 여야 공동 보고서 한건 만들지 못한채 진상규명을 후일로 미뤄야 했다. 3당 합당의 주역중 하나였던 金泳三대통령이 93년 5월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5.13특별담화를 발표하고 이후 특별법제정, 全斗煥.盧泰愚구속수감 및 재판회부로 이어지기까지 5.18은 가해자들에게 한동안 이미 금전으로 보상해버린 과거사가 됐다.
 

제 96회 민의가 이끄어낸 광주해결 첫걸음
 
 93년 金泳三대통령은 집권과 함께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문민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최대 한 활용, 과거 정권의 부패를 과감히 털어내는 모습을 보였다.
당연히 국민들의 호응도 좋았다. 취임 초기 여론조사결과 대통령에 대한 인기도 역대 최고였다.

이처럼 당당히 「개혁」을 부르짖던 金泳三정권이었지만 光州문제는 역시 쉽게 풀 수 없는 민감 한 정치적 사안이었다. 光州문제 해결없이는 진정한 「新韓國 건설」은 안된다는 光州현지·재야 민주세력의 주장은 사실 그냥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인 문제였다. 그렇다고 아직 집권 민자당이 나 군부등에 포진한 5·18관련 가해자들과 결별할 때도 아직 아니었다.

金정권의 인기나 고민과는 상관없이 光州 현지에선 여전히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을 주장하며 대통령의 결단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었다. 야당인 민주당은 문민정권이라고 했으니 이참에 6공정권에서 가동을 중단했던 광주특위를 다시 열자고 공세를 폈다.

光州는 金대통령의 초도순시를 앞둔 3월초부터 더욱 들끓었다.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론 최초 로 망월동 묘역 참배를 계획하고 있었다. 동시에 관계요로를 통해 光州 마무리를 위한 여론수렴 에 착수했다.

5월단체·光州시의회 의원 등은 대통령의 망월묘역 참배가 光州문제해결 차원이라면 굳이 막을 필요가 없다는 다소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초도순시 때 ▲특별검사제 도입을 통한 진 상규명·책임자 처벌 ▲망월묘역 확장 조성 ▲부상자 치료 대책 ▲光州특별법 제정 ▲구속자등에 대한 원심파기등 15개 항을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조속한 시일내에 광주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강 력 촉구키로 했다.

그러나 3월 18일 줄곧 대통령의 묘역참배를 반대해오던 민주주의민족통일광주전남연합과 남총련 의 묘역 점거로 참배와 면담은 동시에 무산됐다. 학생들과 일부 재야단체에 참배 무산에 대한 비 판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정부는 계속해서 5월단체와 13주기전 마무리를 위한 물밑접촉을 계속했 다.

재야통인 金正男 청와대사회문화수석이 鄭東年 광주민중항쟁연합 상임의장과 접촉했고 光州시장 출신인 金良培행정수석도 여러 경로를 통해 지역민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光州시의회도 대통령과 관련 피해자 대표들의 면담을 요청해놓고 있었다.

그리고 5월 13일 오후 5시. 金대통령은 TV 생중계를 통해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오늘의 정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민주정부』라고 5·18의 역사적 정 당성을 분명히 한뒤 앞으로 관련 피해자의 명예회복및 정신계승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 이었다. 5·18정신을 기리기위한 방안으로 ▲기념일 제정 ▲망월동 묘역의 민주성지화 ▲현 전남 도청위치에 기념공원조성 기념탑 건립 ▲상무대 부지의 시민공원화 등이 발표됐다. 피해자의 명 예회복을 위해선 ▲사망자와 행불자에 대한 추가신고 기회의 제공 ▲연행 구금자및 유죄판결자에 대한 전과기록 완전말소 ▲지명수배 공식해제및 해직자 복직 ▲부상자의 계속 치료 보장등이 약 속됐다.

그러나 진상규명은 훗날의 역사에 맡기자는 것이 특별 담화의 골자였다.

『X중략〉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그리고 광주시민여러분.

저는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과 그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주장이 있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 저는 그러 한 주장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 문제를 놓고 많은 고뇌를 거듭했습니다. 그러 나 진상규명은 역사를 올바르게 바로잡고 정당한 평가를 받자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결코 암 울했던 시절의 치욕을 다시 들추어 내어 갈등을 재연하거나 누구를 벌하자는 것은 아닐 것입니 다. 따라서 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명예를 높이 세우는 일입니다. 진상규명과 관련하여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믿습니다. 진실은 역사속에서 반드시 밝혀지고 만다는 것이 저의 확신입니다. X중략〉』

그러나 光州는 명예회복은 반기면서도 진상규명을 뒷날로 미룬데 대해 강력 반발했다. 광주전남 연합은 곧바로 기자회견을 갖고 『5월문제 해결의 첫 단추가 진상규명임에도 현정부가 이를 기피 하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비난했다. 5민련도 기자회견에서 『진상규명을 훗날의 역사에 맡긴다 는 것은 현정부의 해결의지를 의심케 하는 것』이라며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이 관철되지 않는 한 현정부의 개혁에 대한 지지와 협조를 철회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남총련도 『진상규명없는 해결책은 허구』라며 진상규명 투쟁에 나설 것임을 분명히 했다.

소설가 李明翰씨는 한 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민자당을 등에 업고 5·18학살의 주역들의 후 원으로 당선된 대통령으로서는 그럴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며 金정권의 태 생적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金弘明교수는 보다 분석적이고 예언적인 진단을 했다. 『개혁의 초기단계에서 현 정부에 기대할 수 없는 게 있다. 가령 13년동안 정치적 세력을 이뤄온 기득권층에게 개혁이 자기문제로 구체화 될 때 강력한 거부현상이 나타나 개혁자체를 어렵게 할 수 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부문은 법률적 시효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정치·사회적 시효가 무한하다고 볼 때 개혁의 구체적 성과물 이 축적되는 바탕위에서 계속적으로 추진돼야 할 성질의 것이다』

논란과 비판이 비등한 속에서도 정부는 도청이전 1천억원 지원, 윤한봉씨 귀국 허용, 상무대 5만평 추가양여, 관련자 16명 수배해제, 4백23명 전과말소등 재빠르게 후속조치를 취했다.

동시에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운동이 야당과 관련단체·시민들을 중심으로 펼쳐지기 시작 했다.

5·13특별담화가 5·18에 대한 金泳三정권의 최초의 조치이자 동시에 최종적 해결을 위한 첫 단 추가 된 셈이다.

제 97회 특별법제정운동과 고소
 

 `光州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작업은 한참이 지나서야 시작됐다. 5共의 철저한 탄압을 벗어난 89년 이후 공개적으로 시작된 이 역사평가 작업속에는 80년 가해자들에게 사법적단죄를 해야한다는 주장이 포함됐다.

마침내 80년 직후 光州현지인들이나 일부 운동권 세력의 과격구호로만 머물고 있던 `학살자 처단'이 현실정치속의 무거운 숙제로 대두하게 된 것이었다.

94년 5월 13일 鄭東年 5.18광주민주항쟁연합 상임의장을 비롯 金祥根 5.18진상규명과 광주항쟁 정신계승국민위원회 공동대표등 6백16명은 서울지방검찰청에 全斗煥.盧泰憂 두 전직대통령을 포함한 5.18 당시 군지휘관 35명(현역 군인 11명 포함)을 고소.고발했다. 고소.고발된 대대장급 이상의 지휘관들의 죄명은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등이었다.

이 고소장은 "왜곡된 민족사를 바로 잡아 민족의 정기를 회복하고 광주에 씌워진 폭도와 불순분자라는 오명을 씻고 광주의 명예를 회복하여 민죽화합의 실현계기를 마련하고 불법으로 국가권력을 찬탈하고 국민의 기본권리를 탄압해온 학살자를 단죄하고 사법질서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계기를 만들 목적"이라고 밝혔다.

이날 고소장 접수와 함께 光州민주화운동 피해자.부상자.유가족등 3백22명이 연대서명한 고발장도 함께 접수됐다. "80년 5월의 시민학살은 12.12쿠데타를 일으킨 반란군들이 정권 탈취를 위해 자행한 범죄"라고 규탄한 이 고발장은 "全씨등 피고발인들이 불법적으로 국회를 해산하는등 국가기관을 전복하고 저항하는 시민을 총칼로 살상했으므로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 고발운동에는 일반 시민들도 동참하기 시작해 `5.18 14기'를 맞이한 망월동 묘역과 금남로 일대에 서치된 고발운동창구에는 서명하려는 시민들이 줄을 이어 光州에서만 1만명이 넘어섰다. 단일 사건에 과한 사상 최대의 고발인 숫자인 셈이다.

光州민주화운동과 깊은 관계가 있는 `金大中 내란음모사건'과 관련, 李信範환경관리공단 이사등 관련자 22명도 같은해 10월24일 서울지검에 全斗煥.盧泰愚 두 전직대통을 비롯한 당시 군 관계자등 5.17 관련자 10명에 대해 고소장을 제출했다. 고소인들은 고소장을 통해 "金大中내란음모사건은 정권 찬탈에 눈이 먼 정치군인들이 김대중씨등 이 사건 관련자들이 내란을 꾸민 것으로 조작, 야당을 말살하고 억압체제 구축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94년 10월28일에는 張基旭민주당의원등 민주개혁 정치모임 관계자 29명으로부터 全.盧등 80년 당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 23명에 대한 고발장이 접수됐다. 결국 94년 5월 13이루터 95년 4월3일까지 서울지검에는 5.18과 관련 피고소.고발인 58명에 대한 모두 70건의 고소.고발장이 접수됐다.

그러나 이런 고소 고발운도은 검찰의 허무한 수사로 일단락 되고 말았다. 95년 7월 18일 검찰은 `5.18관련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 `전원 공소권 없음'결정을 내렸다. 한마디로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는 없다는 검찰의 입장이었다.

검찰의 이같은 결정이 내려지자 각계 각층에서 비난성명이 잇따랐다. 光州에서는 즉각 5.18단체 및 재야세력들이 총결집, `5.18학살자 기소관철을 위한 光州.全南공동대책위원회'(5.18공대위)가 구성됐다.

공대위는 매주 화요일에 조찬모임을 통해 정례회의를 열고 성명서 및 보도자료를 배부했다. 또 공대위는 5.18유족회와 부상자회를 중심으로한 이른바 `명동성당 농성투쟁'을 열었다. 95년 7월부터 같은 해 12월말까지 1백63일간의 명동성당 농성투쟁에는 매일5~20여명이 참가했으며, 명동성당 입구에서 사진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또 공대위는 전국 대학가를 돌며 강연회와 서명참가등 특별법 제정을 위한 1백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검찰의 수사발표 직후 고소인과 고발인들은 서울고검에 항고장을 제출했지만 기각됐다. 또 대검에 제출된 재항고장 역시 기각되고 말았다. 고소인등은 이러한 검찰의 무성의에 검찰총장등 검찰수사관계자 14명을 직무유기혐의로 서울지방검찰청에 고소하기도 했다. 더불어 공소권없음의 불기소처분은 청구인들의 평등권을 침해한 것이어서 이를 취소해줄 것을 요구하는 `불기소 처분 취소 헌법소원심판청구서'가 헌법재판소에 제출됐다.

검찰의 수사를 불신한 5.18피해자들에겐 이젠 특별법제정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공대위를 주축으로한 명동성당 농성, 교수들의 시국선언, 신부들의 단식농성, 1백만명 서명운동, 9차례의 국민대회, 항고.재항고.헌법소원등의 법적대응, 국회청원과 범국민단일법안의 발표등은 5.18특별법 제정의 염원을 담은 투쟁이었다.

5.18공대위가 光州를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전국적인 차원에서 `5.18진상규명과 광주항쟁정신계승 국민위원회'가 구성된 것은 94년 3월25일이었다. 국민위원회는 범국민고발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검찰의 공소권없음 발표이후 항고.재항고.헌법소원등의 법적대응과 서명운동전개 및 5차례에 걸친 국민대회를 주최했다.

특별법 제정은 5.18공소시효 문제로부터 시작됐다. 95년 5월, 80년 5월부터 만15년에 해당하는 시점은 형사소송법상 공소시효가 만료된 때문이다. 全.盧 두전직대통령등에게 적용된 내란의 공소시효는 15년으로 `성공한 쿠데타'에 대해서도 공소시효제도가 그대로 적용돼야한다면 사법적 처벌의 길은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때문에 5.18관련단체들과 야당등은 光州항쟁의 진상규명을 위해 공소시효를 연기하거나 없애는 것을 골자로한 특별법이 제정돼야한다는 주장을 계속 벌여나갔다. 93년 6월에는 11만5천여명의 서명으로 `5.18 민중항쟁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과 특별검사제 도입에 관한 청원'이 국회에 접수됐다.

3당합당이란 태생적 한게를 내부에 안고 있던 문민정부가 국민과 야당의 압력에 고심하고 있던중 터진게 盧泰愚 비자금 사건이다. 민주당 朴啓東의원의 국회 폭로로 시작된 이 사건은 결국 盧씨에 대해 특별법이고 뭐고 할것없이 부정축재 혐의로의 구속을 가능하게 했다. 검찰은 95년11월6일 盧씨를 뇌물수수혐의로 구속수감한 뒤 다음달 3일 全斗煥前대통령 역시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80년 이후 `한국의 모순'을 상징하는 두사람이 일단 수감되자 이른바 역사 바로세우기 열풍이 불어닥쳤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엔 불가능할것으로만 보이던 5.18특별법제정은 이후 불과 한달여 만에 현실로 나타난다. 12월20일 `79년 12월12일과 80년 5월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 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정지등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국가기강을 바로잡고 민주화를 정착시키며 민족정기를 함양함'을 목적으로 한 `5.18민주화운동등에 관한 특별법'과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등에 관한 특례법'이 국회에서 제정됐다.

제 98회 `공소권없음' 결정
 
 95년12월20일 `5.18민주화운동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5.18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5共과 6共 기간동안 권력을 농단해왔던 신군부 핵심들은 차례차례 차가운 감방으로 끌려 들어왔다. 국민들은 12.12와 5.18등 80년대를 얼룩지게했던 한국현대사 최대사건의 수사와 단죄가 어떤식으로 마무리될지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다.

12.12 및 5.18사건 수사팀인 서울지검 특별수사본부(본부장.李鍾燦 서울지검3차장)는 96년1월23일 全斗煥.盧泰愚 두 전직대통령등 5.18핵심관련자 8명을 내란수괴 및 내란 주요임무종사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이와함께 이날 중간수사결과가 발표됐다. 특별법제정과 함께 본격수사가 시작된지 한달여만이었다. 또 全斗煥 前대통령이 慶南 합천 고향에서 구속집행된지 꼭 한달20일만이었다.

검찰의 수사결과의 요지는 ▲신군부측 시국수습방안은 집권 시나리오였고 ▲5.17계엄확대는 정권탈취를 위한 준비작업이었으며 ▲5.18당시 집단발포는 신군부 수뇌부가 光州시위강경진압을 지시한 것이며 ▲실질적으로는 신군부측이 계엄군을 지휘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검찰은 5.18 光州진압은 군사반란죄에 해당되며 5.17계엄확대조치등은 일련의 정권탈취과정이라고 결론지었다.

5.18의 비극이 끝난지 15년7개월만에 공식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뒤바뀐 것이다. 그리고 이날 수사결과 발표는 5.18을 군사반란과 내란행위로 인정한 최초의 사례가 됐다.

5.18단죄와 법적성격규명은 이로써 일단락됐다. 그러나 15년여동안 국민적 열망이었던 5.18수사와 가해자 처벌은 관련자 고소.고발-5.18 특별법 제정-관련자 기소.재판이란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왔다. 이과정은 굴곡된 역사를 바로잡아가는 전국민적 열망의 소산이었다.

5.18에 대한 최초의 법률적 판단은 5.18직후 이뤄졌다. 80년 7월 계엄사는 `5.18'을 `金大中씨가 全南大와 朝鮮大 주총학생들을 조정.선동한 무장폭도들이 일으킨 내란사건'으로 발표했었다. `5.18'에 대한 5共정부의 성격규정이이었다. 이런 강벼은 5共과 6共기간동안 국민들을 호도해 왔었다.

그러나 金泳三정부들어 5.18학살자처벌과 수사를 요구하는 관련자들의 고소.고발이 이어지면서 검찰의 수사는 불가피해졌다.

95년7월18일 5.18에 대한 고소.고발사건을 수사해온 서울지검 공안1부(張倫碩 부장검사)는 全斗煥.盧泰愚등 이사건 피고소.고발인 58명 전원을 `공소권 없음'결정을 내리고 불기소처분키로 했다고 공식발표했다. 소위 `7.18발표'로 명명지어진 이날 발표는 공소권없음이란 생소한 단어를 국민들에게 각인시키면서 한국검찰에 수치로 남을 기묘한 법논리로 포장된 궤변이었다.

검찰의 이날 발표는 5.18에 대한 수사를 진행한지 꼭 8개월만의 일이었다. 검찰은 발표문을 통해 "全씨등 신군부의 집권과정에 있었던 조치들은 외형적으로 崔圭夏 당시 대통령의 국사행위 또는 그 집행행위에 해당되지만 실제로는 12.12군사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한 全당시보안사령관이 崔대통령의 사전지시없이 주도적으로 기획.입안.추진한 정권창출의 준비 또는 기초행위였?quot;고 규정했다. 검찰은 또 5.18진압경위에 대해서 "현장 지휘관들이 엄격한 통제가 없는 상황에서 시민과 계엄군간에 적대감으로 인한 살상행위로까지 발전, 엄청난 피해를 초래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사태를 촉발했다고 볼만한 증거를 확보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이어 검찰은 "변혁에 성공, 통치조직과 지배권력이 바뀔 경우 새로운 정권과 헌법질서를 위한 행위들의 법적효력을 다투거나 새로운 체제의 주체들을 내란죄로 처벌할수 없다는게 법률적 판단"이라며 "全씨가 새정권을 창출하고 새헌법질서를 이루는데 성공했으므로 이 과정에서 취한 일련의 조치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않아 공소권 없음으로 결정한다"고 밝혔다.

바로 이날 검찰의 발표문의 핵심은 `공소권없음' 결정이었다. 기소의 전제조건이 되는 소송조건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검사가 기소를 할수없다는 것이다. 형사소송법상 공소권없음의 요건은 공소시효가 완료됐거나, 재판권이 없는 경우, 친고죄에서 고소.고발이 없을 경우, 동일사안에 대해 공소가 이미 제기된 경우로 엄격히 한정되어있다. 7.18 공소권없음 결정은 공소시효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소권없음의 요건상 `재판권이 없는 경우'에 해당된다고 보아야했다.

검찰은 공소권없음 결정을 내리면서 이례적으로 결정배경에 따른 옐리네크.켈젠.라드부르흐등 독일 법실증주의자의 법철학적 학설까지 장황하게 제시했다.

그러나 이같은 검찰의 결정은 결국 정치논리에 법논리가 침해당한 대표적인 경우가 됐다. 공소권없음 결정은 金泳三대통령이 93년5월13일 밝힌 `(5.18가해자의 처벌을) 역사에 맡기자'는 논리에 충실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고소인들의 내란죄 인정과 신군부 피고소인들의 무혐의 항변사이를 줄타기해왔던 검찰이 고도의 정치적 계산 끝에 공소권없음을 결정했다는 비난이었다.

검찰결정의 이론적 배경은 독일과 일본등 대륙법계통국가 형법학자들의 승인의 규율이론이었다. 이같은 법이론의 근저에는 헌정질서의 연속성과 관련된 사건을 법률적 잣대로 평가할 경우 5공출범이후 새헌법과 법률에 따라 실효성이 인정된 헌정질서와 법질서가 전부 무효화돼 정치적.사회적.법률적으로 중대한 혼란에 빠지게 될것이라는 현실판단이 깔려있다. 즉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수 없다'는 것이다.

검찰의 이같은 결정배경은 전국민적 비난여론에 부딪힌다. 법조계에서는 검찰이 정치논리에 치우쳐 기소권을 포기하는 직무유기를 저질렀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고소.고발인들은 검찰발표 직후 `검찰의 공소권없음 결정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검찰의 이같은 결정은 결국 몇 개월 지나지않아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우매한 결정이 되고 말았다. 검찰이 이후 金泳三대통령의 재수사지시에 따르면서 가장 곤혹스럽게 한부분도 바로 이부분이었다. 全斗煥씨 측은 바로 검찰의 이같은 약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95년11월 盧泰愚 前대통령이 비자금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정국은 급변했다. 5.18특별법의 제정을 지시한 것이다. 공소시효논란을 차단하고 검찰의 공소권없음 결정에 대한 법률적 무기를 제공하는 5.18특별법은 여야간 협상을 통해 이해 12월 제정됐다.

검찰의 `공소권없음'결정은 결국 검찰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심어주고 정치논리는 법논리를 우선하다는 굴절된의식을 심어주는 한국검찰사의 수치로 기록될 것이다.
 

제 99회 세기의 제판(上)
 

 굴절과 왜곡, 억압의 굴레속에서 빛을 보지 못하던 5.18광주민중항쟁은 그날의 함성이 멎은지 16년만에 법의 심판을 받고 당당하게 부활했다.

5.18재판은 또 내란과 반란, 민중학살의 원흉인 全斗煥.盧泰愚 두 전직 국가원수를 법정에 세움으로써 이땅에도 법과 정의가 살아있고 불법과 폭력은 반드시 응징된다는 진리를 확인케하는 쾌거였다.

지난 3월 11일 1심 1차공판을 시작으로 12월16일 항소심 선고공판까지 9개월동안 국민들의 초미의 관심속에 진행된 이번 재판은 1심에서 全斗煥 피고인에게 반란수괴죄 등을 적용해 사형을 선고케 하는 등 굴절된 과거사를 청산할 수 있으며 국민들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도 보여준 전기였다.

全.盧 두 전직대통령이 수의차림으로 나란히 법정에 서던 순간은 우리 국민모두에게 엄청난 경악과 기대를 동시에 갖게 했다. 비록 16년의 세월이 흐른뒤였지만 5.18이 일어나 동시대에 우리 손으로 역사의 반역자를 법정에 세울 수 있었다는, 특히 한시대동안 국가를 통치했던 최고 지도자였던 그들이 법의 심판을 받기 위해 동시에 법정에 섰다는 사실은 경악이자 충격이었다.

반면 군사반란으로 국헌을 문란케하고 정권을 탈취하고 위해 저항하는 시민들을 총칼로 무참히 살육한 만행을 저지른 全.盧가 적법하게 사법처리 될 때, 이는 한민족이 유사이래로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역사청산이자 역사바로 세우기가 된다는 점에서 국민들은 기대에 부풀었다.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그 그늘에서 아직도 신음하는 국민들에겐 희망이었다.

그래서 국민들의 귀와 눈은 TV와 신문으로 쏠렸고 법정밖은 방청열기로 뜨겁기만 했다.

특히 지난 16년동안 `폭도'와 `일부 불순분자의 난동'이라는 누명아래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던 5.18의 부활을 목도하는 광주시민들의 감회와 기대는 남달랐다.

또 이번 재판은 2차대전 종전이후 지구상 어느 국가에서는 유례를 찾아 볼수 없는 최고의 재판, 세기의 재판으로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전직 대통령이 세명이나 한꺼번에 법정에 서는 희대의 사건을 두고 열띤 취재열기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 일이었다.

지난해 10월19일 국회에서 당시 민주당 朴啓東의원이 盧泰愚 前대통령의 비자금 4천억원설을 폭로하면서 시작된 두 전직대통령의 수사와 이에따른 1, 2심 재판은 한마디로 드러마 같은 대장정이었다.

특히 12.12 및 5.18사건 재판은 지난 88년 국회청문회와 여야합의에 의한 형식적 청산 →피해자 고소.고발→검찰의 1차수사→검찰의 불기소처분→5.18특별법제정→재수사→5.18특별법위헌제청 및 헌법소원→헌재의 합헌결정에 이르기까지 숱한 난관을 거친 끝에 성사되는 우여곡절을 격었다.

역사적인 1심재판은 서울지법 형사합의30부(재판장.金榮一 부장판사) 심리로 열려 3월11일 첫 공판을 필두로 8월 26일 선고공판까지 1백69일동안 28차에 걸쳐 숨가쁘게 진행됐다.

수인번호 `3124'의 全斗煥피고인과 `1042'의 盧泰愚피고인등 신군부 쿠데타세력 16명은 이렇게 시작된 재판내내 법정에 함께 섰다.

18만1천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사건기록과 30여개의 쟁점을 바탕으로 진행된 공판에서는 申鉉碻 前국무총리, 盧載鉉 前국방부장관, 權正達 前보안사 정보처장 등 40명에 달하는 증인들에 대한 신문이 이뤄졌다.

검찰측에서는 金相喜서울지검 형사2부장을 비롯, 8명의 검사가 공소유지에 관여하는 한편 변호인측에서는 李亮雨 前법제처장, 全尙錫 前대법원판사, 韓永錫 前법무차관등 23명의 거물급 변호인단이 나서 치열한 법정공방을 벌였다.

검찰과 변호인측은 특히 ▲鄭昇和 前육참총장연행의 불법성 ▲경복궁 30경비단 모임의 성격▲ 朴俊炳피고인의 유무죄 여부▲시국수습방안의 성격▲비상계엄확대의 의미▲光州시민학살의 법정 성격▲내란목적 살인죄 성립여부 등의 쟁점을 싸고 한치의 양보도 없는 공방을 벌였다.

또 계엄군의 강경진압, 발포명령자, 무력진압의 내란살인죄 해당여부 등 光州와 관련된 민감한 사안들에 대한 공방도 치열했다.

검찰은 "80년 5월 계엄군이 光州민주화 운동을 진압할 당시 자행한 시민학살 행위는 단순살인이 아니라 내란목적 살이"이라며 全斗煥.黃永時.鄭鎬溶피고인 등 5명에 대해 내란목적 살인혐의를 적용할 것을 강조했다.

검찰은 신군부측이 자신의 퇴진을 요구하는 光州시민과 학생들을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즉 `집권을 위해 살해했다'는 주장을 폈다.

신군부측 피고인들은 그러나 "시위대에 대한 발포는 계엄군의 자위를 위해 일선 지휘관들이 업무수행과정에서 한 것일 뿐 내란과는 관련이 없다"며 검찰측 논리를 반박했다.

1심재판은 검찰과 변호인측의 사실관계 및 법률적 공방외에도 구속재판시한(6개월)에 맞춰 신속한 심리를 진행하려는 재판부와 지연전략을 구사하는 변호인측간의 신경전으로 막바지에 파행을 겪기도 했다.

변호인들은 재판부가 주2회공판과 야간재판을 강행하자 5차례에 걸쳐 집단 퇴정 및 불참을 일삼은 끝에 급기야 20, 25차 공판에서는 李亮雨변호사등 핵심변호인단 14명이 집단사임계를 제출해 사실상 변론을 포기했다.

재판부도 이에 맞서 국선변호인을 직권으로 선임하고 신청된 증인 91명 가운데 51명을 무더기로 취소하는 등 재판을 강행함으로써 재판의 공정성에 흠집을 남겼다는 지적을 받았다.

28차례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검찰과 변호인측의 신문에서 나타난 5.18관련 핵심쟁점들에 대한 피고인들과 증인들의 진술과 이들이 보여준 태도는 光州시민을 비롯한 전국민을 분노케 하기도 했다.

16년 세월을 숨죽이며 살아왔던 유족회와 부상자회회원등 `光州피해자들'은 매회 재판이 열릴 때맏 20~30여명씩 상경해 재판을 방청하거나 재판정 밖에서 공정한 재판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해 이목을 끌었다.

이들은 특히 양민학살의 주범들인 全斗煥.鄭鎬溶 피고인들이 명백히 드러난 범죄사실에 대해 발뺌하고 부인하는 행동에 법정과 법정밖에서 거세게 항의하며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제 100회 세기의 재판<下>
 

 지난 16일 서울고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선거공판을 끝으로 5.18사건에 대한 법정 공방은 마무리됐다.

"12.12군사반란을 주도하여 하극상의 패역으로 군의 기강을 파괴하였고 내란을 일으켜 권력을 탈취하면서 많은 사람을 살상하고 군사통치의 종식을 기대하는 국민에게 큰 상처를 주었더..." (항소심 양형이유) 내란수괴이자 전직대통령 全斗煥의 僭越하는 뜻을 시종 追隨하여 영화를 나누고 업을 이었던..."(양형이유) 피고인 盧泰愚역 17년형을 받았다.

黃永時, 鄭鎬溶피고인 등 5.18사건의 핵심관련자들도 대부분 대폭 감형됐다.

그러나 이날 항소심의 감형은 지나치게 정치적 논리에 좌우된 재판이라는 온 국민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국헌문란과 양민학살로 집권한 내란정권의 죄를 단죄하리라던 국민들의 당초기대는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1심 재판부(재판장.金榮一부장판사)는 이에 앞서 지난 8월26일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全斗煥피고인에게는 사형을, 盧泰愚피고인엑는 징역 22년 6월을 선고했다.

선고공판에서 1심재판부는 全斗煥피고인 등 신군부 핵심인사들이 12.12를 거쳐 군권을 장악한 뒤 시국수습 방안에 따라 정권을 탈취한 일련의 과정을 `불법적 내란 및 군사반란행위'로 규정했다.

특히 全피고인에 대해서는 일련의 내란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헌정질서 파괴과정에 수많은 피해자들이 발생한 점을 중시, 극형인 사형을 선고했으며 2인자였던 盧泰愚피고인에게는 정상을 참작, 유기징역 최고형량인 징역 22년6월을 선고했다.

이밖에 내란 및 군사반란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兪學聖, 黃永時피고인 등 11명에게는 징역 10~4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鄭鎬溶, 黃永時피고인의 내란목적살인부분과 12.12와 관련, 朴俊炳피고인의 반란중요임무 종사 부분에서 무죄가 선고되기는 했으나 신군부가 무력을 동원, 정권을 창출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재판부가 거의 빠짐없이 위법성을 인정했다.

특히 5.17비상계엄확대는 국헌문란을 목적으로 하는 폭동이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光州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행위는 내란목적을 위한 살인이라는 분명한 결론을 내렸다.

이날 1심선고공판에서 전직 대통령으로 한때 철권을 휘드르며 이 나라를 통치했던 全피고인의 사형언도장명을 지켜본 국민들 그리고 光州시민들은 `반란세력의 형량이 낮고 발포명령자 등 중요쟁점사실에 대해 규명을 못하는 등 다소 미흡하지만 光州명예가 어느정도 회복되고 아픈 역사의 고리를 단절하는 승리의 순간"이라며 판결결과를 받아들였다.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權誠부장판사)가 심리를 맡은 항소심은 12월16일 선고공판까지 12차례에 걸쳐 증인 40명에 대한 신문이 모두 이뤄지는 등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항소심은 시체적 진실규명 차원에서 光州피해자 진술권을 처음으로 인정, 피해자 姜吉祚씨를 증언대에 세우는 한편 지난 88년 국회청문회 이래 한사코 증언을 거부해온 崔圭夏 前대통령을 강제구인해 법정에 세우기까지 했다.

반면 12.12와 5.18비극의 핵심적 증인인 崔 前대통령으로부터 구체적 증언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신군부측의 내란 및 반란행위의 실체를 입증해줄 새로운 진상이 드러나지 않아 1심과 비교,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했다.

항소심 선고공판은 쿠데타세력에 대한 응징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를 기대했던 국민들에게 `너무 가벼운 역사적 단죄'라는 평가를 받았다.

국권찬탈과 양민살상 및 정경유착 비리에 대해 단죄한 것은 나름대로 그 역사적 의미가 가볍지 않고 특히 그동안 논란이 돼온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밝힌 것은 항소심 선고 공판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재판부는 또 신군부세력의 내란 종료시점을 6.29선언까지로 판결했으며 1심때 면책됐던 鄭鎬溶 등 일부 피고인들의 내란목적 살인혐의를 인정, 사실 판단을 위해 노력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두 전직대통령에 대해 형량을 낮추는 등 1심에 비해 지나치게 작량감경을 남발한 것은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특히 全피고인에 대한 감형이유로 6.29선언을 수용한 점을 들었으나 이는 국민의 저항이라는 타의에 의한 굴복이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약하다는 비난도 샀다.

이밖에 5.18전체를 내란의 연속으로 보면서도 光州재진입작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위진압과정에서 발생한 살상행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대목, 자위권 보유천명을 발포명령으로 본다는 1심을 뒤집어 발포명령에 대한 어떤 규명도 하지 못한 점 등은 `5.18은 끝나지 않은 쟁점'임을 암시하기도 했다.

재판을 지켜본 光州시민들도 "국민들의 법감정과는 너무도 동떨어지게 피고인들의 형량이 준 것은 정치적 배려가 지나쳤다"며 게세게 항의했다. 선고공판을 방청했던 유족회원들은 선고후 법원청사앞에서 연좌농성까지 벌이며 `지나친 감형'을 비난했으며 80년 당시 5.18에 참가했다가 내란수괴죄로 신군부에 의해 사형까지 언도받았던 鄭東年 前5민련상임의장도 방청후 "내란수괴죄는 법정 최고형이 사형인데 이런 판결결과가 나올 수 있느냐"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항소심을 끝으로 신군부 반란세력에 대한 사법적 단죄는 사실상 끝났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법정형이 있음에도 사법부가 정치논리의 악역을 맡아 엄정한 법집행을 바라는 국민들을 또한번 실망시켰다.

특히 이같은 `불완전한 역사적 단죄'는 국민의 또 다른 분열과 좌절을 낳을 불씨로 남아 5.18이 한국 현대사의 원죄임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재판 하루뒤인 12월 17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는 "全.盧씨는 金대통령 퇴임직전에 사면될것"이라는 사면설을 예단했다. 또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를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수순"으로 납득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제 101회 <연재를 마치며>
 

 全斗煥피고인은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은 뒤 상고를 포기했다. "더이상 국민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겠다"는게 상고포기의 이유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상고포기가 결코 2심판결에 승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盧泰愚피고인도 바로 뒤이어 상고포기의사를 밝혔다. 이로써 12.12와 5.18의 수괴 두사람에 대한 실정법상의 심리와 양형은 모두 끝났다.

바로 이것이었던가. 독재자 朴正熙의 피살로부터 이듬해 5월 光州에서의 시민학살이 벌어지기까지 한국 현대사를 갈등과 모순투성이로 뒤헝클어 놓은 자들에 대한 대가가 바로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이었던가. 이 재판 결과를 얻기위해 光州는 지난 17년을 울부짖어왔던가. 박종철은 이한열은 강경대는 이 판결을 위해 죽어갔는가.

국민은 아니 민심이라는건 어떤 경우 영악하리만큼 통찰력이 있다. 全.盧에 대한 2심 감형이 이뤄진후 국민은 마치 이같은 결과를 누가 예측 못했겠느냐는 듯 태연히 생업에 종사했다. 또 이들 두 정치군인에 대한 형량이 그대로 끝까지 유지되리라 믿는 자는 극히 순진한 자 취급을 받게되었다.

우리는 본 연재의 시작에서 `光州'를 풀지 않고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光州를 원칙대로 처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민주주의가 실천될수 있다고 상정했었다. 그리고 원죄 光州를 풀기 위해서는 고통이 따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 고통이란 어떤 것일까. 그릇된 光州의 과격성만 부각 된다는 것을 이유로 누구나가 입에 담기를 삼갔을 뿐 그 고통의 내용이란 12.12와 5.18 수괴 및 책임자에 대한 처형이었다. 더 축압적으로는 全斗煥과 수하 신군부 핵심책임자에 대한 사협집행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사법부는 엄존하는 헌법과 형법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작량감경으로 이 고통을 마무리 지었다. 확대 해석하자면 이른바 문민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光州해결의 고통을 최소한의 대증요법으로 처리하고 넘어가는 셈이 되었다. 이제 全斗煥과 나머지 죄수들은 구속기간을 뺀 나머지 형기를 복역하는 것으로 光州에 답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미완성의 역사청산이 발생시킬 또 다른 국민분열을 경계하지 않을수 없다. 全斗煥이 거만한 표정으로 공언하듯 光州시민학살에 대한 참회는 그들중 누구에게서도 찾을길 없다. 항소심 선고이후 80년 이래 한국사회의 지배 엘리트 집단은 "그만하면 됐다"는 자찬을 숨기지 않고 있다. 심지어 그들의 출생지에서는 이 재판을 문민정부의 정권 유지책으로 폄하하고 있다. 동정론인 것이다.

한국사회의 이 기막힌 현상을 우리는 光州에 대한 공범의식이라 감히 말하고자 한다. 주어진 해방과 `국부' 李承晩의 집권, 반미특위의 좌절과 4.19정권의 허망한 종말, 유신독재와 朴正熙 피살사건으로 주어진 서울의 봄, 이 모든 역사속에 한국민은 모두가 정당하지 못한 권력과 어떤 형태로든 결탁해왔다.

光州의 시민학살로 탄생한 이른바 국보위에 우리는 자랑스런 얼굴로 참여한 석학과 명사들을 보았다. 全斗煥 그의 처와 동생 심지어 장인에까지 줄을 대부를 챙기고 권력을 분양받아 호의호식한 이웃들을 우리는 너무 많이 보아왔다. 盧泰愚씨가 그 피묻는 정권을 인수받으면서 두려움 속에 대통령 직선제라는걸 사용할때에도 한국민은 고통스런 역사청산보다 안온한 결탁을 위해 그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학자들은 86년 6월의 국민저항에도 불구, 그가 집권한데 대해 그 원인을 온전히 야당의 분열에 돌렸다. 그가 잠실스타디움에서 올림픽 개막선언을 할 때 한국민은 자신들의 선택이 천만 다행이었다며 행복해 했다. 3저호황 수출 증가 속에 경제지표가 수직상승하는동안 한국민은 피묻은 정권의 더러운 옷자락을 앞다퉈 덮어주는 일을 즐거워 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도둑의 행복처럼 심저에 가책을 담고있는 행복이었다. 해마다 5월이면 반도의 남쪽 그 불행한 도시 光州에서 피울음이 들려오는걸 그들은 싫어했다. 애써 외면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민의 光州에 대한 공범의식이다.

우리는 이번 연재를 통해 5.18이 80년 5월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개발독지와 그 모순, 유신의 종말과 한국군의 내부모순, 서울의 봄과 정치권의 모순이 빚어낸 필연의 역사였음을 살폈다. 그리고 항쟁기간은 물론 이후 5.6공의 역사와 문민정부의 나날이 이 비극적 사건의 갈등에서 하루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걸 살폈다.

연재가 계속되는동안 12.12, 5.18피고인들에 대한 실정법의 심판은 종료됐다. 그러나 이들을 늘어세운 역사라는 이름의 법정은 여전히 속행되고 있다. 그리고 공소시효가 없는 이 법정엔 국민 누구나가 그들의 공범으로 소환될 수 있다.

이제 그날의 함성과 비명소리가 잠든지 열 일곱해가 저문다. 기록화면에 보이는 어수룩한 장발의 청년들, 교련복을 입고 카빈 소총을 든 지프위의 고교생들, 최루가스 자욱한 錦南로 아스팔트바닥에서 공수대원의 진압봉에 고꾸라지던 사내, 그들이 망월묘지에 잠든지도 오래다. 우리는 그들의 죽음에 답할 역사청산의 기회가 아직은 남아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역사청산이 어떤 고통을 요구하더라도 그 고통은 산자들의 숙명임을 안다. <끝>